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님, 제뉴어리는 뛰어난 아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보내셔도 됩니다."
"아직 어린데 멀리 보내는 게 걱정되는구나."
"저도 그 나이 때 유학 갔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 이곳에 두는 게 더 걱정됩니다."
"이곳에?"
"이곳은 아직 안전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죠?"
페닐 라가 된지 반년이 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반제국파가 존재했다. 그들이 부총통과 관계된 페리헬가를 노릴 가능성은 농후했다. 아버지로서도 보내는 게 낫긴 했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하마.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예. 그건 제가 신경쓰겠습니다. 아는 분이 계셔서 괜찮을 것 같네요."
제뉴어리의 입학이 결정되고나자, 그녀는 신경쓸 게 많아졌다. 입학 수속 서류와 신분증을 물론, 베니슬린 교수에게 연락해 제뉴어리를 부탁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 보였다. 남은 건 그녀의 배웅 정도였다.
"숙부님, 라리마의 상태는 어떤가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들었다. 다만, 이제 걸을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구나. 신관이 화상이나 깊은 상처같은 건 치료해줬다."
"하지만 신관이라도 정신적인 부분은 건드릴 수 없었군요."
"그래. 바로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서 무리였다. 그 고통을 견딘 것만해도 장하지. 비밀로 해두거라."
이미 나을 수 없다라고 생각해버리면 신관이라도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다. 신관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하체를 다친 라리마는 이제 걸을 수 없다. 헤일린은 생각이 깊어졌다.
# Stop being bossy?
산길을 달리던 마차가 어떤 것과 충돌했다. 마차 안에 있었던 사람은 라리마와 그 하녀까지 두명. 마부는 사고 원인을 알아보려다 실종되었다. 라리마와 하녀는 중상을 입었다. 내일까지는 도착한다고 연락해뒀으니 오겠지, 오겠지...... 라리마는 그 생각만 했다. 잠이 들고 깨어나니 고통은 덜했으나 여전히 아팠다. 저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던 하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서로의 고통을 지켜봤다. 과다출혈로 창백해지던 하녀는 결국 죽었다. 라리마는 고통보다도 공포에 떨었다. 이대로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살 거라고, 누가 이대로 죽는다고 했어? 하지만 오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백작이 미리 마중나가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라리마는 꼼짝없이 죽었을 터였다. 라리마의 소식은 빠르게 백작에게 전해졌다.
'라리마, 내 아가! 정신 좀 차려보렴!'
'라리마, 내가 꼭 살려주마. 신관을 빨리 찾아보게! 어서!'
'저래서 어디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내가 테닌 백작님이라면 절대 안해.'
'죽으면 조금 곤란하긴 하네. 저렇게 순진한 주인도 드물잖아.'
사경을 헤매는 중에도 여러 목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라리마의 머리를 지배했다.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일상 생활에 지장이 올 수 있습니다. 하체를 위주로 다치신 게 컸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신관님!'
라리마는 다시 생각을 멈추고 잠들었다. 신관이 먹인 액체는 라리마를 잠들게 했다. 처음으로 라리마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판단을 내렸다. 우리 부모님처럼, 행복한 가정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토끼같은 딸, 아들을 낳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라리마는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라리마는 회복되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회복되고 있다니."
"다행이지 않니, 헤일린?"
"오늘 널 부른 건 부탁이 있어서란다."
"부탁이요?"
"이 소식을 네가 직접 전해주었으면 하는구나."
"설마, 아직도 전하지 않으신 건가요?"
"다들 아직까지도 놀라고 있으니까. 네가 침착하게 이 소식을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왜 백작 본인이 전하지 않고 내게 부탁을 하는 거지? 헤일린은 이 약혼에 있어서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저 아드리안과 친분이 있을 뿐이었고, 아드리안과도 약혼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헤일린은 부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에 부인의 부탁을 한번 거절한 적이 있었다. 이정도는 들어줘야하지 않을까?
