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어갔다. <바벨탑>의 앞에 서 있던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사냥을 갔다가 다시 저녁때쯤 되어 돌아왔다. 현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가르쳐줬던 대로 도시의 동쪽으로 가자 들개들이나 혼자 돌아다니는 늑대들이 출몰하는 초원이 등장했기에, 그곳에서 레벨을 좀 올리고, 저녁 시간이 되자 이곳으로 왔다. 그 결말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남자, 카인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카인은 입구 대신 어떤 팝업창을 켜놓고 그것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탑의 입구 쪽으로 돌리고는 중얼거렸다.
“끝났군.”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가버리는 것이었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로 달려가 그 어깨를 붙잡았다. 그로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 마디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끝났다니, 아직 나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확신하죠?”
카인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카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잡은 그 손을 떼어내며 팝업창 하나를 불러내어 현성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봐. 맵 탐색 범위 갱신이 3시간째 그대로다. 근데, 3시간째 안 나오고 있어.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냐?”
“맵 탐색 범위…?”
“이 세계의 미니맵은 다른 사람이 ‘탐색’한 범위도 표시해준다. 실시간으로. 근데 그게 3시간째 갱신되지 않고 있어.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냐고.”
그제서야 현성은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이해 이전에, 그의 직감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머리보다도 먼저, 직감이 그 내용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설마….”
“전멸한 거다, 그 망할 자식들. 이걸로, <바벨탑>을 올라가는 우리는 <라비린토스>를 선택한 녀석들을 이기기 힘들게 됐다고.”
카인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시퍼렇게 빛나는 그 안광을, 현성은 불쾌감을 담고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불쾌감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마저 진흙탕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왔다!”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인과 현성의 시야가 동시에 탑 쪽으로 향했다. 나오는 것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창을 짚고 겨우 탑 밖으로 나온 여성 한 명이었다. 입고 있는 경갑은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 있었고, 두 눈에 초점은 없었다.
현성은 재빨리 그 쪽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재빨리 그녀에게 뛰어갔다. 웅성거리며 나머지 사람들도 천천히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현성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이봐요!”
그녀는 여전히 초점이 없는 눈으로 허공만을 보다가, 시선을 현성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소름 끼치도록 허무한 미소였다.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다…죽었어….”
“…네?”
“나 빼고…다….”
카인의 예측은 정확했다. ‘전멸’이라는 결과.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러 온 사람은 정신이 붕괴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현성의 바짓자락을 잡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에 초점은 맞지 않았고, 그 눈 속에 있는 것은 공허함뿐이었다.
“다 죽었다고, 다! 다…다…! 들어가면 안 돼…저기는,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야…! 저기서 죽으면…죽는 게 아니야…사라져 버려…. 친구 목록에서도, 파티 목록에서도 사라져 버린다고…이 세계에서, 그냥 없어져 버리는 거야…!”
그녀의 울부짖음이 계속될수록 주변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갔다. <관리자>가 말했던, ‘탑’에서의 죽음은 ‘진짜’가 된다는 말이 이렇게 끔찍한 것이었던가.
끔찍한 시체를 남기는 죽음보다도, 피투성이가 된 살인 현장보다도, 그것이 더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 마치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의 울부짖음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얼굴이 흙빛이 된 사람들이 하나, 둘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남아있던 사람들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현성도 굳어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탑’을 중앙으로 해서 형성된 광장의 입구에, 카인이 굳은 얼굴로 기둥에 등을 기대어 서 있었다.
"이걸로 불가능해졌군, 이기는 건…. 저 녀석들의 도전은 안하느니만 못하게 됐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카인은 중얼거렸다. 현성은 그런 그를 힐끔 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광장 밖으로 나갔다. 지금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를 현성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모럴이 결여된 합리. 그의 말에는 도덕이 없다. 마치 장기를 두는 사람처럼 모든 상황을 장기말 삼아 결정한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합리적이며-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비도덕적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리고 소문이란 괴물은 언제나 그렇듯, 더욱 심각한 이야기로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더욱 멀리 퍼져나갔다.
아무도 <바벨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소문에 의해 그곳은 이제 ‘죽음의 탑’이 되었다. 그 누구도 들어가서 다시 나올 수 없는 절망의 탑. 그것이, 신에게 닿기 위해 쌓은, 신화 속 탑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절망의 탑인 <바벨탑>이었다.
