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왕의 호통소리가 사정전을 뒤흔들었다. 입구에 읍하고 선 내관들의 허리가 절로 숙어졌다.
“상선, 당장 주위를 물리라!”
상선이 내관들을 사정전 마당으로 내보냈다. 내관과 궁인이 빠짐없이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왕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사가에 나가있는 세자빈이 다른 사내와 밤을 보냈다니, 게다가 그 사내가 폐족이고 두 사람이 함께 모반의 계책을 세웠다!
이, 이런 흉측한 말이 어찌 나온 것이냐!”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누군가 빈궁 마노라를 모함하기 위해 꾸며낸 투서일 수도 있사옵니다.”
“꾸며냈다 하기엔 너무 구체적이지 않은가!”
왕의 언성이 다시금 높아졌다.
“내 빈궁이 되바라진 것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난행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이냐. 도대체 어찌하여……!”
왕이 노기를 애써 누르며 어금니를 부드득 갈았다.
“나를 욕보이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내 얼굴에 먹칠을 하기 위해 작정하고 이러는 게야. 저를 미워하는 내게 앙심을 품고 일부러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전하, 투서의 내용을 확인 중에 있사옵니다. 아직 단정치는 마시옵소서.”
“서둘러라. 이는 우리 종실의 명운이 걸린 문제다.”
“말이 나지 않게 믿을 수 있는 이들을 은밀히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오래지 않아 단서를 찾아낼 것이옵니다.”
“우선 그 상천사의 요승부터 잡아들이고, 절을 샅샅이 뒤지거라! 분명 그곳에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왕이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빈궁은 당장 입궁하라 이르라!”
“일단 두고 보시지요, 전하.”
“이 사달이 났는데 어찌 두고 보라는 것이냐!”
“사람을 보내 살핀 결과, 지금 빈궁께서는 사가에 머무르고 계셨사옵니다. 몸이 편찮으신지 어젯밤 의원이 들었다고 하였사옵니다.”
“정말이냐? 빈궁이 사가에 있는 것이 확실하냐?”
“그러하옵니다. 괜히 일을 드러냈다 뜬소문이 퍼져나갈 수도 있고, 만에 하나 그 투서가 사실이라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일의 전모를 밝히는 데 더 유리하옵니다.”
“흐음.”
“어차피 내일이면 돌아오실 날이 아니옵니까. 부러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을 듯하옵니다.”
왕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 일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내 세자빈을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나를 욕보인 죄, 종실의 명예를 더럽힌 죄, 조선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죄! 반드시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야, 반드시!”
* * *
“마노라, 기운이 좀 나십니까? 일어날 수 있으시겠어요?”
월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가이가 월을 부축해 일으켰다. 뼈마디가 흐물어진 듯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서 입궁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입궁하는 날이구나…….
석가이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걸치면서 월은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감옥으로 돌아가는 것같았다.
멍하니 앉은 월의 머리를 빗겨주며 석가이가 안타깝게 물었다.
“마노라, 여즉 소쌍 악공 생각을 하셔요?”
소쌍의 이름을 듣자 목구멍 아래서 신물이 올라왔다.
제 마음속에 새겨진 소쌍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궁궐 마당에서 부딪혔을 때의 소쌍,
꽃무더기를 보여주고 아이처럼 으쓱하던 소쌍,
꽃을 보는 척 저를 흘끔거리던 소쌍,
기생의 복장을 하고 되도 않는 거문고 뜯는 시늉을 하던 소쌍,
자객 앞을 막아서던 소쌍,
그리고 뜨겁고도 뜨거웠던 그 밤의 소쌍…….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두 손으로 헤집는 듯 아리고 쓰렸다.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월은 작은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문지르며 어제의 소쌍을 떠올렸다.
어린 기생을 안고 입 꼬리를 올리던, 경멸과 위악을 함부로 쏟아내던 소쌍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과 표정을 가슴속에 단단히 새겼다. 다른 기억들은 모두 덮어버릴 만큼 크고 깊이 새겨 넣었다.
그것이 소쌍이다. 다정하고 달콤했던 모습은 그저 자신을 희롱하기 위해 뒤집어썼던 가면일 뿐이었다.
