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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쌍극의 탑
작가 : 낙원의새
작품등록일 : 2017.6.1

『선택해라. 목숨을 걸고 너희 본래의 삶을 되찾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마련해준 이곳, ‘낙원’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지….』

불의의 사고로, 병으로, 스스로 죽은 2만 5천명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세계의 관리자>가 제안한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면 '탑'을, 배고픔도 가난도 노화도 장애도 없는 이 <낙원>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싶다면 '미궁'을 정복하라.

돌아가야 하는 자, 남아야 하는 자, 두 세력의 삶을 건 게임.

 
08. 앨리스(2)
작성일 : 17-06-08 13:26     조회 : 265     추천 : 0     분량 : 9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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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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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짝반짝 빛나며 흩어지는 빛의 무리 속에서 소녀는 자세를 바로 하며 들고 있던 대검을 가뿐하게 등 뒤에 걸었다. 

 

 현성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소녀가 보여준 전투는 자신의 전투와는 차원이 달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속 스킬 사용,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회피와 이어지는 반격까지. 그 전투는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완벽했다. 자신은 흉내조차 내지 못 할 정도로. 

 

 정작 그런 아름다운 전투를 끝낸 소녀는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현성에게로 시선을 돌려서,

 

 

 "상대했죠?"

 

 

 라고, 산뜻하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던 현성은 방금 전 자신이 홧김에 던진 말을 기억해내고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상대를, 저렇게나 쉽게 압도해버리면 민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기요, 고맙다는 말은 안 해요? 그래도 나름 구해준 건데."

 

 "아···고맙습니다."

 

 

 현성은 그제서야 소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찌되었건 그녀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감사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예의가 아니겠지. 

 

 소녀는 만족한 듯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현성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우움~’하면서 입을 모았다.

 

 

 "다행히 괜찮아 보이네요. 죽기 직전까지 몰리면 트라우마 때문에 폐인이 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법 멘탈이 튼튼하신가 봐요?" 

 

 "그야,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까요···."

 

 

 현성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는 늑대 무리에게 당해서 죽음을 경험했고, 탑에 들어온 이후에는 수십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무덤덤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이번은 특히나 위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하긴, 그렇게 싸우면 항상 간당간당 하겠죠."

 

 

 소녀가 무심하게 현성에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는 발언을 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현성은 콜록거렸다. 방금 전까지 <글라디에이터>는 좋지 않느니 쓰레기니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정작 그 사용법을 찾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고서. 

 

 그런 현성의 반응에 소녀는 싱긋 웃었다. 장난기가 다소 섞여있는 미소였다.

 

 

 "괜찮아요. ‘스킬 연계’ 테크닉은 모르는 사람도 꽤 되니까. 그래도 10레벨 넘게 모르는 사람은 처음 봤지만."

 

 

 이번엔 어퍼였다. 소녀의 2연속 공격에 현성은 비틀거리며 시선을 돌리고 소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장난이에요. 팩트 폭력이란 거 너무 재밌네요."

 

 

 결정타를 날렸다. 

 

 덕분에 현성은 사례가 틀려 콜록거리고, 소녀는 현성을 놀려먹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미니맵 팝업창을 켰다. 그리고 현성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말했다. 

 

 

 "최근에 맵이 갱신돼서 와 본 거거든요. 이 맵 갱신한 거, 그 쪽 맞죠?"

 

 "네, 맞습니다만···."

 

 "어떻게 그 상태로 여기까지 오셨대? 살아있는 게 용하네요."

 

 

 콤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난 줄 알았던 콤보가 다시 이어지자 현성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소녀의 말은 틀린 것이 한 마디도 없었다. 다만 진실이라는 것은 폭력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소녀는 그런 현성의 표정을 보다가 태도를 바꿨다. 진지하게, 소녀는 그에게 물었다.

 

 

 "단 한 번도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하셨어요? ‘스킬 연계’가 없었다면 엄청 불편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투를 할 때마다 느낀 사항이었다. 다른 전위 공격계 직업과 비교해서 <글라디에이터>의 스킬들은 장점은 없고 단점만이 부각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떠올리지 못하고 불평만 하던 것이 그였다.

 

 

 "···했죠. 하지만 불평만 했죠." 

 

 

 왠지 모르게 시무룩한 현성의 표정을 본 소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가 지나쳤나, 싶었다.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방금 전 죽음의 위기를 넘긴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장난이 조금 심했다. 

 

 ‘에고···반성, 반성.’ 

 

 소녀는 속으로 그렇게 반성했다. 그리고 현성을 보며 위로하듯이 말했다.

