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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38장. 그의 사랑을 지켜 나의 사랑을
작성일 : 17-07-10 13:18     조회 : 261     추천 : 0     분량 : 9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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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쌍은 제가 세자빈인 것도 몰랐고, 저에겐 아무런 관심도 감정도 없었사옵니다.

 

  저 혼자 은애하게 되어……, 소쌍의 마음을 얻으려 기루에 찾아간 것이옵니다.

 

  소쌍은 저의 억지와 겁박에 못 이겨 응한 것일 뿐이옵니다.”

 

  소쌍이 고개를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빈을 연모한 것입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구애하여 겁박하였습니다. 추문을 퍼뜨리겠다, 가족들을 괴롭히겠다 협박에 못 이겨 빈께서 억지로 기루에 오신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잘못이라 나서는 두 사람을 보며 신료들이 수군거렸다.

 

  “저 소쌍이란 자가 여인이라 하지 않았소? 헌데 두 사람이 서로를 연모한다는 것인가?”

 

  “에헤이, 이 사람아. 그거 있잖은가. 궁녀들 사이에도 대식이라고…….”

 

  “마노라께서 진정 그런 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어찌 이런 변괴가!”

 

  “모두들 시끄럽다!”

 

  왕의 일갈이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다. 왕이 힘겹게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계집인 너희가 어찌 서로를 연모한다는 것이냐.”

 

  “어찌 그리 되었는지 저도 모르옵니다. 꽃이 피어나고 비가 내리듯 자연스레 그리 되었사옵니다.”

 

  “자,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나비가 꽃을 찾아가듯,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듯 소쌍을 은애하게 된 것이옵니다.

 

  그 마음이 너무 힘들어 도곡스님을 찾았사옵니다. 스님께 흔들리는 마음을 털어놓았기에 스님께선 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솔직히 고할 수 없었던 것이옵니다.”

 

  “그만, 그만! 지금 네가 나를 기롱하려드는 것이냐!”

 

  “전하께선 제가 진심을 말하면 늘 화를 내시옵니다. 저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실 수는 없으시옵니까.”

 

  왕의 목에 벌겋게 핏대가 올랐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말로 들어줄 것이 아니냐!

 

  하늘과 땅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운행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숨탄 것들 중 음양을 버리고 사는 것이 있더냐.

 

  그런데 어찌 여인과 여인이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삿된 감정일 뿐이다.

 

  네가 추하고 부정하기에, 수양을 게을리 하기에 그런 삿된 마음이 든 것이란 말이다!”

 

  불덩이를 토해내는 듯한 왕의 호통이 계속해 쏟아졌다.

 

  “양과 음이 서로 어우러지고 교합해서야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 정한 이치이거늘, 네 몸과 마음에 이리 삿된 기운이 깃들어있으니 어찌 세자의 마음을 얻고, 회임을 할 수 있었겠느냐!

 

  너는 조정과 왕실의 명예를 더럽혔음은 물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음양의 조화까지 깨뜨렸다! 하늘이 노하고 땅이 흔들릴 일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옵니다. 소쌍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군가의 강압이나 저의 다짐으로 인해 비롯되지 않았사옵니다.

 

  그 자체로 생겨난 마음을 어찌 자연스럽지 못하다 하시옵니까.”

 

  “닥치거라! 너의 궤변은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구나!”

 

  “전하께선 만백성을 사랑한다 하시지만 사랑에 대해선 조금도 모르시옵니다.”

 

  왕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에 옳고 그름이, 높고 낮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여인과 여인이든, 여인과 사내든 그 마음만은 모두 똑같이 소중한 것이라 여기옵니다.”

 

  “감히 난행의 죄를 범하고도 어찌 이리 뻔뻔한가!”

 

  “제가 세자 저하와 부부의 연을 맺고도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으니 부정하다 하시는 것입니까.

