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쌍아, 소쌍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린다. 목소리만큼 부드러운 손길이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넘긴다.
“으음…….”
어머니?
잔뜩 찡그리고 있던 소쌍의 얼굴이 급히 펴진다.
“정신이 드느냐?”
소쌍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단아한 얼굴에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
소쌍이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어깨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갑자기 소쌍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놀란 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쌍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
소쌍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상처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이가 어머니가 아니기에, 매일같이 자신을 괴롭히는 흉몽이 한낱 꿈이 아니기에 우는 것이었다.
“그, 그리 아프냐.”
월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등을 쓸어주었다. 월의 진심 어린 눈빛에 소쌍은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월이 어색하게 소쌍을 안고 다독거렸다.
“많이 아프냐? 미안하다, 나 때문에. 이리 다치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소쌍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죽지 않아줘서 고맙습니다. 내 곁에 살아있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울음 때문에 발음이 뭉개져 소쌍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월은 더욱 따뜻한 손길로 소쌍의 등을 어루만졌다.
* * *
“얼마나 누워있었던 것입니까.”
울음을 그친 소쌍이 동굴 밖을 보며 물었다. 어느 새 희부염한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밤새 앓았느니라. 얼마나 강한 독이었는지 눈이 뒤집히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꼭 네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
무서우셨겠습니다.
소쌍이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는데 월이 씩씩하게 말했다.
“내가 붙인 약초가 아주 엉터리는 아니었나 보다. 네가 이리 깨어난 걸 보니.”
어깨를 내려다보니 뜯어낸 치맛자락으로 상처가 단단히 매어져 있었다. 살짝 들춰보니 족히 여섯 치는 버개져 있었다.
“상처가 조금만 깊거나 아래쪽이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느니라.”
월이 한구석에 놓여있던 원추리를 찧어 상처에 덧붙여주었다. 소쌍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건 어찌 아셨습니까.”
“아버지께 배웠다. 하도 오래 전이라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내 머리는 미색만큼 뛰어나구나. 아, 미색보다 뛰어나다 해야 할까?”
월이 제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왜 그리 뚱하게 보느냐? 내가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똑똑하여 질투를 하는 게냐?”
소쌍이 벙찐 얼굴로 눈을 끔벅거렸다. 월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머리도, 미색도 타고난 것이니 너무 미워하진 말거라. 타고난 것을 내가 어찌 하겠느냐? 부모님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그러냐?”
월의 진지한 너스레에 소쌍이 피식 웃었다. 소쌍이 웃자 월이 기쁘다는 듯 방긋 웃으며 소쌍을 끌어안았다.
“네가 이리 웃으니 이제야 살 것 같다. 내 너를 다시는 못 보는 줄 알고 심장이 떨어져 내렸느니라.”
씩씩한 척 했지만 무서웠던 것이다. 두려웠던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내려 더욱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았을 월을 떠올리니 심장을 헤집는 듯 아팠다. 소쌍이 팔을 벌려 월을 다독이려다 으윽,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무 세게 안아 그러느냐?”
월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뗐다.
“아닙니다.”
“너 때문에 평생 놀랄 것을 다 놀랐으니 이제 더는 놀래키지도 말거라.”
월이 곱게 눈을 흘겼다. 소쌍이 씩 웃으며 한 팔로 월을 끌어당겼다. 월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로 인해 놀래게도, 두렵게도 하지 않겠습니다.
소쌍이 진심으로 대답했다. 마음속으로 한 말이었지만 듣기라도 한 듯 월이 빙긋 웃었다.
“배고프지 않느냐? 이걸 좀 먹거라.”
한참만에야 돌아온 월이 치맛자락을 펼쳤다. 연분홍빛 치마폭에는 버찌며 매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소쌍은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월의 재촉에 버찌 한 알을 억지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새그러운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껄끄럽던 입안에 침이 돌았다.
“이건 처음 보는 열맨데 맛있어 보여 따왔느니라. 꼭 도토리 같지 않느냐.”
월이 푸르스름한 열매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순간, 소쌍이 월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입을 맞췄다. 돌연한 행동에 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쌍의 혀가 월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월이 소쌍을 밀쳐내려 했지만 소쌍은 단단히 월을 붙들었다. 놀란 월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소쌍의 혀가 집요하리만큼 월의 입안을 휘저었다.
