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너머의 혈족이 온지 반 세기
혼혈 시우가 능력을 증명했나니
그 능력이 기묘한 힘에도 있었네.
바다 너머의 혈족을 품는 자 세상을 얻으리.
먼저 버리지 않는 한 버림받지 않을 테니
내 마지막 충성을 받으시어 유일한 꽃을 지키시오.
그들은 거울이니 누구든 참모습을 보게 되리라.
-사멜리아 예언자의 마지막 예언, 사본으로 추정됨
# 돈의 쓰임새
헤일린은 늦잠을 잘 자지 않는 편이었다. 바른 생활을 하는 편이었지만 아주 가끔 음주를 즐겼다. 와인 데이는 그녀에게 불가항력을 선사했다. 그리고 덤으로 셀리의 잔소리도 같이 주었다.
"아가씨, 어제 술 많이 드셨어요?"
"응. 결국 의식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래서 네가 이렇게 화내는거지?"
"잘 아시네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미안."
셀리는 그녀의 안전에 민감했다. 어렸을 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인데, 헤일린은 셀리가 하녀의 신분을 넘어 저를 걱정하는 게 고맙기도 했다.
"테닌 백작님이 모셔오지 않았다면 미혼 영애가 외박을 했다면서 난리가 났을 거라고요."
"아, 그래? 아니, 셀리. 지금 아드리안님을 이야기한거니?"
"네. 그 분께서 본인들 쪽에서 먼저 권한 거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분명 리나와 리첸, 헤일린밖에 없었던 것 같았는데. 아드리안도 같이 마셨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드리안이 데려다주었다는 건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 감정에 올라와서 막 무슨 말을 한 것 같았는데. 그 추태를 다 봤다는 거야? 민망함에 쥐구멍을 찾고 싶어졌다. 그러고보니 아드리안이 같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기억이 잘 안나. 리첸 경이 날 막 이름으로 부르고 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어머, 그 분이요? 아가씨께 호감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라고 봐."
하지만 셀리는 듣고 있지 않았다. 리첸은 겉으론 멀쩡했으니, 셀리가 저리 반응할만도 했다. 아, 리첸 경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 분이 얼마나 한량인 줄 아니? 기사라는 직업 하나는 잘 골랐다고 인정해야했다. 제복을 입고 검을 찬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멋졌으니까. 셀리, 의외로 외모를 많이 보는구나. 헤일린은 상상의 세계로 빠진 셀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리첸 덕에 리나 경을 만났으니 조금은 고맙기도 했다. 언제 그 귀한 와인을 맛보겠는가. 돈 많다는 것은 꽤 좋은 거였구나. 헤일린이 배시시 웃었다.
***
"헤일린 아가씨, 급한 편지가 왔습니다."
"어디서 온 거죠?"
"타일라 대학 병원에서 왔습니다."
"셀리, 편지를 받아주겠니? 방도 정리해주렴. 난 외출 준비를 하마."
헤일린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목욕 시중을 따로 받지 않았다. 받는다해도 셀리에게서만 받았다. 그녀는 타인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편이었다. 혼자 씻는 게 더 빠르기도 했다. 셀리는 그녀의 명을 받아들어 편지를 받고 방을 정리했다. 그녀가 씻는 동안 기초화장품과 색조화장품, 블라우스와 치마, 모자 등등을 준비했다. 그녀가 작은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에는, 이미 건조기가 셀리의 손에 있는 상태였다. 헤일린은 셀리의 손길을 받으며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공기총은 갖고 다니시게요?"
"그래. 스승님이 주신 거니 항상 갖고 다녀야지."
헤일린은 총을 주머니 안쪽에 넣었다. 그녀는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아노힌이 입원하게 되어, 며칠간 병원에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페리헬 저택으로 보고를 해달라고 했는데 그 부탁을 들어줬다. 치료비는 그녀가 낼 생각이었기에, 그녀는 오늘 타일라 병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요즘 유행한다는 딸기 바나나 케이크도 같이 사갈 생각이었다.
"직접 방문하는 건 처음인 걸."
"타일라 병원은 환자를 가리지 않아서 가난한 아이들도 많이 온다고 해요. 일반교육기관에서 오면 꽤 싸게 진료를 해준다나봐요."
좋은 병원이군. 하지만 왜 베니슬린 교수님께서 이 병원을 알려주신 걸까? 베니슬린 교수는 괴짜였다. 하지만 천재였다. 그의 신분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다 뜬 소문에 불과했고 곁에 있었던 헤일린조차도 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14살 때 처음 만났고 그의 애제자가 되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것이 오리무중이었다. 분명한 건, 그가 좋은 인맥과 힘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언제나 그랬다. 가난한 아노힌이 병원에서 보살핌을 받게 된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헤일린 페리헬입니다. 아노힌 환자를 만나러 왔어요."
