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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작성일 : 17-06-29 11:29     조회 : 245     추천 : 0     분량 : 8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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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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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각, 권승휘가 동궁전으로 들어섰다.

 

  “야심한 시각에 웬일이오.”

 

  책을 읽고 있던 향의 얼굴에 성가신 기색이 비쳤다. 종일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고단했던 터였다. 오늘은 그냥 조용히 책을 읽다 잠들고 싶었다.

 

  “오랜만에 지아비를 뵈었는데 술 한 잔 따로 올리지 못한 것이 영 아쉬워서 왔사옵니다. 고단하실 줄 알지만 소첩에게도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소서.”

 

  향이 거절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권승휘가 종일 멀찍이 떨어져 안타까운 눈빛만 던지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권승휘가 기쁜 듯 해사하게 웃었다.

 

  “여봐라, 상을 들여라.”

 

  미리 언질을 주었던지 곧바로 주안상이 들어왔다. 나인이 한켠에 향로를 들였다. 달큼한 향이 금세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게 무엇이오.”

 

  향이 권승휘가 내민 시커먼 사발을 내키지 않는 듯 쳐다보았다.

 

  “고단하실 듯하여 술 대신 탕약을 준비했사옵니다.”

 

  “냄새가 아주 독한데……, 무얼 넣은 것이오.”

 

  “몸에 좋다는 진귀한 것은 다 넣었지요. 한번 드셔보시옵소서. 효능을 바로 느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향이 입을 댔다가 역한지 다시 입을 뗐다. 권승휘가 입술을 내밀며 앵토라지는 시늉을 했다.

 

  “엊그제부터 저하를 기다리며 소첩이 몸소 달인 것이옵니다. 이틀 내내 엉덩이 한 번 붙이지 못하고 분주하였는데 소첩의 정성을 이리 몰라주시렵니까.”

 

  향이 할 수 없이 사발을 비웠다. 권승휘가 활짝 웃으며 유자정과 하나를 입에 넣어주었다.

 

  잠깐의 침묵 후, 권승휘가 말했다.

 

  “저하, 소첩은 바라는 것이 많지 않사옵니다.”

 

  뜬금없는 말에 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들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깟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재물을 가져다주는 것도, 힘을 더해주는 것도 아닌 것을요.”

 

  “허면 승휘는 무얼 원하시오.”

 

  향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하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라…….”

 

  “재물을 가져다주고 힘을 더해주는 것을 원하옵니다.”

 

  “재물을 가져다주고 힘을 더해주는 것이라…….”

 

  향의 고개가 양옆으로 느리게 흔들렸다.

 

  “모두 나는 줄 수 없는 것이구려. 못난 지아비라, 나는 승휘에게 재물을 가져다주지도 힘을 더해주지도 못할 것이오.”

 

  “조선 팔도에 저하만큼 잘난 지아비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하아, 잘난 지아비라.”

 

  향이 헛웃음을 쳤다.

 

  “잘난 지아비가 아니라……, 잘난 아비를 둔 지아비겠지요. 나는 말이오, 아바마마의 발끝도 닿지 못하는 아주 변변찮은 위인이오.”

 

  향의 말이 늘어졌다.

 

  “아니오, 아닙니다! 내가 평범한 것이고, 아바마마께서……, 아바마마께서, 지나치게 잘나신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너무 잘나신 바람에 제가 더 변변찮고 부족해 보이는 것뿐입니다.”

 

  향의 눈이 무겁게 감겼다 뜨였다.

 

  “잘난 아비를 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승휘가 아시오? 게다가 그 잘난 아비가 왕이고……, 그 다음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가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오.

 

  나는 말이오……, 두렵소. 정말이지……, 겁이 나오. 아바마마 같은 성군이……, 되지 못할까봐……, 아바마마의 눈에 차는 아들이……, 되지 못할까봐……, 나의 백성들이 나를 부족한 임금이라……, 원망하고 손가락질 할까봐……, 너무나도 두렵소.

 

  나는 승휘에게도……, 부족한 남편밖에, 되지 못할 것이오……. 승휘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주지 못할 거란 말이요. 승휘도……, 결국……, 나를……, 원망하게…….”

 

  향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향의 얼굴을 권승휘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오. 저하께서 주실 수 있사옵니다. 저하만이 주실 수 있사옵니다.”

