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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작성일 : 17-07-04 13:51     조회 : 282     추천 : 0     분량 : 8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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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이른 새벽, 한기에 몸을 뒤척이던 소쌍의 눈이 번쩍 뜨였다.

 

  월이 없었다!

 

  소쌍이 얼른 일어나 동굴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

 

  월이 바위에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뭉클뭉클 피어나는 물안개와 돋을볕에 휘감긴 월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신비로웠다. 손끝을 물에 담그고, 하얀 발을 들어 물을 튀기는 월의 모습을 소쌍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 * *

 

 

  “언니, 벌써 일어나셨어요?”

 

  눈을 비비며 나오던 옥금이 천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향은 마루에 앉아 생황을 닦고 있었다.

 

  “밤을 새우신 거여요?”

 

  천향의 낯을 살피던 옥금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소쌍인……, 아직 안 들어왔지요?”

 

  천향의 얼굴에서 대답을 읽은 옥금이 말했다.

 

  “오늘은 사람을 사서 찾아보라 할게요. 아무래도 무슨 사달이 난 게 틀림없어요.”

 

  “옥금아.”

 

  “예, 언니.”

 

  “너는 무엇 때문에 사느냐.”

 

  몸을 일으키던 옥금이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저야 우리 육손이……, 때문에 살지요.”

 

  옥금의 마른 눈가에 물기가 고여 들었다. 천향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괜한 것을 물었구나.”

 

  옥금이 얼른 고개를 젓고는 애써 밝은 얼굴을 했다.

 

  “아니에요. 가만 있자, 우리 육손이하고 또 뭐가 있더라. 아, 우리 천향 언니랑 설매 스승님 때문에도 살고……,”

 

  옥금이 천향의 팔짱을 답삭 끼며 웃었다.

 

  “그리고는 거문고죠 뭐.”

 

  “거문고가 그리 좋으냐.”

 

  “예. 우리 육손이만큼 좋습니다. 육손이 없었음 어찌 살았을까 하듯이 거문고 없었음 못 살았겠다 싶은 걸요.”

 

  옥금이 마루에 기대놓은 거문고를 끌어당겨 무릎에 얹었다. 옥금의 손가락이 줄을 부드럽게 쓸자 화답하듯 뚜루둥, 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거문고를 뜯을 때만큼은 저는 노름꾼 아비에게 팔린 계집아이도, 손가락질 받는 천한 기생도, 정인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여인도 아니니까요. 거문고 앞에서만큼은 그저 옥금이니까요.

 

  거문고만은 나를 비웃지도, 천대하지도 않지요. 내 마음 속을 언니나 스승님보다 잘 아는 이가 아마 이 거문고일 겝니다.”

 

  “그럴 테지.”

 

  천향이 옥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며칠 새 옥금의 얽은 뺨엔 기미가 까뭇하게 퍼져 있었다.

 

  “헌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셔요?”

 

  “내가 이 기구한 팔자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궁금해져서.”

 

  “한동안 그런 말씀 않으시더니, 마음이 편치 않으셔요?”

 

  “기생들 마음이야 편할 날이 있더냐.”

 

  “소쌍이가 걱정되어 그러셔요? 아니면 양녕 나으리 때문에……?”

 

  “사람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우습다.”

 

  “예?”

 

  “이러다가 저렇기도 하고, 저렇다가 이러기도 한데 딱히 이유랄 게 없어. 동시에 이렇기도, 저렇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고 말이야. 꼭 처녀 치맛자락 희롱하는 봄바람 같지 않으냐.”

 

  천향이 쓸쓸한 웃음을 흘렸다.

 

  “바람은 떠나고 아니 돌아볼 뿐인데, 이깟 것에 마음 둘 필요가 무어 있겠느냐. 자고 나면 달라질 것, 돌아서면 스러질 것 따위에……. 바보처럼, 먹퉁처럼. 아니 그러냐.”

 

  이전의 옥금이라면, 그러니까 육손을 낳고 정인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옥금이었다면 아니라 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반석같이 굳은 마음이 있다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옥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반석같이 굳은 마음이 있다 한들 생이 쏟아내는 슬픔과 고통을 어찌 거두랴.

