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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31장. 암흑의 소용돌이
작성일 : 17-07-07 13:11     조회 : 252     추천 : 0     분량 : 8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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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국청은 의금부 마당에 마련되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황희를 비롯한 최측근 신료들만 배석한 가운데 내금위와 별운검이 사방을 둘러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월은 형틀 의자 위에 앉혀졌다. 곧이어 왕이 들어왔다. 왕이 삭풍 같은 눈빛으로 월을 노려보았다.

 

  “세자빈은 사가에 나간 엿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고하라!”

 

  월은 목을 가다듬고 생각해둔 답을 차분히 말했다.

 

  “첫째 날은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 절에 갔습니다.”

 

  절에 갔다, 는 말에 신료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세자빈이 절에 갔다? 절에 가서는 무얼 했느냐?”

 

  “기도를 올렸사옵니다.”

 

  “대관절 무슨 기도를 올렸단 말이냐?”

 

  “아비의 병환을 낫게 해 달라 빌었사옵니다. 그리고……, 회임을 하여 국통을 잇게 해 달라 빌었사옵니다.”

 

  “기특도 하구나. 허면 도곡이란 자를 만나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옵고, 그저 어찌 사는가 근황을 나누었습니다.”

 

  “근황을 나누었다? 그 근황이란 것이 모반에 관한 것은 아니더냐?”

 

  “아니옵니다. 모반을 꾀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모함이옵니다.”

 

  월이 단호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근거 없는 모함이라. 진정 그러한지 요승을 데리고 와 보거라.”

 

  벌써 도곡스님도 잡혀 오신 겐가! 두리번거리던 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령들이 도곡을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왔다. 압슬형을 당했는지 두 다리가 짓깨어졌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스님!”

 

  도곡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 와중에도 도곡은 괜찮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처참한 모습에 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요승은 말하라. 세자빈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도곡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궁에서 지내시는 것이 어떤가 여쭈었고……, 회임이 중하시다기에 기도를 올려드리겠다 하였사옵니다.”

 

  “저 요승이 아직도 거짓을 고하는구나!”

 

  “거짓이 아니옵니다.”

 

  “이래도 거짓이 아니라는 게냐!”

 

  왕이 내던진 나무토막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무토막들은 고려 왕족의 명자가 적힌 위패들이었다. 도곡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폐족들의 위폐를 안치하는 것이 곧 대역죄임을 모르는 것은 아닐 터!”

 

  “석가의 제자로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영혼이나마 위로하고자 한 것이옵니다. 대역을 도모한 것은 절대 아니옵니다. 또한 위폐를 모신 일은 빈궁 마노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사옵니다.”

 

  “여봐라, 증인을 데려오너라!”

 

  이번에는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가 끌려나왔다. 여인당에서 자리를 안내해주던 비구니였다.

 

  “네가 절에서 세자빈을 보았다지?”

 

  “그, 그러하옵니다.”

 

  “도곡과 빈궁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들었느냐?”

 

  “자세히는 듣지 못하였으나……,”

 

  비구니가 월 쪽을 흘끔거리다 월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땅으로 박았다.

 

  “나라가 바뀌어도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다, 왕실과 조정의 중신들이 엉망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사옵니다.”

 

  “세자빈이 또 무슨 이야기를 하였느냐?”

 

  “또……, 또……,”

 

  “어서 바른 대로 고하지 못할까!”

 

  왕의 불호령에 비구니가 울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빈궁 마노라께서 궐에서 지내는 것이 싫다 하셨사옵니다. 궐이 낭떠러지 같고 무간옥 같다 하셨사옵니다. 하루하루가 그저 캄캄하고 갑갑하다고……,”

 

  “신성하고 지엄한 궁을 지옥에 비교했단 말인가!”

 

  몇몇 신료들이 혀를 찼다.

 

  “빈궁, 이 비구니의 말이 사실이냐?”

 

  월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말을 해보거라. 내 앞에선 언제나 청산유수더니 어찌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 그저 뜻 없는 투정이었사옵니다.”

 

  “뜻 없는 투정이라. 하필이면 그런 투정을 폐족을 모시는 요승에게 했단 말이지. 세자빈과 도곡이 일찍부터 친했다 하던데 그것이 맞느냐?”

 

  비구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께서 빈궁 마노라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사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고 일가와도 아주 친하다고요.”

 

  “요승이 어릴 적부터 보아온 세자빈을 이용해 모반을 획책한 것이냐. 아니면 일찌감치 모반할 마음을 먹고 세자빈을 끌어들인 것이냐.”

