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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결結
작성일 : 17-07-11 13:29     조회 : 250     추천 : 0     분량 : 8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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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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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넉 달 후.

 

  권승휘가 부풀어 오른 배를 문지르며 산실청을 돌아보고 있었다.

 

  벽에는 간지로 방향을 표시한 방위도와 천지신명에게 산실과 산모의 건강을 비는 부적인 차지부가 붙어져 있었다.

 

  바닥에 까는 볏짚부터 양모전, 기름종이, 백마피까지 모두 최상급으로 마련되었다.

 

  영의정인 황희가 산실청의 도제조를 맡아 곧 있을 출산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애고, 부러워라. 승휘께선 이런 데서 아이를 낳으니 얼마나 좋으셔요.”

 

  단지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산실청을 두리번거렸다.

 

  “이 정도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

 

  말은 이리 했지만 권승휘 역시 뿌듯함을 숨길 수 없었다. 승휘의 자리에 있었다면 꿈도 못 꿀 호사였다.

 

  “준비를 마쳤건만 어찌 아니 나오시는 겐지.”

 

  권승휘가 자랑스럽게 배를 내려다보았다.

 

  “세자 저하를 닮아 성정이 느긋하고 온유하신가 봅니다.”

 

  “그런데 내 배가 정말로 원자 아기씨를 낳을 모양이냐?”

 

  “그렇다니까요. 승휘 배가 꼭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둥그런 것이 원자 애기씨를 품으신 것이 틀림없어요.”

 

  단지가 선물로 들어온 배냇저고리와 면포를 산실청 한구석에 놓으면서 조잘거렸다. 단지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권승휘가 흐뭇하게 웃었다.

 

  “근데 오는 길에 보니 오늘도 유생들이 권당을 하고 있더이다.”

 

  “오늘도? 오늘은 또 무슨 이유라더냐?”

 

  “뻔하죠. 폐빈의 이유를 명백히 밝히고, 승휘의 세자빈 임명을 제고해달라는…….”

 

  단지가 권승휘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권승휘의 얇은 입술이 어그러졌다.

 

  “한심하기는! 전하와 저하께선 태평성국을 이루고자 밤낮으로 고심하시건만 힘이 되어드릴 생각은 못 하고 어찌 쓸데없는 짓들만 하고 있다더냐. 쯧쯧.”

 

  단지가 이때다 싶었는지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속삭였다.

 

  “헌데 폐빈이 사라진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게 사실입니까요?”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헛소리냐?”

 

  “세자빈이 폐출된 후로 매일같이 육조거리에 까마귀 떼들이 몰려들어 울어댄다지 않아요. 그게 세자빈이 억울하게 죽어 혼이 나타나는 거라는 소문이 돈답니다. 어쩌면 전하가 세자빈을 살려주는 척하면서 죽였을 지도 모른다고……,”

 

  “어허, 신성한 산실청에서 어찌 부정한 소리를 입에 담는 게냐!”

 

  권승휘의 호통에 단지의 고개가 쑥 들어갔다.

 

  “그리고 단지 너는 왜 자꾸 날 승휘라 부르는 게야! 내 세자빈이 된 것이 언제인데. 한 번만 더 승휘 소리를 했다가는 종아리를 칠 것이다.”

 

  “아, 소, 송구하옵니다, 빈궁 마노라.”

 

  권승휘가 쌩하니 돌아서 나갔다.

 

 

  * * *

 

  “어허, 답답한지고!”

 

  왕이 노기 어린 얼굴로 서안을 두드렸다.

 

  “폐빈을 한 것은 종실의 일이기 이전에 집안일인데 그 이유를 상세히 밝히라니.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하나 구별치 못하는 이 철없는 유생들을 잡아들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황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 하자면 성균관 유생 모두를 하옥하셔야 하옵니다.”

 

  “뭐라? 유생들이 죄다 들고 일어났단 말이냐?”

 

  “송구하오나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발계를 올렸사옵니다. 사소한 실덕을 핑계 삼아 세자빈을 쫓아낸 것은 옳지 못하니 결정을 재고하셔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왕이 벌떡 일어나 가슴을 쿵쿵 쳤다.