 

  허면 전하는 어떠시옵니까. 전하께선 중전마마와 부부의 연을 맺고도 후궁을 여럿 들이지 않으셨사옵니까. 그것은 부정하지 않은 것이옵니까.”

 

  “빈궁! 그만 하십시오!”

 

  향이 인상을 찌푸리고 일어섰다. 월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의 마음이 삿되다 한다면 저를 벌레 보듯 하시는 전하의 마음은, 세자 저하께서 절 꺼려하시는 마음은 삿되지 않은 것입니까.”

 

  “빈궁!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왕이 성난 황소마냥 콧김을 내뿜으며 고함을 쳤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는지 왕이 비칠거렸다. 향과 상선이 달려와 왕을 부축했다.

 

  “여봐라, 저 추잡한 것들을 얼른 내 눈 앞에서 치워라! 얼른!”

 

  사령들이 우르르 달려와 월과 소쌍을 끌어냈다.

 

 

 

  추국장에서 한바탕 소란이 이는 동안, 발을 내린 빈청 안에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중전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숨이었다.

 

  “기어이 그 길로 가겠다는 게냐.”

 

  중전이 씁쓸한 얼굴로 일어나 처소로 돌아갔다.

 

 

  * * *

 

 

 

  “갑자기 흥분하시어 현훈이 있으셨던 것이옵니다. 잠시 안정을 취하시면 괜찮아지실 것이옵니다. 약을 곧 지어 올리겠사옵니다.”

 

  어의가 목덜미와 어깻죽지에 장침을 놓으며 말했다.

 

  “됐다. 그만두거라.”

 

  “허나 전하, 얼마 전에도 현훈이 있으셨지 않사옵니까.”

 

  상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지만 왕은 손사래를 쳤다.

 

  “모두 성가시니 나가들 있어라.”

 

  왕이 또 흥분을 할까봐 어의와 상선이 얼른 물러났다.

 

  혼자 남은 왕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진 덤불처럼 복잡했다. 추국장에서 들은 말들이 귓가에서 웽웽거렸다.

 

  눈앞으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벽서의 글귀들이 오갔다. 씻고 싶어도 씻어지지 않고 떨어내고 싶어도 떨어내지지 않는 더러운 말이었다.

 

  세자빈이 난행을 저질렀다니, 여인이 여인을 사랑한다니, 절로 그렇게 되었다니. 세상 천지에 그처럼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또 있을까!

 

  어디선가 성마른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집안 단속 하나 못 하는 것이 왕이라고!

 

  아바마마였다. 늘 푸른 살기가 감돌던 선대왕의 눈빛이 눈앞을 스치며 우레 같은 음성이 머리통을 쩌렁쩌렁 울렸다.

 

  거 참 보기 좋구나. 왕이 되고 싶어 그리 나대더니 겨우 이 꼴이냐?

 

  방정맞게 끼득거리는 것은 형인 양녕이었다.

 

  선대왕의 호통 소리와 양녕의 조소 어린 웃음소리가 뒤섞이며 머리가 들끓는 듯하였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뜨거운 물을 끼얹은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숨쉬기가 벅찼다. 왕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여, 여봐라!”

 

  왕의 다급한 목소리에 상선이 뛰어 들어왔다.

 

  “전하, 어의를 다시 부르겠사옵니다!”

 

  “아니다, 황희, 황희를 들라 해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향이 들어섰다. 어깨가 축 늘어진 향을 보며 왕이 마뜩찮은 소리를 내었다.

 

  “그래, 처음으로 국문에 참례한 소감이 어떠하냐? 너를 꾸짖고 다잡는 계기가 되었더냐?”

 

  향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표정이 어찌 그러느냐? 네 이만 일로 혹여 심중에 상처라도 입은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당연히 아니어야지! 이것이 정사다. 이것이 왕의 일이다.

 

  아니, 이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참람한 일들을 홀로 부딪혀나가야 하는 것이 왕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왕의 길이란 말이다!”