 

  “모반이라니 당치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도곡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세자빈을 통해 궁 안의 사정과 왕실에 대해 파악하려 한 것이 아니냐?”

 

  “아니옵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거짓만 읊어대는구나. 이 요승을 끌고 가 철저히 추국하라!”

 

  도곡이 끌려가면서도 아니라고 외쳤지만 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전하, 도곡스님께서는 반역을 꾀할 분이 아니시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빈궁 너는 죄인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다른 이의 죄를 변호할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

 

  왕의 차가운 시선이 월에게 꽂혔다.

 

  “허면 빈궁은 폐족을 만난 일에 대해서는 어찌 설명하려느냐?”

 

  “폐족이라니요. 저는 폐족을 만난 일이 없사옵니다.”

 

  왕이 코웃음을 치며 사령에게 턱짓을 했다. 사령에게 끌려나오는 이를 본 월의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소, 소쌍……!”

 

  사령이 소쌍을 무릎 꿇어 앉혔다.

 

  “전하, 소쌍은 폐족이 아니옵니다! 필시 오해가……,”

 

  왕이 월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네가 말해보라. 너는 폐족이냐, 폐족이 아니냐.”

 

  소쌍이 억지로 실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폐, 폐족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소인은 일가붙이 하나 없는 천애고아로 기방에 의탁해있는 비루한 신세이옵니다.

 

  매일 기생들 뒷바라지에 허드렛일이나 하는 제가 전조의 왕족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요, 암요, 그러믄입죠.”

 

  “그래? 그러면 저고리를 벗어보거라.”

 

  “예?”

 

  “못 들었느냐? 저고리를 벗어보라지 않느냐.”

 

  소쌍이 바닥에 엎드렸다.

 

  “씻지도 못한 더럽고 거친 몸뚱아리이옵니다. 귀하신 분들 앞에 내보이기 송구스럽사옵니다.”

 

  왕이 한쪽 입술을 올리며 말했다.

 

  “네 손으로 못 하겠다면 내가 해주마. 여봐라, 저 자의 웃옷을 벗겨라!”

 

  “아, 아니 되옵니다!”

 

  월이 절규했지만 사령들은 거침없이 달려들어 소쌍의 저고리를 벗겼다. 소쌍의 필사적인 반항에도 불구하고 저고리는 사령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찢겨나가듯 벗겨졌다.

 

  “가슴팍에 폐족임을 상징하는 문신이 있다 하였……!”

 

  일순 추국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달려들었던 사령들도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저고리가 벗겨지면서 천으로 터맨 봉긋한 가슴이 문신보다 먼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다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소쌍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거 보아라. 문신이 있……지 않느냐.”

 

  왕 또한 놀란 얼굴로 의금부 도사를 보았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 저 자가 계집이었느냐!”

 

  “전하, 송구하옵니다. 저희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옵니다.”

 

  도사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왕이 기함한 표정으로 월과 소쌍을 번갈아 보았다.

 

  투서에는 폐족과 사통을 하고 모반을 도모했다고 되어 있었다. 헌데 폐족이 여인이라면 사통을 했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사통을 했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모반을 도모했다는 것 역시 무고일 수도 있었다.

 

  “냉수를, 냉수를 가져오라.”

 

  왕이 상선이 올린 냉수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 자의 옷을 도로 입혀라.”

 

  사령이 벗겨진 저고리를 들고 다가갔지만 손을 대지 못하여 머뭇거렸다. 월이 저고리를 낚아채 소쌍에게 입혔다. 그 모습을 보는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세자빈은 저 자가 폐족임을 정녕 몰랐느냐?”

 

  “몰랐사옵니다! 진정 몰랐사옵니다!”

 

  “허면 저 자를 어찌 알게 되었느냐?”

 

  월이 소쌍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쌍은 저를 구한 자이옵니다.”

 

  “너를 구했다? 누구로부터 너를 구했다는 말이냐?”

 

  월이 잠시 고민하다 결심한 듯 대답했다.

 

  “자객이, 있었사옵니다.”

 

  “자객이라? 너의 사가에 자객이 침입했단 말이냐?”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내려오는 길에 자객과 맞닥뜨렸사옵니다. 자객이 저를 공격하였고, 우연히 길을 지나던 소쌍이 저를 구해준 것이옵니다.”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정이냐?”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옵니다.”

 

  “허면 당장 궁에 알리고 도움을 청했어야지. 저 자와 사흘씩이나 산에 머문 연유가 무엇이냐?”

 

  “소쌍이 심하게 다쳐 정신을 잃은 데다 자객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섣불리 내려왔다가는 화를 당할까 저어하여 그런 것이옵니다.”