 

 

 "혼자 다니면 모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초보’ <글라디에이터>들이 자주 하는 실수고···."

 

 

 결론은 현성이 초보라는 말이었다.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서 소녀는 현성을 보였다. 현성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초보···초보···.’라는 말만 반복해서 내뱉고 있었다. 

 

 그런 현성을 보며 소녀는 피식 웃었다. 죽음의 위기는 멀쩡한 정신으로 받아넘기면서, 이런 소소한 장난이나 말실수에 이렇게 반응하다니, 의외로 여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쪼끔 귀엽네?’ 

 

 묘하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그 여린 점만이 아니었다. 마치 상처 받은 나그네 같은, 혹은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근거도 뭣도 없는, 혹자가 ‘여자의 감’이라고 말하는 단순한 직감일 뿐이었지만.

 

 도와주고 싶었다. 이런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을 보아 단순히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고 ‘탑’에 도전하는 것을 포기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왕 알게 된 거 죽지 않도록, 강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소녀는 등 뒤에서 대검을 뽑고 정자세를 취했다. 현성이 움찔, 하고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피식 웃고는 그에게 말했다.

 

 

 "잘 봐요. <글라디에이터>는 이렇게 쓰는 거예요."

 

 

 다소 유쾌하게, 하지만 진지함을 담아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오른발이 앞으로 내딛어졌다.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대각선을 그리는 내려 베기. 칼날이 차가운 은빛을 뿌렸다. 공격스킬, <초승달 베기>. 

 

 그 직후, 내려간 검이 대각선으로 위로 올라가며 허공을 가르고, 몸이 그대로 회전하며 비스듬히 내려치는 <회전 베기>가 이어지고, 다시 몸이 한 바퀴 회전하며 원심력을 이용해 다시 강렬한 내려베기, <일섬>으로 이어졌다. 3개의 스킬, 총 4격의 연격이 연계되는 동안, 소모된 시간은 고작 2초미만. 물 흐르듯 부드러운 스킬연계였다.

 

 아까도 보았지만 놀라운 속도였다. 현성이 가진 <글라디에이터>에 대한 생각이 전면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MP소모가 적고, 쿨타임이 짧으면서 데미지도 약한 스킬들의 성능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단 한방이 아닌, 이렇게 공격을 끊임없이 몰아치기 위한 부품으로서의 스킬들. 그러기 위해 줄어든 MP소모와 쿨타임, 그리고 데미지.

 

 

 "이게 ‘스킬 연계’예요."

 

 

 소녀는 검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등 뒤에 수납하고 현성을 향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글라디에이터>는 이 스킬연계로 끊임없이 공격을 몰아치는 직업이에요. 남들이 묵직한 거 한 방 넣을 때, 대여섯 개의 스킬을 꽂아버리는 것이 특기죠. 대신, 연계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성능을 내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렇군요···."

 

 

 현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문제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이었다. 직업의 특성조차 이해하지 않고 불평만 해댔던 자신에게. 

 

 소녀는 살짝 현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짓궂은 미소였다. 소녀는 그 미소를 지우고 최대한 친절하게 싱긋 웃으며 현성에게 말을 걸었다.

 

 

 "한 번 해보실래요?"

 

 "네?"

 

 "스킬 연계요. 요령은 간단해요. 스킬이 끝날 때 쯤, 바로 다음 스킬을 사용해주시면 부드럽게 연계돼요. 한 번 해보세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것이 낫잖아요?"

 

 

 소녀의 말에 현성은 순순히 검을 뽑았다. 스스로 연구해서 알아내지 못했으니 배우기라도 해야 한다. 이 ‘위’로 더 올라가기 위해서,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죽지 않기 위해서. 

 

 현성은 오른손에 검, 왼손에 버클러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준비하는 첫 번째 스킬은 <일섬>. 현성의 검이 붉은 빛으로 빛나고, 곧 붉은 잔상을 남기며 검이 휘둘러졌다. 그것에 이어서 현성은 <반월 베기>를 사용했다. 오른발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어지고-

 

 -그대로, 현성은 대지의 품에 안겼다.

 

 

 "···어?"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현성은 보기 좋게 넘어졌다. 상황 자체는 익숙했다. 스킬을 사용한 후에 으레 찾아오는 경직 현상이다. 문제는, 왜 연계가 되지 않았냐, 하는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한 부분이 있었겠지.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작은 소리가 현성의 귀를 간지럽혔다.

 

 

 "풉-."

 

 

 소녀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현성은 먼지가 묻은 옷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의 얼굴을 보자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두 볼은 빵빵하게 부풀려져 있고 눈은 반달 형태로 휘어져 있었다.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던 소녀는 박수까지 치며 진심으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와, 굉장해요! 멋진 몸개그였어요! 하마터면 진짜로 뿜을 뻔했다니까요?"

