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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평행관계
작가 : 헤르쯔
작품등록일 : 2017.6.25

특별한 능력을 가진 너, 그런 능력을 잡아먹는 나, 그런 우리가 연인.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평범한 인간인 노만, 노만의 신체조건과 그들이 가진 시간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인 에이블, 그리고 그들의 능력을 중화하는 동시에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펜들럼. 손바닥 위 문양과 멈춰있는 손목의 시간은 각 종족을 상징한다. 서로의 파장이 맞는 에이블과 펜들럼이 만나면 안정적인 'M의 관계'가 형성되며, 그들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에이블의 시간을 비정상적으로 잡아먹는 암세포와 같은 새로운 종족 말레타가 나타나게 되고, 서로의 파장이 맞아 M의 관계가 형성되어도 시간 조절이 불가능하여 결국 둘 다 사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해버린다.
말레타를 배척하는 사회로 변해버린 현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던 말레타인 겨울은 어느 날, 손목에 새겨진 숫자가 바뀌어버린 것을 보게 되는데….

 
피할 수 없는
작성일 : 17-07-07 23:17     조회 : 287     추천 : 0     분량 : 1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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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세상엔 세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 기존의 4방위에서 더욱 세분화되어 8방위(동, 서, 남, 북, 북동, 남서, 북서, 남동)를 나타내는 나침반은 파장이 맞는 자와 접촉하기 전까지는 발동하지 않으며, 검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한 나침반 속 여덟 개의 바늘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1."

 

 머리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말부터 튀어나온다. '교육'이라 부르기에도 우스울 법한 폭력의 시간이 빚어낸 일종의 반사작용이었다. 무심코 뱉은 의미심장한 숫자의 의미는 까뒤집은 왼쪽 손바닥 위에 있었다.

 

 나침반. 스치듯 보면 문신이었으나 그것은 낙인이었다. 손바닥을 꽉 매운 검붉은 나침반 속 크고 작은 여덟 개의 바늘이 움직인다.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는 실바람에 몸을 맡긴 채 좌우로 이리저리 유영한다. 개중 북동쪽을 가리키는 작은 바늘의 절반이 맹독에 감염되어 핏기 잃은 듯 새카맣게 변했다. 자로 대고 선을 긋기라도 한 것인 양 삐져나온 부분 하나 없이 정확히 반으로 나뉜 삼각형 모양의 바늘이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작은 가루들이 까맣게 타버린 바늘의 반쪽 근처를 배회한다. 쓸데없이 아름답다.

 

 정체 불명한 가루의 이름은 모른다. 그러나 반쪽이 검게 물든 바늘, 그것의 이름이 '1'임은 안다. 그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변해버린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옮겨간 시선의 끝에 또렷이 새겨진 숫자 ‘1’이 들어찬다. 평생을 옅은 흉터로만 남아있을 것 같았던 그것이, 나침반이 작동함과 동시에 선명한 혈흔으로, 아니, 조금 더 끔찍한 표현도 모자람이 없을 법한,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더럽고 탁한 색으로 뒤덮였다.

 

 "하아…."

 

 말도 안 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겨울이 탄식을 내뱉었다.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자, 말레타의 나침반에 있는 여덟 개의 바늘은 단순히 동서남북 8방위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어요. 우리 첫 시간에 배웠다, 그죠?」

 「기억 안 나요.」

 「기억 안 나는 게 자랑이다, 그죠? 동여야. 쌤이 뭐라 그랬어. ‘방향’인 동시에 ‘시간’을 의미한다 했지.」

 「말레타 관심 없어요. 다른 종족이나 배워요, 쌤.」

 「어허. 말레타 부분은 분량이 짧아서 쌤이 빨리 훑어주고 지나가는 거야. 에이블 챕터는 너희가 스스로 공부해야 해. 참고로 시험 범위 제일 많다, 그 부분. 동여는 지방방송 끄고 쌤 말에 집중합니다.」

