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작성일 : 17-07-02 05:02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8214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본가에 도착한 월은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올린 뒤 석가이를 대동하고 상천사에 올랐다.

 

  어느 새 여름이 산발치까지 내려와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머금고 진초록빛으로 자라난 이파리들이 상긋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종달새가 쪼르릉거리며 나뭇가지 사이를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삐리리 짹짹, 알 수 없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이파리를 흔들었다.

 

  꽃시절은 봄이라지만 일 년 중 가장 많은 꽃이 피는 때는 여름이었다. 산 아래서부터 닭 벼슬 모양의 푸릇한 닭의장풀, 작은 꽃잎을 화관처럼 달고 있는 꿀풀꽃, 등황색 잎이 멋지게 뻗은 골잎원추리, 붉은색 반점이 다닥다닥 박힌 범부채꽃, 작은 종처럼 생긴 푸른 보랏빛 잔대가 월을 보며 까딱까딱 춤을 추었다.

 

  산을 좀 더 오르자 이파리와 줄기가 꼭 깎아놓은 무 같은 흰 수정난풀과 실 같은 꽃잎이 촛대 모양으로 붙은 촛대승마도 눈에 띄었다.

 

  “꽃무리들이 얼마나 고운지, 꽃멀미를 하겠구나.”

 

  그러면서도 월의 눈은 꽃에 붙박혀 있었다.

 

  “올해도 피고 내년에도 피는 꽃, 뭐가 그리 신기하고 좋다고 들여다보셔요.”

 

  석가이가 숨을 헥헥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올해도 피고 내년에도 피지만 지금 이 꽃은 꼭 한 번뿐이라 그런 게지.”

 

  “올해 피나 내년에 피나 그 꽃이 그 꽃이지, 어찌 꼭 한 번이라셔요?”

 

  “허술한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게 그것같아 보여도 매해 달리 피어나는 꽃이 어찌 같겠느냐. 또한 꽃을 보는 나 역시 올해와 내년이 다르니 지금 이리 만나는 이 꽃은 평생의 단 한 번인 게지.”

 

  석가이가 줄줄 흐르는 땀을 소맷자락으로 훔쳐냈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서두요. 제가 올해 다르고 내년 다른 건 확실한가 봐요. 어릴 적엔 가뿐하게 올랐던 길이 고새 이리 힘들어지다니. 하이고, 나도 늙었네, 늙었어.”

 

 

  * * *

 

 

  일주문을 지나자 지난 초파일에 달아둔 연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색 채색줄에 매단 분홍빛 연등이 마당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부녀자들이 타고 온 가마가 발 디딜 틈 없이 세워져 있었다.

 

  월과 석가이는 대웅전을 지나 여인당으로 갔다. 여인당은 말 그대로 여인들만 들 수 있는 불당이었다. 초여름 따가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마당에는 평민 아녀자들이 민돗자리 위에 찰싹찰싹 붙어 앉아 있었다. 아예 맨바닥에 앉은 이들도 여럿이었다.

 

  불당 안은 양반 아녀자들로 가득했다. 여인당의 비구니가 월을 알아보고 가운데 자리를 내어주려했다. 월은 손을 저어 사양하고는 한쪽 구석으로 가 삼배를 올렸다.

 

  월은 새삼스럽게 불당 안 여인들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간절한 마음일 여인들이 두 손을 모은 채 부처를 우러르고 있었다.

 

  이 여인들은 무엇을 빌고 있을까? 절을 하고 손을 모으긴 했으나 월은 자신이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임을 하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나?

 

  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것을 어찌 빌까. 마음 없는 자리에 부처인들 돌아볼까.

 

  월이 도움을 구하듯 부처를 보았다. 천관을 쓴 관음보살이 다 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였다.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이라면 제 희뿌연 마음속도 헤아릴 수 있을까. 문득 자신 앞에 엎드린 이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부처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월은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불당을 나왔다. 석가이는 어찌 차지했는지 마당 맨 앞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 손에 불이 나도록 비벼대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상천사의 주지인 도곡스님이었다. 월이 반가운 기색으로 마주 합장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님.”

