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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작성일 : 17-07-05 13:13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8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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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쌍아!”

 

  문간으로 터덜터덜 들어서는 소쌍을 보고 옥금이 소리쳤다. 옥금의 소리에 기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언니, 대체 어디 갔다 오신 거여요?”

 

  “말도 없이 안 들어와서 걱정했잖아요!”

 

  난앵과 춘섬이 어미 기다리던 새끼 참새들마냥 조잘거렸다.

 

  “이년아, 가면 간다고 오면 온다고 연락을 해야지. 기다리는 사람 심정은 생각 안 하냐?”

 

  설매도 퉁박을 놓았다.

 

  “좀 전에 사람이 다녀갔다. 석가이라고 했는데…….”

 

  옥금의 말에 소쌍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걸 주고 갔다. 널 보고 가겠다고 여태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야 돌아갔어.”

 

  옥금이 봉함을 건넸다. 봉투에 ‘월越’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무사히 사가로 돌아갔구나!

 

  직전까지 세상을 다 잃은 듯했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헌데 그 석가이란 이가 언니 정인이유? 생김도 그저 그렇고, 성격도 방정맞은 듯하던데. 생각보다 언니 눈이 낮아 실망이오.”

 

  춘섬의 말에 난앵이 콧방귀를 뀌었다.

 

  “으이그, 이 답답아! 그이가 어찌 언니의 정인으로 보이느냐? 그 사람은 심부름으로 온 거고, 진짜 정인은 이 편지에 적힌 월이라는 사람이겠지. 안 그러우?”

 

  “그런 거요?”

 

  춘섬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까 그 여자 옷 봤지? 우리 옷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거. 심부름꾼이 그런 옷을 입었을 정도면 그 주인은 어떻겠느냐?

 

  필시 양반집도 그냥 양반집이 아니라 엄청 지체 높은 집안일 게다.”

 

  “언니, 난앵이 말이 맞어요? 언니가 지체 높은 양반 댁 여식이랑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예요?”

 

  지체가 높은 정도가 아니라 이 나라의 세자빈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소쌍은 입만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절로 흘러나오는 미소까지는 숨기지를 못했다.

 

  “팔은 왜 그래? 다친 게야?”

 

  옥금이 치맛자락으로 터맨 어깻죽지를 그제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살짝 긁혔어. 별 거 아냐.”

 

  “으이그, 또 어떤 놈이랑 쌈이 붙은 게지. 너 그렇게 아무데서나 힘쓰고 다니다 명줄 끊긴다고 내 못이 박히게 말하지 않았냐?”

 

  설매가 혀를 끌끌 찼다.

 

  “살짝 다친 게 아닌 것같은데. 의원을 불러야겠어. 춘섬아, 얼른 가서 의원을 모셔오너라.”

 

  소쌍이 달려 나가려는 춘섬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돼. 치료 받고 왔어.”

 

  “의원한테 다녀온 게야?”

 

  “응. 대단한 명의께서 친히 약을 발라주신 덕에 거의 다 나았어. 그냥 좀 쉬면 돼.”

 

  “그래도 상처가 심한 것같은데…….”

 

  옥금이 자못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무얼 걱정이야!”

 

  어느 새 나온 천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왔다.”

 

  소쌍이 천향 쪽으로 목을 죽 빼고선 비죽이 웃었다.

 

  “너 따위가 오든 말든!”

 

  천향이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들어가 버렸다.

 

  “언니, 너 없는 며칠 동안 잠 한 숨 못 잤다. 걱정되어 그러는 거니 서운해 말어.”

 

  옥금이 작은 목소리로 귀띔했다. 소쌍이 걱정 말라는 듯 웃어보였다.

 

  “제가 천향이를 하루 이틀 보나요?”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그 속은 어찌 몰라?”

 

  설매까지 화를 버럭 내더니 역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당에 남은 기생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서로 눈을 맞추었다.

 

  “하하,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소쌍이 어색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소쌍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봉투를 뜯자 월의 것인 듯 은은한 향이 베어 나왔다.

 

  소쌍이 월을 안듯 편지를 품에 안고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엔 짤막한 시가 적혀 있었다.