 

  권승휘가 향의 관과 옷을 벗기고 금침 위에 눕혔다. 그리고는 스스로 가체를 내리고 옷고름을 풀었다.

 

  “그것만 주시옵소서. 저하의 관심도 애정도 다 필요치 않사옵니다. 저는 그저 아들 하나만 있으면 되나이다. 그걸 소첩에게 주시옵소서.”

 

  권승휘의 스란치마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 * *

 

 

  댕댕 댕댕.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캄캄한 밤,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어둠을 깨부술 듯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깬 까마귀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띄엄띄엄 세워둔 횃불이 불춤을 추어댔다.

 

  인왕산 중턱, 구멍 숭숭 뚫린 검은 바위가 꼭 장삼 입은 스님 같다 하여 선바위라 부르는 곳이었다. 울근불근 두드러진 바위들이 눈을 부라린 사천왕처럼 주변을 둘러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울긋불긋한 무복을 떨쳐입은 무당이 한 손엔 칠쇠방울을, 한 손엔 신장대를 들고 서 있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상 위에는 온갖 음식과 과일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져 있었다.

 

  권전의 부인 한씨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그 뒤로 권전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합궁하는 권승휘가 원자의 씨앗을 잉태할 수 있도록 비는 동시에 세자빈을 저주하기 위한 굿이었다.

 

  왈랑절렁 울리던 무당의 방울소리가 뚝 멈추었다. 신장대가 떨리기 시작했다. 무당이 연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했다. 무당의 고개가 번쩍 쳐들렸다.

 

  잠시 후 눈을 뜬 무당의 얼굴엔 요사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신이 내린 것이었다. 검은 먹을 칠한 눈이 더욱 귀기를 띠었다. 한씨가 더욱 고개를 깊게 숙이며 비손했다.

 

  무당이 신장대를 버리고 팔선녀선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제자리 뜀을 뛰었다. 방울소리와 팔선녀선이 푸덕거리는 소리가 어둠을 뒤흔들었다. 무당의 뜀이 점점 더 힘차고 높아졌다.

 

  마침내 사람이 뛸 수 없을 만큼의 높이에 이르렀을 때, 무당이 별안간 몸을 구부려 방울을 쌀 바구니 속에 푹 넣었다 꺼냈다. 제단 위로 쌀알이 흩어졌다. 그 모양을 가만히 살피던 무당이 쌀 바구니 옆에 놓인 오방색 천을 마구 찢기 시작했다.

 

  “업을, 업을 끊어야 하니라!”

 

  방울소리가 귀를 멀게 할 듯 울리고, 찢어낸 색색의 천이 마구 휘둘렸다. 무당의 검은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성모천왕께서 노하셨다, 성모천왕께서 노하셨어! 성모천왕의 노여움을 잠재워야 해!”

 

  무당이 뱅글뱅글 맴을 돌더니 구석에 매어놓은 닭을 잡고 모가지를 비틀었다. 우두둑, 소리가 들리자 무당의 눈이 더욱 괴이스럽게 번들거렸다.

 

  무당이 손에 힘을 주어 닭모가지를 뜯어냈다. 털이 날리고, 뽑힌 목에서 진득한 피가 튀었다. 얼굴에 핏방울이 튄 무당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 * *

 

 

  “아악!”

 

  민씨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방 안을 살피는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 안 좋은 꿈이라도 꾸신 겝니까.”

 

  옆에서 자고 있던 봉여가 몸을 일으켰다.

 

  “흉몽을, 흉몽을 꾸었습니다.”

 

  “흉몽이라니요.”

 

  봉여가 민씨의 젖은 이마를 소맷자락으로 닦아주었다. 민씨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아주 커다란 나무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뿌리째 뽑히더니, 우리 집 마당에, 거꾸로 처박혔습니다. 지붕 위까지 뿌리가 솟았는데 잔뿌리가 얼마나 많고 징그러운지, 금방이라도 꿈틀거리며 집을 옭아맬 것 같았습니다.

 

  헌데 그 위에서, 희디흰 새 한 마리가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가냘픈 날개를 퍼덕이는 게 아닙니까. 나무뿌리가 당장이라도 집을 덮칠까 너무도 무섭고, 흰 새가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졌나이다.”