 

  변하여도, 변하지 않아도 고통스럽고 아린 것이 사랑이고 마음이었다.

 

  “소쌍인 찾아볼 것 없다. 오늘 간만에 등 내리고 너의 거문고에 맞춰 춤이나 춰야겠구나. 채비하거라.”

 

 

  * * *

 

 

  꾀꼬리가 곳구릉 곳구릉, 쓰르라미가 쓰르르 쓰르르, 바람에 나뭇잎들이 사락사락, 계곡물이 쪼로록 쪼로로록.

 

  월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었다. 산엣것들이 내는 갖은 청량한 소리가 탁한 귓속을 말끔히 씻어 내주는 듯했다.

 

  월의 발에 작고 보드라운 것이 톡 하고 와 닿았다. 탐스러운 꽃송이였다.

 

  “곱기도 해라.”

 

  월이 반가운 얼굴로 꽃송이를 집어 들었다. 붉은 꽃잎에 물구슬이 맺혀 있다 도르륵 떨어졌다. 또 발치에 톡, 이번에도 꽃송이다. 월이 두 번째 꽃송이도 집어 들어 향을 맡는다. 깊고 진한 향이 미소를 자아낸다.

 

  그런데 꽃송이가 또 한 송이, 두 송이, 점점 더 많아진다. 의아한 눈길로 고개를 돌리니 저만치 떨어진 윗목에서 꽃송이를 한 움큼 든 소쌍이 씩 웃고 있다.

 

  “상처는 좀 나아졌느냐.”

 

  월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돌팔이 의원의 솜씨가 제법 훌륭하여 많이 나아졌습니다.”

 

  소쌍이 보란 듯이 팔을 돌리다 으윽,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월이 꽃송이를 내던지고 소쌍에게 달려갔다.

 

  “상처가 깊어 그리 움직이면 아니 된다. 어디 좀 보자.”

 

  웅크리고 있던 소쌍이 손으로 물을 떠내 뿌렸다. 월이 꺄악, 하며 뒤로 물러났다. 소쌍이 작정한 듯 물을 튕겼다. 별안간 물벼락을 맞은 월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사람 잘못 건드렸느니라.”

 

  월이 첨벙거리며 물에 들어가 자리를 잡더니 두 손을 마구 휘돌렸다. 한 손만 쓸 수 있는 소쌍과 달리, 두 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월의 공격이 더 거셌다.

 

  소쌍은 순식간에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월 역시 물을 뒤집어쓰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모습을 본 두 사람은 배를 잡고 웃었다. 여름날 햇살이 계곡물 위로 부서지고, 두 사람의 웃음소리도 함께 부서졌다.

 

  월과 소쌍은 햇살이 드는 너른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따뜻한 햇살을 쬐자 몸이 조금씩 더워지며 나른해졌다. 월은 소쌍을 흘깃 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콧날이 눈에 들어왔다. 소쌍이 햇살을 기껍게 올려다보다 팔을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월이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낯선 이와 낯선 곳에 있는데도 이물감이 전혀 없었다.

 

  지난 삼짇날, 꽃을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낯선 이를 따라 가면서도 두렵고 의심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래 알았던 지기처럼 편안하고,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풍경처럼 안온했다.

 

  지금도 꼭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딱히 좋을 일도 없건만 충분했다. 몇 겹의 저고리를 덧입고도 어깨가 시리던 스산함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어도 가시지 않던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이 있다는 사실조차 사소하게 느껴졌다. 거짓말 같은 평화로움. 아니, 궁 안에서 지낸 칠 년의 시간이 거짓말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죽 이렇게 지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월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온갖 법도와 예의로 가득 찬 궁궐 생활도, 제 모든 것을 마뜩찮게 여기는 왕과 세자도, 미워하다 못해 아예 자신을 죽이려 드는 권승휘도,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한 궁인들도, 후사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도 넌덜머리가 났다.

 

  월 이외에는 다른 이름이 없었던,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될 필요가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 할 수만 있다면…….

 

  “으악!”

