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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소희유희
작가 : 미루하
작품등록일 : 2017.6.24

완벽쟁이 까탈스러운 상사/덜렁거리는 평범한 여직원 부하/
둘이 함께 이계 이동하는 로맨스판타지.

 
왕국의 그녀
작성일 : 17-07-08 20:04     조회 : 290     추천 : 1     분량 : 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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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희는 고등학생 때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 단어를 외우고 씹어서 삼킨다. 현미밥이 입안에서 녹아내려 달아질 때까지 씹고, 씹고, 씹는다. 들려오는 소리를 전부 암기하듯 따라한다. 가끔 시녀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해서 시녀가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당장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길이 호의에 가득찬 것인지, 경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말실수로 손목을 잘리는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호의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실수를 언제 저지를지 모른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진작 서울대를 갔을 것을….’

 

 뒤늦은 후회는 진부해서 우스울 정도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공부를 할 수 있는지 몰랐다. 노트와 펜이 없어 전부 직접 외워야 했다. 가져다 준 책은 양피지로, 발음과 뜻이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글씨를 읽어주는 여자가 올 때까지 책을 보며 눈으로 익혔다. 그리고 읽어주는 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글씨를 외웠다.

 

 녹음기라면 자동 재생이라도 시킬 수 있을 텐데. 이 여자는 하루에 한두 시간 딱 정해진 시간에만 와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반쯤 읽어주고 만다. 현대 기술은 정말로 어학 공부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원시적인 환경 속에서 그녀는 열심히 소리와 모양을 연결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지금은 자기 이름 정도와 공작의 이름 정도는 외웠다.

 

 글자수가 너무 많았다. 한자를 연상케 할 정도로 꼬불거리는 글자들이 수없이 엉켜 있어 처음에는 어떤 것이 ‘글자’인지 자체를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옛날 이야기 같은 것을 읽어 주었는데, 왕의 이름이나 공작의 이름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 이름에는 각자 특별한 덧그림이 붙어 있었다.

 

 ‘다이어리 꾸미기로 치면 왕관 같은 건가….’

 

 그녀는 다이어리를 꾸미는 걸 좋아했다. 색색깔의 펜과 테이프를 이것저것 붙이고 조그만 그림을 그렸다. 퇴근해서 돌아와 피곤하고 우울한 날은 회색 구름을 조그맣게 그려넣었다. 새 구두를 산 날에는 조그만 빨간 구두를 출력해서 오려서 붙였다. 새로 산 핸드폰이나 구두 같은 것도 아까웠는데, 그보다 다이어리가 제일 그리웠다.

 

 그녀가 차고 있는 헐렁한 금시계에는 더이상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누군가 따로 언질을 한 듯 싶었다. 그리고 시녀들은 더이상 그녀에게 미소로 응대하지 않았다.

 

 시계 말고 다이어리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니, 하지만 시계는 그의 물건이다.

 

 소희는 조심스레 시계의 태엽을 감았다. 구형 시계라 날짜도 모른다. 대략 세 달은 훌쩍 지난 것 같다. 팀장님은 어디 있는지 아무리 물어도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최소한 양아버지, 높은 귀족처럼 보이는 맠시밀리이안-?은 알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거나. 그렇다면 그는 정말 뛰어난 연기자이리라.

 

 일단은 고급스러운 회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한두 마디로 배고프다, 어디 가고 싶다, 남자 만나고 싶다, 이렇게 하는 정도로는 소용이 없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엄청나게 구박해도 좋으니 한국어가 듣고 싶다….”

 

 모국어가 이렇게 그리울 줄은 몰랐다.

 

 보랏빛 비단 커튼이 살짝 올려졌다. 인자한 표정의 노신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벌써 이런 시간인가? 소희는 천천히 일어나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노신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있는 시간도 그리웠다. 여기서 소희는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배고파요?>

 <세르게이 !ㅈ@#%%^^>

 

 세르게이? 낯익은 이름이다. 좀처럼 사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희가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건, 게토레이하고 비슷한 어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내복의 옷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소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린이용으로 추정되는 양피지 두루마리들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시녀들이 당황해서 두루마리를 주웠다. 노신사 곁에 항상 서 있던 갑옷 입은 남자도 오늘은 둘밖에 없다. 소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여자가 읽어 주던 두루마리에서 ‘왕’을 가리키는 듯싶은 단어를 가리켰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가 두루마리를 가져왔다. 그 두루마리에는 여자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남자는 흰 옷을 입고 화려한 관을 썼으며, 여자는 검은 생머리에 붉은 옷을 입었다. 두 사람 다 목에 꽃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복색도 다르고 장식도 다르지만 무언가 낯이 익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금빛 원 형태가 무언가를 의미하는 듯 싶었다.

 

 “결혼…?”