 

  민씨의 말끝에 울음이 물렸다.

 

  “줄기가 무성하고 뿌리가 많은 나무라면 받들 봉 자, 우리 봉씨 가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무가 거꾸로 처박혔으니 이는 우리 가문에 흉사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지요. 그리고……, 그 위에서 날고 있는 흰 새는 혹여 세자빈이 아니실지…….”

 

  민씨가 말을 차마 맺지 못했다. 봉여가 머리맡에 놓인 자리끼를 건네며 민씨를 다독였다.

 

  “내 생각엔 그 꿈은 오히려 길몽인 듯합니다.”

 

  “길몽이라니요.”

 

  봉여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무뿌리가 지붕 위까지 솟는 것은 우리 집안이 토대를 탄탄히 하고, 이름을 드높인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흰 새 또한 길조를 뜻하니 우리 가문에 경사가 생긴다는 뜻일 겝니다.”

 

  “진정, 그리 생각하십니까.”

 

  민씨가 떨리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봉여가 민씨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언제 내가 허튼 말 하는 것 보셨습니까.”

 

  민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봉여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진실이길 바라는 것이었다.

 

  봉여에게 말은 않았지만 요 며칠 비슷한 흉몽이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엔 딸을 걱정하고 그리는 마음 때문이라 여겼지만 꿈이 반복되니 두려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조만간 마노라를 뵈러 가겠습니다.”

 

  “입궁을 하시겠다 말입니까.”

 

  민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봉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외척은 왕실의 첫 번째 경계 대상이었다. 중전을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기 쉽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원경왕후 민씨의 형제들이 줄줄이 목숨을 잃은 것도, 지금 중전의 본가가 풍비박산난 것도 모두 외척의 세력을 경계하느라 행해진 조치였다.

 

  세자빈을 낸 봉여의 가문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때문에 봉여는 딸이 입궐한 이후로는 최대한 바깥출입을 줄이고 사람들과의 모임도 삼가고 있었다. 행여나 외척이 나댄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궁궐 출입도 하지 않았다.

 

  왕이 월을 세자빈으로 간택한 데에는 월의 미색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문이 한미하다는 이유도 주효했음을 봉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감께서 꺼려하시기에 번번이 입궐을 미루었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일곱 해입니다. 이번만큼은 꼭 갈 것이니 말리지 마십시오.”

 

  민씨의 단호한 모습에 봉여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두르지 말고 적당한 때를 보십시다.”

 

  가지 말라는 말을 돌려하는 봉여를 민씨가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봉여가 염려하는 바를 모르지 않기에 민씨는 더 고집을 부리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 *

 

 

  그로부터 석 달 뒤, 조용하던 궁이 떠들썩해졌다. 권승휘가 회임을 한 것이었다. 오래도록 세자의 후사를 기다렸던 왕과 중전은 물론, 대소신료와 궁인들까지 기뻐 마지않았다.

 

  “덕윤신이라, 덕이 있으면 몸이 윤택하다 했느니라. 내 일찍이 너의 행실이 도저하고 덕용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네가 세자의 씨앗을 뱃속에 품었구나. 네 덕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도 남음이로다.”

 

  왕의 칭찬에 권승휘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잘했다, 참으로 잘했어. 네가 큰일을 해내었구나.”

 

  중전도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권승휘의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 앉고 설 때는 물론이고 잠잘 때도 한쪽으로 기울이지 말고, 사특한 것은 눈에 담지도 듣지도 말거라. 방탕한 생각은 일각도 마음에 담아선 아니 될 것이야.”

 

  중전이 흥분해 떠들어대는 왕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전하, 그런 말은 소첩이 해야지요. 전하께서 제 할 말까지 다 해버리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아, 그렇지요. 과인이 너무 흥분해 실수를 했습니다. 중전도 나중에 따로 한 번 더 말씀하세요. 중요한 내용이니 두 번, 세 번 들어도 됩니다. 아니 그러냐, 승휘.”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해주시오소서. 양전의 가르침만큼이나 좋은 태교가 어디 있겠나이까.”

 

  왕이 흡족한 듯 무릎을 치며 웃었다.

 

  “역시 요조숙녀 군자호구라, 네가 진정한 요조숙녀로구나.”

