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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작성일 : 17-07-04 13:50     조회 : 280     추천 : 0     분량 : 8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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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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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 안은 숨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관솔과 검불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월과 소쌍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권승휘가 정말 내 주머니를 훔쳐 없애버렸단 말이지.”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단지라는 나인이 주머니를 측간에 버렸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승냥이를 조심하라 하였던 것이냐.”

 

  “예. 단순한 투기 정도로 여겨 직접적으로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자기 때문에 월이 위험에 빠지기라도 한 듯 소쌍이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단언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하지만 월 역시 권승휘를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비수를 숨긴 미소, 독을 감춘 꽃.

 

  언제나 다정다감한 모습에 양전은 물론이고, 궁의 모든 사람들이 권승휘를 아끼고 칭양하였다. 월만은 어쩐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권승휘를 대할 때면 늘 허리뼈가 꼿꼿해졌다.

 

  오랫동안 벼려온 비수를 드디어 꺼내든 것인가.

 

  만에 하나 그런 것이라면, 치명적인 위협이 되리라. 오로지 자신만을 향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수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다른 짐작 가는 이는 없으십니까?”

 

  소쌍의 물음이 생각에 잠긴 월을 깨웠다.

 

  “글쎄다…….”

 

  말 끝에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주상전하, 얼음장 같은 세자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들 중 하나이거나 그들 모두일 수도 있었다. 정말 그들 모두가 작당을 하고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이라면……,

 

  “잘 모르겠구나…….”

 

  무엇을 어찌 할 수 있을까. 그들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제대로 맞붙어 싸워볼 수나 있을까.

 

  “앞으로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

 

  “자객의 정체가 확실해질 때까지 만이라도 사가에 머무시지요.”

 

  월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외출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중전의 배려 덕분이었다. 중전 역시 더는 봐줄 수 없음을 못 박았었다.

 

  사가에 더 머무르겠다고 청할 면목도 없었지만 사가에 머무른다 하여 화를 피할 수 있을 지도 불확실했다. 어차피 당할 수밖에 없는 화라면 적어도 부모님께만은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허면 부모님께 아뢰어 도움을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월의 고개가 또 가로로 흔들렸다.

 

  “뭐라고 말씀드린단 말이냐. 궁에 있는 후궁이 나를 죽이려 든다, 그래서 궁에 돌아갈 수가 없다 그리 말해야겠느냐.”

 

  “…….”

 

  “그러지 않아도 내가 입궁한 이후 하루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는 분들이다. 확실치도 않은 일로 근심을 더해드릴 수는 없느니.”

 

  어차피 당할 수밖에 없는 화라면 적어도 부모님께만은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허면 이대로 궁에 돌아가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래야겠지.”

 

  “빈……!”

 

  “궁에선 눈이 많아 일을 벌이기 어려우니 사가에 나온 때를 노린 것일 게다. 궁에 들어가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어.”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월이 눈을 들어 소쌍을 보며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슬픈 눈빛에 소쌍의 마음이 시려왔다.

 

  “위험하다 한들, 세자빈이 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겠느냐.”

 

  “하지만…….”

 

  당신을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이리도 여린 당신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기만 하란 말입니까! 지켜주겠다 다짐하였는데, 놀라게도, 두렵게도 하지 않겠다 다짐하였는데……,

 

  하지만 자신이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소쌍이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도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았으니 내일은 내려가자꾸나. 졸리다. 이만 자야겠어. 너도 어서 자거라.”

 

  월이 부러 졸린 기색을 하며 바위 위에 몸을 눕혔다. 월의 가냘픈 뒷모습을 소쌍이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 * *

 

 

  “소쌍이는 오늘도 안 들어온 게야?”

 

  설매가 대문간을 흘깃거리며 대청마루에 앉았다.

 

  “예. 어제 상천사 간다고 나가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난앵의 머리를 빗어주던 춘섬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절에는 가봤고?”

 

  “네. 동 트자마자 쫓아갔다왔는데 소쌍 언닌 없던데요? 물어보니까 어제 해질 무렵에 내려갔대요.”

 

  “염병할, 산중에 어디 꿀통이라도 쟁여놨나. 생전 안하던 외박을 하고 지랄이야.”

 

  “소쌍 언니 말이에요. 혹시 정인 생긴 거 아니에요?”

 

  난앵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정인이라니? 난앵이 넌, 뜬금없이 뭔 소리랴?”

 

  설매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지난번 저자 나갔을 때요, 언니가 꽃신을 하나 사서 숨기잖아요.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안 물어봤는데 분명 꽃분홍색 운혜였어요.”

