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초롱이가 난감한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초롱이는 인우와 달령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 달령 아저씨…
인우가 초롱이의 입에서 달령의 말이 튀어나오자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초롱이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바쁘게 말을 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않았어. 왠지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어. 내가 경호네 불곰에게 물어뜯기고 도망쳤을 때 그분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내 발에 침을 바르고 붕대로 칭칭 감아 주셨어. 그렇지 않았다면 난 벌써 쓰레기통에 처박혔을지도 몰라. 그런 다음 난 너무 아파서 바로 기절했거든. 그런데 깨어나 보니 다락방 천정이었구 곁에는 억새풀로 만든 작은 빗자루가 놓여 있었어. 달령 아저씨가 주셨던 바로 그 빗자루.
-그, 그랬었구나. 달령 아저씨…
-그, 그리구 이거…
인우가 연거푸 달령의 이름을 되뇌자 초롱이가 품속에서 작고 탐스러운 열매를 꺼내 인우 코앞에 들이밀었다.
-이, 이건 뭐야?
-이건 말이야… 그러니까… 달콤한 사탕 같은 거야.
-사탕? 이걸 왜?
-먹어. 그럼 기분이 좋아질 거야.
-난 괜찮아. 지금 많이 나아졌어. 네가 먹어.
-아니야. 난 많이 먹었어. 그러니까 이건 네가 먹어. 몸이 훨씬 좋아질 거야. 그리구 네가 누운 그 파로보나 잎사귀가 모두 시들었잖아.
-응?
인우는 초롱이의 말에 침대 위에 덤불처럼 깔려 있는 잎사귀들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초롱이의 말처럼 파르보나 이파리들은 그가 처음 의식을 찾고 눈을 떴을 때는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두 시들어 말라 있었다.
-그 사탕을 먹으면 보다 빨리 회복될 거야. 파르보나 이파리가 아픈 사람의 몸에 좋은 건 알지만 그렇게 시든 파르보나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거든. 어서 먹어.
-…
인우는 초롱이가 집요하게 굴자 손을 내밀어 받아들고 잠시 쳐다보는 척하더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초롱이의 말처럼 도토리 알처럼 생긴 작고 부드러운 열매는 입에 넣자마자 달콤한 향기가 입안으로 가득 퍼졌고 숨을 쉴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코를 통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인우가 혀로 돌려가며 단물을 빨아내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면이 점점 젤리처럼 변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조금씩 작아지면서 결국 다 사라지고 말았다.
-어때? 괜찮지?
-응. 맛있어.
-그, 그렇지? 맞아. 나도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도 남았니?
-아, 아니. 다 먹었어.
-휴우.
인우의 말에 초롱이가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야. 네가 그걸 먹어서.
-내가 이걸 먹었는데 왜 다행이야?
-응? 아, 아니야. 일어날 수 있겠니?
-응.
초롱이가 인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다쿠니가 보이는 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인우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해.
-왜?
-지금 이곳은 아무도 없어. 네가 자고 있을 때 루퍼 할아버지가 보르말린하고 붐바 그리고 돌무타오를 데리고 브라이튼 계곡으로 가셨어.
-브라이튼 계곡으로?
-응. 이곳이 위험에 빠질 지도 모른댔어.
-하지만… 인사도 못하고 가는 건…
-그렇지 않아. 루퍼 할아버지가 네가 깨어나는 대로 데리고 바로 떠나랬어.
-정말?
-응. 내가 왜 거짓말을 해? 파르보나 이파리가 다 시들면 네 몸이 회복된 거니까 곧바로 떠나도 된다고 하셨어.
-…
인우는 초롱이의 말에 오히려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것처럼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일어서기는커녕 눈을 뜰 힘 조차 없는 것처럼 무기력했고 특히, 초롱이가 건네준 사탕을 먹은 뒤로는 손끝의 감각이 없을 만큼 저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인우를 초롱이는 가끔씩 훔쳐보듯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계속 다쿠니 우리가 보이는 창에 눈을 두었다.
-네가 신전에 올라갔다면 그 가여운 다쿠니가 또 죽었겠군.
-네가 그걸 어떻게…
-날 우습게보지 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착각이야. 어서 일어나 이곳을 떠나야 해. 난 시볼라가 누군지 잘 알 거든.
-네가 시볼라에 관해 알아?
-내가 말했지? 날 우습게보지 말라구?
인우의 말에 초롱이가 비위가 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여 쳐다보았다.