 

  즐거운 웃음소리가 궁궐을 채웠다.

 

  “헌데 세자는 표정이 어찌 그러느냐?”

 

  왕의 물음에 향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는 승휘가 회임을 한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것이냐?”

 

  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향이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어제 공부 중에 미처 풀지 못한 문제가 떠올라 그런 것이옵니다.”

 

  중전이 곱게 눈을 흘겼다.

 

  “세자의 후사가 생긴 것보다 더 중한 문제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오늘은 서연도 쉬고, 승휘와 오붓한 하루를 보내도록 하세요. 승휘에게 다정한 말도 많이 해주시고요.”

 

  향이 권승휘를 쳐다보았다. 그날 밤의 가물가물한 기억 사이로 권승휘의 말과 표정이 토막토막 스쳐갔다.

 

  마음도, 애정도 필요치 않다 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한다 했다. 자꾸만 가무러지는 자신의 몸을 일으키던 권승휘의 억센 손길과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눈빛이 떠올랐다.

 

  다음 날 벗은 몸으로 제 곁에 누워있는 권승휘를 보고 느꼈던 묘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향의 복잡한 눈빛에 권승휘는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향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어마마마.”

 

 

 

  잠시 후, 향과 권승휘가 강녕전을 나왔다. 중전의 분부대로 오늘은 권승휘의 처소로 가려는데 권승휘가 고개를 숙였다.

 

  “저하께오선 이만 가보시지요.”

 

  “어딜 말이오.”

 

  “저와 함께 있기보다는 책을 읽고 싶으신 것 아니옵니까.”

 

  “허나 어마마마께서……,”

 

  권승휘가 향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고요. 저하는 그저 저하 하고픈 대로 하시옵소서.”

 

  권승휘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가버렸다. 얼떨결에 장서각으로 향하게 된 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별궁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오가는 궁인도 거의 없어 언뜻 비어있는 궁처럼 보였다. 삭삭, 손톱 가는 소리만이 숨 막힐 듯한 정적에 미세한 금을 그어댔다.

 

  “이제 겨우 석 달이면 모양도 안 맺혔겠구만. 맹꽁이처럼 배를 쑥 내밀고 되똥거리고 다니는 꼬락서니하고는, 아주 눈꼴셔서 못 봐주겠다니까요.”

 

  석가이가 월의 손톱을 갈아주며 꿍얼거렸다.

 

  “더 웃긴 건 중신들이 벌써부터 산실청을 어찌 세울지 논의를 하고 있대요. 일곱 달이나 되어야 세우는 산실청을 뭐 급할 게 있다고 그리들 서두르는지. 다 고년한테 잘 보이고 싶어 그러는 게지요.”

 

  권승휘에게 줄을 대려는 이들이 선물과 금은보화를 들고 쉴 새 없이 들락거린다는 소문은 월도 들어 알고 있었다.

 

  “소문에는 유명한 점쟁이가 아들을 낳을 거라 했다는데, 아닌 말로 뱃속을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그걸 어찌 안대요? 설사 아들이라 해도 열 달을 무사히 뱃속에서 배겨낼지 못 배겨낼지도 모르는 거구요. 다들 그렇게 김칫국 마시다 큰코다치지.”

 

  “말을 삼가거라.”

 

  “솔직히, 제 말이 틀려요? 저는 권승휘 고년도 고년이지만 고년한테 잘 보이려고 아부 떠는 인간들도 진짜 꼴 보기 싫어요. 마노라께 굽신거릴 땐 언제고 쌩하니 돌아서서는, 쯧!”

 

  “후사도 없고 미움이나 사는 세자빈보다야 그쪽에 줄을 대는 것이 훨씬 수지가 맞지 않겠느냐.”

 

  월의 자조 섞인 말에 석가이가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러게, 제가 첨부터 뭐라 그랬어요. 권승휘 고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얌전하게 생긴 것들이 꼭 사람 뒤통수를 치는 법이라니까요.”

 

  “아얏!”

 

  월이 질겁하며 손을 뺐다. 석가이가 쥔 가위가 손톱을 깊게 잘라 피가 흘렀다.

 

  “아이고, 이를 어째. 죄송해요, 마노라. 괜찮으셔요?”

