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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소희유희
작가 : 미루하
작품등록일 : 2017.6.24

완벽쟁이 까탈스러운 상사/덜렁거리는 평범한 여직원 부하/
둘이 함께 이계 이동하는 로맨스판타지.

 
03 왕국의 그녀
작성일 : 17-06-25 19:17     조회 : 307     추천 : 2     분량 : 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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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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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희는 커튼으로 가려진 조그마한 구석방에 안내되었다. 화려한 공작 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도자기 뚜껑을 살짝 들어올리자 뻥 뚫린 구멍이 나타났다. 어딘가로 연결된 듯한 긴 터널은 시골 할머니 댁에나 있던 푸세식 화장실과 비슷했다. 편안하게 엉덩이를 댈 만한 변기는 없지만, 그럭저럭 두 다리를 벌리고 제대로 겨냥을 할 수 있었다.

 

 발가락 끝까지 뻣뻣하게 힘을 주고 있었는데 비로소 근육에 주던 힘을 풀었다. 긴장이 풀리니 다리가 살짝 저려왔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볼일을 마치고서 여유가 생겨 소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장실에 피워진 이름모를 꽃향기가 암모니아 향과 섞여 머리가 아플 만큼 진한 냄새가 났다. 소희가 들어오기 직전 피웠는지 향은 끝자락만 조금 타들어가 있었다. 거친 붉은 벽돌벽으로 둘러싸인 방인데, 태피스트리가 이것저것 걸려 벽을 가렸다. 바닥은 적갈색 카펫을 깔았다.

 자수가 놓인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이름 모를 누군가 탑에서 내려오는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흰 옷을 입은 여자 같았다. 아래에서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자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기도를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교가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으나 더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피스트리를 살짝 들어올려보자 조그만 창문이 보였다. 유리창은 꽤 높았다. 발끝을 들어도 시야에 바깥이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소희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오른쪽 귀퉁이에 비단이 덮인 둥근 항아리가 있다. 비단 덮개를 옆으로 내려놓고 묵직한 도기 항아리를 끌어와서 조심스레 그 위로 올라갔다. 체중을 한쪽으로 실으려 하지 않고 창가에 튀어나온 손잡이 비슷한 것을 잡아서 분산했다.

 

 창 밖을 내려다보니 바깥에 푸른 물이 내려다보였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넓은 물결이 잔잔하게 넘실거렸다. 태양빛에 반짝이는 물이 마치 지하철 7호선이 도강할 때 보이는 한강 같았다. 한강보다 수십배는 깨끗해 보였다.

 

 이국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서 소희는 하나하나 상황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쪼그린 듯한 자세를 취하고 나서야 그럭저럭 낯선 여자가 상황을 이해했다.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정말로 복도에 쌀 뻔했다. 국철 1호선을 타고 청량리에서 북상하고 있노라면 인파에 휩쓸려서 꽉 끼이는 때가 있다. 특히 사람들이 끼어 타는 환승역 부근이 환상적이다. 중간에 꼭 내려야 하는 역인데도 못 내릴 때가 있고, 오줌이 마려워서 내렸다가 다시 타고 싶어도 내리지 못할 때가 있다. 저번에는 정말로 급했는데…아니, 이건 지금 현실도피다.

 

 우습다, 막상 회사에서 일하거나 퇴근할 때에는 환상 세계를 꿈꾸곤 했는데 지금은 반대다. 한강이나 지하철 같이 낯익은 사물을 떠올리면서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 소희는 크게 숨을 들이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것들을 떠올렸다. 우선 순위를 정해라. 수학부터 하든지, 정말 수학을 포기할 거라면 뭘 들이파서 어떻게 할 건지. 수학을 포기하는 걸 추천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정했다면 밀고 나가라고. 영어를 주력으로 할 거면 영어를 씹어삼킬 정도로 달달 외우던가! 하도 들어 외울 만큼 낯익은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자동재생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래, 우선 순위, 우선 순위…’

 

 대소변을 봐야하는 걸 보면 죽은 것도 아닌 듯 싶다. 일단 말부터 배워야 상황을 알 수 있다. 고민을 하지 말고 행동부터 하라고 했지.

 

 ‘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말부터 배우자. 아냐, 유치원생이라고 생각하자. 미소를 짓고 우아한 모습을 보이고, 신비스러움을 강조하고, 어, 그리고, 웃고…좋은 첫인상…첫인상….’