 

  도곡은 외가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승려였다. 민씨를 따라 어릴 적부터 상천사를 드나들었던 월 역시 도곡을 외할아버지처럼 따르고 좋아했다.

 

  “오신다는 전갈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어찌 그대로십니다. 저만 나이를 먹은 듯합니다.”

 

  맑은 자연 속에서 명상과 수련을 하고 소식과 채식의 습관을 가져서인지 도곡의 얼굴이 분단장한 월보다 훨씬 맑고 윤이 났다.

 

  “빈궁 마노라야말로 어린 시절 그대로이십니다.”

 

  도곡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온 경내와 숲을 헤집고 다니다 꾸중을 듣고 시무룩해지던 어린 월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천방지축 꼬맹이가 벌써 이리 성장하여 성숙한 여인의 태가 나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했다.

 

  “날이 더운데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오. 여기가 좋습니다. 맨날 궁에만 갇혀있는 처지라 한시라도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습니다.”

 

  도곡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불자들이 더 많아진 듯합니다.”

 

  월이 오가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상이 엎어지고 나라가 바뀌어도 민초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지요. 모두 소승이 불민한 탓입니다.”

 

  “백성들의 삶을 다독이는 것이 어찌 스님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외려 왕실과 조정 중신들의 몫까지 떠맡으시는 듯하여 부끄럽습니다.”

 

  오후 예불이 시작되려는지 법고 소리가 둥둥 경내를 울렸다. 기와마루에 줄지어 앉아있던 산새들이 포로로 날아올랐다.

 

  “궐에서 지내시기는 괜찮으십니까.”

 

  월이 힘없이 웃었다.

 

  “사는 것이 어찌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첩첩산중 낭떠러지에 떨어진 듯 앞이 가마득하고, 무간옥에라도 갇힌 듯 갑갑증이 입니다. 날개 잘린 나비가 이러할지요. 소리 잃은 꾀꼬리가 이러할지요.”

 

  도곡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훌륭한 세자빈이 되고 싶었지요. 그리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저의 수양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충분히 잘해내고 계십니다.”

 

  “아니오. 아닙니다.”

 

  월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혹 회임이 되지 않아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월이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 회임을 하게 해 달라, 아들을 낳게 해 달라 빌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세자빈이 되어 국통을 잇는 일이 목숨보다 중할진대 비손조차 하지 않았으니 저는 역시 좋은 세자빈은 못 되는 듯합니다.”

 

  차마 부모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했던 마음의 허물들이 도곡 앞에서는 무렴히 드러난다.

 

  “그럼 무엇을 비셨습니까.”

 

  부드럽지만 따끔하게 충고를 해줄 줄 알았던 도곡이 다른 물음을 하자 월의 눈이 동그래졌다.

 

  “…… 그저 물었습니다.”

 

  “무엇을 물으셨습니까.”

 

  “내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물었습니다. …… 우습지요. 이 나라 조선에서 한낱 계집이 이런 물음을 가지다니요.”

 

  월이 씁쓸하게 웃었다. 도곡이 온화한 눈빛으로 월을 보았다.

 

  “부처님의 품에서는 여자와 남자, 높고 낮음, 강함과 약함의 구분이 없습니다. 누구나 부처님 앞에서는 가엾은 한 명의 중생일 뿐이지요. 부처님께서 마노라의 뜻을 지극히 헤아리실 것입니다.”

 

  그때 뒤에서 도곡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던 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소쌍이 아니냐.”

 

 

  * * *

 

 

  “오늘은 사내의 복색이구나. 거문고는 아니 들고 왔더냐.”

 

  월의 장난기 어린 물음에 뒤를 따르던 소쌍이 머쓱하게 웃었다.

 

  “오늘에야말로 네 엉터리 연주를 들어볼 기회였는데 아깝구나.”

