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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30장.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작성일 : 17-07-06 13:13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7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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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평소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내지 않는 중전이 발걸음을 재우쳐 걷고 있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중전이 뛰어든 곳은 왕이 있는 사정전이었다. 왕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중전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빈궁을 내사옥에 잡아 가두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앉으세요, 중전.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일단 숨부터 돌리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상선이 방석을 놓아주었다. 중전이 상선을 흘깃 보고는 마지못해 앉았다.

 

  “중전께 드릴 따순 차 한 잔 내오거라.”

 

  며느리를 잡아 가두고 차 마시게 생겼냐, 는 말이 목 끝까지 치달았지만 중전은 힘겹게 입술을 가무려 물었다. 차를 내온 상선이 물러나자마자 중전이 거푸 물었다.

 

  “진정 빈궁을 내사옥에 잡아 가두셨습니까.”

 

  “예, 그리 했습니다.”

 

  설마 했던 중전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내사옥이라면 내수사에 관련된 죄인을 잡아가두는 곳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그런 곳에 빈궁을 가두셨단 말입니까.”

 

  “허면 당장 의금옥에라도 가두었어야 하는 것입니까.”

 

  “전하, 그런 뜻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아직은 조사가 진행 중이라 내 중전에게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허면 조사도 다 끝나지 않은 일로 세자빈을 잡아들이신 것입니까.”

 

  왕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중전이 좋은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말했다.

 

  “빈궁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에게 말씀하시어 꾸짖게 하셔도 될 것을, 어찌 단박에 의금부 사령들부터 보내셨단 말씀입니까.”

 

  “그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니라 그런 게지요.”

 

  “도대체 빈궁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그것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왕이 소리를 높였다가 확 낮추었다.

 

  “무작정 흥분하실 일이 아닙니다, 중전. 나중에 사건의 선후가 밝혀지고 나면 중전도 나를 이해하실 겝니다.”

 

  “빈궁의 잘못은 저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내명부에 맡겨주시면 소첩이 잘 처리해보겠나이다.”

 

  “다른 일은 몰라도 이 일만큼은 아니 됩니다.”

 

  “소첩을 믿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중전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일에는 한없이 바르고 꼿꼿한 분이 세자빈의 일에만은 무조건 빈궁을 감싸고돌지 않습니까!”

 

  “무조건 감싸고돈 적 없사옵니다.”

 

  “듣기 싫습니다. 어려서 그렇다, 철이 없어 그렇다, 봐주는 것도 한두 번입니다. 빈궁은 그냥 여염집 여식이 아닙니다. 장차 이 나라의 안주인이 되어야 할 세자빈이란 말입니다.”

 

  “허나 전하……,”

 

  왕이 귀찮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이것은 내명부의 일이기 이전에 왕실과 조정의 일입니다. 중전께선 관여치 마세요.”

 

  “어찌 저에게 관여치 말라 하십니까. 제 아들의 일이고, 제 며느리의 일입니다.”

 

  “지금 중전께서 정사에 참견을 하시려는 겝니까!”

 

  왕의 이마에 퍼런 핏줄기가 불거졌다. 중전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면 아니 되오니까! 소첩은 이 나라의 국모이자 전하와 더불어 왕실을 이끄는 사람이옵니다. 의견을 낼 자격이 저에게도 충분히 있다 사료되옵니다!”

 

  예상치 못한 중전의 대거리에 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중전! 내 중전이 정사에 왈리왈시하는 것만은 질색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예, 알지요. 너무도 잘 알지요. 질색하시기에 평생을 입 닫고 살았습니다. 눈 닫고 입 닫고 귀 닫고 여기 놓인 이 서안처럼, 제가 깔고 앉은 방석처럼 그리 살았습니다. 그렇게 서른 해를 살았는데 이 말 한 마디도 못 하는 것입니까!”

 

  “정사에 참견하는 여인은 어마마마만으로 충분합니다. 어마마마께서 앞뒤 없이 나서신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중전 또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마마마만 아니셨어도 내 삼촌들이 그리 허무하게 가시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매섭게 퍼붓는 입화살에 중전의 고개가 숙어졌다. 잠깐의 침묵 후, 중전의 입에서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면 저의 아버지께서는 어찌 그리 가신 겝니까. 제가 정사에 나선 적도 없는데 어째서요. 어찌 그리 억울하게 가셔야 했단 말씀입니까!”

