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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작성일 : 17-06-29 11:28     조회 : 239     추천 : 0     분량 :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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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근정전 너른 마당으로 천향이 들어섰다. 붉은 전복에 붉은 전립을 쓴 천향의 양손에는 한 자 남짓한 검기가 들려 있었다. 천향의 얼굴을 본 사람들의 입에선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런 천하절색이 이제껏 어디 숨어있었던고?”

 

  “꽃이 사람으로 환생한 것이 아닌가!”

 

  “에이, 저리 아름다운 꽃도 있던가. 하늘에서 내린 선녀가 틀림없네.”

 

  이제껏 환담을 나누느라 공연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기생이 천향이로구나.”

 

  왕이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였다. 종친석 상석에 앉은 양녕 또한 천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향의 눈에 자리에 앉는 월이 들어왔다. 세자빈! 천향은 월을 정면으로 보았다.

 

  음악이 시작되고 천향이 팔을 들어올렸다. 검의 양면과 모서리에 달린 작은 방울들이 차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천향의 팔이 검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잘 벼린 검날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 * *

 

 

  “스승님, 언니, 여기 좀 보세요!”

 

  옥금이 부르는 소리에 뛰어 나가보니 웬 사내가 기루 앞에 쓰러져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죽었느냐?”

 

  설매가 빠르게 좌우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옥금이 코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옥금이 굳은 얼굴로 귀를 가슴에 댔다.

 

  “아, 심장이 뛰어요! 살아있어요! 헌데……,”

 

  “헌데?”

 

  “이 사람, 사내가 아니에요. 여인이에요.”

 

 

 

  셋이서 낑낑거리며 사내, 아니 여인을 들어 방으로 옮겼다.

 

  “관아에 신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옥금의 물음에 여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설매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어라. 괜히 엮여봐야 번거롭기만 하다. 이 여인은 우리 기루에 들어온 적이 없고, 우리 역시 이 여인을 본 적도, 방으로 들인 적도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여인은 꼬박 닷새를 내리 앓은 후에야 겨우 눈을 떴다.

 

  “정신이 좀 들어요?”

 

  수건으로 여인의 얼굴을 닦아주던 옥금이 반갑게 물었다. 멀찍이 앉아 생황을 닦던 천향이 시선을 들었다 떨구었다.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인이 퍼뜩 몸을 일으키려다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요. 대체 어찌하다 이 지경이 된 거예요?”

 

  여인은 대답은 않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보다 못한 옥금이 부축해 일으켜주자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가려 했다.

 

  “이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래요? 갈 때 가더라도 몸이나 추스른 다음에……,”

 

  옥금이 말렸지만 여인은 고집스레 신발을 꿰어 신었다. 그 정도의 움직임도 고통스러운지 여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싸움을 좀 하느냐?”

 

  천향의 말에 여인이 동작을 멈추었다.

 

  “보아하니 싸움질 좀 하는 모양인데, 아주 젬병이 아니라면 여기 있거라. 싸움을 해야 할 때도 없진 않다만 대개는 시늉만으로도 충분할 게다. 따로 보수를 줄 순 없지만 먹여주고 입혀주긴 할 것이니 있고 싶은 만큼 있다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옥금이 반색을 하며 손뼉을 쳤다.

 

  “안 그래도 기루에 기둥서방을 구하던 참이었는데, 그리 해요. 기둥서방이라 해도 잡일이 많지, 싸울 일은 별로 없어요. 우리 천향 언니가 워낙 무서워서.”

 

  옥금이 천향 쪽을 힐끗 보며 쿡쿡 웃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 그럼 기둥서방이 아니라 기둥부인이라 해야 하려나요.”

 

  옥금의 농에도 천향과 여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옥금이 둘을 번갈아 보다가 여인의 팔을 잡았다.

 

  “기둥서방이든 기둥부인이든 밥은 굶지 않을 테니 천향 언니 말대로 해요. 그렇게 해요.”

 

  옥금이 팔을 가볍게 흔들며 조르는 시늉을 하자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맹수에 쫓기는 초식동물처럼 떨리고 있었다. 옥금이 그 눈빛을 다독이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옥금이라 해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여인이 피딱지가 앉은 입을 천천히 떼었다.

 

  “소쌍, 소쌍이라 합니다.”

 

 

 * * *

 

 

  몸 전체가 하나의 검이 된 듯 천향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날카로웠다.

 

  햇살을 벤 검이 바람을 베고 하늘을 베었다. 궁인들의 웃음을 베고, 신료들의 비릿한 눈빛을 베었다.