 

  “언니가 꽃신을 샀다고? 언제?”

 

  “너랑 나랑, 언니랑 같이 장에 나갔을 때 말이야.”

 

  “그랬나? 난 못 봤는데.”

 

  춘섬이 눈을 끔벅거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꽃신 하나 샀다고 다 연애하냐? 언니가 신으려고 산 걸 수도 있지.”

 

  “소쌍 언니가 꽃신을 신는다고?”

 

  난앵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얼굴로 춘섬을 흘겨보았다.

 

  “언니라고 꽃신 신지 말라는 법 있어? 사람이 안 하던 짓도 갑자기 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잖어.”

 

  “쯧쯧, 너는 기생밥 먹는다는 년이 그리 감이 없어서 어쩌냐? 참 갑갑하다.”

 

  춘섬이 억울한 듯 대꾸했다.

 

  “설사 정인 주려고 꽃신을 샀대도 이상하지. 소쌍 언니는 언닌데, 그럼 정인도 여인이라는 거잖어. 연애를 하려면 사내랑 해야지.”

 

  난앵이 손가락으로 춘섬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소쌍 언니가 사내랑 연애를 한다고? 그림이 나오냐?”

 

  춘섬이 잠시 눈을 굴리더니 쉽게 수긍했다.

 

  “뭐 썩 잘 어울릴 것 같진 않다만, 그래도 여인이면 사내와 연애를 하는 것이지.”

 

  “너는 생긴 건 그렇게 자유분방하면서 생각하는 건 어찌 그리 꽉 막혔니?”

 

  “여인이 사내와 연애를 해야 한다는 것이 왜 꽉 막힌 거야? 당연한 거지!”

 

  난앵이 팔짱을 끼며 춘섬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몰라. 딴 사람이면 몰라도 소쌍 언니가 연애하자면 난 당장 좋다 할 거다. 춘섬이 넌 싫으니?”

 

  춘섬이 정말 고백이라도 받은 듯 진지하게 눈을 굴렸다.

 

  “물론 소쌍 언니가 웬만한 사내들보다야 멋있긴 하지. 착하고 다정하고, 먹을 것도 많이 사주고. 그래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같……,”

 

  “느이들은 아까 내어준 숙제는 다 하고 노닥거리고 있는 게야?”

 

  천향이 쨍하게 호통을 치며 마루로 나왔다. 난앵과 춘섬이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갔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옥금이 천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혹시 소쌍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사람이라도 사서 찾아보라 할까요?”

 

  “강아지 새끼도 아니고 제 발로 걸어 나간 인간을 찾긴 왜 찾느냐? 들어올 때 되면 어련히 들어오겠지.”

 

  천향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래도 소쌍이가 외박은 한 번도 한 적 없잖아요. 왈짜들한테 붙들려가기라도 한 거면 어떡해요.”

 

  “소쌍이 걔가 누구한테 맞고 다닐 애니? 왈짜들을 반 죽여 놓았다면 모를까.”

 

  “그건 그렇지만 이때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옥금이 네가 몸이 좀 나아졌구나.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고. 걱정할 기력 있으면 너도 들어가 거문고 연습이나 더 하려무나.”

 

  천향이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가 버렸다.

 

  “스승님, 정말 괜찮을까요? 자꾸 걱정이 되어서…….”

 

  옥금이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설매를 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어. 설마 큰일이야 있겠냐. 천향이 말대로 갈 때 되면 가고, 올 때 되면 오겠지.”

 

  설매가 옥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일어섰다.

 

 

  * * *

 

 

  “자느냐?”

 

  “아직……. 졸리지 않으십니까.”

 

  월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너무 놀라 그런가, 몸은 천근만근인데 잠이 오질 않는구나. 너는 졸리지 않으냐.”

 

  “종일 독에 취해 자서 그런지, 저도 졸립지가 않습니다.”

 

  “너 또한 많이 놀라 그런 게지. 자객에게 습격을 당하고 생사까지 오락가락했으니 어찌 아니 그러겠느냐.”

 

  자객 때문이 아니었다. 월과 한 공간에,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몸을 눕히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시간을 잠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기에 잠이 온다 해도 잘 수가 없었다.

 

  “졸립지 않으면 이야기나 좀 해보거라.”

 

  월이 소쌍 쪽으로 몸을 틀었다. 소쌍이 긴장한 기색을 감추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이야기엔 영 재주가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재주가 있느냐?”

 

  월이 소쌍 쪽으로 몸을 밀었다. 소쌍이 저도 모르게 뒤편으로 물러났다.