 

  “명심……, 하겠사옵니다.”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왕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조아리고 앉은 향을 훑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빈궁의 일은 어찌 처결하실 작정이시옵니까?”

 

  “너는 그저 참관만 하는 것이라던 내 말을 잊었느냐.”

 

  “…….”

 

  왕의 눈에 옅은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왜, 그래도 지어미의 일이라 신경이 쓰이는 게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죄를 지었으면 응당 그에 맞는 벌을 받는 게지! 그것이 물어볼 만한 일이더냐?”

 

  머뭇거리고 있는 향을 향해 왕이 던지듯 말했다.

 

  “걱정 말거라. 내 너에겐 흠집 하나 남지 않게 처분할 것이니.”

 

  향이 변명의 말을 하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어이구, 부자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였나 봅니다.”

 

  불콰한 얼굴로 들어선 이는 양녕이었다. 왕이 고까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세자는 이만 나가보라.”

 

  향이 양녕에게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양녕이 급하게 나가는 향을 꼬나보며 투덜거렸다.

 

  “아우님, 세자 저하 운동 좀 시키십시오. 볼 때마다 피둥피둥 살이 오르는 것이 얼마 안 있어 잘생긴 얼굴이 살에 묻혀 뵈지도 않겠습니다.

 

  조만간 진양을 불러 다 같이 봉희라도 한 판 하시지요.”

 

  “어쩐 일이십니까.”

 

  “허허, 마치 오면 아니 될 곳을 온 듯이 말씀하십니다. 따지고 보면 그 자리는 원래 저의 자리가 아닙니까.”

 

  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농담입니다, 농담. 아우님을 뵌 지도 오래고 하여 간만에 내 아우님과 술이나 나눌까 하고 왔소이다. 수라간 진미가 먹고 싶기도 하고.”

 

  “오늘은 날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다음 날에 다시……,”

 

  “아우님께선 땡기지 않으면 드시지 마십시오. 저는 혼자서도 잘 먹지 않습니까.

 

  이보게, 상선, 주안상을 들이게. 내가 좋아하는 안주들로다가 한 상 그득 차려서.”

 

  양녕이 눈을 찡긋거렸다.

 

  “허나 오늘은 전하께서 성후가 편찮으셔서 술은……,”

 

  상선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왕이 성가신 듯 손을 내저었다.

 

  선대왕도 꺾지 못한 고집이었다. 한번 고집이 서면 시늉이라도 해야 성질이 풀리는 인간이었다. 되니 안 되니 해봤자 실랑이하는 시간만 늘어날 뿐, 웬만한 것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되었다. 상을 들이거라.”

 

  “하하,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은 우리 아우님뿐입니다.”

 

  상이 들어오고 연거푸 몇 잔의 술을 혼자 비운 양녕이 벌써 흥취가 돋는 듯 얼굴이 벌그죽죽했다.

 

  “기분도 좋은데 내 비파를 한번 뜯어볼까요?”

 

  상선이 얼른 비파를 대령했다. 양녕이 손가락을 과장되게 흔들어 보이더니 비파를 뜯기 시작했다.

 

  쟁쟁거리는 음률이 사정전을 가득 채웠다. 왕은 몸을 모로 튼 채 듣는 둥 마는 둥이었지만 비파를 뜯는 양녕은 한없이 진지했다.

 

  연주를 마친 양녕이 비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제법 들어줄 만합니까.”

 

  “지난번보다 나아지셨습니다.”

 

  왕의 무성의한 대답에도 양녕이 헤벌쭉 웃었다.

 

  “이게 다 스승이 훌륭하여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양녕에게 비파를 알려준 것은 왕이었다.

 

  양녕이 세자였던 시절, 선대왕은 세자가 될 수 없는 재주 많은 셋째 아들에게 온갖 악기를 들려주었다.

 

  평생 음악이나 즐기며 한갓지게 살라는 뜻에서였다.