 

  월이 불에라도 덴 듯 튀어 올랐다. 소쌍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번엔 빈께서 저를 골탕 먹이시려는 겝니까.”

 

  “저기, 저기를 좀 보거라.”

 

  월의 목소리가 심상찮았는지 소쌍이 몸을 일으켰다. 월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는 기다란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튼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소쌍이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웃으며 뱀 쪽으로 다가섰다.

 

  “가, 가지 말거라. 물리면 어찌 하느냐.”

 

  월이 손가락으로 소쌍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쌍이 손을 잽싸게 뻗어 뱀의 대가리를 낚아챘다.

 

  “뭐하는 짓이냐!”

 

  월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앉았다.

 

  “독이 없는 착한 뱀입니다.”

 

  “착한 뱀이라니, 날 놀래켰단 말이다!”

 

  “아마 빈보다 이 뱀이 훨씬 놀랐을 겁니다. 놀래켜서 미안해, 친구.”

 

  소쌍이 보란 듯이 뱀의 머리까지 쓰다듬어주고는 가만히 놓아주었다.

 

  “으아악, 나한테, 나한테 오지 않느냐!”

 

  월이 소쌍에게 덥석 안겼다. 뱀은 혀를 낼름거리며 바위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뱀은 빈께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데요.”

 

  “저, 정말이냐?”

 

  “예. 아까 참에 벌써 제 집으로 갔습니다.”

 

  “참이지?”

 

  월이 눈만 빼꼼 내밀어 발치를 살폈다.

 

  “그렇다니까요. 뱀은 갔는데 언제까지 제게 안겨계실 작정이십니까.”

 

  소쌍이 느끼하게 웃었다. 월이 화들짝 몸을 떼어 내려는데 소쌍의 팔이 월을 붙들었다.

 

  “왜, 왜 그러느냐. 또 못된 장난을 치려는 게지.”

 

  월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소쌍의 눈빛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장난이 아니라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월과 소쌍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언가 날카롭고 찌릿한 기운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알 수 없는 전율에 숨이 턱 막혔다. 둘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소쌍의 얼굴이 월에게로 다가섰다. 조금씩, 조금씩. 두 사람의 붉은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월이 놀란 것인지 두려운 것인지 모를 눈빛으로 소쌍을 보았다. 소쌍이 월의 눈을 보다가 가만히 웃었다.

 

  “놀라게도, 두렵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쌍의 얼굴이 멀어지려는데 월이 소쌍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소쌍의 눈이 커졌다. 월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입술은 거침이 없었다.

 

  꿀을 바른 듯 달콤한 입술이었다. 소쌍이 그 입술을 두려운 듯 받아들였다. 현기증이 일며 눈앞이 어질거렸다.

 

  소쌍의 팔이 월의 허리를 세게 감았다. 월의 손이 소쌍의 등허리를 쓸었다. 마르고 단단한 몸이었다. 월의 손이 등허리에서 가슴 쪽으로 올라왔다. 소쌍이 월의 손을 잡았다.

 

  월이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떨리는 눈빛이, 싫은 거냐고, 자신이 또 희롱에 넘어간 것일 뿐이냐고 묻고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럼 무엇이냐. 다시 그 눈이 물었다.

 

  “저는……, 저는……,”

 

 

  소쌍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다. 말하거라.”

 

  소쌍이 결심한 듯 입술을 물고 대답했다.

 

  “저는, 사내가, 사내가……, 아닙니다.”

 

  소쌍이 차마 월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계곡 물소리만이 귓전을 울렸다. 무슨 말이라도, 아무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하지만 월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내 신물 같은 후회가 밀려 올라왔다. 이 여인은 이대로 돌아설 것이다. 자신을 능멸했다 화를 낼 것이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 할 것이다. 월을 안은 것이, 입을 맞추려 한 것이, 아니, 월을 만나고 알게 된 것부터가 모두 후회스러웠다.

 

  “나를……, 연모하느냐.”

 

  억겁 같은 침묵을 깬 것은 월이었다.

 

  “……?”

 

  “나를 연모하느냐 물었다.”