 

 

 당신, 진짜로 뿜었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현성은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담아 소녀에게 질문했다.

 

 

 "뭐가 문제죠? 바로 다음으로 연결했는데."

 

 "그야 연계가 안 되는 스킬을 연계했으니까요. 정확히는, 순서가 틀렸어요. 아무거나 막 연계되는 게 아니라고요. 아무 순서나 막 연계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알죠? 일일이 써봐야 하나요?"

 

 "···저기요, 스킬 툴팁 안 읽어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녀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당연한 것을 모르냐는 태도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스킬 연계’ 자체를 그는 오늘 처음 알았으니까. 

 

 그리고 현성은 원래 스킬 툴팁을 꽤나 성의 있게 읽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읽는데요?"

 

 "···안 읽었네요." 

 

 "읽었다니까요? 

 

 "읽었는데 그걸 몰라요? 툴팁상에 떡하니 적혀 있는데···아, 잠깐! 그럼 스킬 어떻게 찍었어요? 아니다, 내가 직접 봐야겠어. 스킬창 열어요! 공개모드로 해서 보여 달라고요!"

 

 

 갑자기 소녀의 말이 급해졌다. 무슨 정말로 급박한 상황이라도 일어난 듯한 그 기세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스킬창을 열었다. 그리고 공개모드로 전환하자 소녀는 재빨리 현성에게 찰싹 달라붙어 열심히 그 스킬창을 보았다. 무언가가 머리에 꽉 들어간 모양인지, 지금 자신이 현성에게 안겨있는 것과 같은 구도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소녀의 이야기고, 그 구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현성은 괴로움을 맛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달콤한 괴로움이었다.

 

 

 "읏···잠깐···!"

 

 "아 조용히 좀 해 봐요. 집중 안 되니까."

 

 

 소녀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여성의 체취와, 그녀의 특정부위와 밀착한 팔뚝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바람직한 감촉이 현성의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리 위로 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열심히 현성의 스킬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야 당사자의 시야를 기준으로 나타는 스킬창을 보려니 밀착할 수밖에 없다지만, 정작 본인도 지금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약 3분이 지나갔다. 현성에게는 세 시간과도 같이 길었고, 3초보다도 짧은 3분이었다. 전부 살피는 것이 끝났는지 소녀는 고개를 돌려 현성의 얼굴을 보았다.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스킬 공격력만 보고 찍었네!"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녀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면서 손가락은 팝업창을 부술 듯이 툭툭 쳐대고 있었다.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지 못하는 팝업창이지만, 그렇게 하니 정말로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소녀는 바로 현성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 봐요! 툴팁 안 읽었···!"

 

 

 그 순간, 소녀의 몸이 굳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현성의 얼굴이 보였다. 소녀는 그제서야 자신과 현성이 얼마나 밀착해 있는지를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리 위에서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앗···!"

 

 

 소녀는 급히 현성에게로 떨어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소녀는 열심히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현성은 붉어진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결국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소녀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볼을 발갛게 물들인 상태로 현성과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아무튼! 스킬 완전 잘 못 찍으셨어요! 데미지만 보고 찍으니 그렇죠! 그 상태로는 연계 못 해요. 되는 스킬 조합이 있어봐야 한두 개 정도예요."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방금 전까지의 감정은 날아가 버렸다. 게임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온라인 게임에서 스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한 스킬을 되돌리는 것은 대부분의 게임에서 커다란 대가를 요구했다. 

 

 다시 시무룩해진 현성을 본 소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싶었다. 그 순간 소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 마치 악동 같은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재빨리 지우고 소녀는 그를 불렀다. 

 

 

 "저기요."

 

 "네."

 

 

 소녀는 인벤토리에서 투명한 병을 하나 꺼냈다. 병 안에는 맑은 푸른색의 액체가 들어있었다. 소녀는 최상급의 화사한 웃음을 짓고 찰랑찰랑 소리가 들리도록 병을 흔들면서 물었다.

 

 

 "이게 뭐인 것 같아요?"

 

 "글쎄요···."

 

 

 현성으로서는 처음 보는 액체였다. 병의 형태로 보아서는 물약이나 비약의 형태인 것 같기는 했는데,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소녀의 화사한 웃음이 기묘한 미소로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짓궂은 장난을 구상하는 말괄량이 소녀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의 매혹적인 표정 같기도 했다. 절대 조화될 리 없는 두 분위기가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을 풍겼다.