 

  “딱히 재주랄 것이 없습니다.”

 

  “보아하니 싸움은 좀 하는 것 같던데, 그 얘기나 해보거라.”

 

  “싸움을 좀 하는 건 사실이나 무슨 얘기를 드려야 할지…….”

 

  월이 피식 웃었다.

 

  “억지로 겸손 떨지 않아 좋구나. 음, 그럼 어찌 하여 그리 싸움을 잘 하게 되었는지 얘기해보거라. 누구에게 배웠느냐?”

 

  월의 물음에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시간들이 첩첩이 떠올랐다. 소쌍은 일렁거리는 가슴속을 다잡으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 * *

 

 

  부모를 잃고 난 뒤 소쌍은 전국 팔도를 정처 없이 헤맸다. 아무데서나 쓰러져 잤고, 눈에 보이는 열매나 풀을 뜯어먹었다. 독이 올라 며칠씩 앓아눕기도 여러 번이었다.

 

  살이 내려 뼈마디가 툭툭 드러났고, 희고 보드랍던 살갗은 햇볕과 바람에 노출되어 거뭇하고 거칠어졌다.

 

  그래도 소쌍은 힘든 줄을 몰랐다. 힘들다거나 아프다거나 하는 감각이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모든 감각기관이 마비되어버린 듯했다.

 

  덕분에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소쌍은, 울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어린 것이 살기가 충천하여 제 살을 깎아먹는구나.”

 

  발길 닿는 대로 멍하니 산길을 걷던 소쌍의 걸음이 멈칫하다 다시 이어졌다.

 

  “그리 살다 죽으면 누가 좋아할꼬, 쯧쯧.”

 

  소쌍이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눈빛은 흐리멍텅했다. 낡은 장삼에 삿갓을 쓴 스님이 물끄러미 소쌍을 보며 서 있었다. 소쌍은 성큼성큼 다가가 스님에게 주먹을 날렸다.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시오.”

 

  표정 없는 얼굴로 내뱉은 소쌍이 가던 길을 가려는데, 스님이 맞은 자리를 문지르며 웃었다.

 

  “허허, 고년 계집아이 주먹맛이 보통이 아니구나. 왕의 피를 타고났으나 개돼지의 생을 살다 길에서 죽을 팔자, 그리 용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니 사는 동안만이라도 편히 살거라.”

 

  “닥치시오!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떠드시오!”

 

  소쌍이 또 주먹을 날렸다. 스님은 대거리 한 번 없이 소쌍의 주먹질을 받아냈다.

  한번 시작된 주먹질은 쉬 그치지 않았다.

 

  소쌍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연거푸 휘둘렀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다. 소쌍의 눈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참이나 주먹질을 하던 소쌍은 제풀에 털썩 주저앉았다. 헉헉, 가쁘게 내쉬던 숨이 서서히 흐느낌으로 변했다.

 

  꾹꾹 누르고 또 눌러도 비집고 나오던 흐느낌은 끝내 울음으로 터져나왔다. 산이 무너지는 듯한 울음이었다. 땅이 뒤집히는 듯한 울음이었다. 제 몸 속 어디에 그런 거대한 것이 숨어있었는지 알지 못한 채 소쌍은 울고 또 울었다.

 

  탈진할 지경까지 울고 나자 스님이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건넸다. 소쌍은 호리병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바싹 마른 입술이 갈급증을 내며 물을 받아들였다. 호리병을 다 비우고 나자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소쌍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죽이시든가, 관가에 고발하든가 하십시오.”

 

  엉망이 된 스님이 피가 흐르는 입가를 스윽 닦으며 웃었다.

 

  “너를 죽이거나 고발하여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

 

  “볼 일 다 보았으면 이만 가보거라.”

 

  소쌍이 일어나는 스님의 앞을 막아섰다.

 

  “허면 저를 때리기라도 하십시오. 분이 풀리실 때까지 때려주십시오.”

 

  “분이 쌓이지 않았는데 풀 분이 어디 있겠느냐.”

 

  “스님께선 제게 이유도 없이 맞았는데 화도 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소쌍이 도리어 따지는 듯한 말투였다. 스님이 느긋한 눈길로 소쌍을 보았다.

 

  “인생 만사 이유 없는 일이란 없느니라. 모든 것이 다 업보인 게지. 나와 너 또한 전생의 업으로 이리 마주친 것이 아니겠느냐. 이리 하여 우리 사이에 얽힌 업원을 풀 수 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너에게 맞아 죽어도 족할 것이다.”

 

  소쌍이 벙찐 표정으로 스님을 보았다. 스님은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스, 스님!”