"어, 아가씨!"
때마침 파힌이 그녀를 불렀다. 파힌은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그녀를 보며 웃었다. 아노힌의 병실은 햇볕이 잘 스며드는 곳이었다. 아노힌은 작은 주사기를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노힌. 몸은 좀 괜찮니?"
"으앗!"
간호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노힌은 아프다고 소리쳤지만, 파힌조차도 간호사를 보며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주 건강해보였다. 팔에 붕대가 감겨있긴 했지만, 그의 머리칼에는 윤기가 돌았다. 그녀는 퍽 안심이 되어 환하게 웃었다.
"그, 그렇게 웃지 말지?"
"응?"
"아노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녀의 웃음을 오해했는지, 아노힌이 발끈했다. 파힌은 아노힌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노힌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짝 보다가, 붉은 뺨을 가라앉히지 않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천만에."
헤일린이 코트 끝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신사들을 위한 작은 예의였다. 아노힌은 다른 귀족과 확연히 분위기가 다른 헤일린을 보며 제 발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귀족이라고 다 제게 무례하지 않았다. 신분이 낮다하여 짐승 취급하지 않아준 건, 헤일린이 처음이었다. 동료라고 했었지? 아노힌은 헤일린의 흑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짓도 천천히 보았다. 그녀는 손수 케이크를 잘라주고 있었다. 바나나 크림이 들어간 케이크는 맛있어보였다.
"아가씨, 제가 할게요."
"아냐, 셀리. 일일이 네 손을 빌렸다간 아기가 되어버릴 것 같구나. 너도 먹고 싶었지? 자리에 앉으렴."
하녀의 시중조차도 잘 받지 않으려 하다니. 정말 이상한 귀족 아가씨야. 케이크를 자르는 손가락은 아주 우아했다.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아노힌은 그녀가 주는 접시와 포크를 받았다.
"아노힌, 요즘 유행하는 롤케이크라고 하는구나. 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 파힌 씨도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셀리, 침만 흘리지 말고 너도 어서 받으렴. 네가 이런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건 아주 잘 아니까."
"크흠."
셀리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아노힌의 병실은 1인실이었는데, 베니슬린 교수의 명함 때문에 1인실로 배치된 것 같았다. 아노힌의 가정이 4달은 생활할 수 있는 돈이 단 4일의 입원비였다. 돈은 걱정하지 말라는 헤일린의 말이 아니었다면 퇴원했을지도 몰랐다.
"돈, 갚을게요. 얼마가 걸리든 간에, 꼭 갚을 테니까."
"네, 맞습니다. 바로 치료받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노힌과 파힌은 그녀에게 경제적인 빚을 두고 싶지 않아했다. 헤일린은 이들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영양실조였다죠? 파힌 씨는 수면 부족이였고요. 이번만큼은 내가 귀족 영애라는 사실에 감사해야겠네요. 돈은 걱정마세요."
"하지만 아가씨의 돈이……."
"아, 저도 그럴 생각으로 지갑을 챙겨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아노힌이 여기에 있는 것도 제 덕분이 아닙니다."
"네?"
"제 스승님께서 돈을 내주실 거예요. 애초에 아노힌이 바로 치료받을 수 있었던 건 스승님의 이름 때문이었거든요. 제가 여러분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네요."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건 계약서였다. 집세를 1년치를 미리 받았으며 계약을 더 연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노힌과 파힌은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또 아노힌은 아직 어리고 더 성장할 나이입니다. 병원에 부탁해서 영양제를 처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놓을테니 일주일에 한번씩 약을 받아가세요."
"아, 아가씨!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헤일린은 아노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를 떠오르게 만드는 다정한 손이었다. 아노힌은 그제야 헤일린의 나이가 보였다. 저런 눈빛을 하는 이가 어떻게 저와 동갑이겠는가. 세상살기 너무 각박했는데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반에서도 혼혈이라고 차별받았었다. 이 사람도 이런 고통을 다 안다는 걸까? 아노힌은 헤일린이 말하는 '동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다르다는 건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괜찮아, 아노힌. 정 빚을 갚고 싶다면 휼룡한 사람이 되어주렴."
"훌륭한 사람?"
"그래."
"하지만 될 수 없어요. 난 돈도 없고 가난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힘 없고 가난하다고 휼룡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건 아니란다. 네 자신이 봐도 인정할만한 멋진 사람이 되렴. 환경과는 관련이 없는 거야, 이런 건."
"아……."
그녀는 좀 더 수준 높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게 맞았다. 그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아노힌은 어렴풋이 이해했으나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아직 체념을 배울 나이가 아닌데. 그녀는 안타까움에 눈시울이 살짝 붉어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