 「치지직. 껐습니다.」

 「자,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각 바늘의 절반이 검게 변한다 했지? 어디부터 시작이라고? ‘북동쪽 작은 바늘’부터. 북쪽 큰 바늘부터 아니라고 강조했어요. 저번에 쪽지 시험 보니까 여기 많이 틀리더라. 12시 방향이라고 무조건 거기가 시작이 아니에요. 또, 흐르는 시간을 지칭하는 용어가 따로 있었지? ‘검은 시간.’ 딱 봐도 시험에 빈칸 채우기로 잘 나오겠죠, 둘 다.」

 

 학교에서 매번 세뇌하듯 머릿속에 욱여넣었던 나침반의 색 변화 과정이 이런 식으로 실전에 적용될 줄이야.

 

 「검은 시간이 나침반 한 바퀴를 다 돌면 결국 나침반 모든 바늘의 반쪽이 검게 변하겠지?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긴 바늘이 검게 변하는 데에는 바늘 하나당 이틀씩 걸린다 그랬어. 그다음 북동, 동남, 남서, 서북, 이렇게 나머지 네 방위를 가리키는 작은 바늘은 하루씩 걸려요. 쉽게 생각해. 긴 바늘은 길이가 기니까 이틀, 짧은 건 하루. 기억하셔야 합니다. 쌤이 말하는 거 다 시험에 나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수업 내용이 끊임없이, 그것도 너무나 생경한 장면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이런 상황과 조우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움직여버린 나침반. 수백 수천 번의 되풀이되는 악몽 속에서 보아온 그 방향. 너무 질리도록 봐온 탓에 실제 움직이더라도 덤덤할 것만 같았던 그것을 실제로 보고 있자니, 겨울의 온 신경이 일제히 굳어버린다. 수백 수천 번의 상상을 통한 연습 따위는 무용지물이었다. 두려움이 용솟음치듯 솟구쳐 오른다. 그것은 곧 돌부처인 양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던 그녀에게 억누를 수 없는 떨림을 선사했다. 겨울은 더러운 기분을 뿌리쳐낼 수가 없었다.

 

 “아….”

 

 애써 부정하고픈 아찔한 현실이 눈가를 짓눌러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지만, 바라본 그곳에 정적은 없다. 잘못 본 게 아니야. 정말 움직였어. 바뀌어 버렸어. 태어나 25년을 줄곧 낙인처럼 옥죄던 고요함이 이제는 진정 그녀를 떠나갔다.

 

 잘못 본 게 아니야. 꿈이 아니야. 진짜 1이라니….

 

 「고로 바늘이 가진 시간의 합은 이틀짜리 긴 바늘 네 개를 합친 8과 하루짜리 바늘 네 개를 합친 4를 더해서 총 12가 되겠죠. 열 두시간이 아니라 12일을 의미하는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지?」

 「네네.」

 「이게 끝이지?」

 「네네.」

 「나와, 동여야.」

 「왜요?」

 「'왜요’는 무슨, 빨리 나와. 나침반이 가진 시간이 총 12일이야?」

 「어…선생님 말투로 봐서는 아닐 것 같은데요.」

 「왜 아니야. 검은 시간이 다 돌아서 모든 바늘의 반쪽이 검게 변했는데. 숫자 계산도 맞았고.」

 「그럼, 맞는 것 같은데요.」

 「틀렸지. 끝 아니죠. 검은 시간이 모든 바늘을 한 번 지난 뒤에 어떻게 된다고 했어? 시계 방향으로 궤도를 한 바퀴 더 왕복한다고 그랬지. 열 두시부터 여섯 시 방향으로 하루, 다시 여섯 시부터 남은 열 두시 방향까지 또 하루 걸린다고. 그것까지 합쳐야 완전한 시간의 합, 즉, ‘클로징 데이트’가 나온다고 쌤이 열 번도 더 말했잖아. 또 까먹었네.」

 「어휴, 쌤. 너무 어려워요. 그런 걸 일일이 어떻게 다 기억합니까, 제ㄱ…악!」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간 뒤에도 여전히 불량하기만 하던 동여의 학습 태도를 꿀밤으로 응징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벽면의 커다란 스크린 화면 위로 뜬 나침반 그림. 겨울의 손바닥 위, 북동쪽 바늘 절반이 어둠에 집어삼켜진 문양과 정확히 일치하던 그 그림도 함께 생각난다.

