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서울시내 교통망 CCTV가 한 눈에 들어오는 컴퓨터 앞에 앉은 수사관은 5시부터 화계사로 올라가는 차들을 추적했다. 두 시간이 지나자 화계사로 올라간 소나타의 차량번호가 화면에 나타났다. 소나타의 주인을 알고 나자 지용운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새끼들이 정말! 한 놈은 범인을 은닉시키더니 한 놈은 도주를 도와? 김 대식 소재지 파악해봐. 장 석태보고 김 대식 연행하라고 해”
지용운은 화가 치솟았다. 그때만 해도 단순하게 태워준 걸로만 생각한 지용운이었다. 밤 열시 김대식은 임의동행형식으로 광역수사대로 끌려왔다. 조사실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 지용운은 살기가 등등했다.
“김 대식! 지금 뭐하자는 거야? 살인범을 체포해야할 경찰이 도주를 도와?”
“...”
김대식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지용운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눈앞에 놓인 책상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범인 도주를 도와주면 죄가 무겁다는 거 몰라?”
김대식은 자신이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경찰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그로서는 선배를 도운 죄로 옷을 벗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상황들을 정리한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해입니다. 저는 전혀 도운 적이 없습니다.”
광역수사대로 불려오는 차속에서 들은 이야기를 생각했다. 화계사에 들이닥친 수사관들의 시간, 그들이 종무실에서 들은 애기를 종합해볼 때 마치 송정수가 소나타를 직접 운전한 것처럼 보였다.
“뭐가 오해라는 거야?”
“저도 차가 도난당한 줄 몰랐습니다.”
“뭐? 도난? 그게 통할 말이야?”
“진짭니다. 제 차를 강동서 주차장에 세워뒀는데 퇴근할 때보니까 없었습니다.”
“그게 말이라고 해?”
“사실입니다. 다만...”
“다만 뭐?”
“다만 송 정수 계장님이 가져갔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뿐...”
“어떻게 짐작한다는 거야?”
“자신이 몰던 차가 수배되었는데 달리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제 차니까 몰래 가져가도 괜찮다고 생각했겠죠.”
“그럼 안 만났단 거야?”
“정말입니다. 만났으면 일 계급 특진인데 제가 체포했겠죠. 살인범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지용운은 김대식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말에 아니라는 증거를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넨 두 사람이 검거될 때까지 당분간 내 눈 앞에 있어. 핸드폰도 압수야.”
“강동서에는 뭐라고 합니까? 당장 내일 출근하지 않으면 난리 날 텐데...”
“그건 염려하지 마. 당분간 인력 충원으로 광수대에 있다고 말을 해줄 테니까”
지용운은 김대식을 믿지 못하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두 사람이 만났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아니라고 말하는 김대식을 향해 무조건 그 말을 거짓이라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자신의 눈에 묶어둔다면 차후 김대식의 도움은 끊어질 것이라 믿는 지용운이었다. 살인자와 살인자를 돕는 송정수, 그 두 사람을 돕는 어떤 누구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날 밤 김대식은 핸드폰을 뺏긴 채 광역수사대에서 하는 일없이 밤을 지새웠다.
9월 30일, 아침 일찍 호텔에서 눈을 떤 정수는 아홉시가 되자 호텔 전화로 곽상근에게 전화를 했다. 핸드폰은 고객의 사정으로 임시로 정지되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시 명함에 적혀있는 사무실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곽 상근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출타중이신데요”
“핸드폰이 안 되던데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까?”
“우짠 일로 그라신대요?”
“제 이름은 송 정수입니다. 전화 왔더라고 하면 알겁니다. 제 전화도 번호 바꿨다고 말해주시고 010.4621.5XXX로 전화해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아참, 한 시간 이후부터 통화가 가능합니다.”
“예. 알것네요. 전해 드리것습니다.”
아침 일찍 곽상근은 군산에서 선주를 만나고 있었다. 밀항선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배도 조건만 맞으면 밀항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밀항에 이용된 배는 발각 즉시 형사적 책임을 져야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간 실형을 사는 중범죄에 해당했기에 아무나 나서지 않았다. 첫째는 충분한 보수가 있어야했고, 둘째는 밀항을 하더라도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했다. 특히 주선자가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의 타지 인이라면 불가능했다. 또한 공해 상에서 넘겨받을 배를 미리 수배를 해둬야 성공할 수 있었다. 네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하므로 밀항선을 하나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곽상근은 선주와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새벽에 광주에서 출발하여 군산지역 건달들의 소개를 받고 찾아간 것이었다. 곽상근은 그 흔한 명함 한 장도 건네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부탁하나 들어주십시오. 빠를수록 좋습니다. 청도로 갈 건데 배하나 띄어주십시오.”
“동수 동상 소개로 왔다는 건 알지만서도 그게 그리 쉽간디? 요즘 공해상 단속도 심허고...”
“쉬우면 부탁하겠습니까? 제가 준비한 돈은 이게 전붑니다.”