 

  “산에서 내려온 뒤에는 왜 알리지 않은 게냐?”

 

  “첫째는 심려를 끼쳐드리는 것이 송구스러워서였고, 둘째는 자객의 정체를 파악한 연후에 고하고자 했기 때문이옵니다.”

 

  “자객의 정체를 네가 어찌 파악한다는 게야?”

 

  “이것이 있사옵니다.”

 

  월이 품에서 표창을 꺼내 내밀었다. 상선이 표창을 받아 왕에게 올렸다.

 

  “흔한 표창 같은데 이것으로 어찌 자객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이냐?”

 

  “자세히 보면 갈퀴 날에 독특한 새김자국이 있사옵니다. 이 표창을 만든 이를 수소문하면 자객 또한 반드시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표창을 의금부 도사에게 던지듯 건넸다.

 

  “이런 것이야 어찌 대단한 증좌랄 수 있겠느냐. 네가 구해온 것일 수도 있지 않으냐.”

 

  “전하!”

 

  “진짜 자객의 공격을 받은 것이 맞느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내 앞에서도 거짓을 서슴없이 고하는 네가 아니냐. 멀쩡한 아비가 아프다 하고, 지난해 만든 세자의 선물을 새로 만든 척하고,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으면서 잘못했다 사죄를 하고. 거짓말이야말로 너의 특기가 아니더냐.”

 

  전하께서 그것까지 알고 계셨단 말인가! 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것만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네가 살려면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헌데, 너와 저 자 말고 자객을 본 이가 있느냐?”

 

  월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없느냐? 단 한 명도 없어? 너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여종도 보지 못한 게야?”

 

  “그 아이는 길을 찾느라……. 허나 사실이옵니다, 전하! 소첩의 말을 믿어주시옵소서.”

 

  “믿어 달라? 간특스럽게 거짓만 주워 삼기면서 믿어달라는 말이 나오느냐?

 

  이제부터라도 사실을 고해보거라. 저 자와 사흘간 무슨 짓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낱낱이 고해보란 말이다. 그걸 듣고 내 판단하겠다.”

 

  월의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또 대답을 않는구나. 네가 불리하면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저 자에게 궁 안의 사정을 전한 것이 아니냐? 나와 세자, 중전에 관해, 궁의 지리에 관해, 궁의 경비와 경호에 관해 세세히 일러바친 것 아니냔 말이다.”

 

  “아니옵니다!”

 

  “허면 무얼 했느냐? 무얼 하느라 사흘씩이나 산 속에 처박혀 있었단 말이냐?”

 

  “실은……,”

 

  월이 입을 열려는데 소쌍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제가 세자빈을 겁박하였사옵니다.”

 

  “겁박이라?”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세자빈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한몫 챙겨볼 작정으로 제가 겁박을 하였사옵니다.”

 

  “재물을 얻으려 하였다?”

 

  “폐족이긴 하나 왕족에게 청탁을 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은 떨거지이옵니다. 엄밀히 말하면 왕족이라 할 수도 없는 한미한 가문이지요.

 

  죗값을 받았는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일가붙이 하나 없이 혼자 몸이 되었사옵니다.

 

  계집의 몸으로 홀로 살기는 너무 고단하여 남장을 하였사옵니다. 계집의 몸으로 사내 옷을 걸쳐 입고, 매일같이 기생들에게 무시나 당하며 허드렛일만 하는 팔자가 너무도 힘에 겨웠사옵니다.

 

  하여 세자빈을 협박해 재물을 받아낸 뒤 먼 곳으로 떠날 작정을 한 것이옵니다.”

 

  “재물을 얻어 역모의 자금으로 쓰려 한 것은 아니고?”

 

  “역모를 꾀할 배짱도, 머리도 없는 미천한 자이옵니다.”

 

  왕이 표정 없는 눈빛으로 소쌍을 내려다보았다.

 

  “빈궁께서 기루에 들르신 것도 저의 겁박 때문이었사옵니다. 제가 재물을 내놓지 않으면 추문을 퍼뜨리겠다 하였기에 저를 설득하기 위해 기루로 오신 것이옵니다.”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전하! 소쌍의 말은 진실이 아니옵니다. 소쌍은 저를 겁박한 사실이 없사옵니다.

 

  자객이 있었사옵니다. 자객을 피하기 위해 사흘간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소쌍아,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허튼 말 하지 말거라.”

 

  월이 안타까운 눈으로 소쌍을 보았다. 하지만 소쌍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빈께서는 제가 생명을 구한 은인인지라 제 허물을 덮어주시려는 것이옵니다. 제가 겁박한 것이 맞사옵니다. 허나 역모는 정녕 아니옵니다, 절대로 아니옵니다!”