-미, 미안. 네가 그 무서운 시볼라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
-시볼라는 무섭지… 시볼라는 포악하지… 시볼라와 상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초롱이는 시볼라의 이름을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듯 말하면서 계속 고개도 쳐들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가까이에서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초롱이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인우도 초롱이의 말을 처음부터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다가 초롱이가 계속해서 버릇처럼 중얼거리자 그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서 일어나. 이곳을 떠나야 해. 시볼라가 오면 우린 끝장이야.
-시볼라가 여길 왜 오니?
-지금 왜냐구 했니?
인우가 귀찮다는 듯이 돌아눕자 초롱이가 인우를 한심하다는 투로 쏘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초롱이는 인우에게 시볼라에 관해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다만, 무섭다거나 포악하다거나 잔인하다는 말 외에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초롱이가 알고 있었던 시볼라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테이블 밑에 있던 비쩍 마른 삼나무 상자에 숨어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시볼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인우가 파르보나 침대에서 돌아눕자 자존심이 상한나머지 쏘아보면서 중얼거리기만 했다.
-어서 일어나. 네가 일어나지 않으면 난 혼자 갈 거야.
-뭐? 정말?
인우는 초롱이가 매몰차게 굴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무도 없는 루퍼의 농장에서 그것도 다쿠니 우리가 보이는 곳에서 덩그러니 혼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그래. 가자. 하지만 루퍼 할아버지께 인사해야 해.
-그 분은 이곳에 계시지 않아. 언제 오실지 기약 없이 떠나셨다구. 그렇지만 언젠가는 또 볼 수 있을 거야.
-…
인우는 거듭되는 초롱이의 재촉에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몸에 달라붙은 파르보나 이파리와 빛이 바랜 연분홍 색깔의 꽃잎을 떨어냈다. 그러자 초롱이가 파르보나 침대 위로 벌러덩 누워 이리저리 장난치듯 굴러다녔다.
-파르보나가 그렇게 귀한 풀이야?
-…
인우는 엉겅퀴처럼 달라붙은 시든 꽃잎과 풀잎들을 떼어내며 초롱이를 쳐다보았다. 초롱이는 인우의 말에 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아예 시들어 이미 말라비틀어진 풀잎들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시간이 없다며?
-그, 그렇지. 미, 미안. 어서 이곳을 떠나자.
인우의 말에 초롱이가 쑥스러운 듯 단숨에 침대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잠시 인우의 표정을 살피다가 묘한 웃음을 짓고 밖으로 나갔다. 인우도 초롱이가 나간 곳으로 뒤따라나가자 초롱이가 다쿠니 우리를 등지고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다가서는 인우도 신경 쓰지 않고 부지런히 고개를 돌려가며 매우 신중한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저곳이로군!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초롱이가 커다란 산이 보이는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인우도 동시에 초롱이가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인우는 초롱이가 무엇을 보고 소리쳤는지는 알지 못했다.
-저곳, 우물이 있는 저 담장 근처에 희미하게 돌아가는 연둣빛이 보이지? 마치 공중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면서…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인우는 인상을 쓰며 초롱이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초롱이가 말하는 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너도 바루의 꽃방을 먹었는데…
-뭐? 바루의 꽃방? 그, 그게 뭐니? 내가 언제 그걸 먹었니?
-기억 안나? 아까 네가 먹은 거.
-그거? 사탕?
-사탕은 무슨… 그건 바루가 그렇게 찾던 꽃방이었어.
-뭐, 뭐? 아니 그럼 이젠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마지막 남았던 그 꽃방을 네가 먹은 걸 알면 바루가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모르지…
-그, 그걸 말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어. 지금은 그걸 갖구 싸울 때가 아니야.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해. 시볼라가 이곳으로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아갈 탑이 어떤 곳이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을 거야. 네가 만약 시볼라의 아갈 탑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을 거라구. 알겠니?
초롱이는 오히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인우를 쳐다보며 비꼬듯 말했다.
-웜프를 찾지 못했어?
-웜프? 그, 그건…
-잘 보란 말이야. 바루의 꽃방을 먹어놓고도 웜프가 눈에 안 띈다는 건 말이 안 돼. 연한 연둣빛 동그란 원이 마치 공중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 않니?
초롱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인우를 돌아보았지만 인우의 눈에는 연둣빛 동그란 원은커녕 비슷해 보이는 먼지바람도 한 점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