 

 공작의 굵은 손가락이 그림 속 여자를 가리켰다. 투박하고 거친 손가락은 손톱끝도 무뎠다. 그 손가락이 다시 소희를 향했다. 소희는 입을 벌렸다.

 

 <나?>

 <그렇다. 소이는 폐하와 !@#%>

 

 소희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그녀는 손짓발짓으로 아니라는 뜻을 전달했다. 결혼은 무슨, 꽃목걸이도 사양한다. 당장 여기서 필요한 건 팀장을 찾고, 여기가 어디인지 정보를 전달하고, 같이 어떻게든 원룸 월세 방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거다. 오후 7시 전에는 절대 퇴근시켜 주지 않는 악덕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게 지금 소희가 제일 바라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비단옷도, 살살 녹는 신기한 과일도 원치 않았다. 어느 순간 이 환경이 확 뒤집혀 버릴지 모른다. 얼음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강을 건너는 것처럼 순간 순간이 긴장되어 속이 뒤집혔다. 여기 온지 세 달이 넘게 지났고, 그녀는 이미 꽤 살이 빠졌다.

 

 창백한 얼굴로 그녀는 손을 저었다.

 

 <소이는 안한다>

 

 공작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뚝 떨어졌다. 경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의 뜻인가?>

 

 소희는 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뭐더라…? 뭐였지,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소희는 남자 찾는다, 같이 온 남자 찾는다, 어디 있는지 알아요?>

 

 유리그릇이 깨지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동안 서로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데, 긴장을 풀어주듯 가정 교사가 다가왔다.

 

 <자자 공작님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는 이제 마사지를 받으러 가실 시간이세요>

 

 공작은 눈썹이 절로 일그러지며 소희와 백작부인을 노려보았다. 소희에게 이곳의 예절과 문화, 화장과 예술을 알려주러 온 백작 부인은 노련한 사교의 달인이었다. 공작은 일단 몸을 돌렸다.

 

 <나중에 이야기하지>

 

 쿠션은 푹신하고 손길은 보드랍다. 보랏빛 얇은 천 위에 벌거벗고 드러눕는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면서 다리를 모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뻔뻔하게 다리를 들이민다. 지옥철에 시달리며 몇시간씩 서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조금 걷고 약간 돌아다녔을 뿐인데 이런 마사지를 받는다니 사치스럽다.

 

 ‘강남에서 받으면 한번에 한 이삼십만원 하려나…?’

 

 전신 마사지의 시세 따위를 알리가 없다.낯선 사람이 몸을 만진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혹시 잘못해서 퇴폐업소 같은 데에 들어가게 될까봐 신경쓰이기도 했다. 사실 제일 큰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한달 월세를 한시간만에 날려 버릴 수는 없으니까 아예 알아보지도 않았다.

 

 소희는 따뜻한 손이 온몸을 어루만져주는 감각에 저절로 신음 소리를 냈다.

 

 “으아으아….”

 

 여기 와서 제일 좋은 게 그거였다. 이틀에 한 번씩 공짜로 전신 마사지 받는 거. 몸에 뭔가 보드라운 걸 발라주는데 아주 아기 피부처럼 촉촉해져가는게, 이 상태로 일년만 지나도 김태희급은 아니라도 피부가 철철 꿀이 흐르듯 좋아지겠구나 싶은게 눈에 보였다. 한장에 십몇만원씩 한다던 금가루 뿌린 팩이 이런 느낌이려나 하고 소희는 기지개를 폈다.

 

 조그만 단지를 흔들어 보다가,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아마 ‘왜 없지?’ 이런 내용인 듯 싶었다. 단지를 내려놓은 시녀가 방을 나갔다.

 

 처음으로 소희는 방안이 조금 싸늘하다고 느꼈다. 다른 시녀들과 달리 고급스럽게 옷을 입은 이 여자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같이 살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어 번 낮에만 방문했다. 아마 신분이 높은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어떻게 높은지는 알 수 없었다. 옷을 다 입은 귀족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백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소희에게 말을 걸었다.

 

 <소이님>

 <응?>

 <이것을>

 

 부드러운 비단 손수건 안에 감싸인 것은, 짧고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소희는 입을 벌렸다. 하얀 손수건을 펼치자 검은 머리카락 옆에 점점이 뿌려진 검붉은 얼룩이 선명했다.

 

 <교황 니콜라이께서는 신의 사도께서 진정한 신의 뜻대로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뭐라고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노신사가 거짓말을 했다. 자기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박팀장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사실을 숨기고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박팀장님은 자신과 달리 혼자 걸어다니다가 찬장에 머리를 부딪혀서 피가 새어나오고, 머리에 딱지 따윌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고의로 그를 해친 것이다.

 

 귀족 여자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시녀가 다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손수건을 자연스럽게 치웠고, 소희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안은 채 도로 누웠다.

 

 마사지를 받는데 근육이 점점 더 뻣뻣해졌다. 향유를 바르던 시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묵묵히 다시 마사지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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