※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가상의 왕이 등장하는 픽션소설임을 밝혀둡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등은 실제 역사와 다소 차이가 있답니다.
【태양이 된 달 – 왕이 된 여자】
제20화 : 낙화(洛花:꽃이 지다)
장고(醬庫)의 푸레독에서 검은 물에 잠긴 시체를 처음 발견한 소주방의 견습나인은 그 참혹함을 보고 몇날 몇일 구토를 했다.
다른 궁녀들이 어린 나인을 다독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이건 살인사건 아니니? 사람을 죽여서 푸레독에 넣고 물을 부은거 아니니?”
“아유~ 무서워라~ 감히 누가 궁궐에서 저런 짓을 한단 말이니?”
궁녀들은 두려움에 떨며 수군대었다.
누가 보아도 살인사건인 듯 한 시체의 형상을 보자 의금부에서 조사를 시작하였다.
검시관이 달려와 장독에서 시체를 꺼냈다.
시체는 얼마나 오랫동안 물 속에 잠겨 있었는지 살들이 다 흐물흐물해졌고 시체를 푸레독에서 꺼내자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시체의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여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그 참혹함에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시체는 궁녀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가녀린 몸과 봉긋한 가슴이 여인 인 듯 했다.
산발해져 얼굴에 미역처럼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섬뜩함을 주었다.
얼굴의 형태가 다 망가져서 신원이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거야 원... 전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구만...
사건이 미궁에 빠지겠는걸!“
의금부의 신하들과 검시관들이 난색을 표했다.
"근데... 혹시 비선재에서 근무하던 이화 아니야?"
"맞아! 소현옹주님 돌아가신 직후 이화가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며?“
“그러게... 근데 저 시체가 이화라면 누가 이화를 저렇게 잔인하게... 죽인 걸까?“
“혹시 갑자기 돌아가신 소현옹주님과도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야?”
궁궐은 벌집을 쑤신듯한 형상이 되었다.
초검이 시작되었지만, 그 시체의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
궁녀의 옷을 입고 있으니 궁녀일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가 하나 나왔다.
시체의 왼손 검지에 단단하게 끼워져 있던 푸른 옥 가락지...
옥 가락지의 중앙에는 다섯개의 꽃잎이 정밀하게 조각된 특이하고 아름다운 반지였다.
일개 궁녀가 가지고 있기에는 상당히 귀한 반지라 검시관들은 의아해했다.
그런데 그 반지의 주인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저거 이화의 옥 가락지 아니야?"
그 옥 가락지는 비선재에서 근무하던 궁녀들의 눈에는 익숙한 것이었다.
"맞아... 돌아가신 수빈마마가 이화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그 반지인것 같은데...“
궁녀들은 하나같이 그 반지가 이화의 반지라고 말하였다.
검시관들이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옥 가락지의 안쪽에는 이화(梨花)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 시체가 이화라는 궁녀란 말인가?
얼마 후 의금부 내에 마련된 검시소에 키가 큰 사내가 들어섰다.
검시소의 탁자 위에 누워 있는 얼굴의 형상이 흐물어져 버린 여인을 사내는 오래도록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디 있느냐? 저 여인이 손가락에서 나온 반지가?!“
검시관은 조심스레 옥 가락지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옥 가락지를 건네 받은 내관 충선이 가락지를 이리 저리 살폈다.
가락지의 안쪽에 쓰여진 이화라는 두 글자를 보자 충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 여인이 정녕 이화라는 말이더냐?”
내관 충선은 참혹하게 죽은 그 여인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화가 죽었으니... 이제 대현군마마 독살의 증좌를 찾을 길이 없구나! 그나저나 배후가 보통이 아닌 듯 한데..."
왕이 은밀히 부탁하신 범인을 잡을 길은 더 요원하여졌다.
사건을 따라가면 갈수록 더 큰 장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어 내관 충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충선의 손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푸른 옥 가락지만이 남아 반짝이고 있었을뿐...
충선은 그 시체가 이화로 밝혀졌다고 왕에게 고하였다.
"전하... 종합해보면 비선재의 궁녀 이화가 아마도 음식에 독을 넣은 범인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건의 배후세력에게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 외 다른 증좌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화의 손에 끼워져 있었던 푸른 옥 가락지를 내밀었다.
