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가상의 왕이 등장하는 픽션소설임을 밝혀둡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등은 실제 역사와 다소 차이가 있답니다.
【태양이 된 달 – 왕이 된 여자】
제15화 : 운명을 거슬러
-- 운명을 거슬러 살아남아, 운명을 거슬러 삶을 지배할 것이다!
대현군은 분홍빛 비단 저고리에 소매가 색동으로 덧대워진 야장의(夜長衣)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소현옹주가 입던 잠옷이었다.
경조는 두 아이가 바뀌었다는걸 알아채자 미친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정신을 차려야돼! 정신을...'
마음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보모상궁 김상궁의 치마로 몸을 반쯤 가리고 선, 놀라서 새하얗게 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살피는 아이를 보게 된다.
걱정이 가득한 사랑스러운 아이
대현의 잠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가 분명한 소현옹주였다.
'두 아이가 바뀐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왕은 대현의 옷을 입은 소현옹주와 소현의 옷을 입고 쓰러져 있는 대현군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품안의 대현군은 이제 곧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날은 대현군과 소현옹주의 어머니 후궁 수빈 진씨의 제사날이었다.
소현옹주 월은 낙안재의 화재때 화마속에서 헤매이는 자신을 구한 후 돌아가시게 된 어머니 수빈 진씨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수빈은 분명
“아가... 너 때문이 아니야!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단다. 자책하지 말거라”라며 남겨질 월이 걱정되어 몇 번이나 당부를 하였건만, 월은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제사를 모시기 전 소현옹주는 대현군에게 부탁을 했었다.
"현 오라버니... 나도 어마마마께 절을 올리고 싶어! 작년에도 나는 여자아이여서 절을 못드렸잖니? 올해는 꼭 절을 올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그래? 그럼, 월아... 우리 옷을 바꿔 입을래?"
대현군 현은 곰곰이 생각하다 그런 제안을 했었다.
"우리는 얼굴이 너무 비슷해서 옷을 바꿔입고 아무말 안하고 있으면 궁인들도 잘 모를거야... 월아! 이번에는 네가 어마마마께 절을 드리도록 해!"
그랬다.
두 아이는 남자와 여자로, 서로 다른 성으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였지만 그 용모가 매우 닮았었다.
키도 비슷하며 얼굴 생김도 매우 비슷하나, 그 풍기는 분위기는 오히려 대현군이 단정하고 조용한 여자아이, 소현옹주가 씩씩하고 호기심 많은 남자아이의 느낌을 드러냈다.
그래서 두 아이는 서로의 옷으로 바꿔입고 서로의 목소리와 행동을 따라 하며, 간혹 궁인들을 속이는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대현군과 소현옹주가 그런 장난을 치면 가까이에서 두 아이를 모시던 궁인들조차도 깜박 속곤 했었다. 그렇게 속는 궁인들의 모습을 보고 깔깔깔 웃으며 좋아하던 두 아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늘 함께 자라고, 함께 공부하며 둘은 서로 강하고 깊게 교감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의 해와 달처럼, 영혼의 반쪽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의지해 오면서 커오고 있었다.
대현은 소현의 제안에 서로 옷을 바꿔입고 소현이 어마마마께 절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晛)은 월(月)보다 겨우 몇 분 먼저 태어난 오라버니지만 훨씬 더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소현이 부탁하는 일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대현은 자라오면서 느끼고 있었다.
할마마마 수인대비 한씨는 소현옹주를 늘 탐탁지 않게 보았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라 남녀가 유별한데, 두 아이는 열 달을 한 배에 있었다고... 왕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망측함이라 했다. 또한 소현옹주가 대현군에게 해라도 미칠까 늘 염려하며 아직 어린 소현옹주를 무섭게 훈육하곤 했다.
"소현옹주! 대현군을 앞질러 걷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너는 대현군을 위해 없는 듯이 있어야 한다. 대현군이 저 하늘의 해라면 너는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보이지 않는 달이란 말이다! 알겠느냐?"
"네... 할마마마!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소현옹주 월은 한기가 돌 정도로 매섭게 말하는 대비의 말씀을 한번도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늘 월만 보면 화를 내는 대비를 내심 어려워했다.
대현군은 그런 소현옹주가 안스러웠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특히 여자로... 동생으로... 태어난 소현옹주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 무척이나 크다는 것을 대현군은 어린 나이에도 온 몸으로 알수가 있었다.
어마마마 수빈의 제사를 마친 후,
비선재로 돌아온 월은 현에게
"현 오라버니! 오늘밤은 어마마마 이야기를 하며 함께 잠들지 않을래? 돌아오면서 보니 바람이 심상치 않던데... 나 무서워...! 오라버니~ 같이 자자!"
