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일찍 목풍아는 일도와 함께 마갑보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다점을 나왔다.
“마갑보가 봉 잡았습니다. 대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사채업자들에게 큰 변을 당했을텐데 말입니다.”
“나는 어깨가 무겁다.”
“어디 아프십니까? 갑자기 어깨가 무거우시다니오?”
“마음이 무겁단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살기위해 죄를 저지르지 않고 다투지 않고도 배 부르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을까 마음이 무겁단 말이다.”
“아! 그런 것이었군요. 그래서요?”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니? 가던 길이나 가자.”
목풍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삐를 당겼다.
“대장. 같이 가요.”
일도가 고삐를 당겨 목풍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말을 타고 머리를 번쩍 든 목풍아의 얼굴은 밝았다.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크게만 보이는 것이다.
목풍아는 옆에서 따라오는 일도를 보니 마음이 든든하였다. 일도는 승평현의 건달패들 중에 제법 주먹실력이 출중한 까닭에 이제 다시는 어제 같은 낭패를 당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에게 얕잡아 보일 일도 없으니 이제 앞길은 순탄하리라.
정오 무렵이 되어서 목풍아는 등줄기와 허리가 아프고 사타구니가 흔들릴 때마다 전신이 결려서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어제 오늘 타지도 못하는 말을 탄 때문이었다.
말에서 내리니 그 걸음이 가관이었다. 사타구니에 밤송이를 끼워 넣은 것처럼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작 말 타는 것을 배워 놓을 것을 그랬다.”
“그러게 말입니다. 날도 덥고 배도 고픈데 저 앞에 있는 객잔에서 하루 쉬어갈까요?”
일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과연 커다란 느티나무 옆에 객주가 하나 있었다.
목풍아는 고삐를 잡고 어기적거리며 말에 올랐다.
“대장. 말에 타시게요?”
“그럼. 명색이 대장인데 너와 함께 걸어서 가야겠느냐? 어서 고삐나 잡아.”
일도가 웃으며 고삐를 잡았다. 긴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지막 열기를 품어내듯 태양은 대로를 뜨겁게 달구었다. 등줄기를 볶아대는 뜨거운 더위와 사타구니를 파고드는 통증 때문에 연신 얼굴을 찡그리는 목풍아였다.
“대장. 대장질 하기 힘들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목풍아는 들고있던 부채를 펴 태양을 가리며 말했다.
“어째서 대장질이 힘드는지 내가 이야기해 줄까?”
일도가 고개를 돌려 목풍아를 바라보았다. 일도는 목풍아가 찡그린 것을 보고 웃자고 농담 삼아 한 말이었으나 목풍아는 다가오는 객잔을 바라보며 정색을 하고 있었다.
“대장이란 말이야 높은데 있는 것 같지만 언제나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졸개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는 깔보는 자리, 좋아하는 것 같지만 미움받는 자리에 있는 것이 대장이란 말이야.”
“그렇게 나쁜 자리에 있다면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대장의 재목(材木)이니까 말이야. 나서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나섰다면 대장밖에 할 수 없단 말이야. 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
일도가 피식 웃었다.
“웃어?”
목풍아가 두 눈을 부라렸다.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배우 같아서요. 솔직히 웃겼습니다. 그런데 대장. 대장의 재목이 뭡니까?”
“대장의 재목이라는 것은 집으로 말하자면 큰 기둥을 말하지. 목수로 말하자면 도편수라고나 할까? 기둥이 없다면 집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고 집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재목들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지. 결론적으로 집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이야.”
“대장. 알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일도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목풍아가 물었다.
“도편수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럼요 대장. 도편수는 집을 짓는 목수의 우두머리 아닙니까?”
“잘 아는군. 도편수는 집을 지을 도면을 만드는 목수의 우두머리란 말이야. 도편수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먼저 재목을 배치하겠지. 곧고 옹이가 좋고 보기 좋은 재목은 눈에 띄는 입구 쪽 기둥으로 사용할 것이고, 조금 옹이가 있더라도 곧고 튼튼한 재목은 눈에 띄지 않는 장소의 기둥으로 사용하겠지. 그리고 다소 약하더라도 옹이가 없고 보기 좋은 재목은 문턱, 문, 미닫이 등에 사용할 것이고, 옹이가 있거나 약간 휘어졌더라도 도편수는 그 재목에 맞추어 용도를 마련하고 튼튼한 집을 만들겠지. 도편수가 목재의 용도를 맞추어 집을 짓는 것처럼 모든 부분의 용도에 맞게 부릴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대장의 재목이란 말이야.”
“그럼 대장께서는 그런 눈을 가졌다는 말이군요.”
“당연한 말. 너는 힘과 무예솜씨가 제법이지만 많은 사람을 부릴 만한 재주가 없고, 풍계 역시 금전이나 사무에 관한 일이 뛰어나고 부하를 다루는 재주 역시 조금은 있지만 나만하지는 않지. 비유하자면 너와 풍계는 도편수의 명을 받는 목수 정도일까?”