“죽은 시체의 손에 끼워져 있었던 옥 가락지입니다.”
“그러하냐? 분명 이화인 것이냐?”
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죽어서 장고의 푸레독에 물과 함께 담겨있었다는 이화의 시체
그 대담하고 잔인한 짓을 저지른 자가 바로 내 아들을 독살한 자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왕은 충선이 건낸 옥 가락지를 바라보았다. 그 반지는 왕의 눈에 익숙한 것이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수련이 구해달라며 왕에게 청하였기에 왕이 직접 구해 주었던 그 옥 가락지!
"전하... 청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옥 가락지를 하나 구해 주시어요!
가능하면 이쁜 배꽃이 조각된 특별한 반지면 더 좋구요!
쌍가락지로 구해주셔요"
수련은 패물을 좋아하거나 탐하지 않았다. 또한 물욕도 없었기 때문에 수련이 왕에게 어떤 물건을 구해 달라 청을 올린적은 없었다.
그러기에 왕은 의아한 듯 수련을 바라보았다.
“옥 가락지가 갖고 싶은 것이냐? 네가?”
왕은 자신에게 공손히 청을 하는 수빈이 사랑스러웠다.
"물론이지... 내 아주 멋진 것으로 구해 주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수련!"
그렇게 해서 수빈에게 건넨 그 옥가락지를
수빈은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화에게 하나를 준 것이구나!
이화는 수빈이 주는 반지를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 받았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며 아꼈는지 몰랐다.
비선재의 거의 모든 궁녀들에게 자랑을 하였기에 다른 궁녀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이 이화의 옥 가락지인 것을...
궁녀들은 말은 안했지만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다.
또한 약간의 시기와 질투가 섞인 눈길로 이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전혀 가진 적이 없었던 귀하고 화려한 푸른 옥가락지를 자신들이 모시는 후궁마마로부터 덥썩덥썩 받는 이화를...
왕은 괴로운 듯 용안을 찌푸렸다.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사랑하는 수빈을 잃고...
아껴서 보듬던 대현군을 잃고...
그리고 수빈이 친애했던 이화도 잃는구나!
"이화를 어디에서 찾았다고 했느냐?"
"그것이... 향원정 서쪽의 장고(醬庫)의 장독안이옵니다."
"장독안이라? 허... 지엄한 궁궐에서 그것도 궁녀의 시신을 보는 이 하나 없이 유기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자가 범인일 터...
장고? 장고라면 중궁전 뒤쪽이구나!"
왕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편전 문을 나섰다.
"중궁전으로 가자!“
“네? 중궁전으로요?”
왕의 거친 발걸음에 충선과 내관들이 따라 움직였다.
"주상전하 납시오!“
“중전마마... 전하께서 납시신답니다~”
중궁전의 서상궁은 호들갑을 떨며 중전에게 아뢰었다.
"무슨 일이실까?"
왕이 중전의 처소를 찾은 일이 몇달만에 처음이었기에 중전 민서는 왕께서 자신을 보기 위해 오신 일이 아닌지를 알면서도 설레기 시작했다.
중전 민서는 경조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번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경조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후궁 수빈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멀리서만 지켜보았지만... 민서에게 경조는 사랑하고 보고싶은 지아비였다.
민서도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실 리는 없겠지..."
민서는 왕을 처음 본 순간부터 설레였지만 왕은 민서를 처음 본 순간부터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민서는 영의정 윤 판의 큰 딸이었으므로...
아비의 권세로 민서가 중전 자리에 오른 건 사실이었지만, 민서가 중전의 자리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비의 손에 이끌려서 들어온 궁궐이었지만 민서는 왕이 좋았다.
허나 국모의 자리란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삶이었다면 남편의 사랑을 담뿍 받았을만큼 민서는 무던하고 조용하며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여자였다.
화려한 중전의 자리에 올랐지만 늘 초라하게, 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게 될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슬하에 아이도 하나 없이...
소현옹주의 장례를 치른 날이 얼마되지 않았고 왕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것을 짐작하면서도 민서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용안을 뵙는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민서는 쓸쓸히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었지만 경대를 바라보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어 보았다.
