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9년(을묘년, 1795).
그것은 이상한 광경이었다.
어둡고 스산한 들판 한 가운데의 다 무너진 초가집 하나.
가을과 겨울의 어디쯤엔가 위치한 바람과 교교한 달빛이 혼재된 가운데, 가냘픈 인영(人影)하나가 역사서에 기록된 적 없는 괴수(怪獸)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니, 가슴 높이에서 투박하게 자른 은빛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는 소녀는 인영(人影)이 아닌 인형(人形)이라 해도 괴리가 없을 듯 한 모습이었다.
곧게 뻗은 넉 자 길이의 외날 검을 늘어트린 채, 보는 것 만 으로도 졸도할 듯 괴이한 형상의 마수를 마주한 소녀라니.
끓는 듯한 괴성을 흘리며 과거엔 누군가의 손이었을 고깃덩이 하나를 씹어 삼킨 마수는, 시뻘겋게 수축된 동공을 굴리며 입 꼬리를 당겼다.
키만 해도 소녀의 두 배. 지저분한 회색 살갗 아래에 붉은 핏줄이 얼기설기 얽힌 꼴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괴수는 많은 것을 재지도,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산중의 호랑이가 토끼를 덮치듯 맹렬하고 패도적인 기세가 소녀의 가느다란 신형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괴수는 호랑이가 아니듯, 소녀 역시 토끼가 아니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한 걸음 물러선 소녀는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파공음을 흘려 넘기며 검을 올려 벨 뿐 이었다.
공간과 함께 휘둘러진 검 끝에 괴수의 겨드랑이가 아무 저항 없이 갈라졌다.
굵고 거대한 비명이 사위를 내리 찢었지만 소녀의 얼굴에 자리 잡은 것은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마치, 예쁘게 빚어 놓았을 뿐인 인형과 같은 얼굴은 다만 상처 입은 괴수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손톱을 피하는 와중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만 격렬하게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만이 그녀의 기민한 회피와 공격의 연쇄를 대변했다.
비명인지 포효인지 불분명한 괴수의 고함은 점점 높아져 가고, 치솟는 피분수와 흩날리는 살점이 늘어감에 따라 달마저도 붉게 시들어갔다.
“─────!”
언제까지고 이어질 듯 하던 검광과 월광의 쾌속하고 음산한 교차도, 예리한 파공음과 소름끼치는 비명의 처절한 혼재도 끝을 향해 치달았다.
둔중하게 지축을 울리며 쓰러진 거체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처참했다. 멀쩡하던 때에도 흉측하던 괴수가 무작위 적으로 뚫린 구멍과 베어진 살결 틈으로 검은 피를 게워내는 모습이라니.
“…….”
공포도, 혐오도, 심지어 승리감조차 섞이지 않은 메마른 시선으로 그 참상을 지켜보던 소녀가 뒤돌아선 때였다.
쓰러져 있던 괴수의 복부가 급속도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폭발하며 사방으로 피보라를 흩뿌렸다.
“……!”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미간만 가볍게 찌푸리며 폭심지의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눈으로 쫓기도 힘든 쾌속함을 무기로, 불쾌한 검은 피를 뒤집어쓰는 것은 면했지만 그 틈에 숨어 날아든 뼛조각은 피하지 못했다.
색감만은 어딘지 한복을 닮았지만 한복이라기엔 지나치게 짧은 치마였다. 그런 치마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에 생선의 가시 같기도 한 이물이 틀어박혔다.
소녀가 겉으로 드러낸 반응은 소리도 없이 이를 악 무는 것 뿐 이었다.
‘왼쪽 허벅지. 뼛조각.’
너무도 건조한 사고를 짧게 끝내고 손을 뻗어 뼛조각을 뽑아 버린 뒤 검을 갈무리 한 때였다.
두근!
소녀의 인식 범위와 항상 빙점(氷點)아래에서 머무는 이성을 초월해 생명체 본능의 경고가 들려왔다.
‘독……!’
다분한 위험성을 내포한 단어 하나가 소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때 이미 그녀의 무릎은 힘없이 꺾여 쓰러지고 있었다.
“하윽…….”
호흡하는데 필요한 기관들이 서서히 마비되며 보이지 않는 강철 올가미로 소녀의 목을 천천히, 그러나 빈틈없이 조여 갔다. 천천히 흐려져 눈앞에 있는 갈대의 형상조차 흐릿해져 갈 즈음, 눈에 익은 윤곽과 색감의 조합이 시야 안에 들어왔다.
“───────.”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