 

  ‘바다 위로 떠오른 밝은 달은 이 시간 하늘 끝에도 함께 비추리라

 

  어룬 임은 긴 밤 원망하며 잠 못 들고 일어나 나를 그리워하겠지

 

  촛불 끄고 방안 가득한 달빛 즐기다가 옷마저 이슬에 촉촉이 젖어드네

 

  환한 달빛 떠다가 임께 보낼 수 없으니 다시 잠들어 꿈에서나마 만나려네’

 

  소쌍은 몇 번이나 시를 읽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빈 말이나마 다시 만나자는 말도 없었지만 구절마다 스며든 월의 마음을 올올이 느낄 수 있었다.

 

  소쌍은 편지를 다시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래, 이걸로 되었다.

 

  다시 볼 수 없어도 월이 무사하니 그걸로 족했다. 월을 데리고 간 무사가 정말 월을 도우려는 자라면 자객에 대한 걱정도 한결 덜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걱정이 말끔히 씻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자객을 막는다 해도 궁으로 들어가면 무슨 수를 써서 월을 해치려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매수해 독을 탈 수도 있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무서운 상상에 소쌍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리 고민해봤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봐도 월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소쌍이 짜증 섞인 소리를 내지르며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소쌍아, 괜찮어? 잠시 들어갈게.”

 

  문이 열리고 옥금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상처가 걱정되어 건너온 것이었다.

 

  “정말 의원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겠어?”

 

  “응, 진짜 괜찮어.”

 

  소쌍이 옥금을 안심시키려 어깨를 휘휘 돌렸다. 짜르르한 통증에 절로 신음이 나올 듯했지만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옥금이 다 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아프면 아프다고 좀 해. 맨날 강한 척, 씩씩한 척하지 말고.”

 

  “강한 척 씩씩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강하고 씩씩한 거거든?”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얼마간 조용히 앉아있던 옥금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수찬 나리한테 갔었지?”

 

  “아, 응, 그건 어떻게 알았냐?”

 

  소쌍이 당황하여 물었다.

 

  “엊그제 사람이 왔더라. 앞으로 달포마다 한 번씩 육손이가 어찌 지내는지 기별을 해주겠다고.

 

  그렇게 몰인정하게 육손일 빼앗아간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럴 린 없지 않느냐. 생활에 보태라고 쌀이랑 비단도 주고 갔다.”

 

  “…… 잘 됐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걸. 신경써줘서 고마워. 덕분에 마음이 훨씬 나아졌어.”

 

  “고맙긴. 육손이를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아무리 소쌍이어도 양반집 혈육을 마음대로 빼앗아올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강수찬은 아이의 아버지였고, 옥금 역시 바라지 않는 일일 것이었다.

 

  “아주 가끔, 이런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 수찬 나리가 오지 않으면 내 편에서 아이를 보내야 하는가 고민한 적도 있고.

 

  이리 급히 헤어져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

 

  “몇 번을 생각해도, 잘된 일이야. 천한 기생 애미 곁에서 좋을 일이 무어 있겠어.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 받고 살걸.

 

  나리 곁에서야 번듯하게 자라 과거도 치르고, 좋은 자리에 올라 어여쁜 규수도 색시로 들이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눈을 하고서 옥금이 말을 삼켰다. 말이 아니라 울음을 삼킨 것일 게다.

 

  그 애처로운 모양에 소쌍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쨌건 소쌍이 너한테 많이 미안해. 매번 받기만 하고.”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냐. 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네 일인 게지.”

 

  일없이 손가락을 방바닥에 문지르던 옥금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나도 참 웃겨.”

 

  “뭐가?”

 

  “그렇게 보고 싶고 그려했던 사람인데, 내 아들을 데려간다니까 지옥불 뒤집어쓰고 나타난 야차보다 무섭고 싫은 거 있지.”

 

  “그거야 당연하지. 어미한테 자식을 뺏는데 그게 야차가 아니고 뭐야?”

 

  “평생 기다리기만 했음 좋았을걸. 죽기 전에 꼭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는 왜 그리 했나 몰라.”

 

  옥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거 보면 하늘도 참 무심해. 다른 기도는 다 들은 척도 않더니 꼭 그런 기도만 들어주실 건 뭐야.”

 

  “너라고 이리 될 줄 알았냐. 자책할 거 하나 없어. 강수찬 그 새끼가 죽일 놈이지.”

