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수(被囚)
"어디로든 도망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 … .”
“어디든 가서 다시 시작하면 그만입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서 나혜와 나와 당신. 몸 뉘일 곳 하나 찾아 함께 살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살면, 그렇게 살아가면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 .”
정신없이 눈물을 닦으며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깜깜히 죽은 것에 가까운 눈으로 인기척 하나 없는 창호문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천천히 문고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 … 한 시도 당신을 그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나를, 나를 데려가세요. 나는 이렇게나 아직도 당신을… … .”
힘 하나 없는 여인네의 손에 거짓말처럼 육중한 창호문이 열렸다. 외려 밖이 더 스산한 회현궁은 어느덧 해가 저물어 어두컴컴했다. 별 빛 하나 없는 싸늘한 초여름의 밤. 그 날은 왕후(王后) 사씨가 유폐된 지 아흐래가 되던 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빛 하나 없는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사씨가 넋을 놓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생을 바쳐 사랑한 임이 기어코 저를 버렸다는 사실은 그녀가 평생을 바라온 숙원을 앞당기기에 충분했다. 몇 번의 울부짖음과 흐느낌이 멎고 무언가에 맞은 것 마냥 머리가 새하얀 백지로 가득해졌을 때, 그녀는 제 죽음을 예감했다.
“사랑한다, 나혜야.”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두덩이를 두 어 번 훔친 그녀가 애써 입매를 끌어올렸다. 모성보다는 사랑이 더욱 중했고 그렇기에 그것을 시발로 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로 한 맺힌 생(生)이였다.
"너를 사랑한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매끄럽게 올라간 입매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제 피가 섞인 어린 계집을 남기면서 웃어주는 것이 전부인 어미. 그러나 기실 사씨는 고아한 여인이었다. 궁 안 그 누구보다 선하고 아름다웠던 여자.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지쳐 차라리 죽기를 매일같이 기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해서, 그런 성품을 가졌기에 비로소 제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었다. 계집아이는 그 을씨년스럽고도 기괴한 제 어미를 두고도 동요 하나 없이 고개를 들었다.
“하니 너는 살아남거라.”
"... ... ."
"살아서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살려무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눈물을 삼킨 그녀가 선연히 웃었다.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사씨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하얗게 질린 딸 아이가 발작처럼 제 다리를 부여잡는 것을 보고도 태연히 당의를 찢은 그녀가 참은 숨을 내뱉듯 느릿하게 교의(交椅)에 체중을 실었다. 다소 멍하니 천장을 보던눈이 기어이 감기고 그렇게 왕후는 제 딸이 보는 앞에서 목을 매었다.
금방 죽은 어미의 음성이 환청 마냥 맴돌던 그 순간-
아직 식지도 않은 어미의 시신을 목도한 계집이 정신줄을 채 놓기도 전에 회현궁은 불로 타 들어갔다.
삽시간에 불이 그들이 있는 내궁까지 붙었음에도 계집아이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뻘겋고 뿌연 연기 사이로 제 어미의 얼굴이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될 즈음 아이는 죽기 직전의 발악처럼 낮게
울음을 토해냈다.
살아남거라-
지독한 연기에 금방이라도 까무라칠 듯 정신은 혼미한 데 오직 그 환청만이 저가 아직 살아있음을 실감케 했다.
“나혜야!”
일각의 시간이 지나 도포를 입은 사내가 다급하게 아이를 찾았다. 매캐한 연기에 결국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던 아이를 그 정체 모를 사내가 안아 들었다. 그는 쓰러진 계집아이 위로 매달려 있는 싸늘한 시신을 발견하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불을 끄려는 노비들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발을 떼었다.
숨이 붙어있는 아이를 커다란 자주 빛 천으로 감싸 안으며 사내는 제가 왔던 출구를 향해 달음박질했다. 그리고 아이, 나혜는 그 품에 안겨 궁을 빠져나가면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살고 싶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갈망하던 것은 죄 잃고 종래엔 제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끊은 어미가 소름끼치게 두렵고 원망스러웠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지 제가 살 수 있는 지도 몰랐다. 그저 어찌 살아도 좋으니 예닐곱의 어린 계집은 살고 싶었다.
나혜가 가까스로 얼굴을 들어 스러져가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불길이 잡혀 진화되었으나 화마는 이미 회현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킨 후였다. 이는 사씨를 원비로 둔 혜종의 마지막 역작이었다. 미치광이 왕이 직접 회현궁에 불을 놓은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사씨의 불명예스러운 자살도 함께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마땅한 후계자 하나 없었던 왕은 제 광기에 사로잡혀 새벽이 오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는 그를 암군이자 21대 아화국왕으로 기록했고 ‘혜종’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 흉을 알리고 염습을 하기도 전에 노도와 같았던 밤을 뒤로하고 혜종의 배 다른 아우가 보위를 이었다. 왕모(王母)가 친히 교서를 내리니 종가의 계승자이자 사직(社稷)의 구휼자로 정원공을 인정하매, 그는 22대 왕으로 즉위한다. 이후 혜종의 유일한 혈육이자 원후, 사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공주는 수안 궁주로 책봉되어 왕가의 여인으로서 제관직을 사사받으니 그녀의 이름은 나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