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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정말 치사한 놈들...어쩌...저런...비열한 수를...."
힘겹게 숨을 쉬는 사내는 치명상은 피했지만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방향을 잃을 듯, 무작정 걷고 있다. 오른 팔의 상처를 왼손으로 지혈하며 힘겹게 걸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조금 전의 치열했던 싸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젠장~ 누군 목숨 걸고 싸워서 겨우 겨우 도망 나왔는데....달빛 한 번 곱네.."
자신의 수하의 무장한 기사들과 비밀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어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소수 인원으로 움직이다 변을 당한 것이다. 자신의 수하들은 분명 영리하고 기본적으로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라 어딘가로 잘 도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본가에 도움을 청해 나를 찾으러 올것이다.
상황을 판단하며 정신없이 걷다보니 너무 깊이 들어왔나보다. 초행길에 처음 접하는 숲에서의 예기치 못한 하루 밤은 휘고른에게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전신에 부상으로 거동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살려는 본능은 그를 계속해서 채찍질해 숲의 깊은 곳까지 이끌었다.
어느 정도 숲이 깊어지자, 한결 긴장을 늦춘 휘고른은 주위를 살피다 커다란 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쉴새 없이 몰아치는 적들의 공격을 거의 단신으로 막아내고 수하들의 퇴로를 확보해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주고 휘고른도 몸을 피했다. 끊질긴 공격에 상처는 입었지만 뛰어난 기사답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너무 정신 없이 도망친 탓에 방향감각을 잃은 것이 문제 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으로 걷고 걷다 지쳐버린 것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적들과의 거리과 많이 벌어져 비밀의 숲이라는 라르돈이란 숲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더 두고 봐야겠다. 어두움의 기사라 불리는 적들은 비밀의 숲이자 빛의 숲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라르돈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휘고른이 이 숲에 들어왔을 것이라곤 상상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것이다.
"에~이, 모르겠다. 조금 쉬다가 내 발로 돌아가지 뭐. 휴~!"
길게 숨을 내 쉬고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아름답게 부서진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얼마전 한 바탕 싸움을 치른 후라 흙먼지와 핏자국이 엉켜있지만 그의 외모 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달빛을 그대로 쏟아 부은 것 같은 빛나는 은빛의 머리에 뚜렸한 이모구비에 바다의 보석 아쿠아 마린으로 만든 것 같은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한 번보면 잊을 수 없는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보통의 남자들의 키를 훌쩍 넘긴 장신에 날렵하게 단련된 잔근육들로 전신이 이루어져있다. 엉망이 된 모습이지만, 그 나름대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휘고른의 귀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심한 갈증을 느끼던 차였다. 지친 몸을 들어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움직였다. 얼마 걷지 않아 작은 물줄기가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물을 만나자 힘든 것도 잊고 재빨리 뛰어 두 손으로 모아 물을 받아 목을 축였다. 몇 번을 더 그렇게 하고 더러워진 얼굴, 목, 팔등도 씻었다. 물을 마시고 간단하게라도 씻었더니 정말 살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물을 마시려고 손을 모아 물을 뜨다가 휘고른은 아름답게 물에 반사되어 빛나는 달빛에 매혹되어 고개를 들었다. 깊은 숲 속, 유난히 밝게 달빛이 빛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본능에 이끌리듯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라르돈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나?
달빛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누군가가 정성스레 가꾼 야외 정원처럼 잘 정돈되어있었다. 달빛 아래, 달빛을 닮은 은색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을 땅에 뿌려놓은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꽃밭을 작은 덤불들이 두르고 또 그 덤불 주위를 나무들이 두르고 있었다. 마치 이 꽃밭을 지키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 였다. 꽃밭의 중앙엔 옹달샘 같은 물 웅덩이가 있었고 거기에 달이 가득 차있었다. 신비한 광경에 넋을 잃고 보던 휘고른의 눈에 어떠한 꽃보다 더욱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