 

  “왜, 아직 덜 때렸느냐?”

 

  무안해진 소쌍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스님이 허리를 구부려 떨어진 삿갓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정말 후련한 듯 돌아섰다.

 

  “하,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스님이 말없이 돌아보았다.

 

  “지금 하신 말씀은, 현생의 불행이 모두 제가 지은 죗값이란 뜻입니까?”

 

  “그저 나로 인한 것이 내게로 돌아오는 것일 뿐이라네.”

 

  소쌍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겪은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말씀입니까? 허면 고통 받는 백성들도 모두 전생에 죄를 지어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찍소리 말고 핍박과 고통을 감사히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스님이 빙긋 웃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고통스럽다 하여 반드시 벌이랄 수 없고, 즐겁다 하여 반드시 상이랄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는 것 역시 무지의 소치일 뿐, 가늠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하려 하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려 하기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니라.”

 

  “그럼 대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비루하게 살아남은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해야, 어찌 해야 제가!”

 

  소쌍의 바르쥔 주먹이 떨렸다.

 

  “…… 살 수 있단 말입니까.”

 

  “가늠하겠다, 헤아리겠다 하는 오만함을 버리거라.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 원망하고 따지는 억하심정도 버려야 해.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을 받아들여라. 예측하지도, 판단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야. 모든 것이 너를 통해 흘러가도록 너를 내주어라. 그것만이 생에서 니가 해야 하는, 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소쌍이 분기 실린 울음을 쏟으며 허물어졌다.

 

  “과한 증오도, 과한 자책도 모두 독이다. 제가 삼킨 칼이 되어 온몸을 헤집고 다니지. 그것마저 내가 만들어낸 마음임을 잊지 말고, 다 쏟아버리거라.”

 

  스님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소쌍은 제 안의 독을 꾸역꾸역 토해내듯 울고 또 울었다. 스님은 소쌍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 앉아 먼 하늘을 보았다.

 

  울음을 그친 소쌍은 무작정 스님의 뒤를 따랐다. 스님은 따라오는 소쌍을 굳이 내치지도, 반기지도 않았다.

 

  절까지 쫓아간 소쌍은 다음 날 제 손으로 댕기머리를 자르고 사내의 옷을 찾아 입고 스님 앞에 섰다.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쌍은 눈치껏 장작을 패거나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무예를 단련하는 스님들을 훔쳐보며 연습을 했다.

 

  무예 연습을 할 때면 머릿속이 텅 비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때만큼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죄책감과 절망감을 잠시나마 벗어내릴 수 있었다. 소쌍은 더욱 무예 연습에 열을 올렸다.

 

  딱히 보아주는 이도, 일러주는 이도 없었지만 워낙에 타고난 자질이 있었던지 소쌍의 무예는 날로 일취월장하였다.

 

 

  * * *

 

 

  소쌍은 앞 이야기는 생략하고 우연히 도곡스님을 만나 절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어깨너머로 무예를 배웠다는 정도로만 간단히 말했다.

 

  “그랬구나. 나 역시 도곡스님께 무예를 살짝 배웠느니라.”

 

  “그러셨습니까.”

 

  소쌍이 진지하게 놀라자 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예라 하기엔 조금 부끄럽구나. 그저 상대의 급소를 공격하는 정도의 간단한 호신술이었다. 여인이라도 자신의 몸을 지키는 법은 알아야 한다며 알려주셨지. 정작 써야 할 순간에는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지만.”

 

  자객을 향해 무작정 몸을 날리던 제 모습을 떠올리고는 월이 푸훗, 웃었다.

 

  “너는 왜 무예를 배웠느냐?”

 

  원수를 갚겠다거나 하는 거창한 다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무얼 해야 하는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얼 하든 자신이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부모와 이웃들처럼 허무하게 죽어버릴 수는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견디기 위해, 그거라도 해야겠기에, 그리 해야 숨이라도 쉬겠기에 배운 것이었다.

 

  “딱히 무얼 하고자 하여 배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님께선 무예란 나 자신으로 바로 서기 위해 익혀야 한다 하셨습니다.”

 

  “나 자신으로 바로 서기 위한 것……. 그럼 너는 너 자신으로 바로 서고 있느냐.”

 

  “그러려고……, 합니다.”

 

  “그러려고 한다…….”

 

  월이 이번에도 소쌍의 말을 따라했다.

 

  “대단하구나, 너는. 나는 내가 누군지도 잊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월의 자조적인 미소를 본 소쌍이 속으로 안타까이 말한다.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알게 되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음 속 말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월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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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6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6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2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7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4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43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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