"코코나 부인의 부탁이면, 기꺼이."
"고맙구나."
부인은 확답을 듣고나서야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나가려는 헤일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헤일린, 관심있는 영식은 없니? 백작께선 어찌된 건지 네 약혼이나 결혼은 추진하지 않으시지만, 난 너만 관심있다면 얼마든지 널 지지해줄 생각이 있단다."
"말씀은 감사드려요, 코코나 부인."
이 나라는 아직 개인의 경력에는 관심이 없다. 헤일린은 객관적인 사실을 상기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저건 호의를 기반으로 한 말이었기 때문에, 헤일린이 감정적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
"셀리, 부총통 각하께 편지를 써야겠어. 편지와 잉크를 준비해주겠니?"
"예, 아가씨."
이젠 미리 약속을 잡아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정말로. 헤일린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사총사 모임은 그가 부총통이 된 이후로도 계속 되었지만, 그가 참석하는 건 아주 가끔이었다. 그는 유쾌하고 부드러워서 같이 있으면 즐거웠지만, 능력도 그만큼 출중했다. 편지는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이틀 후에 저녁 식사를 하자는 답장이 왔다. 헤일린은 부인의 전담 하녀를 불러 이 소식을 전했다. 하녀는 곧 그녀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이게 무엇이지?"
"마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부통총 각하를 위한 선물이니 가서 직접 풀어주면 좋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알았다."
페리헬 가가 위태롭다고 느껴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한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부인의 묘한 태도도 그렇고, 의아했으나 따지기도 그랬다. 헤일린은 부인에게 잠시나마 신세를 졌고,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부탁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거였다. 기억이 없는, 누군지도 모르는 어머니 대신이기도 했다. 근거도 없는 얄팍한 강박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셀리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제 감정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리 행동하는 것인가 고민했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셔요?"
"셀리, 난 코코나 부인을 내심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 날 챙겨준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코코나 부인께서 요구하는 거엔 마음이 좀 약해져."
"아가씨."
여기 돌아올 때만해도 정을 주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마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끔 어릴 적의 다정함이 떠올라 그녀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라리마가 세상에 나온 이후 변했다는 걸 알면서, 모질지 못한 제가 원망스러웠다. 어떠한 믿음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부인이라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굳센 신뢰가 있었다.
"셀리, 너도 같이 가야지. 너도 어서 준비해."
"예, 알겠습니다."
아드리안은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벨페르고에게 결제를 받으면서도 표정이 좋았다. 공무를 볼 때의 그는 거의 무표정이었는데, 벨페르고는 그가 살짝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아드리안이 드디어 과로사할 예정인가 고민했을 정도였다. 분명 최근 보좌관을 붙여주었던 것 같은데. 벨페르고마저 수상히 여겨 말을 삼켰으니 궁의 사람들은 오죽 하랴.
"부총통 각하께서 요즘 더 무서워지신 것 같아."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무섭다. 왜 웃으시는 거지?"
"뭐, 곧 페리헬 영애와 결혼식을 올린다니 좋으셔서 그런 거 아닐까? 그 예쁘장한 금발 아가씨 말이야. 저리 바쁘셔도 새신랑이시잖아."
"그런 거겠군."
페닐 라의 2인자, 아드리안과 페닐 왕국의 명문가 페리헬의 조합을 두고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이제 아드리안에게는 페리헬과의 혼약으로 얻을 이득이 없었다. 있다면 부총통이 페닐 라를 식민지 취급하지 않아준다는 민심 정도였다. 하지만 페닐 왕국이 '라'로 명명된 이후 대대적으로 친민 정책을 펼쳐온 덕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아드리안의 행보는 페닐 라에 온 제국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권력이 있는 곳에 대중의 시선이 가는 법, 그는 그 관심에 무덤덤했다. 그의 속은 친우도 몰랐다. 리첸은 그 꼬맹이는 제발 버리라면서 가끔 애원도 할 정도였으나, 아드리안은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사랑을 버리는 건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리첸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