“대장은 힘이 없지 않습니까?”
“제갈공명은 힘이 있어서 조조(曹操)와 사마의(四馬懿)와 어깨를 겨루었느냐? 항우(項羽)가 힘이 없어서 한신(韓信)에게 죽임을 당했던가? 한고조(漢高祖)는 날 건달 출신이고, 명태조께서는……”
목풍아는 일개 도적 땡중 출신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대장은 모든 사람에게 의지가 되고 믿음을 주는 사람이어야 된단 말이야. 알겠나? 잘 생각해보라구. 까막눈이라는 것을 둘째치더라도 너는 너무 생각이 모자라. 그래서는 대장이 될 수 없어. 알겠나?”
일도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주먹을 쓰는 일로는 우두머리가 될 수 있겠지만 대희루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한다던가, 껄끄러운 관원들과 상대한다던가 하는 문제에서는 번번이 벽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부하들을 휘어잡는 능력이라던가, 사람을 다루는 재주, 맹달의 일을 처리한 것 같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큰 객잔에 다달았다. 객잔 앞의 넓은 그늘에는 활과 창을 든 무사 20여명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의 마가(馬架)에는 30여기의 말이 메어져 있었다. 일행들의 차림새를 보니 사냥을 나온 무리들 같았다.
“대장. 내리십시오.”
객잔의 앞에서 말을 세운 일도가 손을 깍지 끼우고 대기하자 목풍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일도의 손을 밟고 간신히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허벅다리와 사타구니가 욱신거렸다.
“이런 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용하네.”
“처음이라서 그렇지요. 말도 자주 타다보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렇겠지.”
목풍아가 어기적거리며 객잔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였다. 종달새 같은 여자의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오호호호. 저것 봐. 사타구니에 밤송이를 끼웠나봐. 호호호호.”
목풍아가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누각의 난간에 여자 하나가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엉?”
커다란 까만 눈동자에 입술은 앵두를 입에 문 듯 붉어 뽀얀 얼굴과 대비되어 한눈에 쏙 들어올 미인이었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일도의 물음에 목풍아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놔둬라. 내 걸음걸이가 천상 사타구니에 밤송이 끼운 것 같은데 뭐. 틀린 말도 아니고, 저깟 어린 계집년이 뭐라 짓껄이던 무슨 상관이냐.”
누각에서 웃고 있는 여인에게서 시선이 떠나지 아니하였다. 다시보아도 입에서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의 미인이었다.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귀티가 나는 옷하며 반짝이는 장신구가 소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소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니 부글거리던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것 같았다.
“뉘집 딸인지 정말 미인이군. 보기 드문 미인이야.”
“그렇죠? 입은 옷하며 꽤 높은 집안의 여식 같습니다요. 헤헤헤.”
일도와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또 다시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호호. 저, 저것 좀 봐. 어기적어기적. 마치 골난 자라가 걸어가는 것 같아. 오호호호.”
부아가 솟구쳤다.
‘골난 자라 같다구? 저 년이?’
목풍아가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어 웃고 있는 미녀에게 말했다.
“소저. 제 걸음걸음이 꼴불견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골난 자라라는 말은 소저처럼 교양 있고 아름다운 미녀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호호호. 그럼 골난 자라라는 말이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데?”
“그런 천박하고 상스러운 말투는 노류장화들의 입에서나 나오는 말이지요.”
“노류장화가 뭐지?”
“갈보들입지요.”
소녀가 난간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구? 내가 갈보라고? 너 죽고 싶으냐?”
“허허. 선녀처럼 예쁜 소저의 입이 걸레로구만.”
“뭐? 내 입이 걸레라구?”
소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무릇 사람의 인격은 그 말에서 나오는 것이 지요. 소가 이슬을 먹으면 우유를 만들고 뱀이 이슬을 먹으면 독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지요.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요조숙녀라도 내면이 갈보와 같다면 입으로 나오는 말이 어찌 갈보 같지 않겠습니까? 소저께서는 겉모습보다 내면을 치장하는데 신경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와하하하.”
목풍아가 한바탕 목을 젖혀 웃다가 옆에 있는 일도의 배를 툭 치며 유쾌하게 말했다.
“자자. 우린 밥이나 먹으러 들어가자.”
“대, 대장. 그냥 밥 먹을 분위기가 아닌데요?”
일도는 창백한 얼굴로 목풍아의 허리를 찔렀다. 목풍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느티나무 아래에 있던 20여명의 무사들이 험악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층 객잔의 계단 아래로 10여명의 무사들이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을 꺼내들고 뛰어나왔다.
시퍼런 칼날들이 목풍아와 일도의 목에 겨눠졌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말고 말로 하십시다. 강호의 사람들끼지 왜 이러십니까?”
일도가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이 웃어?”
무사 하나가 일도의 멱살을 잡아 마당으로 끌고 갔다. 서너명의 무사들이 둘러서서 일도를 개패듯이 때렸다.
“아이구. 사람 살려.”
일도가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이층 난간 위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들을 사로잡아서 끌고 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