 

  “설매 스승님 말씀이 옳았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애초부터 쳐다보지도 말았어야 해. 결국 내 고개가 이렇게 꺾이게 될걸 그땐 꿈에도 몰랐지.”

 

  “…….”

 

  “닿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손을 뻗고 또 뻗으면. 그렇게 뻗어봐야 만져지는 건 휑한 허공뿐인 걸. 아무리 노력해도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는 걸.”

 

  “후회…… 하냐, 그 자식 좋아한 거.”

 

  옥금이 고개를 저었다.

 

  “후회는 안 해. 해봤자 되돌릴 수도 없는 거고.”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 그 사람 절대 마음에 두지 않을 거야. 이루지 못할 사랑에 마음을 두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아니까.

 

  사람을 참 피 말리게 하거든. 나 내색은 안 했어도 매일매일 속이 썩어 무너지고 또 무너졌어.”

 

  “…….”

 

  “나도 나지만 그 사람도 많이 힘들었을 거야. 지금은 많이 변했다 해도 적어도 그때 그 사람은 진심이었으니까.

 

  그 진심이 변할 동안 그 사람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을 테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걸 아니까,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 사람만 원망하진 못하겠어.

 

  그래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 그 사람 정말로 안 볼 거야. 그 사람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냥 지나칠 거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좋은데도? 죽을 것 같이 아픈데도?”

 

  옥금이 아까보다 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 사람이 내가 좋아도, 안 되는 거니까. 안 되는 건 죽어도 안 되는 거야.”

 

  “그런……가?”

 

  소쌍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사람을 좋아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힘이 없어. 세상에 내놓으면 햇볕에 내놓은 음지식물처럼 금세 흐물흐물해져버리는 거야.

 

  내 것만은 아니겠지, 절대 안 그러겠지 바랐지만 사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욕심이고 자만이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데, 어떻게 나만 안 그러겠어? 내가 해탈한 부처님도 아니고.”

 

  소쌍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는 옥금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맺혔다. 옥금이 티나지 않게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내 정신 좀 봐. 아픈 사람 붙들고 말이 길었다. 얼른 쉬어라.”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되지?”

 

  소쌍이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에 문을 열던 옥금이 멈칫했다. 옥금은 시선을 앞으로 둔 채 대답했다.

 

  “그 힘을 다해서……, 마음을 접어 소쌍아. 그게 그 사람도, 너도 사는 길이야.”

 

 

  * * *

 

 

  “아이고, 시끄러워.”

 

  석가이의 코고는 소리에 월이 귀를 막았다.

 

  민씨가 궁에 돌아갈 때까지 석가이에게 월에게서 한 시도 떨어지지 말라 명하는 바람에 잠까지 같이 자게 되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놀란 민씨는 부득불 그리 하라고 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덕에 월은 삼경이 되도록 잠도 못 자고 뒤척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석가이가 아니었어도 쉬 잠이 오진 않았을 것이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자객을 보낸 것이 권승휘의 짓임을 어떻게 밝혀내야 할지에 관한 물음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수많은 생각과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소쌍이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그럴 때마다 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쌍을 떠올리면 방금 전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월이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가만히 쓸었다. 소쌍의 입술이 닿았던 입술이었다.

 

  제 몸을 쓸었다. 소쌍의 손길이 닿았던 몸이었다.

 

  소쌍의 뜨거운 입술과 부드러운 손길과 깊은 눈빛이 차례로 떠올랐다. 덥고 습한 밤인데도 온몸에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월이 고개를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검고 검은 밤하늘에 실눈썹만한 그믐달이 외로이 걸려 있었다.

 

  “소쌍…….”

 

  월은 소쌍을 보듯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소쌍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듯했다.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더라도 저 달처럼, 먼발치에서 볼 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월이 이루지 못할 바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월의 눈에 낯선 것이 잡혔다. 담장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보니 그것은 꽃이었다. 소담하게 피어난 붉은 꽃.

 

  어찌 그 꽃이 하필 담장 위에 놓여있는지 신기했다.

 

  소쌍이 자신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놓아둔 것일까.

 

  월은 새삼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위는 인기척이라고는 느낄 수 없게 고요했다.