 

  왕의 면복을 베고, 세자 머리 위의 원유관을 베었다. 원유관에서 떨어진 구슬들이 영롱한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깨어진 구슬들이 햇빛을 받아 검광 같은 빛을 뿜었다.

 

  전복의 붉은 자락이, 베어낸 햇살인 듯, 베어낸 하늘인 듯, 베어낸 웃음인 듯, 베어낸 눈빛인 듯, 베어낸 면복인 듯, 베어낸 구슬인 듯 바닥으로 흩어졌다.

 

 

  * * *

 

 

  “이년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치뜨는 게야?”

 

  호되게 뺨을 치는 소리에 이어 술상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엎어진 천향의 뺨이 금세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천향은 지지 않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새로 부임한 개성 유후는 부임한 첫날부터 개성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을 하나씩 불러들이고 있었다. 천향도 그렇게 불려간 기생 중 하나였다.

 

  “니까짓 년이 뭔데 못 벗겠다는 게야? 천한 기생년이 웃전이 벗으라면 얌전히 벗는 것이지! 네 몸뚱이가 내 것임을 모르느냐!”

 

  천향의 뺨이 또 한 차례 돌아갔다. 천향은 다시 고개를 똑바로 하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나는 재주를 보이는 예기이지, 몸을 파는 수청기가 아니오!”

 

  “니가 재주를 팔지 몸을 팔지는 네가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니가 그리 자랑스러워하는 재주도 결국 몸 팔아먹으려는 겉치레이지 않느냐! 더러운 기생년 주제에 어울리잖게 음전한 척은!”

 

  이번엔 사내의 뺨이 돌아갔다.

 

  “나를 모욕하여도 재주는 모욕하지 마시오!”

 

  사내의 눈이 뒤집혔다.

 

  “이년이 제대로 미쳤구나! 천한 기생년이 감히 유후의 몸에 손을 대다니, 발칙한 년!”

 

  격분한 사내가 천향을 때리기 시작했다. 분노가 실린 주먹이 천향의 가냘픈 몸을 짓이겼다. 천향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사내가 천향을 찍어 누른 채 사정없이 옷을 찢었다. 희고 보드랍던 살결이 찢어지고 터진 채 드러났다.

 

  그때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사내가 벌러덩 나가떨어졌다. 씩씩거리고 선 것은 소쌍이었다. 소쌍이 사내의 가슴을 깔고 앉아 연거푸 주먹을 날렸다. 사내의 코와 입이 터져 피가 흘렀다.

 

  “그만, 그만하거라! 그러다 사람 죽는다, 소쌍아!”

 

  옥금이 달려와 소쌍을 뜯어 말렸다. 소쌍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사내를 노려보며 발광하듯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짐승 같은 절규에 천향이 힘겹게 눈을 떴다. 엉망으로 얻어터진 사내와 절규하는 소쌍의 모습이 보였다. 천향의 터진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잡혔다.

 

 

  * * *

 

 

  천향의 검이 공중을 현란하게 휘돌았다. 검은 보이지 않고, 검광만이 은빛으로 빛났다. 천향이 은빛의 광채를 뿜어내는 듯하였다.

 

  천향의 몸이 광채에 뒤덮일 즈음, 천향의 검이 정면을 찌르며 멈추었다. 월 쪽을 향한 것이었다.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정확히 자신을 찌르고 드는 듯한 검의 움직임에 월이 자기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었다. 천향의 눈빛과 월의 눈빛이 공중에서 맞닥뜨렸다. 두 사람만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천향은 이내 천연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거둬들였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춤은 끝났으나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하고,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참으로 묘무로다!”

 

  칭찬에 인색한 왕이 손뼉을 쳤다. 그제야 사람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무릎을 치며 탄성을 쏟아냈다.

 

  “진정 대단한 재주입니다!”

 

  “명필 희소가 초서의 요를 터득케 했다는 공손대랑의 현신이 분명합니다!”

 

  천향은 담담한 얼굴로 공손히 절을 올린 뒤 물러났다. 양녕의 시선이 천향의 뒤를 늘쩍지근하게 쫓았다.

 

 

  * * *

 

 

  기루로 돌아오니 난앵과 춘섬이 옥금의 방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엇다.

 

  “뭐하냐?”

 

  소쌍이 저도 귀를 문에다 댔다. 난앵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 속삭였다.

 

  “그분이 오셨어요.”

 

  “그분이라니.”

 

  “옥금 언니가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그분이요.”

 

  춘섬이 제 품에 안긴 육손이를 곧추 안으며 말했다.