애초에 악연이었던 게다. 그를 탓할 것도 없다. 얕디얕은 수작에 넘어간 자신이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이렇게 마지막…….
겨우 이런 끝을 보려고 그리 마음을 앓았던 것인가 생각하니 실소가 났다.
“마노라, 그만 잊으셔요. 소쌍 악공이랑은 아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지독한 꿈을 꿨다, 이리 생각하셔요.”
그래,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인 지도 몰랐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그러니 절반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 책임의 몫만큼 앓고 다 지워버리는 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툴툴 털고 돌아서면 될 일이었다.
다시는 만날 일도, 떠올릴 일도 없다. 다시는 만날 일도, 떠올릴 일도, 다시는……,
“잠깐 다녀와야겠다.”
월이 벌떡 일어섰다.
“마노라, 안 돼요! 기루엔 절대 가시면 안 돼요!”
석가이가 두 팔을 벌리고 앞을 막아섰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느니라.”
“그럼 어떻게 끝내시게요? 어찌 해봤자 상처만 커지실 뿐이에요.”
“상관없다!”
매가리 하나 없던 몸피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월은 석가이를 밀치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탕탕탕, 탕탕탕!
“문 열어, 문 열라고! 당장 문 열란 말이야!”
월이 미친 듯이 향원각의 문을 잡아 흔들었다. 잠시 후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얼굴만 보일 정도로 열린 문 앞에는 천향이 서 있었다.
“귀한 분께서 기루 앞에서 소란을 부리시다니요. 추문이 날까 두렵습니다.”
“소쌍을 보러 왔다. 문을 열거라.”
“소쌍이 만나길 원치 않습니다. 그냥 돌아가시지요.”
“문을 열라 하였다. 세자빈으로서 내리는 명이다.”
월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천향이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지체 높으신 분이라 해도 기루에 드실 때에는 행수인 저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세자빈을 저희 기루 안으로 들일 수 없습니다.”
“감히 내 명을 거스를 셈이냐.”
“저희 기루와 소쌍을 지키고자 함이니 너무 서운케 여기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월이 닫히려는 문틈으로 막무가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마당으로 뛰어든 월을 옥금과 설매가 간신히 붙들었다. 월이 몸을 뒤흔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당에서 이 난리가 나는데도 소쌍은 코끝도 비치지 않았다. 월이 필사적으로 버티며 소리쳤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너를 귀찮게 하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여 묻겠느니라! 진정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냐? 그저 한순간의 희롱이었던 게야? 정말 그뿐이었느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마음 어딘가에……, 나를 아끼고 은애하는 마음이 한 자락도 없었더냐?
대답해 보거라,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해보란 말이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두 번 다시 너를 볼 수가 없단 말이다!”
소쌍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난앵과 춘섬이 눈만 빼꼼 내밀고 월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천향이 괴괴한 정적을 깨뜨렸다.
“이것이 대답이지 않겠습니까.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월의 어깨가 툭 떨어졌다. 입술 끝에 쓸쓸한 조소가 매달렸다.
“그래. 그렇구나. 너의 대답은 끝내 이것이구나.”
월을 붙들고 있던 설매와 옥금의 팔이 떨어졌다. 몸을 돌리는가 싶던 월이 소쌍의 방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너는 아니었대도, 나는……, 진심이었느니라.”
절절한 고백에 둘러선 기생들의 눈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슬이 맺혔다.
“이런 너라도 나는 고맙다 할 수밖에 없구나. 소쌍이 너를 만나 사랑을……, 알았으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이리 뜨겁고도 차갑고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것인지, 그 처음과 끝을 모두 너로 인해 알았느니라.
너와 함께한 시간들로 이 생을 견디겠지. 그것만으로도 고맙달 수밖에 없구나, 나는.”
월이 젖은 눈으로 기루를 한 바퀴 훑고 돌아섰다. 터덜터덜 몇 걸음 옮기는데 누군가 달려 나와 월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 체취와 숨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소쌍이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월의 손이 저를 끌어안은 소쌍의 손 위에 얹어졌다.
“저 역시 빈을 만나 숨을 쉬었고, 가슴이 뛰었고, 사랑을……, 알았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빈을 만나며 진심이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거짓이기를, 그저 지나가는 마음의 장난질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진심이었으니까요! 내 마음이었으니까요!”
