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는 헤라의 정문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눌러 쓴 모자를 더 눌러썼다. 그리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손님이 찾아왔는지 알고 여자가 나리를 맞이했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준비 안 되었는데...”
“누나 아닙니다. 대리기사입니다. 혹시 부를 일 있으시면 꼭 전화주세요.”
여자는 남자가 살갑게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싫지 않은 듯했다. 나리는 여자에게 명함과 둔촌역 앞에서 산 스타킹 세 개를 손에 쥐어주었다.
“뭘 이런 걸 다... 알았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이뿐 누나. 그럼 부탁합니다.”
남자가 돌아서자 여자는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그녀는 세실리아였다. 그녀는 남자를 몰라도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 헤라의 마담으로 오픈 때부터 줄곧 사장 대신해서 가게를 책임지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이뿐 누나라고 불러주는 남자에게 호감이 갔다. 금요일과 토요일이면 가게에 찾아오는 사장은 항상 술에 취했기에 대리기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올 때마다 다른 기사가 배정되는 바람에 껌 한통도 서비스가 없는 대리기사 보다 호남형의 대리기사가 직접 찾아와서 스타킹까지 주자 이참에 대리기사를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실리아는 남자가 준 명함을 카운터 옆에 꽂아놓았다.
여덟시가 지나자 애림은 가게로 들어섰다. 나리가 나간 지 불과 이십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리는 또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성내중학교 후면 담벼락에 세워둔 차에 올라탄 후 배낭을 열어 신문지 뭉치를 끄집어냈다. 신문지를 펼치자 예리한 칼이 독을 품고 누워있었다. 칼을 집어서 날카로운 칼날에 왼쪽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세키카네쓰구’, 몇 번을 세키카네쓰구라며 중얼거렸다. 바로 이 칼의 이름이 세키카네쓰구였다. 일식당에서만 쓰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사시미 칼이었다. 칼은 일반 칼보다 넓이가 좁고 길이는 길었다. 어쩌면 회를 뜨는 것보다 사람을 찌르는 용도가 더 어울릴 듯했다. 나리는 칼을 살피고는 다시 신문지에 말아서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대포폰이 울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무려 네 시간이나 차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살인을 위해서는 집요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이었기에 한 치도 오차를 벗어나지 않았다.
“네. 대리기삽니다.”
“여기 헤라예요. 아까 오셨던 기사님이죠?”
“아네. 이뿐 누님이구나. 지금 갈까요?”
“네. 얼마나 걸려요?”
“5분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리는 헤라로 걸어가면서 애림의 차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가게 앞에 세워둔 은색 제네시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 차군! 구형 소나타를 몰더니만 많이 컸네.’ 나리는 제네시스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누님. 대리기삽니다. 헤라에 도착했습니다.”
“빠르네요. 호호호 잠시 기다려요. 우리 사장님이 술에 취하셔서... 내가 모시고 올라갈게요.”
“네. 천천히 나오셔도 됩니다.”
10분 후 애림은 세실리아의 부축을 받으면서 1층으로 올라왔다. 나리는 애림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대각선 방향에서 비스듬히 서서 차 열쇄와 목적지가 적혀있는 메모지를 받았다. 애림은 세실리아가 열어주는 뒷좌석에 타고는 머리를 기대고선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내비게이션 찍고 주소지에 도착하면 우리 사장님 깨워주세요.”
“염려마세요. 이뿐 누님. 감사합니다.”
“잘 모시면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은 고정으로 대리운전 줄 테니까, 아셨죠?”
“넵. 잘 모시겠습니다.”
나리는 운전석에 앉자 차안에 설치된 전방카메라와 후방카메라의 전원 스위치를 모두 꺼버렸다. 내비게이션에 의정부의 주소를 찍었다. ‘잘 모시면 대리운전을 고정으로 준다?’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피씩 웃으며 백미러로 애림을 쳐다보았다. 중늙은이의 모습을 한 애림은 고개를 옆으로 처박고는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제네시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던 세실리아에게 대리기사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제네시스는 헤라와 세실리아를 남겨두고 둔촌역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다시 백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벗겨진 중늙은이는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보였다. 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천호대교를 올라탄 제네시스는 강변북로를 통하여 동부간선도로로 나아갔다. 애림을 어디에서 죽일지는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 차에만 태운다면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이 죽일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아무런 문제없이 애림은 차에 태워졌고, 그 차의 운전을 나리가 하는 것이었다. 동부간선도로로 접어든 차는 의정부까지 곧장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월릉IC에서 우회전을 해버렸다. 그리고는 내비게이션을 꺼버렸다. 봉화산역으로 방향을 털었다. 봉화산역을 지난 제네시스는 서울의료원 외부주차장에 서버렸다. 밤늦은 서울의료원 외부주차장은 인적이 드물었다. 길 가에는 대형 트럭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제네시스는 주차된 대형 트럭 사이로 들어갔다.
대형 트럭들로 길가에서도 쉽게 제네시스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은 어두웠다. 트럭의 화물칸 높이가 제네시스를 가려주었다. 나리는 차에서 내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긴 호흡을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나리의 행동에는 초조함이 없었다. 세 번째 살인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놈이라서 그럴까? 담배 한 개비를 천천히 피우고는 조수석에 둔 배낭에서 신문지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는 신문지 안에 숨겨둔 칼을 오른 손에 들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늙은이는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나애림을 흔들었다. 흔들어도 깨어나지를 않자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아픈 통증에 놀란 애림은 눈을 뜨고 쳐다보지만 어둠에서 상대를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구야?”
나리는 말없이 모자와 굵은 뿔테 안경을 벗었다. 어둠이지만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목구비였다.
“나리?”
“날 알아보겠어?”
“여긴 어디야?”
“네가 죽을 곳!”
“뭐?”
“개새끼! 네놈이 죽을 곳이라니까. 아직도 모르겠어?”
“왜 왜 그래?”
“왜? 넌 왜 그랬냐?”
더는 말을 섞는다는 자체가 무의미했다. 살려두려면 변명이라도 듣겠지만 죽이려고 마음먹은 이상 변명도 시간 낭비였다. 나리는 왼손으로 애림의 목을 누르고는 오른 손에 들려있는 칼로 왼쪽 심장을 깊숙이 찔러버렸다. 칼이 심장에 닿을 때쯤에 애림은 발버둥 쳤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날카로운 칼은 심장 깊숙이 박혀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고함도 칠 수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순간, 애림은 그렇게 사늘한 시체로 변해버렸다. 상대가 나리라는 것을 알아본 후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리는 애림의 숨이 멎을 때까지 칼을 놓지 않았다. 칼을 찌른 채,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네가 언니라면서? 내가 동생이라면서? 그런데 왜 나한테 그랬어?’ 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애림은 마지막으로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온 몸의 힘이 빠졌다. 나리는 가슴에 칼을 꽂아둔 채로 지문을 모조리 지운 후 제네시스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