 

  “우리 육손인 아부지 와서 좋겠네. 아부지 보고 싶었지? 그치, 육손아?”

 

  다행히 육손은 그 사이 열이 내리고 혈색도 제법 돌아와 있었다. 설매가 상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이게 다 뭐래요?”

 

  난앵과 춘섬의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상 위에는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쌀밥에 오리탕, 우심적, 웅어찜까지 담쑥담쑥 담겨 있었다.

 

  “뭐긴 뭐야, 빌어먹을 놈의 옥금이 정인한테 바칠 상이지. 그놈의 손, 두 번만 왔다간 기둥뿌리 뽑히겠다.”

 

  말은 그리 하면서도 상을 들이는 설매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옥금은 송화색 삼회장저고리에 짙은 남색 치마를 받쳐 입고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강수찬은 멀뚱한 시선으로 옥금의 방을 둘러보았다. 반닫이에 삼층장, 화로가 놓인 방은 기녀의 방이 아니었다. 여느 여염집 여인의 방이었다. 방 한켠에는 원앙새 한 쌍이 연못에서 노니는 풍경을 그린 연생귀자도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강수찬의 눈이 병풍에 머물렀다. 그 병풍은 자신이 성균관 유생 시절, 과거 급제하면 꼭 데려가마 약조하고 징표로 사준 것이었다.

 

  “저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가.”

 

  옥금이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강수찬을 보았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소첩은 수찬 나리께서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강수찬이 옥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많이 낡았는데 버리지 그랬는가.”

 

  버리다니. 첫 정을 준 정인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평생을 함께 하자 약속하고 다짐한 징표였다. 낡고 더러워졌다 하여 어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또 사주면 되지 않겠느냐.”

 

  강수찬이 옥금의 굳어진 표정을 흘끔 보더니 변명처럼 덧붙였다. 옥금은 강수찬의 말이 못내 야속했지만 얼른 서운한 기색을 지우고 술병을 들었다. 삼 년 만에 든 정인이었다. 어여쁜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소첩이 한 잔 올리겠나이다.”

 

  술을 따르는 옥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도화주로구나. 자네가 담근 것인가?”

 

  “그렇습니다.”

 

  도화주는 강수찬이 유난히 즐기는 술이었다. 강수찬을 만나고부터 옥금은 매해 봄이면 도화주를 담았다. 옥금의 한 해는 복숭아꽃을 따면서 시작되었고, 말끔히 비운 술병을 닦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꼬박 여섯 해를 쌓은 정이었다.

 

  그가 자신을 찾지 않은 삼 년 동안에도 옥금은 매년 도화주를 만들었다. 손가락이 닳아지도록 정성들여 만든 도화주가 그대로 버려지고 또 버려져도 옥금은 봄이 오면 묵묵히 복숭아꽃을 땄다.

 

  그때마다 다시 만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꿈에서라도 한번 보길 바랐던 정인과 마주앉은 옥금의 가슴은 그야말로 터질 듯하였다.

 

  “맛이 좋구나.”

 

  강수찬의 칭찬에 옥금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개복숭아꽃을 뜯어 향이 더욱 진할 것입니다. 한 잔 더 드십시오.”

 

  강수찬이 술을 따르는 옥금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네도 나이를 먹었구만.”

 

  옥금이 얼굴을 붉혔다. 원래도 미색은 아니지만 지난 밤 육손이 때문에 잠을 설쳤더니 피부가 평소보다 더욱 꺼칠했다.

 

  하필 이런 날. 옥금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수찬이 와서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날 오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원망도 들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이리도 얄궂은 것이었다.

 

  “하기사, 자네는 미색보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지. 그래, 요즘도 거문고를 뜯는가.”

 

  “예. 오랜만에 한 곡 올릴까요.”

 

  “그리 하시게.”

 

  옥금이 당장 거문고를 대령했다. 매양 쓰는 초미금이 아니라 고방 깊숙이 넣어두었던 벽력금이었다.

 

  벽력금의 머리 부분에는 ‘여청만학송如聽萬壑松’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만산 골짜기의 솔바람 소리 듣는 듯하다’라는 뜻의 이백의 시구였다. 옥금의 거문고 소리가 깊고 웅혼하다 하여 강수찬이 직접 써준 것이었다.

 

  옥금은 내심 이 거문고와 글귀도 강수찬이 알아봐주길 바랐지만 연주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도 강수찬은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혼자 술잔을 연거푸 비운 강수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한 물음이었다.

 

  “아이가 있다 했는가.”