 

  “원하신다면 다음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월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음에 또 언제 볼 줄 알고.”

 

  “지난번에도 다시 못 볼 줄 알았으나 이리 만나지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신기하긴 하구나. 헌데 도곡스님과는 어찌 아는 사이더냐.”

 

  “어릴 적 천애고아로 떠돌던 저를 거두어주신 분입니다. 오갈 데 없는 신세라 한동안 이 절에서 지낸 적이 있지요.”

 

  천애고아, 란 말에 월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스님들에게 야단을 맞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면 이곳 암자에 숨어 있곤 했습니다. 여기는 버려진 지 오래라 스님들도 발길을 않으시거든요.”

 

  월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도 어린 시절 상천사에 와서 숨바꼭질을 할 때면 이곳에 숨곤 하였다. 석가이는 귀신이 나온다고 이쪽으론 얼씬도 못 했거든. 여기 숨기만 하면 백전백승이었지. …… 그러고 보니 어쩌면 우리는 어린 시절에 한 번쯤 마주쳤을지도 모르겠구나.”

 

  월이 암자 옆 너른 바위에 앉으려 하자 소쌍이 품에서 명주수건을 꺼내어 깔아주었다. 월이 싱긋 웃었다.

 

  “이곳엔 자주 오느냐.”

 

  “한양에 오고부터는 종종 옵니다. 달포에 한두 번쯤.”

 

  “좋겠구나. 그리 자주 올 수 있다니.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궁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가끔 행차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궁에서의 일이 번다하여 못 나오시는 겝니까.”

 

  소쌍의 말에 조바심이 얹혔다.

 

  “일이 번다하여 나올 수 없는 것이라면 이리 갑갑치도 않겠지. 아니다, 궁 안에 머물러 얌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니 일이 번다한 탓이라 할 수도 있겠구나.”

 

  “세자빈께서 못 하시는 것도 있습니까.”

 

  숫제 따지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 따져 물어 풀 수 있는 일이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따지고 들었으리라. 허나 그것은 따져 물을 수 없는 궁의 법도였고, 규칙이었다. 세자빈인 자신은 법도와 규칙을 한 발짝도 벗어나서는 아니 되었다.

 

  “세자빈이라 할 수 있는 것보다 세자빈이라 못 하는 것이 훨씬 많으니라. 이것도 하지 말아야 하고, 저것도 하지 말아야 하고…….”

 

  월이 쓸쓸한 눈빛으로 하늘을 보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리개는 잘 받았다. …… 묶어둔 진달래꽃도 곱더구나.”

 

  “꽃구경을 흡족할 만큼 못 하신 듯하여…….”

 

  “석가이를 만난 날, 혹여……, 나를 기다린 게냐.”

 

  못내 묻고 싶었던 것을 무심하게 묻고는 월이 곁눈으로 소쌍을 흘깃 보았다.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 가시고 난 후 뒷모습이 눈에 밟혀 심장이 에이는 듯하였으니까요.

 

  소쌍이 가슴 속 말을 누르며 하하, 웃었다.

 

  “매일 할 일 없이 저자를 오갑니다. 그러는 와중에 여종을 마주친 것이고요.”

 

  “네가 있는 기루가 어지간히 장사가 안 되는 모양이구나. 일 거두어주는 이가 그리 한가한 걸 보면.”

 

  소쌍의 말에 내심 실망했는지 자신도 의아할 만큼 퉁명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술궂은 마음에 내처 물었다.

 

  “헌데 동산에 오른 날은 대체 왜 그런 것이냐? 나를 정말 우습게보아 희롱하려 든 것이야? 지난번 궁에선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갔다만 오늘은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꾸나.”

 

  월의 새침한 시선이 소쌍을 향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흑갈색 눈망울을 보자 소쌍은 숨이 멎을 듯했다. 그리워 마지않았던 눈빛이었다. 꿈에서라도 마주치길 간구했던 눈빛이었다.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맑고 깨끗한 눈망울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쿵 울렸다.