 

  석가이가 호들갑을 떨며 수건을 가져와 손가락을 감쌌다.

 

  “괜찮다. 살짝 베인 것뿐이다.”

 

  “이게 다 권승휘 고년 때문이어요. 하여튼 재수 옴 붙은 년이라니까요. 내 진짜 성질 같았으면 진작에 묵사발을 내버렸을 것인데.”

 

  석가이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종주먹을 쥐었다. 제 마음을 풀어주려는 석가이의 속내를 아는 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만하고 아랫고에 넣어둔 장뇌삼과 비단을 가져오거라.”

 

  “그건 왜요?”

 

  “회임을 했다니 축하 선물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음마, 그건 마님께서 특별히 마노라 챙겨주신 거잖어요. 그 귀한 걸 왜 고년한테 준대요.”

 

  “나도 못 하는 중차대한 소임을 권승휘가 다하였으니 그 정도 감사 표시는 해야지.”

 

  “무슨 말씀이 그러셔요? 권승휘는 권승휘고 마노라는 마노라죠. 어디 승휘 자식 따위가 마노라 배로 난 귀한 아기씨에 비하겠어요? 그깟 회임, 마노라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니 걱정 마셔요.”

 

  “그건 그거고, 권승휘의 회임은 또 그것대로 기쁜 일이지 않느냐. 후사가 탄탄해야 왕실이 안정되는 것이니.”

 

  석가이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바투 앉았다.

 

  “마노라, 저한테만 솔직하게 말씀해 보셔요. 마노라께선 진정 기쁘셔요?”

 

  “그거야 왕실의 국통을 잇게 되었으니 당연히……,”

 

  “국통이고 나발이고 다 빼고, 마음이 진정으로 좋으시냐구요.”

 

  월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힘없이 웃었다.

 

  “그래도 회임하라는 잔소리는 덜 듣지 않겠느냐.”

 

  석가이가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그게 아니죠. 승휘도 하는 걸 마노라는 왜 못 하냐 더 닦달하시겠죠. 딴 때는 증말 모르겠는데 이럴 때 보면 마노라도 영락없는 양반은 양반이셔요.”

 

  “그게 무슨 말이냐.”

 

  “양반들이 잘 하는 짓이 뭐여요. 말도 안 되는 걸 예의니 법도니 정해놓고는 그걸 지키느라 생 똥들을 싸잖어요.

 

  그냥 기쁘면 기뻐하고, 화나면 화내면 되는 거지. 기쁜데 안 기쁜 척하고, 화나는 데 안 난척하고, 그걸 예의고 법도라 하고 사니, 쯧쯧. 왜 그렇게 어렵게들 사는지 저는 정말이지 모르겠구만요.”

 

  석가이가 몸서리를 치며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월이 참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권승휘의 회임 소식을 듣고 불뚝거리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세 승휘 중 가장 얄망스러운 권승휘가 회임을 할 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어쩌겠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드러냈다간 못난 아녀자의 시기요 질투라 불호령이 내릴 것인데.

 

  월 역시 석가이의 말처럼 기쁘면 기뻐하고 화나면 화내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 나라의 양반들은 저속하고 무례하다 했다. 참고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저속하고 무례하다 손가락질 당하는 것도 싫었다. 두 갈래길이 놓여있는데 어느 길도 평탄치 않은 것이 양반들이 만들어놓은 예의와 법도라는 틀이었다.

 

  월이 창문 밖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힘겹게 퍼득이며 외로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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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1장. 암흑의 소용돌이 2017 / 7 / 7 251 0 8165   
31 30장.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2017 / 7 / 6 252 0 7793   
30 29장. 이것이 마지막, 이렇게 마지막 2017 / 7 / 6 253 0 6452   
29 28장. 아니 된다 하여도 2017 / 7 / 5 250 0 7066   
28 27장. 아니라 해도 2017 / 7 / 5 247 0 7852   
27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2017 / 7 / 5 243 0 8017   
26 25장. 이렇게 돌아서면 2017 / 7 / 4 234 0 7564   
25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2017 / 7 / 4 282 0 8756   
24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2017 / 7 / 4 280 0 8427   
23 22장. 뜨겁고도 날카로운 첫, 2017 / 7 / 3 255 0 6587   
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3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5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0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3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2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39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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