 

  “핑계를 삼아? 내게 지금 핑계를 삼는다 한 것이냐? 그리고 재고하라니, 폐빈이 사라진 지 넉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고집들을 부린단 말이냐. 사라진 폐빈을 데려다 세자빈 자리에 억지로 앉히기라도 하란 말인가!”

 

  “직첩을 회복하여 정빈의 자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지금의 빈궁께선 간택의 절차도 없이 후궁으로서 정빈이 되었으니 적서의 예에 어긋난다 하여……,”

 

  “후궁이 지들이 두는 첩과 같은 줄 아는가!”

 

  황희가 왕이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렸다가 달래듯 말했다.

 

  “사라진 폐빈이 사통한 사실을 밝히시면 어떠하실지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면 들고 일어나는 이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옵니다.”

 

  “한 나라의 세자빈이 폐족과, 그것도 여인과 사통을 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하겠는가! 조선이란 나라가 겉만 그럴듯하고 속은 엉망이다 하지 않겠느냐! 또 죄 없는 폐족을 걸고 넘어진다 손가락질을 해대겠지!

 

  뿐인가, 세자는 또 얼마나 입길에 오르내리겠는가! 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일만은 명명백백히 밝히고 싶지가 않다. 이런 내 심중을 영상 또한 잘 알지 않은가!”

 

  황희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여 소신이 고민을 해보았사온데, 사통임을 드러내되 상대가 폐족임을 언급치 않으시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리만 하여도 훨씬 부담이 덜어지시지 않겠사옵니까.”

 

  왕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상대를 밝히지 않으면 거짓을 말한다 할 것이다.”

 

  “궁인이라 둘러대시지요.”

 

  “궁인?”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빈궁이 외로움과 투기심을 못 이겨 궁인을 유혹하였고, 궁인은 빈궁의 강압에 못 이겨 동침하였다 하는 것이옵니다.

 

  궁 안 여인들의 대식이야 흔한 일이니, 이상히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유생과 백성들도 빈궁의 폐출에 십분 공감할 것이옵니다. 또한 추잡한 풍기문란 사건을 깊이 파고들어 따질 신료도 없을 것이옵니다.”

 

  “흐음.”

 

  왕이 숱 많은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한참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의 말대로 처분토록 하지.”

 

  “속히 교지를 올리도록 하겠나이다.”

 

  어명을 받든 황희가 나가려다 말고 물었다.

 

  “헌데 궁인이라 하면 소속이 필요할 터인데 어느 곳 궁인이라 할지요.”

 

  왕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권승휘 처소의 궁인이라 하게.”

 

  “그리 하겠사옵니다.”

 

 

  * * *

 

 

  며칠 후, 춘추관에서는 사관 신이용이 밤이 깊도록 일을 하고 있었다. 동료 사관 정신석이 들어오며 아는 척을 했다.

 

  “자네가 오늘 상직인가. 폐빈의 기록을 정리 중이시구만.”

 

  정신석이 신이용 앞에 쌓인 산더미 같은 문서더미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금일 왕이 발표한 교지를 토대로 세자빈이 권승휘 처소의 궁인 소쌍과 대식을 하였고, 드러내기 부끄러운 일이라 일일이 밝히지 않았다는 왕의 말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 교지는 영 찜찜했어. 고작 애기 나인들과 더불어 사랑 노래 좀 부르고 저하의 탄신 선물을 깜박한 일로 세자빈을 쫓아내다니. 전하께서 그리 허술한 분이 아닌데 이상타 이상타 하였지.”

 

  “말해봤자 집안 망신이고 제 얼굴에 침 뱉기니 그리 두루뭉술하셨던 게지.”

 

  신이용이 붓을 멈추지 않고 대꾸했다. 문서를 무심히 뒤적이던 정신석이 말소리를 확 낮추고 물었다.

 

  “헌데 그 소쌍이란 자가 궁인이 아니라 사내란 소문이 있던데, 자네도 들었는가.”

 

  신이용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눈을 올려 떴다. 정신석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도 목소리를 더욱 줄였다.