“네, 네가 미쳤구나!”
월이 소쌍을 밀치고 발딱 일어섰다.
“역시나 그런 것이었느냐! 나, 나를 탐하기 위해,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런 곳으로 날 데리고 온 것이야!”
월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소쌍이 침을 퉤 뱉어냈다. 굳어졌던 월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되려 소쌍이 힐책하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매번 저를 색한으로 모십니까! 제가 그 정도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리 보여서 한 말이 아니었다. 전혀 그리 보이지 않지만 자꾸 마음이 가기에, 마음이 흔들리기에 부러 밀어내느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뭔지도 모르는 걸 드시면 어쩝니까! 숲에서 처음 보는 열매는 함부로 따먹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부친께 배우지 못하신 겝니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소쌍이 뱉어낸 것은 방금 월이 입에 넣은 열매였다.
“저, 저게 뭔데 그러느냐.”
월이 소쌍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때죽나무 열매입니다. 독이 있는 열매란 말입니다. 저걸 찧어서 물에다 풀면 물고기들이 죄다 배를 뒤집고 떠오릅니다. 모르십니까?”
“그, 그건……, 몰랐다.”
월의 목소리가 확연히 수그러들었다 다시 높아졌다.
“아니,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할 일이지, 어찌 입술을……!”
월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이번에는 분노와 수치심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말을 할 틈이나 있었습니까.”
소쌍의 얼굴 역시 발그레해졌다.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감돌았다. 월과 소쌍은 서로 딴 데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이거나 마저 먹고 있거라. 나는 열매를 좀 더 따올 테니.”
월이 남은 열매를 던지듯 소쌍 앞에 놓고는 홧홧한 얼굴을 감싸며 동굴 밖으로 뛰어나왔다.
“성질이 어찌 나보다 급할까? 그렇게 안 보았는데, 사람 못 쓰겠네 못 쓰겠어.”
월이 계곡에 내려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동굴에 남은 소쌍은 소쌍대로 얼결에 해버린 행동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독을 맞아 정신이 나가버린 게야.”
소쌍이 머리를 감싸 쥐고 자책하는 소리가 한참이나 동굴을 울렸다.
* * *
“뭐라구요? 세자빈을 놓쳤다구요?”
권승휘가 서안을 내리쳤다. 꽉 쥔 손등 위에 새파란 핏줄이 돋아났다.
“송구합니다.”
권전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들개를 푼 것으로도 모자라 자객까지 나섰는데 세자빈 하나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 풍도란 자객이 알아주는 검호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불쑥 끼어든 사내놈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었을 터인데…….”
“혹시 우리의 계획이 누설된 것 아닙니까.”
권승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럴 리 없습니다. 은밀히 일을 진행하였기에 이 일에 관해 아는 것은 저와 승휘, 그리고 자객 풍도밖에 없습니다.”
“미리 알고 대비를 한 것이 아니라면 갑자기 사내가 어디서 나타난단 말입니까.”
“그자가 누군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단서가 없지 않습니까. 그자도 같이 사라져버렸다면서요.”
“풍도와 맞설 정도니 무예가 고강한 고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무예가 고강한 고수라……. 허면 내금위병이나 운검은 아닙니까.”
권승휘의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금위병이나 운검이 움직였다면 자신의 계획이 세자궁까지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리 세자빈에게 정이 없는 세자라 하더라도 세자빈을 죽이려 한 승휘를 두고 보진 않을 것이었다.
“생김새를 들어보니 내금위병이나 운검은 아니었습니다.”
“모를 일입니다. 비밀스럽게 데리고 있는 운검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워낙 의뭉스러운 분이 아니십니까.”
“정말 세자궁에서 움직인 거라면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세자궁으로는 세밀한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심어두었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권승휘가 못 미덥다는 듯 권전을 흘겨보았다.
“믿을 만해야 믿지요! 어찌 일을 이리 허투루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러다간 우리 원자까지 위험해지겠습니다.”
뱃속의 원자까지 들먹이자 권전이 더욱 황감해했다.
“우선 그 무사의 정체를 밝혀내세요. 그래야 그에 맞게 대비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자에 대해서라면 뭐든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떠올려보라 하세요.”