소쌍에게서 흘러내린 눈물이 월의 가냘픈 어깨를 적셨다. 월이 천천히 돌아섰다.
“전날 보인 모습도 너의 진심이었더냐.”
소쌍이 고개를 저었다.
“두려웠습니다! 제 마음의 칼날이 나를 베고, 빈까지 벨까 두려워 거짓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월이 설운 울음을 터뜨리며 소쌍의 가슴을 때렸다.
“진심만 주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추하고 아픈 것일지라도 진심만을 건네기로 하지 않았더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빈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말로 빈의 마음을 다치게 한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소쌍이 젖은 월의 얼굴을 감싸며 이마를 맞댔다.
그때 의금부 사령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 마당을 에워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생들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소쌍과 월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대역죄인은 오라를 받으라!”
“무슨 말이냐, 대역 죄인이라니!”
월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쳤다.
“대역 죄인이라니, 내가 누군지 알고들 이러는 게냐! 당장 물러서지 못할까!”
의금부 도사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대역죄를 범한 빈궁과 소쌍을 잡아오라는 어명을 받았사옵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죄인들을 묶지 않고!”
사령들 몇이 앞으로 나섰다. 소쌍이 월을 등 뒤로 잡아끌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사령들도 육모방망이와 창을 쥐었다.
마당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서렸다.
“뭣들하고 섰느냐!”
도사의 불호령에도 사령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소쌍의 눈빛과 검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기가 눌린 것이었다.
소쌍은 형형한 눈빛으로 사령들을 노려보며 필사적으로 퇴로를 짚어보고 있었다.
혼자라면 이 정도 무리는 가뿐하게 뚫고나갔을 것이었다. 월을 데리고 빠져나가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좀 다치더라도 월만 안전하게 데리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리 하면 향원각의 기생들이 화를 당할 것이었다. 소쌍은 두려운 눈으로 떨고 있는 옥금과 설매와 난앵과 춘섬을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향도.
천향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너의 갈 길을 가라는 듯, 우리들 걱정은 말고 어서 가라는 듯 천향의 눈빛이 소쌍의 등을 떠밀었다.
월이 소쌍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작은 손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소쌍이 월의 손을 꼭 맞쥐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결정을……,
“우리가 가자꾸나. 우리 때문에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할 순 없다.”
월이 속삭였다.
“빈……!”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
월이 정말 괜찮다는 듯 손을 꼭 쥐었다. 검을 쥔 소쌍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사령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 * *
“대군!”
태길이 진양대군 유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인데 이리 부산을 떠느냐.”
책을 읽고 있던 유가 미간을 찌푸렸다.
“빈궁께서 잡혀가셨사옵니다.”
“빈궁께서 대관절 누구에게 잡혀갔단 말이냐?”
유가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며 물었다.
“의금부 사령들이었습니다.”
“그랬느냐. 그것 참 놀라운 일이로구나.”
말과는 달리 유의 얼굴엔 놀라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유는 궁 안에 심어둔 간자를 통해 월과 소쌍의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태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대군 나으리께선 알고 계셨사옵니까?”
유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홱 들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그저 활이나 쏘고 말이나 타러 다니는 한량인 내가 무얼 알겠느냐!”
“송구하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되었다. 이유야 금세 밝혀지지 않겠느냐.”
유의 음성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허면 제가 어찌 움직이면 좋을 지요.”
유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의금부에서 잡아갔다면 아바마마께서 하신 일인데 무얼 어찌 한단 말이냐! 의금부로 쳐들어가 빈궁을 빼내오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전하께서 빈궁을 부르셨다면 그럴 만한 연유가 있겠지. 그리도 사리 분별이 안 되느냐!”
“소, 송구하옵니다.”
“내 다시 부를 때까지 물러가 있거라.”
태길이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나갔다.
“세자빈이 대역 죄인이라……. 반정을 함께 도모했다 하진 않더라도 지어미를 올바로 간수하지 못한 저하의 책임도 반은 되지 않겠는가.
조선의 안녕과 평화를 그런 분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방문 밖으로 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