 

  “아 글쎄, 그 사내가 폐족인데 세자빈과 정을 통해 왕씨의 아이를 낳으려 했다더구만. 이 나라 왕실의 세자빈이 왕씨의 아들을 낳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만에 하나 그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고 생각해보게. 그럼 이 나라는 왕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신이용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붓을 움직였다.

 

  “하여튼 왕씨들의 집념도 알아줘야 한다니까.”

 

  “……?”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냔 말이지. 그래봐야 나라 말아먹은 죄인들 아닌가. 설사 왕씨의 자손이 왕이 되면 무엇하나. 이미 고려는 끝장난 왕조인 것을, 쯧쯧. 하여튼 폐족들이란 그저 씨를 말려야 후환이 없지.”

 

  신이용이 굳은 얼굴로 문진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정신석이 움찔하여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자네 일하는데 눈치도 없이 방해가 길었구만. 나는 먼저 퇴청할 테니 그럼 일하시게.”

 

  정신석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신이용의 붓이 흔들리며 먹물이 옷에 튀었다. 신이용이 짜증을 내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목 안쪽에 ‘비의구야’의 문신이 작게 찍혀 있었다.

 

 

  * * *

 

 

  동이 트기 전인데도 창밖이 환했다. 천향이 방문에 쳐두었던 자줏빛 명주 침장을 걷고 문을 열었다. 밤사이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매서운 찬기가 훅 들어차지만 소담한 눈 때문인지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천향이 눈이 부신 듯 하얗게 덮인 천지를 바라보았다.

 

  “아씨, 일어나셨어요? 수세하셔요.”

 

  더운 물이 담긴 놋대야를 되똥거리며 들고 오는 이는 석가이였다.

 

  “다리가 아프냐. 오늘따라 유난히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구나.”

 

  석가이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원래 이렇게 눈비 오는 날이면 쬐끔 더 쑤셔요.”

 

  “그럼 오늘은 집에서 쉬겠느냐. 눈길이라 걷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음마, 무슨 소리셔요. 제가 가야지. 걷는 덴 이골이 났으니까 아씨는 암 걱정 마셔요.”

 

  석가이가 두 다리를 보란 듯 굴러 보이며 외출 채비에 나섰다.

 

  천향은 햇솜을 먹인 솜저고리 위에 담비털로 만든 갖옷을 걸쳤다. 이엄을 쓰고 두툼한 비단으로 만든 계화를 신었다. 석가이도 발을 개가죽으로 감싼 뒤 짚신을 신고 여러 번 끈으로 동여맸다.

 

  채비를 마친 석가이가 제법 큼지막한 보따리 하나를 둘러맸다.

 

  “그건 뭐냐.”

 

  “이것저것 소용될 것들 좀 챙겼어요. 좋아하시는 유밀과랑 다식도 넣고요.”

 

  배시시 웃는 석가이를 보며 천향이 흐뭇하게 웃었다.

 

  “어서 가자. 기다리시겠다.”

 

 

  * * *

 

 

  흐리게 내려앉은 하늘 가운데로 쇠기러기가 날았다. 암자 주변을 두른 잣나무는 흰 눈을 두껍게 얹고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은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따금씩 뎅그렁 뎅그렁, 풍경 울리는 소리만 울릴 뿐 사위는 고요했다.

 

  “오셨습니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천향과 석가이의 뒤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대삿갓을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석가이가 새침하게 치마를 말아 쥐고 눈을 흘겼다.

 

  “음마, 웬 외간 사내가 처음 본 여인들한테 말을 걸고 그러신대요?”

 

  말은 그리 하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삿갓 속에서 쿡, 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새치름하게 내리깔았던 석가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마노라, 아니, 월 아씨셔요?”

 

  석가이가 대삿갓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내가 대삿갓을 벗으며 환히 웃었다. 바지저고리에 상투를 맨 사내는 다름 아닌, 월이었다.

 

  “하이고, 깜박 속았네. 영락없는 사내인 줄 알았잖어요.”

 

  “어떠냐. 제법 사내 티가 나느냐?”

 

  “사내 티가 나긴 나는데 너무 훤해서 원, 사내들이 아니라 여인들이 떼로 쫓아다니게 생겼는데요?”