 

  당시 대군이었던 왕은 악기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연주법을 금세 터득하였고, 그것을 세자였던 양녕에게도 가르쳐주었다.

 

  왕이 책 대신 악기를 들었던 그 시절, 형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애로웠다. 양녕은 세자가 되어 처음으로 공부에 열을 올렸고, 가끔이지만 선대왕의 칭찬을 듣기도 했었다.

 

  두 사람 사이의 평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깨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왕이 양녕 대신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때 아우님께서 그러셨지요. 음을 알면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세상의 이치를 통하게 된다고요. 현왕이 되기 위해선 음도, 예도 알아야 한다 하셨지요.”

 

  “제가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짐짓 모르는 척하는 왕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양녕이 웃었다.

 

  “돌이켜보면 나란히 앉아 비파를 뜯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만 해도 선대왕께서도 나를 그리 미워하지 않으셨지요. 물론 그때도 나보다 아우님을 훨씬 아끼셨지만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바마마께선 누구보다 형님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컸기에 더욱 혹독히 대하신 것입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 하지 않습니까.”

 

  “겸양의 말은 하실 필요 없어요. 아우님이야말로 이 나라 왕의 재목으로 손색이 없음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요. 아우님은 어려서부터 뭐든 특출나게 잘하지 않았습니까.

 

  시를 짓고 경전을 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술과 의학, 천문, 풍수지리와 예악, 지리와 약초학, 그림과 글씨, 하다못해 고자질까지도요.”

 

  왕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양녕이 자작을 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왜,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틈만 나면 내 잘못을 아바마마께 일러바친 것이 충녕 너임을.”

 

  왕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중전의 아비인 심온과 한통속이 되어 나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 또한 알고 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너는 늘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왕이 말없이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늘 나를 크게 돕기 위해 공부를 한다 했지만 너는 너의 재주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했다.

 

  내가 걱정이 되어 충고의 말을 하는 것이라 했지만 너는 늘 다른 사람이 볼 때만 골라서 충고를 하였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못난 사람인지 소문을 퍼뜨리고 망신을 주기 위해서였지.

 

  내가 폐세자가 되고 아바마마께서 너를 세자로 지목했을 때 너는 감히 그 자리를 받을 수 없다 하였다.

 

  허나 한편으로는 궁에 들어올 채비를 하느라 바빴지. 너는 나를 밀어내고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착한 아들, 착한 아우의 가면을 쓴 것일 뿐이다. 아니 그러냐?”

 

  왕이 술잔을 비우고 양녕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양녕은 왕의 시선을 맞받으며 이죽거렸다.

 

  “그리고 세자가 되고 나선 어찌 했느냐. 너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심온을 아바마마의 손을 빌어 제거하였다.

 

  아바마마께서도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지 않으냐. 금쪽같은 아들을 위해 제 손에 피 묻히길 꺼리지 않으셨으니.

 

  허기사, 아바마마의 손은 이미 핏물로 젖어있었으니 한두 목숨쯤 더 앗는다 한들 무어 차이가 있었겠느냐.”

 

  양녕이 한숨을 내쉬며 술을 마셨다.

 

  “내게도 그리 깊은 애정을 베푸셨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모르지, 내가 너 못지않은, 아니 너보다 훨씬 나은 성군이 되었을지도.”

 

  “그만하시지요. 많이 취하셨습니다.”

 

  “왜, 내 말이 듣기 싫으냐. 듣기 싫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으냐.

 

  겁 많고 위선투성이인 충녕 니가 아바마마의 칼날이 없었다면 오늘날 그 자리에 발이라도 붙이고 서 있을 수 있었겠느냐.”

 

  “상선, 형님을 모시거라.”

 

  “너는 참으로 무섭도록 치밀하고 간교한 자다! 조선의 왕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충녕 네가 현명하고 인자한 국부라 하나 나는 잘 알고 있지.