 

  거문고 연주에 대한 칭찬이 없어 의기소침했던 옥금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육손이를 보일까 때를 살피던 참이었다.

 

  “보여주겠는가.”

 

  옥금이 구르듯 달려 나가 춘섬에게서 육손을 받아 들었다. 옥금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육손을 강수찬에게 안겨주었다.

 

  강수찬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육손을 안았다. 육손이 낯선 얼굴이 신기한지 강수찬을 빤히 보았다. 강수찬이 눈을 맞추자 육손이 앙실방실 웃었다.

 

  “그래, 아비다. 아비를 알아보고 그리 웃는 게야?”

 

  기루에 든 이후 처음으로 강수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굳어있던 옥금의 표정도 스르르 풀어졌다.

 

  “이름이 있는가.”

 

  “아직 짓지 않았습니다.”

 

  아비가 지어주길 바라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이었다.

 

  “태어난 지 두 해가 되었다면서 아직 이름이 없단 말인가.”

 

  왠지 질책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져 옥금이 서둘러 대답했다.

 

  “왼편 손가락이 여섯이라 육손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육손이라. 귀한 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구나.”

 

  강수찬이 육손의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엄지손가락 옆으로 작은 손가락 하나가 새순처럼 덧붙어 있었다.

 

  “이 손이야 용한 의원에게 보이면 금세 고칠 수 있을 테지. 아이가 병치레는 하지 않는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열이 오르고 설사를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고, 태어나 처음 보는 아비에게 점수를 깎이고 싶지 않아 옥금은 거짓말을 했다.

 

  “쇠약한 어미 대신 아비의 강골을 타고 났는지 자잘한 병치레는 없습니다. 아주 건강한 아이입니다.”

 

  “아이를 아주 잘 키웠구만. 옥금이 자네가 애 많이 썼네.”

 

  강수찬이 흡족한 표정으로 육손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흐뭇하게 부자 상봉을 지켜보던 옥금의 얼굴에서 미소가 증발하듯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자꾸 열이 오르고 목구멍 안에서 불쾌한 갈증이 느껴졌다. 옥금이 육손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선상기로 뽑혀 한양으로 왔다고 했는가.”

 

  “그러합니다.”

 

  옥금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자네 재주 정도면 상감마마 앞에 충분히 내놓을 만하지.”

 

  “……주시옵소서.”

 

  옥금이 바삭 마른 입술로 중얼거렸다.

 

  “상감마마는 한없이 까다로운 분이시네. 그분 마음에 들려거든 죽을 각오를 하고 연습에 매진해야 할 것이야.”

 

  “……주시옵소서.”

 

  옥금의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하기사, 자네만한 악바리도 없지. 예전에도 매일 밤을 새어가며 거문고를 뜯지 않았던가. 그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글을 읽고……,”

 

  “주시옵소서!”

 

  옥금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고성에 강수찬이 움찔했다. 육손도 놀랐는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아이를 주시옵소서! 육손이를 제게 주시옵소서!”

 

  “자네, 갑자기 왜 이러는가? 아이가 놀라 울지 않는가.”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고 천향이 들어왔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아 검무를 추며 입었던 전복 차림에 검기까지 들고 있었다. 강수찬의 눈이 커졌다.

 

  천향이 검기를 옆에 던지듯 놓고는 강수찬의 품에서 육손을 빼앗아 옥금에게 안겨주었다. 옥금이 육손을 꼭 안고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너는 아이나 어르거라. 수찬 나리는 내가 대접할 것이니.”

 

  옥금이 강수찬에게 인사도 않고 나가버렸다.

 

  “오랜만입니다, 수찬 나리. 남은 술은 저와 함께 하시지요.”

 

  강수찬이 천향을 노려보았다. 천향도 차가운 눈으로 강수찬을 보았다.

 

  “방자한 년들 같으니라고!”

 

  강수찬이 이를 으드득 물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 *

 

 

  거문고를 든 악공인가 했다가, 세심한 한량인가 했다가, 응큼한 오입쟁이인가 했던 이가 오늘은 거문고 하나 뜯을 줄 모르는 엉터리 기생이 되어 나타났다.

 

  연이어 만나지는 것도 신기했지만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인 것도 신기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였다. 월의 손가락이 서안 위에 글씨를 적어 내렸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석가이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들어왔다. 멍하니 앉아 소쌍을 떠올리고 있던 월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는 고하지도 않고 들어오느냐!”

 

  “음마? 고했거든요? 대답이 없으셔서 두 번이나 고했구만.”

 

  “그, 그랬느냐?”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느라 고하는 소리도 못 들으셨대요?”