 

  왕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어섰다.

 

  “어, 어찌 그 일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입니까! 중옥의 일은 언급치 말라는 선대왕의 유언을 어기시려는 것입니까!”

 

  “허면 전하께선 원굴을 풀어달라는 제 아버님의 유지는 어찌 지키지 않으십니까.”

 

  “어허, 중전!”

 

  “저를 낳고 기르신 부모님도 똑같이 어버이라 여긴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왕이 질린 눈빛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선대왕 마마께서 이런 일이 있을까 제게 미리 경고를 하신 것이지요. 죽어서도 잊히지 않도록 뼈에, 살에 새기게 하신 것이지요. 그 가르침이 하도 크고 깊어 서른 해를 벙어리로, 귀머거리로, 뜬소경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중전의 눈에서 퍼런 불꽃이 튀었다. 왕이 어지럼증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짚고 머리를 흔들었다.

 

  “중전, 내 중전에게 처음으로 실망하였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중전이 맞는지 혼란스럽고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저는……, 소첩은……! 전하에게 평생을 실망하고 있사옵니다. 저는 늘 이렇게 비원을 담아 전하를 보고 있었사옵니다. 그 눈빛을 모른 척, 그 마음을 없는 척 보신 분은 전하시옵니다!”

 

  왕이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다는 듯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중전, 날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마세요. 분명히 경고하였습니다. 이번만큼은 내 중전이라도 참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세요.”

 

  “전하!”

 

  “상선, 얼른 중전을 뫼시거라!”

 

  상선이 난처한 기색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중전은 화살촉 같은 꼿꼿한 눈빛으로 왕을 노려보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 * *

 

 

  중전의 발길이 향한 곳은 동궁전이었다.

 

  “어마마마, 어찌 기별도 없이 납시셨사옵니까.”

 

  향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중전마마 오셨사옵니까.”

 

  함께 있던 권승휘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중전이 권승휘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승휘는 나가있거라. 내 세자와 긴히 할 말이 있다.”

 

  “무슨 일이시온지 함께 들으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저도 중전마마와 함께 있고 싶사옵니다.”

 

  권승휘가 제법 부른 배를 자랑스럽게 문지르며 웃었다.

 

  “어디 감히 승휘 따위가 내 말에 토를 다느냐! 썩 나가라니까!”

 

  평소라면 권승휘의 애교에 기뻐했을 중전이었다.

 

  “중전마마…….”

 

  권승휘가 의아하여 눈만 깜박거렸다.

 

  “나가라는 말 못 들었느냐! 나인들은 무얼 하는가, 승휘를 뫼시지 않고!”

 

  중전의 냉랭한 반응에 권승휘가 얼굴을 구기며 쫓기듯 나갔다.

 

  “어마마마, 무슨 일이 있으시옵니까.”

 

  향이 상기된 중전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세자는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중전의 목소리에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간만에 시간이 나 승휘와 태중의 아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사옵니다.”

 

  “태중의 아이?”

 

  싸한 눈길에 향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예, 요즘 부쩍 발차기가 잦아졌다 하여 태동을 짚어보고 있……,”

 

  “빈궁이 의금부에 잡혀온 것은 알고 계십니까?”

 

  향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대답했다.

 

  “예,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세자는 권승휘와 태중의 아이에 관한 정담이나 나누고 계셨습니까?”

 

  향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아바마마께서 알아서 처분하시겠다 하교하셨사옵니다. 조사가 끝나고 나면 따로 알려주시겠다……,”

 

  “그렇다고!”

 

  중전이 서안을 탕 내리쳤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지어미가 감옥에 갇혔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보아야지 않겠습니까.”

