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는 1분 간격으로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다시 핸드폰을 버리고 잠적한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초조하게 핸드폰만 바라볼 뿐이다. 1시간이 지나고서야 답장이 왔다.
“어쩐 일이세요? 소식도 안주던 분이”
그녀 역시 아주 짧은 답이었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대화가 이어지지?’ 짧은 시간에 정수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문답형으로 맞추어 나갔다.
“때로는 옛 사람이 그리울 때도 있죠. 요즘 그런가봅니다. 시간되시면 얼굴 한번 봐요. 소주도 한 잔 하면서.”
참 생뚱맞은 문자였다. 문자를 보낸 후 후회스러웠다. 옛 사람이 그리울 때도 있다니, 정말 미친 소리 같았다. ‘떠날 땐 언제고 2년이 지나서 옛 사람이 그립다니’ 정수는 자신이 보낸 문자를 보고는 아차! 했다. 이 문자에 답장이 안 온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또 1시간이 흘렀다. 1시간동안 정수의 입술을 바짝 말라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병실에서 핸드폰만 붙들고 있었다. 답장이 왔다.
“좋아요. 우리 만나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알죠? 양수역”
그랬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 양수역이었다. 양평 쪽 펜션을 소개해준 정수를 만나기 위하여 양수역으로 나간 나리였다. 그때는 나애림도 함께 간 날이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양수역에서 만나기로 하는 문자를 주고받았다.
나리는 핸드폰을 닫으면서 손이 떨리고 있었다. 2년 전 그날, 날마다 울던 그날, 이 남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노래만 부르면 추가열의 ‘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를 부르던 그때, 사랑의 열병으로 씨름씨름 앓던 그때, 그때 그 사람의 문자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던가. 나리는 핸드폰을 덮고 나서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나리는 수첩을 펼쳤다. 네 번째 아랑, 다섯 번째가 바로 송정수였다. 또 순번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볼펜으로 4자를 5자로 고치고, 5자를 4자로 고쳐 넣었다. 송정수를 만나기로 한 내일, 나리는 정수를 죽이는 날로 정해버렸다. 해가 서산에 걸렸을 때 강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리는 그때서야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9월 중순의 하루는 옛 연인과 불행한 재회로 저물고 있었다.
정수는 과거에 나리를 알던 사람들의 주변부터 찾아다녔지만 별 소득 없이 일주일이 지나고 있을 때 생각지도 않은 이란에게서 그녀의 행적이 포착되었다. 매일 광역수사대에서 수사한 진행상황을 김대식으로부터 연락받았지만 광역수사대에서도 별다른 수사의 진전이 없었다. 오로지 쳐둔 그물에 용의자가 걸리도록 기다릴 뿐이었다. 숨어버린 용의자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무의미했다. 또 다른 피살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미제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용의자라고는 한 사람 있지만 용의자의 행방조차 찾지 못하는 광역수사대는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질타를 받기 시작될 쯤, 은행 창구에서 일도상사로 송금한 날짜에 CCTV 카메라에 찍힌 여자를 끈질긴 탐문수사를 통해 찾아냈다. 여자는 은행 부근에 있는 커피점 종업원이었다. 여자는 송금을 부탁한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송금을 부탁하면서 2만원을 쥐어주었고, 송금하고 올 동안에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던 여자는 수사관이 제시한 사진 속의 인물이었다. 용의자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나타나자 광역수사대도 바쁘게 돌아갔다. 각 지방 검문소마다 사진이 배포되고, 경찰서와 지구대마다 수배 전단지가 붙었다. 수배 전단지 인적사항에는 김우진으로 적힐 뿐 사진은 나리의 주민등록부에 올라있던 여자 사진이었다. 김대식은 광역수사대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을 정수에게 즉시 알렸다.
나리는 자신이 수배가 되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벌금을 내지 않아서 이미 기소중지는 되어 있었지만, 살인범으로 수배된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정수를 만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모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수는 다음 날 나리를 만나기로 했으면서도 광역수사대에 보고하지 않았다. 김대식에게도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그녀와 맞닥트리려고 작정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옥죄어오는 섬뜩함은 몽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세 건의 살인사건 범인이 그녀라면, 그녀를 만나서 어떡하겠다는 말인가?’ 스스로 반문을 해보아도 명쾌한 해답이 없었다. 정수는 스스로 자신도 살해의 타깃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만남을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연쇄살인범이라면 이제는 살인을 말리고 싶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여자, 세상이 그녀를 등졌다고 해야 옳았다. 잔인한 복수는 세상을 향한 분노였고, 그녀를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살해의 대상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하더라도 그녀를 만나야했다. 그 역시 그녀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몽골이 송연하던 두려움도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정수에게 드리웠지만 정수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통의 간격은 점점 빨라졌다. 가끔 오는 위통에 온 몸을 뒤틀다시피 했고, 통증이 사라질 때는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가득 고였다.