 

  “어서 말을 해보거라.”

 

  월의 재촉에 누르고 또 눌렀던 진심 한 자락이 무심결에 흘러나오고 말았다.

 

  “차마 볼 수가 없어……, 그랬나이다.”

 

  “무엇을 말이냐?”

 

  “빈의 눈빛이……,”

 

  “……?”

 

  “너무도 맑고 청아하여, 차마 저의 눈에 담기 송구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말입니다. 제 눈을 찌른다 한들 빈의 눈동자를 쫓을 듯하기에, 그리하여 빈의 눈을 가렸습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고백에 월이 한 대 맞은 얼굴로 소쌍을 보았다. 소쌍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월을 마주 보았다. 월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아릿한 떨림이 느껴졌다.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떨림은 조금씩 더 크고 뚜렷해졌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월이 재빨리 손을 가무렸다.

 

  하지만 떨림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마멀미를 할 때처럼 눈앞이 어질거리고 머릿속이 뜨거웠다. 그것을 숨기려 월이 발딱 일어났다.

 

  “너는 정말 못됐구나. 경망스러운 자인 줄은 알았다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어찌 그런 눈빛으로 농을 한단 말이냐! 내 너를……, 흡! 왜, 왜 이러느냐!”

 

  소쌍이 돌연 월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월이 소리를 지르며 버둥대자 소쌍이 힘주어 월의 허리를 안고 제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누군가 있습니다.”

 

  월의 눈이 긴장과 의구심으로 굳어졌다. 사위에 귀를 기울이던 소쌍이 날랜 몸짓으로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돌아오는 소쌍을 월이 쏘아보았다.

 

  “승냥이라도 있더냐?”

 

  “도망친 듯합니다.”

 

  “승냥이를 핑계로 나를 또 기롱하려 한 것은 아니고?”

 

  “제가 어찌……,”

 

  “아니면 네가 그 승냥이인 것은 아니냐? 반반한 미색과 달콤한 말을 앞세워 여자들이나 후리고 다니는 승냥이 말이다.”

 

  소쌍이 억울한 듯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승냥이를 조심하라 이르는 승냥이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를 승냥이라 곧이 말하는 승냥이도 없지.”

 

  소쌍이 한쪽 눈썹을 실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리 웃지 말거라!”

 

  자꾸 믿고 싶어지니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그때 저만치서 월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빈궁 마노라, 어디 계셔요? 마노라!”

 

  석가이의 목소리였다.

 

  “나를 어수룩하게 보아 그러는 것이면 관두거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순진한 여인이 아니다.”

 

  돌아서던 월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저도 모르게 내뻗은 소쌍의 손이 월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찰나,

  지극히 짧은 찰나였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모조리 보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자빈과 기루의 무사가 아니라, 그저 월과 소쌍이라는 존재의 민낯을 보고 만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절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이 자신들의 생을 뒤흔들고 말 것이라는 것 또한.

 

  “왜, 왜 이러는 게냐?”

 

  월의 떨리는 목소리에 저도 놀랐는지 소쌍이 화들짝 손을 떼었다.

 

  “너와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월이 떨리는 눈빛을 감추려 차갑게 돌아섰다.

 

 

  * * *

 

 

  “대체 어디 계셨던 거여요? 온 절을 죄다 뒤졌는데도 뵈지 않으시더니.”

 

  산길을 잰 걸음으로 내려오며 석가이가 연신 투덜거렸다.

 

  “탑돌이를 하였다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갑자기 뭔 탑돌이냐구요. 그리구 탑돌이를 하러 가실 거면 말씀을 하셨어야죠. 사고라도 난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잖아요. 저 죽는 꼴 보고 싶으셔요?”

 

  “흠흠, 해가 곧 지겠구나. 서둘러야겠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시겠어.”

 

  월이 석가이의 잔소리를 잘라내듯 발길을 재촉했다.

 

  산에서의 오후는 짧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가 싶더니 반절도 다 못 내려왔는데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길까지 잘못 든 듯했다.