 

 「검은 시간이 다시 왕복하면 남은 이틀 동안 나침반 모든 부분이 검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1을 지난다. 이름 모를 가루들이 조금씩 위치를 옮겨 2에 가까워진다. 지금도 시간이 지나고 있다.

 14가 되기까지 남은 숫자는 단 13.

 

 「그럼 이 사진 속 말레타에게 남은 시간은 총 며칠이야.」

 

 13일.

 

 겨울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클로징 데이트(Closing Date) - 말레타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모든 신체 기능이 영구적으로 정지되는 날. 즉, 사망일.

 

 **

 

 “언제 발견했어.”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온 영하가 겨울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지문 하나면 쉽게 열렸을 현관문을 몇 번의 오류까지 내가며 실패하더니, 결국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방법을 통해 겨우 집에 발을 디딘 그였다. 나침반이 움직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그녀의 연락을 받자마자 회사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영하는 여전히 불규칙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언제나 단정하던 정장도 뜀박질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다. 집을 나섰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겨울은 살짝 삐뚤어진 넥타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각 맞추어 타이를 고정하던 영하의 습관을 잘 알고 있어서, 아무리 다른 누가 모난 곳 없다고 말할 차림새라 하더라도 그녀만은 극도로 고조된 그의 불안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만큼은 영하가 온전하게, 또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리지 못하리라는 것까지도.

 

 차 키를 던지듯 탁자 위에 올려놓은 영하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온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이젠 별로 남지도 않은 손톱을 물어뜯는 볼품없는 꼬락서니의 겨울에게로 간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목을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강인한 발톱처럼 다급히 잡아 돌리고선 변해버린 바늘의 색과 뚜렷해진 숫자에 시선을 고정한다.

 

 "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겨울은 미약한 신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살짝 숙여 바라보니 잔뜩 힘이 들어간 영하의 팔에 군데군데 선명한 핏줄이 서 있다. 그것은 마치 침묵으로 일조하는 영하를 대신하여 그의 몸이 분출해내는 불안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런 건가. 겨울은 영하의 손아귀에 붙잡힌 제 손목이 유난히도 가련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다. 가련하다기보다는 처량함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예 생기 잃어 파리해진 이파리처럼 바들바들 떨린다. 이 안쓰러운 떨림이 겨울 자신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제 손목을 꽉 쥔 영하 때문인지 겨울은 분간할 수가 없다.

 

 영하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이내 줄기를 이루어 관자놀이 위를, 그리고 그의 두껍고 진한 눈썹 위를 타고 내려왔다.

 

 “언제 발견했냐고.”

 

 영하가 조금 전보다 더 격양된 목소리로 심문하듯 되물었다. 평소 때와는 180도 다른 영하의 저돌적이고 다급한 모습에 겨울은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기까지 했다.

 

 “과일 좀 사러, 요 앞 마트에 들렸다가….”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흐릿한 잔상이 있었다. 널따란 캔버스 위에서 바래져 가는 오래된 그림처럼, 희미하게 남은 기억이 잡아낸 단서.

