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친구 지현을 만난 설헌의 학교 생활은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었다. 집에선 주위 사람들과 기운에 눌려 얌전한 요조숙녀인 설헌은 학교에선 다행히 그 나이대에 맞는 활기찬 소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설헌의 1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조만간 학교에서 사생대회와 백일장이 진행될거에요. 지난 일학년때도 해봤겠지만 관심있는 학생들은 날 찾아오면 됩니다."
"네~"
"그럼 오늘 종례 이걸로 끝!"
담임선생님이 서류파일을 손에 쥐고 교탁을 내려섰다.
백일장. 이 세 글자가 설헌의 뇌리에 박혔다. 지난해엔 자신이 없어참여해보지 못한 백일장이었다. 하지만 보육원에 있었을 때 온갖 대회에서 수많은 입상 경력을 가진 설헌이었다.
'원장님...'
설헌의 머릿속에 잠시 보육원이 떠올랐다. 보육원 시절을 생각하니 갑자기 자신감이 솟았다. 그때의 장설헌은 자신 넘치고 스스로의 재능을 참 잘 알던 소녀였다.
"설헌아!"
"응?"
하교하며 길을 걷던 설헌은 내내 머릿속으로 백일장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덕에 옆에서 지현은 여러번 설헌을 불러도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이제야 설헌의 응답을 듣게 됐다.
"안 가? 너 뭔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응, 가야지~!"
문득 지현에게만은 자신의 다짐을 말하고 싶어진 설헌이었다.
"백일장..나 백일장 나가 보려고."
설헌은 백일장에 나가기로 다짐했다. 자신있었다. 글재주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 맞아!!! 설헌이 넌 보육원에 있을때 동화도 막 짓고 그림도 잘 그리고 그랬잖아!"
"응 그랬지..."
"너라면 상 받을 수 있을거야! 응원할게!"
지현은 정말로 든든한 설헌의 친구였다. 설헌의 다짐을 진심으로 응원해줬다. 원래 글쓰기에 자신있던 설헌이라 자신감은 넘쳤지만 지현의 진심어린 응원은 자신도 누군가에게 응원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나게해 더 의미있게 다가왔다.
**
"오늘 주제는 한글, 문학, 동식물이에요.
주제 하나를 선택해서 작품을 지으면 됩니다.
자, 지금부터 백 분의 시간이 주어질 거에요."
어느덧 백일장 날이었다. 설헌은 주어진 주제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다.
"한글, 문학, 동식물..?"
설헌의 머릿속은 주제로 가득 차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설헌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
시간이 흘러 설헌은 참가자 중 가장 먼저 작품을 제출했다.
"야 쟤 봐. 뭘 저렇게 빨리 써?"
"쓰기 싫은 거 아니야? 대충 생각해 보다가 안 될 거 같으니까 그냥 쓰고 낸거 아니야?"
주위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설헌은 작품에 자신이 있었기에 뿌듯함이 가득 차 있었다.
학교 건물을 나서니 지현이 역시나 하교 하지 않고 설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지현이 너 왜 아직 안 갔어?"
"너 기다린다고~"
"에이 학교 끝나고 얼마나 지났는데 그걸 기다리고 있어~~"
이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는 지현이 설헌은 너무도 고마웠다. 집에선 항상 어딜가나 드러나면 안되고 가족 취급도 안 해줘 응원받기 힘든건 당연지사였다. 그런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건 지금도 곁에서 함께 해 주는 지현이 때문인 것임을 설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수고했어 설헌아~"
"아니야 기다려준다고 니가 더 고생많았어 지현아!!
진짜 고마워. 우리 보육원에서 그렇게 오래 있지도 못 했는데 넌 정말 참 좋은 친구 같다.고마워..."
결국 고마움을 표시하던 설헌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야~ 뭐 그런거 갖구 울고 그래~"
설헌의 울음에 지현도 내심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고인 그 눈물에서 설헌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미안ㅎ 울컥하네, 고마워서.."
"으이그~너도 참.. 나 이만 들어가 볼게! 내일 보자!"
지현이 애써 더 밝은 얼굴과 목소리로 설헌에게 인사했다.
지현이 집으로 들어간 시간에 때 맞춰 기사로 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것도 해 주는 것 없는 부모지만 이른바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등하교는 항상 개인 차를 타고 하는 설헌이었다.
"어디십니까? 또 지현이라는 친구네 집 앞이십니까?"
전화를 받자 덤덤한 목소리의 기사가 설헌에게 물었다.
설헌은 참 따라다니기 쉽고 운전해주기 쉬운 아이였다.
항상 집 아니면 지현의 집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네."
"기다리십시오."
기사와의 전화가 그렇게 끊겼다.지극히 업무에 충실한 기사였다. 어쩌면 관심이 없는걸지도 모르지만 남들 처럼 무시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설헌의 기사 일을 하고 있는 그였다. 그런 기사를 설헌 또한 담담히 여겼다.
기사를 기다리며 설헌은 백일장을 다시 곱씹어보고 있었다.
' 후회는 없어...꽤, 잘 써진것 같아!'
생각외로 백일장에서 더 글이 잘써지니 오늘 하루 설헌은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