 

  월은 그 꽃을 조심스레 집어 들고 품에 안았다.

 

 

  * * *

 

 

  “뭐라구요? 사라진 세자빈이 지금껏 그 사내와 있었다구요?”

 

  권승휘가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올렸다.

 

  “풍도를 피해 산에 숨어있었던 모양입니다.”

 

  “호오, 그래요?”

 

  권승휘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빛났다.

 

  “그럼 세자빈을 사가까지 데려다 준 이는 누구랍니까?”

 

  “그건 아직……,”

 

  “일처리를 이리 하실 겁니까, 아버지!”

 

  권승휘가 큰소리를 내었다 제풀에 놀라 입을 가렸다. 권전이 달래듯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하지만 하나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두루마리에는 ‘비의구야婢衣求也’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내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신은 글자를 파자해 원형으로 배열한 것이었습니다. 글자를 이리저리 합쳐보니 이런 구절이 되더이다.”

 

  “비의구야, 종의 옷을 어찌 구할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별다른 뜻은 없는 것 아닙니까.”

 

  권승휘가 드러내어 실망한 기색을 했다.

 

  “저 역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유교경을 읽다가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하였지 뭡니까.”

 

  “유교경이라면 석씨가 열반에 들기 전 광경을 담은 불경이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그런 잡서를 읽으신 겝니까.”

 

  권승휘가 눈썹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흠흠, 잠이 오지 않아 잠을 청할 겸 읽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요. 그 흥미로운 구절이란 게 대체 뭡니까.”

 

  권승휘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권전의 말을 재촉했다.

 

  “‘복여불복服與不服 비의구야非醫咎也’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권전이 품에서 붓말이를 꺼내 펼치고는 붓을 들어 두루마리의 여백에 글자를 써보였다.

 

  “약을 먹고 아니 먹고는 자신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의원을 탓하겠는가?”

 

  “음은 다르지만 저 비의구야라는 구절이 불경에서 짝을 이루고 있는 복여불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권승휘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 해도 별 뜻이 없긴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 복여불복 역시 음만 같은 다른 글자를 뜻한다면요?”

 

  “음만 같은 다른 글자라…….”

 

  권승휘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권승휘의 반응에 자신을 얻은 권전이 힘 있게 글씨를 써내려갔다.

 

  권전은 ‘더불어 여與’ 자를 ‘고울 여麗’ 자로 바꾸었다.

 

  “이 여 자는 고려의 려로도 쓰이지요.”

 

  “복여, 고려를 따른다? 그리고 엎드리지 않는다.”

 

  “고려를 따르면서 엎드리지 않는 대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조선……!”

 

  권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해석이 맞다면 조선에 투항하지 않은 전조의 무리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은밀히 수소문해본 결과, 일전에 왕씨들을 집단 수장시킬 때 이와 비슷한 문신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허면 그자가 고려의 폐족일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런 듯합니다.”

 

  “세자빈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려의 폐족과 함께 있었다? 그것도 사흘씩이나!”

 

  “그렇지요.”

 

  “일이 참으로 재미있게 돌아갑니다, 아버지.”

 

  권승휘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만연했다.

 

  “그자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 자라 하더이까?”

 

  “향원각이라는 기루에 기둥서방으로 있는 소쌍이라는 자라 합니다.”

 

  “향원각이요?”

 

  권승휘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시는 곳입니까.”

 

  “일전에 저하의 탄일연 때 들었던 예기들 중에 향원각에서 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전하께서 몇 번이나 칭찬을 하셨었지요.”

 

  “소쌍이란 자가 향원각에 들어온 것이 칠팔 년쯤 전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그 기생들 역시 한 패일지도 모르겠군요.”

 

  권승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궁에 들어온 것도 애초에 계획된 일일 수 있겠습니다. 궁의 내부를 파악하고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고려의 폐족들이란 틈만 있으면 쥐새끼처럼 파고드는 자들이 아닙니까.

 

  승휘, 새로운 실마리를 잡았으니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듯합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우리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권승휘가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빛냈다.

 

  “방안을 마련할 때까지 우선 풍도에게는 빈궁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지켜보라 하세요.

 

  그 답은 아마도 빈궁께서 찾아주실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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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0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3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2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5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39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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