다음날, 나리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연인을 만나는 여자처럼 미용실 문이 열리기가 바쁘게 미용실로 들어섰다. 올림머리를 한 나리는 단정한 여자처럼 보였다. 짙은 화장을 하자 어느새 단정한 여자가 요염한 여자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하는 짙은 화장은 그녀를 딴 사람으로 만들었다. 긴 원피스는 드레스를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했다. 마치 가을 여행을 가는 여자처럼 보였다. 핸드백에 숨겨둔 칼만 없다면 그녀는 지금도 사랑받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렇게 준비한 나리는 정오가 되자 집을 나섰다. 자동차는 세워둔 채 역삼역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집과 역삼역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을 만큼 교통이 편리했다.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빌라라서 아늑한 맛은 없었으나 장점이라고는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나리는 지하철 앱으로 역삼역에서 양수역까지 소요시간을 확인했다. 왕십리역에서 용문행을 갈아타고 양수역에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략 1시간 30분, 시간까지 계산하고 움직였다.
그 시각, 정수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나섰다. 어젯밤 집에 가서 산타페를 가져와서 병원 지하주차장에 세워두고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정수였다. 아침도 병원에서 주는 밥으로 해결했지만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눈은 충혈 되어서 시뻘겋고 얼굴도 푸석푸석했다. 마치 환자처럼 보였다. 이틀전만해도 이 모습은 광역수사대 수사관들에게 보여줄 연출된 모습이었지만 어제부터 시작된 강한 위통으로 몰골이 형편없었다. 이제 연출하지 않아도 영락없는 환자처럼 보였다. 정오가 되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담당의사가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했지만 정수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빨고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나리는 연인을 만나는 모양새였다면, 정수는 사별한 남자의 모양새였다. 그만큼 정수의 모습이 형편없었다. 티셔츠에 점퍼를 입은 모습은 공사판의 잡부처럼 보였다. 머리도 이틀식이나 감지 않아서 기름기가 번들번들했다. 산타페는 모래네 고가차도에서 내부순환도로로 들어섰다. 절기상 추분이라서 그런지 제법 가을 날씨처럼 창문을 열면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정수는 창문을 내렸다가 이내 올려버린다. 병원 조제실에서 준 약봉지를 뜯어서 알약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고는 생수병을 들이킨다. 그러면서 헛구역질을 연신 한다. 이런 몸으로 운전을 하는 것조차 버거워보였지만 정수는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이미 빠져버렸다. 정확하게 2년 2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들떠야 함에도 들뜰 수가 없고, 기뻐야 함에도 기쁠 수가 없는 재회. 정수와 나리의 재회가 그랬다.
정수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녀를 만나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만나기로 했다. 형사로서 용의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옛 연인의 소식이 궁금해서 만나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정수였다. 그러나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정수는 드라마의 대사를 읽듯이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어디서 살아요? 아픈 곳은 없어요?’ 몇 번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이내 머리를 흔든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이런 인사가 가당키나 해?’ 그리고는 다시 또 중얼거린다. ‘왜 그랬어요? 바보같이 왜 그랬어요? 그래도 사람을 죽이다니,’ 정수는 백미러를 돌려서 중얼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본다. ‘이런 젠장! 이게 할 소리야? 왜 그랬냐고? 네가 몰라서 물어?’ 정수는 거울을 보고 스스로 문답을 하다가 백미러를 확 꺾어버린다. 산타페는 남양주로 접어들었다. 정오에 출발한 차는 이대로만 가면 약속시간보다 삼십분 일찍 양주역에 도착할 판이었다. 도로는 막힘이 없이 잘 뚫렸다.
다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헛구역질이 나와도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담배뿐이라고 생각하는 정수였다. 불을 붙이고는 폐 깊숙한 곳까지 한 모금을 빨았다. 콜록콜록! 연신 기침이 쏟아졌다. 기침에 목이 따갑더니 눈에 눈물마저 고였다. 그렇게 시작된 눈물은 계속 흘러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이 따가워서 잠시 고인 눈물이 아니었다. 정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다. 정수의 머리에는 마지막으로 본 나리가 떠오른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두운 조명아래 울고 있던 그녀였다. 정수는 그날 7080노래주점에서 마지막으로 본 나리가 생각났다. ‘개새끼! 너는 개새끼가 맞아. 참 나쁜 놈이네. 사랑하는 여자를 울리면 안 된다면서, 그런데 너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정수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 던진 질문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가슴이 아려왔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찌른 듯이 아려왔다. 그러자 눈물은 더욱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