 

  차마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내가 어찌 감히……,

 

  “내가 싫은 것이냐.”

 

  “저, 저는……,”

 

  “나는 네가 좋다.”

 

  소쌍이 놀란 눈으로 월을 보았다.

 

  “처음 보았던 날, 너의 눈빛이, 너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이름밖에 모르는 네가 내 눈 안에 들어왔느니라. 지아비가……, 있는 몸이라 응당 쫓아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더구나. 자꾸 마음이 네게로 가서, 너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네가……,”

 

  월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내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노닐었다. 수시로 떠오르고, 그보다 자주……, 보고 싶었다.”

 

  “빈……!”

 

  소쌍이 월을 끌어안았다. 연모하는 마음에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 꼭 끌어안았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했는데 말 대신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무서운 것이냐. 아님 싫어 우는 것이냐.”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인데 무슨 의미인지 저 또한 알지 못했다. 소쌍은 그저 고개만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월이 조심스럽게 소쌍의 젖은 볼을 쓸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안아주겠느냐. 아니, 내가 너를 안아도 되겠느냐.”

 

  소쌍 또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괜…… 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하얀 손가락도, 붉은 입술도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말입니다. 무엇이라도.”

 

  월이 대답하듯 소쌍의 저고리를 벗겼다. 소쌍의 가슴을 세게 동여맨 광목천도 풀어 내렸다. 월의 손이 소쌍의 문신과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쌍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월이 제 손으로 옷을 벗었다. 소쌍이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월이 소쌍의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눈앞에 하얗고 탐스러운 연꽃이 피어난 듯했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몸이 참을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너무 귀하고 아름다워 털끝 하나 닿아선 아니 될 것같았다.

 

  그 마음을 헤아리듯 월이 소쌍의 손을 끌어 제 몸에 가져다 댔다. 소쌍의 거친 손이 머뭇거리다 떨어졌다. 월이 다시 그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제 몸 위에 놓았다. 소쌍의 손이 망설이듯, 천천히 월의 몸을 어루만졌다. 나비를 감싸 쥐듯, 꽃잎을 어루만지듯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소쌍의 손이 점점 뜨거워졌다. 불꽃을 쥔 듯 달아오른 소쌍의 손길이 월의 몸에 닿을 때마다 정말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홧홧해졌다.

 

  명치끝에서 시작된 손톱만한 불꽃은 점점 타올라 불덩어리가 되었다. 제 몸속 불덩어리가 너무도 뜨거워 살갗이 닿기만 해도 아릿한 동통이 느껴졌다. 몸살을 앓을 때처럼 온몸에 미열이 오르면서 오한이 들었다.

 

  어린 시절 따가운 뙤약볕 아래서 놀다가 벌게진 살갗이 쓸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때 같기도 하고, 지독한 열병을 호되게 앓았을 때 같기도 했다.

 

  제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월은 이를 악물었다.

 

  기이한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운데도 그 손길을 멈추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만하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될 텐데, 그저 살짝 밀어내기만 해도 될 텐데, 그 고통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고통스럽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고통의 끝, 그 끝의 끝까지 닿아보고 싶었다.

 

  문득 석가이의 말이 떠올랐다.

 

  아프기도 한데 좋기도 하고, 좋기도 한데 아프기도 하고, 아프다 좋고, 좋다가 아픈 것.

 

  그것은 선명한 고통이자 날카로운 쾌락이었다. 고통이면서 쾌락이고 쾌락이면서 고통인 것.

 

  월은 비로소 석가이의 말뜻을 알았다. 닥치면 절로 깨치게 되고, 그 전에 몸이 움직인다는 말도 옳았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을 할 여유 따위 없었다. 마음이 먼저인지, 몸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몸짓들이 제 몸에서 흘러나왔다.

 

  소쌍의 혀가 앙다문 월의 입술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참지 말라고, 겁내지 말라고 다독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월의 벌어진 입에서 누르고 눌렀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월이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괴감과 수치심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파도처럼 밀려오는 희열과 흥분이 잡다한 감정들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월의 입에서 몸과 몸이 빚어내는 소리가 거침없이 토해졌다.

