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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소녀 류하 시리즈
작가 : 루날
작품등록일 : 2017.7.9

비정한 청부업자들과 범죄조직들이 판치는 부산을 배경으로, 오갈 데 없는 한 소녀가 방황한다. 무기력하고 무감정한 소녀가 거친 세계 속에서 살아남으며 성장하는 하드보일드하고 피카레스크한 이야기, 지금 여기서 개막.

 
1 - 소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작성일 : 17-07-10 20:45     조회 : 240     추천 : 0     분량 : 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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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파에 누웠다가 잠깐 잠들었던 모양이다. 내 집 겸 한현의 사무실. 일어나려고 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을 처먹은 것도 아닌데. 오히려 요새 음주는 안 하고 있다.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하긴, 며칠 째 뭐라도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뭘 집어삼켜도 토해버리고, 그나마 제대로 먹은 거라고는 한현이 타주는 홍차 정도밖에 없다.

 두 시. 새벽 두 시 치고는 너무 밝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오후 두 시였다. 어제 몇 시에 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량차오의 사무실에서 올 때는 지하철 첫 차를 타고 돌아왔으니, 적어도 해가 뜬 다음에 잤을 것이다.

 몸에는 새롭게 붕대와 반창고가 붙어 있다. 매일 자기 전에 괴로워서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다 잠들고 나면 어느 새 소독된 채 반창고나 붕대가 감겨 있다. 분명히 한현이 했으리라. 한현 외에 그럴 사람은 없으니까. 게다가 한현도 그걸 대놓고 숨기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홍차 냄새가 났다. 맞은 편 소파에서 한현이 앉아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두통이 몰려왔다.

 “이제 일어났어?”

 “아뇨. 아직 자는 것 같아요.”

 “차 마실래? 스콘도 있어.”

 “먹어봤자 다 토하는 거 알잖아요.”

 “토할 땐 토하는 거고, 먹을 땐 먹어야지. 어제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먹기 귀찮아요. 하고 대답하려는데 배에서 소리가 들렸다. 먹는 건 귀찮은데 왜 사람 몸은 뭔가를 먹어야 하게 설계되어 있는 걸까. 한현의 미소가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는 척 했다.

 “저도 그럼 한 잔 줘요.”

 한현은 새 잔을 꺼내와 잔에 차를 따랐다. 잠을 깨는 독한 냄새가 났다. 스콘을 받아든 나는 반으로 갈라 잼과 크림을 발랐다. 스콘에서 아직 따뜻함이 느껴졌다. 퍽퍽한 스콘을 한 입, 쓰고 떫은 홍차를 한 모금.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은 한현이 분명했지만, 정작 한현은 내가 스스로 상처를 내는 걸 뻔히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이유만큼은 알 수 있었다. 커터칼로 손목을 그어도, 식칼로 자기 배를 쑤셔대도 한현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응급처치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단 한 번, 한현이 자해를 막은 적이 있었다. 송곳으로 눈을 찌르려 할 때였다. 그 때만큼은 한현이 내 팔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현은 말했다.

 “그 이상 하면 고치기 힘들어.”

 그때부터 수위를 조금 낮추게 되었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치솟는 괴로움은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벽에 머리를 처박아도, 송곳으로 손바닥을 쑤셔대도 자괴감은 가시질 않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세상을 저주해도 죽기로 마음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다리나 육교에서 뛰어내리면 될 일인데, 그 가벼운 행동 하나 하는 게 힘들었다. 더 이상 살아서 기대할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데. 그냥 인생 한 가운데에 툭 하고 버려진 기분. 발버둥쳐봤자 거기서 거기일 뿐.

 홍차의 색이 피처럼 검붉다. 하지만 피처럼 끈적끈적하고 엉겨있지는 않다. 잔을 흔들면, 그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소용돌이가 잦아들고, 붉은 물 속에 내 얼굴이 보였다. 눈이 흐리멍덩했다.