 

  “그래서 내 웬만하면 삿갓은 벗지 않으려 한다. 애먼 여인들이 상사병이라도 앓으면 아니 되지 않느냐.”

 

  “예예, 그리 하셔야지요. 허면 이제 아씨가 아니라 도련님이라 불러드려야 하려나요? 월 도련님?”

 

  석가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월이 밝게 웃으며 천향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험한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네.”

 

  “수고라니요. 당연히 와야 할 길인 것을요.”

 

  천향이 월의 복색을 애틋하게 훑었다. 소쌍의 옷가지들을 모두 태운 후 꼭 한 벌을 남겨 월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이리 입혀놓으니 언뜻 소쌍 같기도 했다.

 

  두 사람, 참으로 닮은 이들이었구나.

 

  “이곳이 소쌍이 어린 시절 머물렀던 절입니까.”

 

  “그렇다네. 나 역시 어릴 적 이곳에서 자주 뛰놀곤 하였지.”

 

  “두 분의 인연이 오래 전부터 닿아있었던 게로군요.”

 

  천향이 소쌍의 흔적이나마 느껴보려는 듯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며 숨을 깊게 쉬었다.

 

  “헌데 지금 바로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천향이 월의 등에 둘러맨 바랑을 보며 물었다.

 

  “숙제를 끝마쳤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지.”

 

  “좀 더 머무시다 맹춘이나 지나면 그때 가시지요.”

 

  석가이도 거들었다.

 

  “그러셔요, 아씨. 길이 온통 질퍽질퍽한 흙탕이라 낙상하기 딱 좋겠더라구요.”

 

  “내 그 사이 산을 바지런히 오르내리고 스님들 일 도우며 팔 힘, 다리 힘을 제법 길렀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월이 보란 듯 팔을 구부려 보였다.

 

  “수월치 않을 것입니다. 객주에서 지내시기도 적이 불편하실 테고.”

 

  천향이 못내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월은 고개를 내저었다.

 

  “길이 아무리 험한들 마음과 몸이 떨어져 있는 것보다 힘들겠는가. 마음 가는 곳에 몸을 두는 게 제일 행복하다는 것을 내 이제야 깨쳤다네.”

 

  모두 소쌍의 덕이다.

 

  월이 삼킨 뒷말을 듣기라도 한 듯 천향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당차고 똑 부러진 여인이었다. 소쌍이 사랑에 빠질 만하구나. 소쌍을 떠올린 천향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딱히 예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네. 그저 내 발길 닿는 곳에 마음을 두며 천하를 떠돌려 하네. 남쪽 끝부터 북쪽 끝까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속속들이 내 눈에 담고 싶다네.”

 

  “부럽습니다.”

 

  천향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 천향이 자네 덕분이지.”

 

  “제가 무어 한 게 있다고요.”

 

  “진정이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게야.”

 

  소쌍을 떠나보내는 것도, 길을 떠나겠다 마음먹는 것도…….

 

  문득 소쌍이 주고 간 선물이 천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씨, 늘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해요. 성질대로 아무 데나 끼어들고, 싸우고 그러심 안 돼요. 아셨죠?”

 

  석가이가 월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노력은 해보겠다만 싸울 땐 싸워야겠지. 지고선 못 사는 성미 아니냐.”

 

  “아이그, 이제 그 성질은 좀 버리시고……,”

 

  고맙게도 천향이 석가이의 잔소리를 잘라주었다.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전갈 주십시오. 미약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천하의 천향이 나의 뒷배를 보아준다니 이보다 든든한 약조가 없네 그려.”

 

  석가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럼요. 팔도 어느 기방을 가더래도 우리 천향 아씨 명자만 대면 며칠 신세 지는 건 일도 아닐 거여요. 헌데 기방에 들렀다가 오만 기생들이 다 들러붙으면 어쩐대요? 당장 살림 차리자고 발목이라도 붙들어대는 거 아냐?”

 

  월이 무슨 문제냐는 듯 대꾸했다.

 

  “내 이미 천향과 연을 맺은 몸이라 하면 되지 않겠느냐.”