 

 「…….」

 

 가려진 모자 아래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던 눈빛만은 선명히 떠오른다. 그 남자다. 필시 그 사람이 분명했다. 신체적 접촉이 있었던 사람이라곤 오전에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부딪쳤던 캡 모자 쓴 남자가 다였다. 오자마자 깜빡하고 손목에 뿌리지 않은 스프레이를 찾으려다 발견했으니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

 

 그 사람은 알고 있었어. 내가 그와 연결되리라는 것을.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접촉한 순간 파장이 들어맞는 M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던 걸까. 에이블이라서 가능했던 건가? 나 같이 저주받은 말레타 족속이 아니라, 그 위대하신 에이블이라서? 아닌데. 그 사람 분명,

 

 울고 있었는데….

 

 나와 부딪쳤다가 멀어지면 자신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마음 졸여야 하는 건 똑같을 텐데, 왜. 아, 내가 말레타가 아니라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펜들럼이라도 된 줄 알았던 건가? 이제는 사라져서 흔적조차 찾을 수도 없다는 그 펜들럼?

 

 겨울의 의문이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커져간다.

 

 뚜렷하게 표시된 숫자가 너무도 낯선 나머지 이제는 입술마저 제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이게 정말 현실이 맞기는 한 걸까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나침반은 계속해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흔들리는 손목 언저리에 표시된 1은 그대로였다. 그것은 전혀 떨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일부였음에도 겨울이 평생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지독스러운 냉정함이었다.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못할 제 부정이었다.

 

 내일이면 하나가 또 늘겠지.

 

 우습게도 겨울은 눈에 채 익기도 전에 사라져버릴 1에 벌써 미련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시간을 조금 더 잃고 생겨날 2을 붙잡을 새도 없이 그다음 숫자가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잔인한 숫자놀음으로 목숨 줄을 옭아매어 오다, 그렇게 미련 없이 자신과의 놀이를 끝내겠지.

 

 "나 에이블 자치구역 근처에는 발도 디딘 적 없는데, 왜…."

 

 두려웠다. 살고 싶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몸뚱어리뿐인 하찮은 존재였으나 붙들고 싶었다.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하고 약아빠진 존재에 불과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역구 말레타 집중 감시 기간 때문에 도망치듯 나와버린 일자리, 고작 동네 개인 마트의 물건 재고 따위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였으나 그마저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얻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뛰쳐나왔다는 허무함에 미련 없이 그어버린 손목을, 아니, 단순한 허무함이라기보다는 여태껏 눌러온 겨울의 모든 억하심정이 담긴 마지막 발버둥에 가까웠다. 그런 징글징글한 억울함이 담긴 손목을, 이제는 정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보물처럼 감싸 쥐고 있으니….

 

 차라리 14를 찍고 빨리 죽어버렸으면 했던 과거의 수없이 많은 제 자신이 한심해지기만 했다.

 

 “영아, 나 이제 죽…."

 

 죽는다는 말이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체한 것처럼 속을 꽉 틀어막는 거북한 느낌에 숨을 꾹 참았더니 영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편의점이랑 그 근방 CCTV 조회해서 확인해 볼게. 인상착의랑 시간대만 대충 알려줘.”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달팽이 기어가듯 느릿느릿 꺼낸 말이었는데도 자꾸만 그것이 입안에서 헛돈다. 허나 의미 없이 똑같은 단어만 내뱉는다고 해도 지금 상태로는 무슨 말이든 지껄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겨울은 말하는 방법마저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인상착의? 시간? 지금 내가 편의점에 갔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냥 온통 숫자뿐이었다. 1. 그것도 움직이는 1이라니. 내일이면 2잖아. 벌써? 미친 것 같아. 14일은 너무 짧잖아. 아무것도 와 닿지 않다가 갑자기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이 이리도 개 같을 수가 없다. 진짜 개 같아.

 

 "검정, 검정이었나? 아니다, 네이빈가? 어두운 모자를 썼고…, 그리고, 키가 크고…그리고 또, 어…또."

 "겨울아."

 "잠시만, 영아. 또…아씨, 또 뭐지? 뭐였지? 아, 시간은, 아마…아마도 오전인데."

 "……."