곽상근 신문지에 둘둘 말린 두툼한 쇼핑백 하나를 선주에게 내 민다. 선주는 신문지부터 풀어본다. 만 원권으로 5천만 원이 들어있었다. 말이 선주지 작은 배로 고기잡이로 평생을 살아온 70대 영감은 한번 나가도 경비를 제외하면 백만 원 벌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 어선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고기 씨를 말리는 통에 어획량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내일 저녁에 고기잡이를 위해 출항을 할 계획이었다. 영감은 돈 뭉치를 등 뒤로 밀어 넣는다.
“10월 1일에 출항할 계획인디 우짜요? 괴안겠소?”
“배를 탈 사람과 연락을 취해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만 날짜는 하루 이틀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루 전에는 연락을 줘야 저짝에도 연락을 취할 것이구먼”
“아 청도요?”
“그라제. 저짝과 날짜를 맞춰야 하니께”
“알겠습니다. 오후에라도 전화 드리겠습니다.”
대화가 마무리되고 일어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큰 형님! 송 정수라고 라는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다고 바뀐 번호로 전화해달랍니다.”
“알았다. 지금 일마치고 출발한다. 문자로 찍어 보내”
곽상근은 일어섰다. 산복주공아파트를 빠져나온 에쿠스는 곧장 동군산IC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에 접어든 차는 광주로 향해 남하했다. 에쿠스가 고창을 지날 때쯤 곽상근은 핸드폰에 찍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상근입니다.”
“아, 상근이구나. 내 핸드폰 바뀌어서 전화했다.”
“저도 바꿨습니다. 짭새가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고... 부탁했던 건 어때?”
“지금 군산에서 일보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구했습니다. 언제가 편하십니까? 당장 내일도 괜찮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내일이라... 몇 시에 떤다니?”
“저녁 여섯 시에 출항한답니다. 공해 상에서 새벽 한시에 중국배로 갈아타야 한답니다.”
“내일 저녁이라... 알겠다. 그렇게 하자.”
“내일 제가 군산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군산항 부근에 오스카스위트호텔이라고 있습니다. 호텔 커피숍에서 오후 두 시쯤 뵙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내일 보자”
정수는 곽상근의 전화를 받고 시계를 보았다.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리는 이미 샤워를 하고 화장을 마친 후였다. 양복 입기를 꺼려하던 나리는 짧은 머리임에도 여자 옷을 입었다. 이제 하루뿐이었다. 밀항선도 구했고, 그녀와 함께 지낼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며칠 입은 정수의 양복바지도 잔주름이 가서 엉망이었다. 그런 바지를 나리는 거부했다. 말릴 수가 없었다. 어젯밤 위통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정수였다. 침대에서 잠자던 나리가 깰까봐 욕실에서 혼자 위통과 사투를 벌였다. 병원에서 준 약도 아침에 먹고 나자 떨어지고 말았다. 아파도, 고통스러워도 그녀의 앞에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었다. 얼굴빛이 창백했다. 나리는 땡땡이 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짙은 군청의 바바리를 걸쳤다. 두 사람은 호텔을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둔 소나타 뒷좌석에 트렁크를 실었다.
“배고프죠?”
“난 괜찮지만... 정수 씨 배고프겠다.”
“내일 저녁에 배가 출발한답니다. 이것저것 당신 필요한 것 사야겠어요. 밥 먹고 백화점에 가요.”
“꼭 가야해요? 안가면 안돼요?”
“안가면 어쩌려고? 힘들어도 살아야지...”
“지금도 힘들어요. 차라리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왜 당신까지 힘들면서 이래요?”
“다 내 책임이니까... 당신이 이렇게 된 건 내 책임이니까...”
“차라리... 차라리 좀 더 일찍 오지. 왜 이제야 왔어요?”
나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방울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는다. 고였던 눈물이 이내 주르륵 볼을 타고 떨어졌다.
“차라리 죽어도 서울에서 죽을래.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중국에서 어떻게 살아?”
정수는 지갑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어 나리의 손에 쥐어준다.
“청도에 도착하면 이 곳으로 전화를 해요. 내가 이미 연락해뒀으니까 당신 있을 곳을 만들어 줄 거예요.”
“누군데요?”
“내 사촌 동생. 청도에서 봉제공장을 하는데 살만큼 사니까 당신이 지낼 만 할 거요. 나도 정리 되는대로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정수의 마음은 그랬다. 이제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다. 한 여자를 위하여 평생을 산 그였다. 아내의 배신도 감내하며 두 딸을 위하여 참고 또 참은 정수였다. 이제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뒤를 생각하지 말자. 뒤는 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하던 정수였다. 소나타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은 11층에 있는 식당가로 들어섰다. 한식을 먹겠다는 나리를 위해 불고기를 먹고 다시 백화점 1층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화장품가게에서 서성그릴 때 광역수사대에는 새로운 단서가 포착되었다. 송정수의 신용카드가 사용되면 바로 컴퓨터에 띄도록 해두었지만 김대식이 어젯밤 소환된 후에는 김대식의 신용카드마저 추적을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지용운은 김대식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