 

 다른 생각을 하다가 왼발이 살짝 균형을 잃었다. 도기 항아리 뚜껑이 밀려나면서 항아리가 옆으로 넘어졌다. 소희는 그대로 굴러떨어져 바닥에 내팽겨쳐졌다. 쨍 하는 소리가 나며 항아리가 깨져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낯익은데 잘 모르겠는, 진한 냄새가 확 풍겼다. 뭉클한 것이 손과 다리에 닿았다. 소희는 바닥에 짚은 손을 들어 코에 가져다댔다.

 

 “아 씨발!”

 

 저절로 욕이 나왔다. 이 항아리는 요강이었다. 그럼 아까 그 푸세식 변기는….

 

 바닥에 손을 문질러 애써 닦고 소희는 제가 덮어두었던 도자기 뚜껑을 들어올려보았다. 아까 본 대변이 흘러가지 않고 그대로 얌전히, 저를 보세요 하고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엄청난 실수를 한 모양이다.

 소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머리에 뭔가 묻어 아주 진한 냄새가 풍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아아아악!”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

 방금 지른 소리가 들렸는지 황급히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시녀인 것 같다.

 

 아,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소희가 통과하기에는 창문이 너무 높고 좁았다.

 

 여자는 소희를 안내해서 몸을 씻겨주었다. 이번에는 소희를 혼자 두지 않고, 두 명의 여자가 더 들어와 함께 서 있었다. 아무래도 혼자 두면 안 되는 사고뭉치 취급을 받은 모양이다 하고 소희는 슬프게 생각했다. 향이 나는 물을 끼얹어 오물을 씻어내고, 머리와 몸에 향기나는 오일을 발라주었다. 쉴새없이 만져대는 손길에 부끄러울 새도 없었다. 여자들은 평생 이 일을 해온 것처럼 아주 능숙했다. 아까 변소보다 조금 클 뿐인 방이라서 좁을 텐데도 용케 움직여가며 할 것을 다 했다.

 

 소희는 무어라무어라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반쯤 벌거벗고 얇은 천만 걸친 여자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따뜻한 물과 따뜻한 손길이 닿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소희는 다시 가져다준 옷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입고 있었던 블라우스와 브래지어, 팬티와 핑크색 미니스커트를 다시 입을 수는 없다. 더러워졌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가져다준 옷은 복식 자체가 달랐다. 중국이나 일본, 인도의 전통 의상을 입어 본 적이 있는데 셋 중에서는 인도 옷에 제일 가까웠다. 다시 말해 옷이 아니라 식탁보 같았다. 보들보들한 고급 옷감이 손에 닿는 감촉은 황홀했지만, 어떻게 입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다 속옷은? 팬티는? 브래지어는?

 

 소희가 두리번거리자 여자 한 명이 살짝 팔에 손을 가져다댔다. 허락을 구하는 몸짓 같았다. 소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진행되었다. 안감을 덧댄 얇은 천으로 가슴을 감싸고, 뒤에서 살짝 매듭을 묶는다. 코르셋처럼 자잘한 매듭으로 꽉 조여주었다. 즉, 가슴을 크게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작게 하는 형태였다.

 팬티도 브래지어와 비슷했다. 즉 아래가 뻥 뚫려 있고 앞뒤만 가리는 모양이었다. 한복 속곳 같다. 어어 하는 사이에 그 위에 새로 천을 하나 더 휘감고,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천을 감고, 또 그 위에 뭔가를 걸쳤다. 어떻게 어떻게 천을 둘둘 감았을 뿐인데 옷처럼 보이게 된 데다가 걸을 때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이거, 못 벗는다.

 혼자서는 절대 입지도 못해.

 

 어어 하는 사이에 여자 한 명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핀과 리본을 사용해서 동그랗게 말아올렸다. 머릿결이 잡아당겨지는게 아마 말아올린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제일 필요한 건 핸드폰도 노트북도 아니고 거울이었다. 소희는 제가 어떻게 비칠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다른 여자가 문을 열고, 소희를 바깥쪽으로 안내했다. 다들 굳은 표정으로 소근거리는 것이 뭔가 급해 보였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가, 소희도 덩달아 긴장했다. 정신 한 구석이 나사가 풀린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는데, 불안함이 스물스물 밀려왔다.

 

 ‘설마 잘 씻겨서 구워 먹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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