라고 대현군을 졸랐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오는 날이 소현은 유독 두려웠다. 낙안재에 불이 나던 날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부는 것에 맞춰 불이 춤을 추던 날...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거대했던 불길!
그 불길은 결국 사랑하는 어머니 수빈 진씨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또한 소현옹주의 다리를 다 태워버릴 듯이 뜨겁게 느껴지던 불꽃의 느낌까지...
월은 그날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선재로 돌아오면서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본 소현은 곧 심상치 않은 비가 내릴 것을 직감했다. 어마마마가 돌아가신 날도 비가 내렸다. 한 낮인데도 마치 한 밤처럼 느껴지던 어두운 날씨... 비구름이 태양을 모두 덮어 버렸는지 다시는 태양을 볼 수 없을 듯 비가 내리던 날.
그 날, 어머니 수빈 진씨는 먼 길을 떠났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대현군은 소현옹주가 함께 잠들기를 청하자 그러자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둘은 이부자리에 함께 나란히 누워 오랫동안 어마마마 이야기를 한다.
어마마마와 행복했던 이야기들..
너무나 따스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는 서화에 얼마나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종종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어머니는 그 모습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리운 어머니 수빈이 가슴에 차올라 어린 소현은 눈물을 탁 터뜨렸다.
"으아앙... 어마마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나를 구하시다가... 그렇게... 으아앙"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소현옹주에겐 너무나도 아픈 기억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직 어린 월의 작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마마마는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현아~"
대현은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소현에게로 와 등을 톡톡 두드리며 다독거렸다. 6살답지 않은 의젓함이었다.
"울지마... 현아... 괜찮아..."
대현군은 소현옹주에게 자주 "현아..."라고 불렀다.
소현의 이름은 월(月)이였지만,
월이라는 이름 대신 소현의 끝자 "현"을 다정히 부르곤 했다.
그것은 마치 대현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대현군의 이름이 이 현(晛:햇살 현)이었다.
월은 현의 따뜻한 다독거림에 다시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소현옹주에게 대현군은 태산같은 든든함을 주는 오라버니였다. 늘 괜찮다고... 너에겐 내가 항상 곁에 있을테니까... 걱정말라고 하는 대현군!
월은
"현 오라버니... 나만 놔두고 어디 멀리 가고 그러면 안된다! 알겠지?"
라고 다시 한번 약속을 받는다.
대현은 해사하게 웃으며
"그럼... 우리는 쌍둥이니깐. 하늘의 해와 달처럼 언제나 같이 있는 거야!"라고 다시 한번 확신있게 대답해준다.
"내가 우리 월이와 아바마마를 굳건히 지켜드릴거야!"
그러면서 주먹을 불끈 지어보이며 흡!하며 기합을 넣는 대현군. 말갛고 뽀얀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현도
"아니야.. 아니야.. 우리 대현 오라버니와 아바마마는 이 소현이 지켜드릴거야.. 얍!" 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소현의 얼굴도 금새 달아올랐다.
둘은 서로 바라보며 맑게 웃다가 잠들었는데...
축시를 넘기는 시점에
대현군의 괴로워하는 숨 소리에
소현옹주가 잠을 깨고 일어난 것이었다.
대현군은 숨이 끊어질 듯 힘든 숨을 내쉬면서도 소현옹주를 찾았다.
소현옹주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대현군을 바라보았다.
월도 느끼고 있었다.
현이 이대로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을... 돌아가신 어마마마처럼...
“너만 놔두고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라 약속했는데...
미안해... 현아...
나 아무래도 엄마한테 먼저 가야될 것 같아... 허억... 허억...“
대현군의 숨이 끊어질 듯 하였다.
"안돼... 안돼..."
소현옹주는 다급히 오라버니 대현군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저 하늘의 해와 달 오누이처럼
오랫동안 같이 있자고 했잖아... 엉 엉 엉"
소현옹주의 손을 잡고 혼자 남겨두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눈을 감는 대현군의 모습을 훗날 소현옹주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밤,
어머니처럼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대현 오라버니의 맑고 슬픈 눈망울을...
이윽고 맞잡은 소현옹주의 손에서 툭 떨어지는 대현의 손!
쿵!
경조는 자신의 심장도 함께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현아... 아가..."
경조는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이 나즈막히 대현군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오늘 저녁만 하여도 그렇게 밝게 웃던 대현군이 아니었던가?
대현군은 아직 어린 나이었지만 경조의 믿음직한 장자였다.
두 아이는 수빈의 제사를 마치고 손을 잡고 정답게 대전을 걸어 나갔었다.
경조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하였다.
이제 겨우 여섯해를 넘긴 사랑스러운 사내아이
왕의 장자이자 하나뿐인 아들 대현군 - 이 현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며 숨을 거두었다.
슬픈 울음소리만이 동궁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