 

  “아이 참, 오랜만에 왔더니 헷갈리네. 아까 왼쪽 길로 갔어야 하나?”

 

  석가이가 연신 땀을 훔치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마노라, 여기 잠깐만 앉아 계셔요. 제가 얼른 길 좀 살피고 올게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거라. 허둥대니 길이 더 안 보이는 것 아니냐.”

 

  석가이가 재빨리 길을 되짚어보러 간 사이, 월은 나무둥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해가 진 숲은 더욱 진한 향을 뿜어냈다. 멀리서 이름 모를 산짐승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낮에 본 청량한 숲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곧게 뻗은 나뭇가지는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시원해보였던 나무 그늘에선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월이 치맛자락을 모두며 괜스레 헛기침을 하였다.

 

  “석가이는 어디까지 간 게야? 설마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같이 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 때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낮게 그르릉거리는 들렸다. 월의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헉!”

 

  숲 사이로 형형한 안광이 나타났다. 들개였다.

 

  한둘이 아니었다.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놈들은 여섯 마리나 되었다. 숲속에 몇 놈이 더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성대도 굳어버렸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큰 놈이 앞으로 나왔다. 월의 손이 앉은 자리 주변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 잡히는 것이 없었다. 월의 움직임이 거슬렸는지 우두머리가 캬악, 하며 이를 드러냈다. 날카롭게 솟은 이빨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컹컹!”

 

  우두머리가 짖자 나머지 개들도 짖기 시작했다. 월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귀를 틀어막았다.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고 느꼈는지 우두머리가 월 쪽으로 달려들었다.

 

  “캬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 것은 우두머리 들개였다.

 

  “괜찮으십니까?”

 

  사람의 목소리! 월이 얼른 눈을 떠보니 소쌍이 검을 들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다시 마주치게 되어 송구합니다.”

 

  소쌍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실그러뜨리며 웃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44 결結 2017 / 7 / 11 252 0 8434   
43 42장. 꿈은 여기까지죠 2017 / 7 / 11 240 0 5297   
42 41장. 가는 걸음걸음 붉은 꽃잎 점점이 떨어지… 2017 / 7 / 11 247 0 7140   
41 40장. 그대, 이렇게 돌아서니 2017 / 7 / 10 255 0 6921   
40 39장. 저의 마음을 여기에 두겠습니다 2017 / 7 / 10 247 0 6909   
39 38장. 그의 사랑을 지켜 나의 사랑을 2017 / 7 / 10 262 0 9344   
38 37장. 너는 나를 버릴 수 없고, 나는 너를 버릴… 2017 / 7 / 9 239 0 5709   
37 36장. 내가 아니라 너 때문에 2017 / 7 / 9 254 0 6554   
36 35장. 깊어지는 어둠 2017 / 7 / 8 266 0 6330   
35 34장. 나도 어렵고 너도 어려워라 2017 / 7 / 8 243 0 5512   
34 33장. 수십, 수백 번이라도 기꺼이 2017 / 7 / 8 229 0 6520   
33 32장. 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 2017 / 7 / 7 239 0 8483   
32 31장. 암흑의 소용돌이 2017 / 7 / 7 253 0 8165   
31 30장.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2017 / 7 / 6 254 0 7793   
30 29장. 이것이 마지막, 이렇게 마지막 2017 / 7 / 6 254 0 6452   
29 28장. 아니 된다 하여도 2017 / 7 / 5 251 0 7066   
28 27장. 아니라 해도 2017 / 7 / 5 248 0 7852   
27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2017 / 7 / 5 246 0 8017   
26 25장. 이렇게 돌아서면 2017 / 7 / 4 237 0 7564   
25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2017 / 7 / 4 285 0 8756   
24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2017 / 7 / 4 281 0 8427   
23 22장. 뜨겁고도 날카로운 첫, 2017 / 7 / 3 256 0 6587   
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6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6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3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7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4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43 0 9145   
 1  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