 

  석가이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러면 되겠어요. 아무리 낯짝 두꺼운 기생이라도 천향 이름 듣고 달려들지는 못할 거구만요. 암, 살고 싶음 그럼 안 되지.”

 

  진지한 석가이의 반응에 월과 천향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네.”

 

  월이 한쪽 눈썹을 실그러뜨리며 천향의 손을 잡았다.

 

  “제가 더 고맙지요.”

 

  천향이 월의 손을 마주 잡았다. 꼭 쥔 손에서 온기가 퍼져나갔다.

 

  “이거 받게나.”

 

  월이 바랑에서 보자기로 감싼 것을 건넸다. 천향이 소중히 받아들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졸필이라 부끄러울 따름이네.”

 

  “필사는 궁인 춘덕과 춘복이 맡기로 하였습니다.”

 

  간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이름에 월의 눈이 살짝 흐려졌다. 그 마음을 읽은 천향이 말했다.

 

  “두 사람 다 지밀방 나인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글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였던지, 서체가 단정하고 필사 속도도 빠르다 소문이 자자합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한 채는 거뜬히 올릴 만큼 돈을 벌었다 하는데 그 돈을 부모 없는 아이들을 거두는 데 쓴다 합니다.”

 

  “잘 되었구나. 정말 잘 되었어.”

 

  월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씨, 이거 가시면서 드셔요. 유밀과랑 다식 넣었어요.”

 

  석가이가 아쉬운 듯 가지고 온 보따리를 건넸다.

 

  “네가 해준 유밀과랑 다식이라니, 얼마 만에 먹어보는 것이냐. 고맙다. 아껴가며 먹으마.”

 

  월이 바랑 안에다 보따리를 넣고 꽃분홍 온혜를 제일 위에 얹었다.

 

  “사내 복색으로 길을 떠나시면서 웬 온혜여요?”

 

  “…… 이 신발이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하였거든.”

 

  월이 온혜를 소중히 쓸고는 바랑을 단단히 묶었다. 신들메까지 고쳐 맨 월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 정말 가보겠네.”

 

  “아씨, 나중에 저랑 천향 아씨 보러 오실 거지요?”

 

  “작정하지 않아도 인연이 있으면 만나지지 않겠느냐.”

 

  “꼭 그리 하셔야 해요.”

 

  월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안녕히.”

 

 

 

  마주 손을 흔드는 천향의 시선에 나비 한 마리가 잡혔다. 아주 고운 빛을 내는 노란 나비였다.

 

  “음마, 한겨울에 웬 나비래요?”

 

  석가이도 신기한지 눈을 끔벅거렸다. 나비는 천향과 석가이를 지나 월 쪽으로 향했다. 꼭 월을 호위하기라도 하듯 나비는 월의 어깨와 머리를 오르내리며 날았다. 천향이 웃으며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아이고!”

 

  돌아서던 석가이가 얼음을 잘못 디뎠는지 발라당 넘어졌다.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한 귀퉁이가 비죽이 드러났다.

 

  ‘채운몽’

 

  “책이네요? 제목이 뭐라 되어 있는 거여요?”

 

  천향이 말없이 책을 소중히 보듬어 안았다. 책에서 익숙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천향이 눈을 감고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코끝에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탐스러운 눈송이였다. 꽃 같은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풀풀 떨어져 내렸다.

 

  “이 책을 월 아씨께서 쓰신 거여요? 뭐라고 쓰신 건데요? 말씀해 주셔요, 예? 천향 아씨.”

 

  졸라대는 석가이에게 웃어 보이며 천향이 걸음을 떼었다.

 

  풍경이 뎅그렁, 울었다. 신호라도 되듯 눈이 점점 더 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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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2017 / 7 / 5 245 0 8017   
26 25장. 이렇게 돌아서면 2017 / 7 / 4 236 0 7564   
25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2017 / 7 / 4 284 0 8756   
24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2017 / 7 / 4 280 0 8427   
23 22장. 뜨겁고도 날카로운 첫, 2017 / 7 / 3 255 0 6587   
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4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6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2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6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3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41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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