왕은 중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전하... 어인 일로... 이 늦은 시각에...“
중전 민서는 지아비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자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인사를 하였으나 왕의 안색을 살피니 금방 풀이 죽어 물었다.
왕의 얼굴은 냉랭하였고 초여름인데도 한기가 돌았다.
"들으셨소? 비선재의 궁녀 이화가 죽은 채로 장고의 장독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랬다.
며칠전 서상궁이 놀란 가슴으로 달려 들어와 호들갑스럽게 말했었지
“마마... 궁궐에 이런 변고가...
장고의 푸레독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 시체가 이화라는 비선재의 궁녀라 하옵니다.“
“비선재 궁녀라고?”
“네... 이화가 바로 소현옹주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지밀상궁입니다.”
“그래? 어린 옹주가 떠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리 안 좋은 일만 궁에 자꾸 생기는 것이냐? 허면 이화를 죽인 범인은 잡은 것이냐?”
“그것이 지금 조사중이온데... 단서가 전혀 없다 들었습니다.”
서상궁의 보고에 민서도 마음이 좋지 않은 터였다.
궐 내에서 떠돌고 있는 소현옹주의 독살설에다가
옹주의 지밀상궁 이화도 처참하게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하고...
그 배후가 혹시 중전이 아닐까 하는 소문이 흉흉한 때였다.
"예... 전하... 그 이야기는 들었사온데... 그 일로 오신 것입니까?"
"중전은 모르는 일이시오? 정녕?"
중전은 진정 모르는 일인지를 캐묻는 왕의 눈이 매서워 민서는 왕을 보던 눈길을 거두었다.
왕의 눈빛은 민서에게 말하고 있었다.
‘중전 그대가 이화를 시켜 소현옹주를 독살하고 입막음을 하려 이화도 죽인것이 아니냐?'고...
중전 민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저는 진정 모르는 일이옵니다. 전하.”
자신은 정녕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소? 중전께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란 말이지?”
“예... 전하!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을 고하리까?”
왕의 분노가 전해져 와서 중전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몸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왕도 모를리 없었다.
중전의 아버지가 영의정 윤 판이었을뿐...
중전 스스로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경조는 심기가 뒤틀렸다.
중전 윤민서의 얼굴에서는 늘 탐욕스런 윤 판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왕의 눈에는 앞에 서 있는 가녀린 여인이 오롯이 중전 윤민서만으로 보인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영의정 윤 판의 권력을 공고히 해줄 맏딸 - 윤민서일뿐!
"중전... 이번에 죽은 아이가 대현군이라면 좋았을 것을요... 소현옹주라서 아니되셨습니다! 다음 왕이 될 세자가 굳건하니까요! 나는 곧 대현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중전 민서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둑 떨어졌다.
"전하... 소현옹주가 그리되어서 제가 얼마나 비통한지 정녕 모르십니까? 제가 낳진 않았지만 대현군과 소현옹주는 제 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민서는 서러워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중전은 대현군과 소현옹주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귀하게 여겼다. 수빈이 죽고 난 뒤에는 두 아이를 더욱 이뻐하여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어머니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중전의 눈물을 바라보는 왕의 눈길은 무심했다.
"다시 한번 묻겠소. 정녕 그대는 궁녀 이화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모른단 말이지? 진정 이 일과 전혀 관계없단 말이지?
왕은 다시 한번 확인하듯 힘을 주어 물었다.
"네 전하... 저는 결단코 모르는 일이옵니다!!!"
"허면... 그대의 아버지 윤 판도 모르는 일이겠는가?"
왕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위엄이 서려 있었다.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순간 중전 민서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왕은 알아차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지만 결국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중전 민서!
왕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왕비전을 나가버렸다.
민서는 왕이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설마 아버지께서? 소현옹주를 죽게 만드셨단 말인가?
대현군을 제거하기 위해?"
민서는 머리가 깨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가 잠시후 그 자리에서 꼬꾸라지듯이 쓰러졌다.
쓰러진 민서의 눈동자에 놀란 서상궁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중전마마... 중전마마...”
“어서 어의를 불러오게! 중전마마께서 혼절하셨다네...”
서상궁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태전을 걸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