 

  “아바마마께서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빈궁을 보지 말라 하시어……,”

 

  “세자는 전하가 죽으라면 죽을 것이냐!”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중전의 호통 소리에 향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세자빈이기 이전에 세자의 아내다! 아무리 정이 없기로서니 지아비와 지어미의 연을 맺은 사이가 아니더냐. 생전 모르는 이도 곤경에 처하면 돌아보는 법인데 평생의 연을 맺은 지어미가 옥에 갇혔는데도 어찌 이리 무덤덤한 게야? 꼭 이리 매정한 것까지 전하를 닮아야 하느냐!”

 

  “어마마마…….”

 

  향이 얼이 빠진 눈으로 중전을 보았다. 중전의 눈에 빨갛게 핏줄이 돋아있었다.

 

  “전하께서 세자가 된 후 선대왕께서 내 아비와 집안을 도륙하신 것을 세자도 알 것이다. 그때 전하께서는 어찌 아들 된 도리로 감히 부왕에게 맞서겠느냐 하셨다.

 

  내 아비가 죽고, 내 어미가 노비로 쫓겨날 때도 전하는 일언반구 없으셨다. 그동안 전하께선 무얼 하신 줄 아느냐. 장서각에 파묻혀 책을 읽고, 신료들을 불러 토론을 하고, 형제들과 더불어 사냥을 다니셨다.”

 

  중전의 눈에 시퍼런 불덩이가 치솟는 듯했다.

 

  “사람들은 전하께서 지극한 효심으로 그리 하시는 거라 했다. 당신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아버지의 마음부터 헤아리는 효자라 입을 모았다.

 

  허나 그것이 정말 효심 때문이었겠느냐? 정말 효성이 지극한 효자 중의 효자라 그리 하셨겠느냐! 아니다, 아니야! 전하께선 선대왕이 외척의 가지를 미리 쳐주시는 것을 알고 나서지 않으신 게다. 옥좌의 반석을 탄탄히 하기 위해 그저 모른 척하신 게다.”

 

  “어마마마, 말씀을 듣기가 두렵사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어찌 다른 마음으로 그리 하셨겠사옵니까.”

 

  향이 바들바들 떨며 엎드렸다.

 

  “허면 내 아버님은 왜 아직도 관작이 복구되지 않았느냐? 왜 역모를 모의했다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아직도 죄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느냐? 어찌하여 내 어머니는……!”

 

  중전이 서안을 으스러지게 움켜잡았다.

 

  “아직도 관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느냐. 선대왕이 붕어하신 지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세자는 말해보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 생각하느냐! 그리도 명석하고 사리에 밝은 세자가 아니냐.”

 

  “어마마마.”

 

  “정말 모르는 게냐,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게냐!”

 

  벽력처럼 쏟아지는 일갈에 향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어, 어마마마,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내 일가가 나로 인해 풍비박산 나고, 그 와중에도 내 지아비란 이는 위선만 떠는 그 더러운 꼴을 보고도, 내 질긴 목숨 끊지 못하고 욕된 생을 살아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 세자 네가 짐작이나 하느냐!”

 

  “…….”

 

  “내 일가의 신원을 위해서다. 그것 하나만 바라고서 이 자리를 꿋꿋이 지켰느니라. 그 피눈물 나는 치욕의 세월을 견뎌온 것이 네 어미다. 헌데!”

 

  중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얹혔다.

 

  “내가 아들마저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 꼴을 보아야 하느냐. 어찌 이리 잔인한가, 어찌 이리 냉정해! 지어미가 옥에 갇혀 험한 국문을 당할 지도 모르는데 일의 곡절조차 궁금해 하지 않으니, 네가 정말 내가 낳고 기른 내 아들이 맞느냐!”

 

  중전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향을 쏘아보았다.

 

  “아들만은 달리 키우고 싶었는데, 어찌하여 너도, 전하와 하나 다르지가 않으냐. 어찌하여, 어찌하여!”

 

  중전이 가슴을 두드리며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 * *

 

 

  한편 내사옥에 나란히 앉은 월과 소쌍은 의외로 담담한 낯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서로가 있기에,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에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필시 자객을 보낸 쪽에서 날 모함한 것일 게다. 어리석은 자들이다. 모함을 하려도 그럴 듯하게 해야지. 대역죄라니,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아니냐. 너무 걱정 말거라. 증좌도 없고 결백하니 곧 풀려날 것이다.”