 

  충녕 너는, 나나 아바마마나 별반 다를 바 없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군 나으리, 제가 뫼시겠사옵니다.”

 

  양녕이 상선을 밀치고는 왕의 멱살을 잡을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이런 너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면 어찌 하겠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의 위선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내 자리를 돌려받겠다 나서면 어찌 하겠느냐 말이다.”

 

  왕이 차갑게 실소했다.

 

  “형님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대책 없이 무작정 지르기만 한다고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폐세자가 되신 것입니다. 저 때문이 아니라, 형님의 무능력과 부덕함으로 세자 자리를 내팽개친 것이란 말입니다!”

 

  “아니,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야! 니가 나를 매사에 폄박하고, 보란 듯이 너의 재주를 뽐내지만 않았어도, 아바마마께서 날 그리 달달 볶진 않았을 것이다.

 

  호랑이 같은 아비와 잘난 동생에 치이지만 않았어도 나도 제법 괜찮은 세자가 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네가 내게서 옥좌를 도둑질해간 것이다.”

 

  왕의 입가에 감정 없는 미소가 잡혔다.

 

  “허면 그리 해보십시오. 형님 마음대로 한번 해보시란 말입니다.

 

  그런다고 형님께서 제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양녕이 갑자기 시들해진 듯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무 소용이 없겠지. 다시 세자가 될 수도 없고, 옥좌를 빼앗을 수도 없을 것이다. 허나 말이다. 제법 재미난 얘기꺼리는 되지 않겠느냐.”

 

  “……?”

 

  “네가 다시없을 성군이라, 만백성이 격양가를 부르며 강구연월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줄 아느냐.

 

  아니,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네가 왕이 되고부터 가뭄과 홍수와 화재가 끊이지 않았지.

 

  어떤 백성들은 니가 내게서 옥좌를 빼앗았기에 하늘이 노한 것이라 여기더구나.

 

  신료들은 어떠하겠느냐. 잡학에 몰두하는 너와 세자를 두고 뒤에서 수군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느냐?

 

  내 주변에 간자 몇쯤은 박아두었을 테니 그 중에선 면종복배하여 여전히 나를 받드는 이들도 있음을 너 또한 잘 알고 있겠지.”

 

  왕의 미간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내 아무리 못나고 부족해도 이런 이들의 마음을 들쑤실 수 있진 않겠느냐.

 

  마침 빈궁도 대역의 혐의로 잡혀 들어왔다고 하니 내 말이 들어 먹힐 틈이 좀 더 넓어졌겠구나. 며느리마저 역심을 품게 한 지독한 왕이라 떠들어대면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까?”

 

  왕은 양녕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술을 따랐다. 술잔을 따르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형에게서 왕좌를 빼앗은 왕! 자신에게 그런 꼬리표가 붙어있음을 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꼬리표는 아무리 선정을 펼쳐도, 건강을 해쳐가며 정사에만 몰두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속에서부터 염오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국무도, 제멋대로인 신료들도, 늘 불평불만인 백성들도 다 신물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저 형이라는 작자를 이 자리에 끌어다 앉혀 이 모든 것들을 상대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때도 저리 입을 놀릴 수 있을지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이 손바닥으로 메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벼운 내 입 닫는 거야, 아우님에겐 일도 아니지.”

 

  “말씀하십시오.”

 

  “빈을 살리게.”

 

  뜻밖의 말에 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양녕이 어째서 빈궁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요망한 빈궁이 양녕에게까지 손을 쓴 것인가. 아니면 양녕 또한 고려의 잔당들과 연루되어 있는가.

 

  설마 그렇게까지…….

 

  왕은 속으로 고개를 젓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고려의 잔당이 아니라 지옥의 야차들과도 손을 잡을 인간이었다.

 

  “그리 보지 마십시오. 이게 다 아우님을 걱정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양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말투를 공손히 했다.