 

  “아니다, 아무것도.”

 

  석가이가 월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래도.”

 

  월이 석가이의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뗐다.

 

  “정말 암것도 아니에요? 그럼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씀해 보셔요.”

 

  “아무것도 아니래는데 자꾸 그러느냐?”

 

  석가이가 피식 웃었다.

 

  “제가 걸음마 떼고부터 마노라를 모셨거든요? 얼굴만 봐도 다 안다구요. 지금 마음속에 뭔가 껄쩍찌근한 게 있으시잖아요.”

 

  “티가……, 나느냐?”

 

  “엄청 나거든요?”

 

  숨긴다고 숨겼는데, 어찌 그 마음이 드러났을꼬.

 

  “…… 그게 말이다,”

 

  “저도 열심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누가 집어간 것 같어요.”

 

  “응? 무슨 말이냐?”

 

  석가이가 눈썹을 여덟 팔자로 떨어뜨렸다.

 

  “제가 분명히 잘 챙겼거든요. 마노라도 아시다시피 제가 어디 물건 떨어뜨리고 다니는 덜렁이가 아니잖어요.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마노라가 만드신 세자저하 선물을 떨어뜨렸다구요? 제가?

 

  하늘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분명, 일부러 누가 가져간 거예요.”

 

  월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대관절 누가 그걸 가져갔단 말이냐? 주머니쯤은 쉬 구할 수 있을 터인데.”

 

  “뻔하죠.”

 

  “짐작 가는 이가 있는 게야?”

 

  석가이가 월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는 시늉을 했다. 월이 귀를 가져다 대자 석가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빈궁 나인들이요.”

 

  “내 나인들 말이냐? 내 나인들이 왜 세자저하 선물을 훔쳐간단 말이냐?”

 

  혹시……?

 

  “저를 시기해 그러는 거여요.”

 

  “너를?”

 

  석가이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렇게 이쁜 데다 마노라 총애까지 독차지하고 있으니 약이 오르는 거죠. 사고를 쳐서 절 밀어내려는 수작이에요.”

 

  월이 맥 빠진 얼굴을 했다. 석가이는 이부자리를 보아주고는 다부지게 주먹을 쥐었다.

 

  “걱정 마셔요, 마노라. 저 촉 되게 좋은 거 아시죠? 요 촉으로다가 단번에 잡아버릴 테니까 마노라께선 모르는 척 하고 계셔요.”

 

  석가이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나갔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라. 아주 요절을 내버릴 테니까. 그럼 주무셔요, 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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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결結 2017 / 7 / 11 249 0 8434   
43 42장. 꿈은 여기까지죠 2017 / 7 / 11 239 0 5297   
42 41장. 가는 걸음걸음 붉은 꽃잎 점점이 떨어지… 2017 / 7 / 11 246 0 7140   
41 40장. 그대, 이렇게 돌아서니 2017 / 7 / 10 252 0 6921   
40 39장. 저의 마음을 여기에 두겠습니다 2017 / 7 / 10 247 0 6909   
39 38장. 그의 사랑을 지켜 나의 사랑을 2017 / 7 / 10 261 0 9344   
38 37장. 너는 나를 버릴 수 없고, 나는 너를 버릴… 2017 / 7 / 9 237 0 5709   
37 36장. 내가 아니라 너 때문에 2017 / 7 / 9 251 0 6554   
36 35장. 깊어지는 어둠 2017 / 7 / 8 263 0 6330   
35 34장. 나도 어렵고 너도 어려워라 2017 / 7 / 8 242 0 5512   
34 33장. 수십, 수백 번이라도 기꺼이 2017 / 7 / 8 229 0 6520   
33 32장. 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 2017 / 7 / 7 237 0 8483   
32 31장. 암흑의 소용돌이 2017 / 7 / 7 251 0 8165   
31 30장.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2017 / 7 / 6 253 0 7793   
30 29장. 이것이 마지막, 이렇게 마지막 2017 / 7 / 6 253 0 6452   
29 28장. 아니 된다 하여도 2017 / 7 / 5 250 0 7066   
28 27장. 아니라 해도 2017 / 7 / 5 247 0 7852   
27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2017 / 7 / 5 243 0 8017   
26 25장. 이렇게 돌아서면 2017 / 7 / 4 234 0 7564   
25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2017 / 7 / 4 284 0 8756   
24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2017 / 7 / 4 280 0 8427   
23 22장. 뜨겁고도 날카로운 첫, 2017 / 7 / 3 255 0 6587   
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3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6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1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5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3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40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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