 

  “예…….”

 

  “헌데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월이 소쌍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갖은 고생은 다 하는구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괜히 저로 인해 오해를 사실까 걱정이옵니다.”

 

  괜찮다는 듯 웃던 월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터무니없는 누명일지라도 혐의를 밝히기 위해 국문을 받을 게다. 많이 힘들고 괴로울 것인데……. 견딜 수 있겠느냐.”

 

  “견디는 데에는 이골이 난 몸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과장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견디는 것은 자신 있었다. 부모를 잃고도 견뎠고, 절에서 궂은일은 다 하는 불목하니로 지내면서도 견뎠고, 기루에서 오입쟁이들의 온갖 추악한 행패를 보고도 견뎠다.

 

  몸 다치는 것은 마음 다치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모진 국문을 견디는 것쯤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문제는 월의 고초를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차라리 월의 고초도 제가 겪을 수 있다면. 소쌍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용한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월 역시 침착한 척했지만 내심으로는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다른 죄도 아니고 대역죄라니. 아무 증좌도, 증인도 없이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죄목이 아니었다.

 

  일을 벌인 것이 정말 권승휘가 맞다면 필시 증좌와 증인도 만들어놓았을 것이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해맑게 웃던 권승휘의 얼굴을 떠올리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이길 수 없다! 자신의 머리로는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질 수도 없었다. 져서는 아니 되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소쌍의 목숨까지 달린 일이었다.

 

  네 허튼 수작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완벽해도 그것은 만들어진 증좌와 증인이다. 분명 틈이 있을 것이다. 그 틈을 찾아내야 한다.

 

  그때 월을 부르는 옥졸의 목소리가 들렸다. 월과 소쌍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손을, 잡아주겠느냐.”

 

  월이 손을 내밀었다. 소쌍이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월의 손을 등 뒤로 끌어 조심스럽게 잡았다. 소쌍의 손 안에서 월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소쌍이 월을 달래듯 손을 꼭 쥐었다. 온기가 전해지자 두려움이 한결 가시는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 * *

 

 

  “무슨 일이냐?”

 

  침소에 들기 직전 찾아온 향을 보는 왕의 눈빛이 껄끄러웠다.

 

  “별일 아니면 내일 아침에……,”

 

  “소자도 빈궁의 국청에 참례하게 해주옵소서.”

 

  얼른 말을 뱉어놓고 향이 질끈 눈을 감았다. 곧바로 왕의 호통이 떨어질 것이었다.

 

  왕은 한없이 인자하고 너그러웠지만 가족이나 종친들이 정사에 말을 얹는 것만은 극도로 꺼려했다. 정무를 처리할 때 대소신료들의 의견을 널리 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중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자인 향조차 일정 선을 넘으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잔소리를 한바탕 들어야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정무에 참관하며 의견을 펼치기도 하지만 왕이 허락한 사안에 한한 것일 뿐, 향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상과 달리 호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던 향이 왕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국청의 일이란 자고로 불편부당, 공명정대하여야 한다.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곧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허나 너는 빈궁의 지아비가 아니냐. 아무리 정이 없었다 해도 지아비 된 자로서 어찌 치우침이 없다 하겠느냐.”

 

  “소자 아직 어리고 어리석으나 공과 사를 변별할 정도는 되옵니다.”

 

  “하기사, 너는 빈궁의 지아비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국주이니 당연히 그리 해야지.”

 

  “소자는 빈궁의 지아비인 동시에 이 나라의 세자인 것이옵니다.”

 

  왕의 숱 많은 눈썹이 꿈틀했다. 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 구절 한 구절 신중하게 덧붙였다.

 

  “빈궁을 편들거나 죄를 덜기 위해 참례코자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집안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제 자신을 꾸짖고 다잡기 위해 참례코자 하는 것이옵니다.”

 

  “왜, 중전이 세자를 책망하더냐?”

 

  “아, 아니옵니다. 진작부터 고민하고 있던 것이옵니다.”

 

  “그러냐?”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왕의 눈빛에 향이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왕이 여전히 떠름한 낯빛으로 말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내 생각해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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