 

 

 "이건요, ‘망각의 비약’이에요. 그럼 효과가 뭘까요?"

 

 

 소녀의 미소에서 짓궂음이 다소 짙어졌다. 현성은 뭔가 직감적으로 그 비약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 ‘망각’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 그것을 조합해서, 직감이 말해주는 정답.

 

 

 "스킬···초기화?"

 

 "빙고!" 

 

 

 소녀는 장난을 성공시킨 말괄량이 소녀처럼 빙고를 외쳤다. 그 순간 현성이 순식간에 다가와 소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어깨가 아파올 정도의 힘이 전해졌다. 그 힘에 소녀는 경악했다. 분명, 레벨의 절대치도, 근력(STR)치도 자신이 높을 텐데?

 

 

 "그거···그거 어디서 팔아요? 얼마에요?"

 

 "저기···일단 이거 놔주실래요? 아프거든요···." 

 

 

 그제서야 현성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깨달았다. 현성은 손에 힘을 풀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소녀는 붙잡힌 어깨를 서로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HP를 보니 약 5% 정도 깎인 상태였다. <몽크>도 아닌, 그것도 근력(STR) 수치가 그렇게 높지 않은 현성이 잠깐 잡았다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으···아파라···. 아무튼 대답을 해드리자면, ‘틸문’시의 중앙 마법조합의 비약상점에서 팔아요. 이건 ‘망각의 비약 LV.2’니까 가격은 금화 40개. 레벨이 10을 넘기셔서, LV.2를 쓰셔야 해요."

 

 

 현성의 말문이 막혔다. 정말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그의 전 재산을 털어도 어림도 없었다. 현재 자신이 ‘환몽의 신도’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드롭되는 돈은 은화 10개 정도였다.

 

 물론 회색 사슴, ‘그레이 디어’와 비교해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드롭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금화 40개라는 가격은 ‘환몽의 신도’ 400마리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도저히 지불 가능한 액수가 아니었다.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주 잠깐 빼앗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검토했다. 즉시 기각되었다. 소녀의 전투력은 자신과 비교할 때 절대적인 수치에서도, 테크닉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달라고 해 볼까? 굳이 보여주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금화 40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야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을, 과연 오늘 처음 본 자신에게 공짜로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는 현성의 얼굴은 소녀는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완연히 말괄량이의 표정으로 변해버린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거, 드릴 수 있는데···."

 

 "정말요?"

 

 

 눈이 번쩍 뜨였다. 소녀는 짓궂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고, 외상이에요, 외상. 비약값에 과외비까지 합쳐서 금화 45개! 과외 내용은 스킬 트리와 스킬 연계는 물론 <글라디에이터>의 전투법까지. 상환기간은···음, 2년으로 할까요?" 

 

 

 소녀가 웃는 얼굴로 장난을 치듯이 던진 제안은 현성에게는 말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운 제안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현성은 ‘망각의 비약’으로 스킬을 초기화한다고 해서 제대로 찍을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고 필요한 것을 주겠다고 한다. 외상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금화 45개가 언제까지 큰돈일까.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사냥에 사냥을 거듭하다 보면, 게임 유저는 부유해지기 마련이다. 초기에 많아 보였던 돈은, 후반에 가면 푼돈이 된다. 결국, 그에게 무안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일까. 현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오해는 하지 말아요."

 

 

 소녀가 현성의 말을 끊었다. 현성은 다소 짓궂어 보이는, 하지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그냥, ‘콜드 게임’이 싫어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재미없잖아요? 그런 건."

 

 

 현성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소녀의 ‘콜드게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악천후, 혹은 지나친 점수 차이로 경기 조기종료를 심판이 선언(Called)한 게임을 의미하는 야구 용어, ‘콜드 게임(Called Game)’.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무튼, ‘예스’예요, ‘노’예요?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그녀의 말은 이해하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아마 자기 식으로 만든 암호처럼, 그렇게 대답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현성의 직감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제안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런 제안을 해준 소녀에게 감사했다. 현성의 손이 내밀어졌다. 악수를 청하는 손짓이었다.

 

 

 "이현성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내밀어진 손. 소녀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 손을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짓고 그 손을 잡았다.

 

 

 "앨리스(Alice)에요. 잘 부탁해요."

 

 

 맞닿은 두 손. 그 손을 통해 서로의 손의 온기가 전달되었다. 그 손의 감촉에, 현성은 다소 놀랐다. 방금 전 까지 자신의 몸 크기만 한 대검을 휘두르며 파워풀한 전투 스타일을 보여주던 전사의 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랑 받고 자란 듯한, 고생은 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 천상 여자의 손. 그 고운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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