 "영아. 영하야. 어떡하지? 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천천히 생각하고 말해도 돼.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해. 그냥 생각하지 말자, 겨울아."

 

 이성을 되찾은 영하의 차분한 목소리를 따라 겨울은 천천히 생각했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을 점령한 막연한 두려움이 또다시 아찔한 어지럼을 몰고 온다. 이제는 눈을 감는 것마저도 무서웠다. 감으면, 다시 뜰 수 있을까? 다시 뜨면, 살아갈 수나 있을까?

 

 "나 이렇게 죽는 거야?"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

 "기억이 안 나. 영아, 나 죽어? 진짜 이대로 죽는 거야?"

 "겨울아."

 "어차피 M을 만난 이상 내가 살 길은 없는 거잖아. 나는 펜들럼이 아니니까 파장 조절 못 할 거잖아. 나 말레타잖아, 영하야. 나뿐만이 아니라 상대 M 생명까지 긁어먹는 빌어 처먹을 암세포 덩어리밖에 안 되잖아. 나 그러면, 나 죽는 거지? 어? 어차피 에이블을 만나서 붙어있든 떨어져 있든 죽는다는 소리 아니야."

 "겨울아, 일단 진정하고."

 "진정할 겨를이 어디 있어, 나한테!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날뛰어도 나는! 내 시간은…!!”

 “…….”

 “안 멈출 거잖아."

 

 살고 싶다는 본능이 이성을 앞질러도 너무 앞질렀다. 이제는 제가 말을 내뱉고 있는 게 맞기나 한 건지 의심이 갔다. 겨울은 그저 숫자,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이 빌어먹을 숫자만 멍하니 바라보며 쓸데없이 올라가는 몸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나 잡히기 싫은데…, 그냥…지금 죽어버릴까?”

 "한겨울!!"

 

 영하가 소리쳤다. 그것도 말문이 막힐 정도로 크게. 단 한 번도 겨울에게 언성을 높여본 적 없던 영하가 조금 전 그녀의 손목을 잡았을 때보다 더 강한 힘으로 양쪽 어깨를 붙잡으며 제 이름을 불렀다.

 

 새삼 겁이 났다. 영하 목소리가 이렇게나 낮고 무서웠나? 겨울은 잠시나마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이 알던 영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영하라기보다는 영하의 가죽을 쓴 공포 같았다. 밤마다 계속되던 악몽이 현실의 경계를 넘어온다. 발끝부터 자신을 집어삼키던 새까만 파도가 보인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영하가 그렇게 보였다.

 

 높고 모난 부분 없이 예쁘게 뻗어 언제나 칭찬을 마지않았던 콧대마저도 지금의 겨울에게는 자신을 찌를 창의 촉처럼 무섭게 보이기만 했다. 얇은 속 쌍꺼풀이 그려진 두 눈마저 매섭다. 새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흩뿌려 탄생한 수채화처럼 부드럽고 유려한 인상도 지금만큼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온통 날카로운 가시투성이다. 왜 안 늙느냐고, 고등학생 때부터 항상 똑같은 얼굴이라고 타박을 주던 그의 앳된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세월마저 느꼈다. 자신에게 언제나 부드러운 소년이었던 영하가 순식간에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어버린 듯했다.

 

 그러고 보니 소리쳐 부른 이름에 성까지 붙어있다. 언제나 '겨울아.', 아니면 이따금 제 이름에서 따온 별명으로 '동(冬)아'라고 불러주지도 않았다. 예전에 손목을 그었다가 영하에게 크게 혼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겨울은 자신이 이렇게나 빨리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인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영하의 단 한 마디에 금세 눈동자 위로 차오른 눈물이 새벽, 어느 이름 모를 풀잎 위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처럼 톡 하고 떨어졌다. 쉬이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나약함이 응어리져 겨울의 볼 위를 타고 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하의 재촉에 그제야 긴장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레 눈물 흘린 모습에 당황한 영하가 자신이 저지른 짓에 실망스러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옭아매듯 강한 힘에 짓눌린 어깨가 점점 풀린다.