“아, 그 무사의 가슴팍에 문신이 있었다 합니다.”
“무사가 문신을 하는 것이야, 특이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그 문신의 모양이 특이했다고 하더이다. 이걸 좀 보십시오.”
권전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풍도가 본 대로 모사한 문신이었다.
세로 가로로 그어진 선과 함께 글자로 보이는 것들이 원 형태로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글을 읽을 순 없다. 글자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부수만 쓰여 있는 경우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뭐랍니까.”
권승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뜻을 해석하는 중입니다. 필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자가 누구든, 두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아버지.”
권승휘가 제법 부른 배를 문지르며 눈을 빛냈다.
“걱정 마십시오, 승휘.”
권전이 단호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빈궁께서 도망을 쳤다고?”
머리를 터맨 태길이 면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정중히 모시려 했으나 저를 자객으로 오인하신 듯하옵니다.”
“하여튼 빈궁 마노라도 성질이 급해 큰일이시다. 어찌 나이를 먹어서도 그대로신지. 하기사, 타고난 성정을 바꾸기가 쉽지 않겠지.”
유가 태길의 상처를 보며 혀를 찼다.
“헌데 들개를 푼 자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
“틀림없사옵니다. 소인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빈궁의 뒤를 따르던 자가 신호를 보내자 맞은편에서 들개들이 나타났사옵니다.”
“빈궁을 공격하기 위해 들개를 풀었다? 누굴까? 누가 그런 짓을 벌였을까?”
“여기저기 수소문해보았으나 뒷배를 밝혀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빈궁께서 절에서 만났다는 사내는 어떤 자냐?”
“소쌍이라는 자로 향원각이라는 기루의 기둥서방이라 하옵니다.”
“조선의 세자빈이 양반집 자제도 아니고 기루의 기둥서방을 만났다? 하하하, 역시 빈궁께선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시라니까. 아버님께서 아시면 또 한바탕 궁이 뒤집히겠구만.”
유가 검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수염을 문지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혼자였고, 너를 공격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혹 빈궁이 그 소쌍이란 자와 함께 숨어있는 것은 아니냐?”
“그것까진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그 소쌍이란 자도 아직 기루에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흐음, 그래. 어쨌거나 태길이 너는 빈궁을 뫼시고 오너라. 혼자 계시건, 소쌍이란 자와 있건 반드시 찾아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헌데……,”
태길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어찌하여 대군께서 저를 보내시면서까지 빈궁을 보호하시려는지 소인의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사옵니다.”
태길은 유를 그림자처럼 지키는 비밀 무사였다. 가족들조차 존재를 모를 만큼 은밀히 따르는 이였다. 빈궁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사들을 보내도 충분할 일이었다.
“어허, 이 나라의 대군으로서 종실을 보호하고 세자빈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거늘, 어찌 그 연유를 묻는 게냐.”
유가 짐짓 정색을 하며 질책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아 당연한 것을 여쭈었사옵니다.”
태길이 나가고 나자 유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리석은 놈, 아들 있는 승휘보다야 아들 못 낳는 세자빈이 내게 더 유리하지 않겠느냐.”
* * *
한편 월의 친정은 발칵 뒤집혔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월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스님들이 온 산을 다 뒤졌지만 월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민씨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대감. 세자빈께서 변고라도 당하신 것이라면…….”
겨우 깨어난 민씨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우리 월이 어떤 아이입니까. 어릴 때부터 마을에서 제일 씩씩하고 용감한 아이가 아니었습니까.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봉여가 민씨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독였다.
“지금이라도 궁에 알려야 하는 것은 아닐지…….”
봉여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릴 적부터 무시로 오르던 산입니다. 밤이 어두워져 내려오지 못하신 것일 겝니다. 지금쯤 길을 잡아 내려오고 계실 것입니다. 별일 아닌 것을 궁에 알렸다 괜히 빈궁께서 책을 잡히시면 어찌 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월이었다. 본가로 내보냈더니 소동을 일으켰다고 친정걸음을 영 못하게 할지도 몰랐다.
“돌아오시겠지요?”
“걱정 마세요. 우리 딸을 믿어봅시다, 부인.”
말은 그리 하면서도 봉여의 표정 역시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