 

  왕이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어찌 함께 있었던 두 사람의 말이 다른가. 필시 거짓을 덮기 위해 수를 쓰는 게지. 허나 속이 빤히 보이는 얕은 수다.

 

  여봐라, 사흘간 저 둘의 일을 낱낱이 밝혀내도록 하라. 빈은 옥에 다시 가두어 자탄장을 쓰게 하고, 저 폐족은 바른 대로 토설할 때까지 형문을 가하라!”

 

  “전하, 전하!”

 

  왕과 신료들은 월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허면 형문이라도 제가 대신 받게 해주소서. 전하, 전하!”

 

  월의 애끓는 목소리가 빈 추국장을 가득 채웠다.

 

 

  * * *

 

 

  “세자빈과 있었던 폐족이 사내가 아니라 계집이었다고요?”

 

  권승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예. 그리고 자객이 쓴 표창을 증좌로 내놓았다 합니다.”

 

  “표창이야 만든 자의 입을 덮어버리면 그만이고……, 형문은 계속 진행 중이랍니까?”

 

  “예, 그자가 폐족임은 인정했으나 세자빈을 통해 재물을 얻으려 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합니다.”

 

  “질기기가 고래 심줄 같은 것이, 과연 폐족답습니다 그려.”

 

  권전이 진득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 정도까지 버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역모로 엮으려면 폐족이라는 것 외에 확실한 증좌나 토설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문신 외에는 알아낸 것이 없으니, 자칫 일이 꼬이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세자빈은 어찌하고 있답니까?”

 

  “세자빈은 세자빈대로 자객을 피하기 위해 산 속에 머문 것이며, 도곡이란 자가 모신 위패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 발뺌하고 있다 합니다.

 

  상대가 계집이니 사통했다는 혐의는 자연히 사라졌고, 대역죄 역시 증좌가 없어 무고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승휘.”

 

  “괜찮습니다.”

 

  뜻밖의 말에 권전이 눈을 크게 떴다.

 

  “어차피 대역죄야 세자빈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만든 미끼일 뿐입니다.”

 

  “허나 무고로 풀려난다면……,”

 

  “무고로 풀려난대도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자빈이 무고냐 아니냐보다 대역죄의 혐의를 받았다는 데 더 주목할 테니까요.

 

  대역 죄인으로 끌려갈 정도로 처신이 미덥지 못한 세자빈, 이 정도면 제가 원한 바는 반절은 이루는 것입니다.”

 

  권전은 갈수록 딸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바를 따지고 있다니, 아비인 자신조차 상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혐의가 없다면 쫓겨나지는 않을 텐데요.”

 

  “사통의 혐의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폐족이 계집인 것이 드러났는데 어찌 사통의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폐족은 겁박을 했다 하고, 세자빈은 그런 일이 없다 한다면서요? 아무리 은인을 위한다 하나, 자신을 겁박한 자를 그리 감싸고돌다니요.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겁박을 한 쪽이 오리발을 내밀어야 할 것인데, 외려 당한 쪽에서 그런 일이 없다 한다니요. 필시 둘 사이에 말 못할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어찌 여인과 여인이 사통을…….”

 

  “아버지께선 여인과 여인이, 사내와 사내가 사통하는 것이 불가하다 여기십니까.”

 

  권승휘가 어울리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전조의 왕이었던 왕송도 남색을 행했고,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화랑들 역시 남색으로 우의를 다졌다지 않습니까?

 

  사내와 사내가 가능하듯 여인과 여인도 가능한 게지요. 또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가엾은 궁인들끼리 대식을 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비밀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대식을 대역죄만큼이나 미워하시고요.”

 

  딸과 아비가 나누기에는 민망한 이야기였다. 권전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허나 세자빈과 폐족이 끝까지 아니라 버티면 어쩝니까. 그 역시 증좌가 없게 됩니다.”

 

  “증좌가 없다면 만들면 되지요.”

 

  “사통의 증좌를 무엇으로 만든단 말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증좌가 무엇입니까.”

 

  권전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권승휘만 멀뚱히 보았다.

 

  “바로 세간의 말입니다. 한 사람이 떠들면 낭설이나 열 사람이 떠들면 정설이라 믿는 것이 우매한 인간들입니다.

 

  더군다나 전하께선 백성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조선 최고의 성군이 아니십니까.”

 

  권전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히 소문을 퍼뜨려 주세요. 두 사람이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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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5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6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2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7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4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42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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