 

 "아…."

 "……."

 "미안. 미안해, 겨울아."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영하의 눈에 묻어난다. 여러 차례, 그것도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한다. 그래도 그것도 잠시였다. 그가 동글동글한 물방울을 이루어 뚝뚝 떨어지는 겨울의 눈물을 엄지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눈가에 닿는 영하의 손길이 한없이 부드럽다가도 여전히 차갑다. 삭막한 바깥 공기가 여태껏 그의 손에 묻어있던 것뿐이라고, 겨울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춘 영하가 이제야 겨울을 올려다본다. 영하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차자마자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눈물에 다양한 이유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 쉬이 억누를 수가 없다. 눈을 맞추던 영하가 다시 겨울이 알던 영하로 돌아와서 그랬고, 달래주기보다는 밀어붙이던 영하의 행동이 서러워 그랬고, 눈물로 번져 흐릿해진 눈으로도 여전히 뚜렷하게 보이던, 손목에 선명하게 새겨진 '1'이 야속해서 그랬다. 그래서 울었다.

 

 숫자가 겨울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말레타, 말레타. 저주받은 시계추가 드디어 힘차게 움직이네. 우리 함께 흘러가자. 죽음을 향해 나아가자.'

 

 말레타는 겨울이었다. 저주받은 족속. 인간을 초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에이블로도 모자라 평범한 종족인 노만에게마저 핍박받아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린 펜들럼보다 못한 존재. 자신이 펜들럼이었다면, 적어도 짝인 에이블과 제 목숨줄만큼은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전에 자신도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겨울은 그들과 함께 사라지지 못한 채 죽음의 기로에 땅을 파고 숨어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이었다. 떠나가는 철새 떼를 쫓아가지 못해 홀로 남아버린 외로움. 손목에 낙인처럼 찍힌 '1'이 바로 그 상징이었다.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 중 파장이 맞는 M과 접촉하여 연결되었다가 멀어질 때, 말레타와 에이블의 시간이 움직인다. 일정 선에서 성장이 멈춘 그들이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늙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또한, 말레타와 에이블은 노만보다 그 수가 훨씬 적어 희귀하다. 그 두 가지만은 추앙받는 에이블과 천대받는 말레타를 관통하는 공통된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발달한 신체적 능력도,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감각도, 늙지도, 쉽게 죽지도 않는 불멸에 가까운 몸을 가진 에이블이 걸어 다니는 암세포 덩어리인 말레타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유한'이라 이름 지어진 불행의 출발선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늙지 않는 건 말레타도 매한가지인데, 불행은 오로지 에이블만이 손에 쥘 수 있는 권한이었다. 말레타는 불행한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존재였다.

 

 대다수의 에이블로 이루어진 정부는 물론이고 협회와 노만마저도 신에 가까운 에이블을 찬양하다 못해 떠받든다. 말레타와 반대로 숫자 '14'를 새긴 채 태어나는 에이블, 그리고 손바닥에 들어찬 해와 그 안에 자리 잡은 초승달.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의 권위와 위상을 나타내는 힘의 표시였다. 지금은 몇 남지 않은 초대 에이블 중 최초로 자신의 M을 만나 14가 뚜렷해진 날을 시간이 탄생한 날이라고 정의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매월 14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기까지 했으니…. 시계도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그만큼 에이블은 시대를 넘나들고 세상의 중심이 된 족속이었다.