 

  소쌍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소쌍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붉어졌고, 붉어진 자리에선 그의 입술만큼 붉은 꽃송이가 돋아났다. 가슴에, 허리에, 허벅지에, 종아리에― 꽃이 맺혔다.

 

  나비가 꽃을 희롱하듯 취연하게 제 몸 위를 오가는 소쌍의 입술에 꽃송이가 파르르 떨렸다. 꽃송이가 떨릴 때마다 꽃은 더욱 붉어졌다. 붉어지고, 붉어지고, 붉어지던 꽃은 끝내 꽃망울을 터뜨렸다.

 

  파핫!

 

  월의 몸이 탐스러운 꽃이 되었다. 겹겹의 꽃잎들이 바르르 떨며 제 몸을 한껏 열어젖히는 소리가 월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월의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소쌍이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제가 혹 아프게 하였습니까.”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네가 나를 만지는 것이 꼭 내 살이 아니라 마음을 만지는 것같다고, 그래서 네 손끝이 닿는 곳마다 얼어붙었던 마음들이 녹아 눈물로 흘러내리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이 앞서,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월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만 흔들었다.

 

  소쌍이 한쪽 눈썹을 실그러뜨리며 웃었다. 미안해하고 있구나. 월은 그 미소에 담긴 소쌍의 마음을 그제야 알았다. 미안할 때 저리 웃는구나. 그동안 오해했던 것이 떠올라 뒤늦게 미안해졌다.

 

  “두려우십니까.”

 

  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우신 것입니까. 손가락질 당할까봐, 꽃 같은 이름을 더럽힐까봐…….”

 

  “아니, 아니다. 내가 두려운 것은……,”

 

  월이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나를 알고 나를 보게 되면……, 그 이전의 나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이상 너를 몰랐던 나로 살 수 없기에, 두려운 것이다.”

 

  소쌍이 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깊은 물처럼 고요한 눈빛이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너를 좋아한 것이다. 내가 너를 연모하여, 그 연모의 마음이 너무 크고 깊어서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죄송하단 말은 말거라. 대신 약조를 하나 해주겠느냐.”

 

  월이 눈물을 닦고 소쌍을 보았다. 소쌍이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진심만 말하거라.”

 

  “그러겠습니다.”

 

  “아무리 추하고 아픈 것일지라도 내게는 진심만 건네야 한다.”

 

  “그리……,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다시 볼 수 없을 지라도 나를 잊지 않겠다고, 너의 마음 한 자락은 내 곁에 두겠다고……, 약조해줄 수 있느냐.”

 

  “…….”

 

  “이것은……, 어려운 것이냐.”

 

  “평생……, 그리 하겠습니다.”

 

  월이 안도하듯 옅은 미소를 흘렸다.

 

  “진정이냐. 그리 해줄 수 있겠느냐.”

 

  “평생의 그 다음까지라도, 그리 할 것입니다.”

 

  그리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눈앞의 월이 당장 사라지기라도 하듯 소쌍의 눈이 애틋하게 월을 담아냈다.

 

  “고맙구나.”

 

  두 송이의 커다란 붉은 꽃이 고개를 외로 꼰 채 있는 힘껏 서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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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2장. 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 2017 / 7 / 7 237 0 8483   
32 31장. 암흑의 소용돌이 2017 / 7 / 7 251 0 8165   
31 30장.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2017 / 7 / 6 252 0 7793   
30 29장. 이것이 마지막, 이렇게 마지막 2017 / 7 / 6 253 0 6452   
29 28장. 아니 된다 하여도 2017 / 7 / 5 250 0 7066   
28 27장. 아니라 해도 2017 / 7 / 5 247 0 7852   
27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2017 / 7 / 5 243 0 8017   
26 25장. 이렇게 돌아서면 2017 / 7 / 4 234 0 7564   
25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2017 / 7 / 4 283 0 8756   
24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2017 / 7 / 4 280 0 8427   
23 22장. 뜨겁고도 날카로운 첫, 2017 / 7 / 3 255 0 6587   
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3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5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0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4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2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39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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