 

  “첫 번째 세자빈을 쫓아내 아비 손에 죽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번 세자빈에게까지 사약을 내리면 며느리를 두 번이나 죽이는 셈이 되는데, 백성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왕이 저 못난 걸 숨기느라 애먼 며느리들만 잡아먹는다 하지 않겠는지요.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성군으로 길이 남을 아우님의 이름에 금이 갈 일은 조금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녕이 잠자코 있는 왕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 히죽 웃고는 잔을 비웠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허면 부덕한 이 몸뚱아리를 치워드려야지요. 암요, 그렇고말고요!”

 

  문을 열고 나가려던 양녕이 깜박 잊었다는 듯 왕을 돌아보았다.

 

  “아, 빈궁과 함께 잡혀온 소쌍이란 폐족도 살리십시오.”

 

  왕이 뜨악한 얼굴로 양녕을 올려다보았다. 빈궁도 빈궁이지만 폐족은 왜 입에 올리는 것인가.

 

  “또 무슨 꿍꿍인가 하는 표정으로 좀 보지 마십시오. 아우님께서 날 그리 볼 때마다 진짜 죄인이 되는 기분입니다.”

 

  “형님께서 웬갖 불한당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은 알았어도 폐족과도 연이 닿아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불한당 중 내 친구 아닌 이가 드물긴 합니다만 그자와는 연이 닿아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럼 뭣 때문에 그 폐족까지 살리시라는 겝니까.”

 

  왕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양녕이 잠시 허공을 보다가 입을 뗐다.

 

  “나 또한 그 사람의 사랑을 지켜 내 사랑을 지켜보려는 것입니다.”

 

  뜻 모를 말을 남긴 양녕이 인사도 없이 나갔다.

 

  문이 닫히자 왕이 주안상 위에 놓여있던 잔을 집어던지려다 겨우 참았다. 왕의 악력을 이기지 못한 잔이 깨지며 사기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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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결結 2017 / 7 / 11 250 0 8434   
43 42장. 꿈은 여기까지죠 2017 / 7 / 11 240 0 5297   
42 41장. 가는 걸음걸음 붉은 꽃잎 점점이 떨어지… 2017 / 7 / 11 246 0 7140   
41 40장. 그대, 이렇게 돌아서니 2017 / 7 / 10 254 0 6921   
40 39장. 저의 마음을 여기에 두겠습니다 2017 / 7 / 10 247 0 6909   
39 38장. 그의 사랑을 지켜 나의 사랑을 2017 / 7 / 10 262 0 9344   
38 37장. 너는 나를 버릴 수 없고, 나는 너를 버릴… 2017 / 7 / 9 238 0 5709   
37 36장. 내가 아니라 너 때문에 2017 / 7 / 9 254 0 6554   
36 35장. 깊어지는 어둠 2017 / 7 / 8 264 0 6330   
35 34장. 나도 어렵고 너도 어려워라 2017 / 7 / 8 242 0 5512   
34 33장. 수십, 수백 번이라도 기꺼이 2017 / 7 / 8 229 0 6520   
33 32장. 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 2017 / 7 / 7 238 0 8483   
32 31장. 암흑의 소용돌이 2017 / 7 / 7 252 0 8165   
31 30장.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2017 / 7 / 6 253 0 7793   
30 29장. 이것이 마지막, 이렇게 마지막 2017 / 7 / 6 253 0 6452   
29 28장. 아니 된다 하여도 2017 / 7 / 5 250 0 7066   
28 27장. 아니라 해도 2017 / 7 / 5 248 0 7852   
27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2017 / 7 / 5 245 0 8017   
26 25장. 이렇게 돌아서면 2017 / 7 / 4 236 0 7564   
25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2017 / 7 / 4 284 0 8756   
24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2017 / 7 / 4 280 0 8427   
23 22장. 뜨겁고도 날카로운 첫, 2017 / 7 / 3 255 0 6587   
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4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6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2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6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3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41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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