 

 고로 그런 신성한 존재인 에이블의 숫자를 움직여 죽음으로 이끄는 말레타를, 마치 바퀴벌레 박멸하듯 없애려는 자들이 무성한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겨울은 생각한다. 나는 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1'에서 시작해야 했으며, 왜 숭배받는 에이블이 지닌 '14'의 행운을 얻지 못한 채 그들을 피해 살아야만 했는가? 차라리 영하처럼 평범한 노만이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이 거지같은 '1'이 '14'을 만나 움직이지 않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펜들럼이기라도 했다면, 기껏 고정시킨 숫자 하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1'은 '14'이라 이름 지어진 죽음으로, '14'는 '1'의 나락으로 빠뜨려버리는 덜 떨어진 말레타가 아니기만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내 인생이 이 정도로 불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이블의 능력을 빼앗기 싫다. 빼앗고 싶은 마음 역시 추호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빼앗는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가지질 못하니까. 말레타는 그저 에이블의 생명을 갉아먹는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것이 조금 더 나아진 시력이든 더 먼 곳의 소리를 듣는 청력이든, 더 강해진 힘이든…. 어차피 얻을 수도, 얻어 봤자 말레타의 위치에서는 별 도움도 안 되는 그딴 능력 같은 거 다 필요 없으니 그저 살게만 해달라 빌고 싶다. 파장이 맞는 에이블과 부딪치지만 않았어도 영원히 살 수 있었다. 솔직히 영원까지 살 욕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죽기도 싫었다. 그저 지금 드는 생각은 하나다.

 

 "살고 싶어."

 "…겨울아."

 "나 살고 싶어, 영하야. 이대로 죽으면 나 억울해서 어떡하지?"

 

 협회 측에는 이미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에이블의 상태를 알았을 것이다. 분명 신호가 갔을 것이다. 그들 몸에 이식된 칩이 절대 오류를 낼 리가 없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실험체로 전락하거나 죽어 나가기까지 한 수십 명의 말레타들을 뉴스로 보았던 게 잊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남아있는 13일을 '산다'는 것 또한 기적에 가까웠다.

 

 협회가 움직일 것이다. 에이블 또한 살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1'이 새겨진 나와 달리 14에서 '13'으로 바뀌어버린 숫자를 보는 그 사람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능력이 점차 퇴화하는 그의 상태는 어떠할까? 어찌 되었든 파장이 맞는 이상 말레타와 에이블은 함께 있어야 흘러가는 숫자를 원래대로 되돌려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텐데.

 

 어느 쪽이 되었든 곧 나를 찾아내겠지. 그럼 내겐 13일마저도 바람일 뿐인 건가? 그 작은 것 하나 바라는 것도 내겐 사치인가?

 

 들키고 싶지 않다. 협회에 들킬 바에야 차라리 에이블에게 먼저 들통나는 게 낫다. 아닌가? 둘 다 도긴개긴일지도 모르겠다. M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위대한 자성효과가 장장 25년 만에 효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에이블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도, 협회의 실험도구가 되어 남은 평생을 연구실에서 고통 받고 싶지도 않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바랐던 건 그저 그거 하나였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나 큰 욕심이었나?

 

 겨울은 밀려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목 놓아 크게 울어 재꼈다. 누가 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태어나 그렇게 소리 높여 울어본 적이 없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쉴 틈 없이 우는 그녀 위로 영하의 포근함이 겹쳤다. 세게 껴안아 내가 무너지지 않게, 그렇게 영하는 겨울을 꽉 안았다. 겨울은 제 몸이 다 가려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에이블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는 허무한 착각이 일 정도로.

 

 "넌 내가 살려."

 

 살고 싶다.

 

 "반드시 살릴 거야."

 

 영하의 품이 정말 방패라도 됐던 건지 모르겠다.

 겨울은 기적적으로 12일을 더 살았다.

 

 그리고 손목의 숫자가 '13'을 가리키던 날, 검은 시간이 나침반 한 바퀴를 다 돌아 곳곳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바늘이 제 기능을 대부분 상실하고, 절반이 어둠에 먹혀버린 그 날,

 

 "네가 살아야 할 이유를 대봐."

 

 더한 기적이 그녀의 에이블을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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