 “아저씨는 나 정신병원 안 데려가요?”

 “너 가면 장기입원 확정인데 네가 순순히 입원 할 녀석이냐?”

 “하긴, 그렇죠.”

 잔을 비웠다. 씁쓰름한 떫은 맛이 혀를 훑고 지나간다. 새 잔을 따랐다. 홍차는 넓고 작은 잔에 따라야 한다. 특히 수색이 진한 차일수록 그렇다. 좁은 잔에 따르거나, 큰 잔에 너무 많이 따른다면, 진한 진홍색이 지금처럼 말라비틀어진 검은 색으로 바뀌게 된다. 나는 오히려 그게 좋지만.

 “량차오랑은 엮이기 싫어하는 것 같던데.”

 나는 대답 없이 차를 입 안에 머금었다. 별로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대답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도 엮이지 않는 걸 충고하고 싶지만…….”

 “거기까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간수해요. 아저씨 꼰대질은 필요 없어요.”

 “하긴, 네가 자해하는 걸 보니 잘 간수하고 있는 게 확실히 맞는 것 같구나.”

 “비꼬지 마세요. 그건 제 역할이라구요.”

 “네 상태가 멀쩡하진 않은 것 같으니 나라도 똑바로 해야지.”

 심통이 났다.

 “아무튼, 그렇게 둘이 친한 사이도 아니더니 왜 갑자기 의뢰를 받은 거야?”

 “뭐긴 뭐야. 돈이죠. 용돈이 없어서.”

 “네가 훔친 게 뭔 지 알아?”

 “솔직히, 잘 몰라요. 그냥 전 미술 같은 데 관심도 없고 시키는 대로 한 거지.”

 “오늘 경매 겸 전시회 메인 작품이야. 필명은 희나리. 거의 유작이나 다름없는데 그 화가 작품이 차례차례 사라지고 있어서 거의 마지막 남은 작품이지.”

 잔을 입가에 가져가려다 멈췄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 몇 년 전에 봤던 그 여자가 그 새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되었구나. 게다가 유작이라니, 나랑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린 걸까. 딱한 일이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킨다. 한현이 아침에 내오는 차는 늘 부드러움이라고는 없이, 씁쓰름하고 떫다.

 “좀 달달한 거 좀 내오면 안 돼요?”

 “씁쓰름해야 잠이 깨지. 그냥 설탕을 넣는 게 어때?”

 “그러면 지는 기분이잖아요.”

 “맨날 독한 거 찾더니 정작 독한 거 주고 나면 단 걸 찾네.”

 “사람이 좀 청개구리 같아야 귀여운 면이 있죠.”

 “하긴, 네가 좀 귀엽게 생기긴 했지.”

 “페도새끼.”

 “그런 의미 아니라는 거 알잖아.”

 다음 잔. 찻주전자에서는 물이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새 다 마셔버린 건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생각보다 큰일을 저질렀다는 거야.”

 “잘됐네요. 잠깐, 그 좆같은 경찰 아저씨 얼굴 다시 보는 건 아니겠죠?”

 “정현석 말하는 거면 걘 담당 아닐걸.”

 “그거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될 대로 되라고 하세요.”

 “까딱 하면 버리는 패로 써먹힐 뻔 한거야.”

 “깜빵도 콩밥은 잘 나온다면서요?”

 “가본 적 있어서 하는 말인데, 제대로 주지도 않는데 맛은 맛대로 맛대가리없어.”

 한현은 찻잔과 주전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 한 주전자만 더 타주지 이대로 끝인가.

 “아무튼 앞으론 조심해. 너무 무턱대고 대책없이 하지 말고. 지금도 넌 충분히 위험해.”

 “그 그림은 어떻게 되는 거죠?”

 “량차오가 다른 데에 팔아넘기겠지. 그러다 량차오가 경찰에 걸리면 너도 같이 큰일나는거고.”

 “와-아.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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