현성은 <바벨탑>이 세워져 있는 광장에 다시 발을 디뎠다. 아무도 없었다. 처음으로 도전한 그들을 응원하던 사람들도,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들도, 그리고, 동료를 전부 잃고 돌아와 패닉에 빠져 울부짖던 그녀도 이 광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현성은 장비를 점검했다. 현재 레벨은 10. 무기와 방어구 모두 레벨제한이 10인, 현재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최신의 장비로 맞췄다. 물약도, 붕대도, 도핑용 약품들도 전부 넉넉하게 챙겼다. 현성은 각오한 눈으로 <바벨탑>을 올려다보았다.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한다면 확정적으로 죽는다. 조합이 완성된 5인 파티가 들어가서 손도 쓰지 못하고 전멸당한 곳이다. 자신 혼자 들어가서 살아남는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현성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잘못했을 거라는, 그들이 이상한 행위를 해서 위기에 빠졌을 것이라는,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직감과 희망에 근거해서 이곳으로 왔다.
“바보 같아.”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곳은 저주받은 죽음의 탑, 절망의 탑. 그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직감에 근거하여 이곳에 들어가는 그를 모두가 미쳤다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카인의 분노한 얼굴이 떠올랐다. 현성의 눈에, 그는 비겁자로 보였다. 자신은 그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럴 용기도 없던 주제에 먼저 들어가려는 5인의 용기를 이용했고, 그들이 실패하자 멋대로 분노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카인과 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해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그들이 옳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적어도 그의 검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실망할 때 하더라도 적어도, 그 스스로가 그들처럼 목숨을 건 이후에 그들에게 실망하고 싶었다.
현성은 검을 뽑고 버클러를 들었다. 그리고 ‘탑’을 올라가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계단. 그리고 그 계단을 올라가자 계단과 이어진 조그마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보였다. 그것을 열자 <바벨탑> 내부가 펼쳐졌다.
“여기가….”
<바벨탑>. 처음 본 인상은 ‘신성함’이었다.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푸른색의 탑 안을 비추며 주변을 성스러운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물 샐 틈 없이 벽돌로 메워진 벽은 아름답다 못해 성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현성은 그 내부를 걸었다. 그런 그의 눈에 수도사처럼 보이는 어떤 인물이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고깔처럼 생긴 수도모를 쓰고 있었으며, 얼굴은 웃는 얼굴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길이 약 70cm 정도 되는 소검(小劍)이 매달려 있었다. 레벨은 9, 이곳 <바벨탑>에서 최초로 맞닥뜨린 몬스터, <환몽의 신도>.
“너냐….”
현성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저것이다. 저것이, 그 용기 있는 5명을 죽인 몬스터들 중 하나다. 현성의 눈이 분노를 담은 흉흉한 빛을 뿜어냈다. 현성의 발이 땅을 박차고 곧바로 <환몽의 신도>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까가앙!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굉음이 조용한 탑을 울렸다. 현성은 힘으로 <환몽의 신도>를 내리누르고, <환몽의 신도>는 그 힘에 눌려 부들부들 떨며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현성은 곧바로 왼쪽의 버클러를 앞으로 내밀어 <환몽의 신도>를 후려치고 그 틈에 생긴 수비의 빈틈으로 검을 날카롭게 찔러 넣었다. 옆구리가 깊게 베이며 몬스터의 HP가 20% 정도 감소되었다. 그 경직으로 인해 휘청거릴 때, 현성의 검이 위로 쳐들어지더니 붉은 빛을 머금었다.
“죽어.”
자신이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인 줄은 알지 못했다. 현성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현성은 그 분노마저도 양분으로 삼아 검을 <환몽의 신도>에게로 내리쳤다. <글라디에이터>의 스킬, <일섬>. 붉은 빛을 머금은 검이 <환몽의 신도>의 몸을 가르고, 총 60%에 달하는 HP를 앗아갔다.
피격으로 인해 몸을 휘청거리며 <환몽의 신도>는 현성에게로 흰 장갑을 낀 손을 뻗었다. 잠깐 동안 현성의 시야가 이지러지고, 밀려오는 두통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 사이로 <환몽의 신도>의 검이 섬광처럼 내질러졌다.
캉!
그것을 현성은 버클러로 가볍게 막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이 방법으로…그 사람들을 죽였냐?”
현성의 검이 내질러졌다.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내뿜어진 일격은 <환몽의 신도>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며 남은 HP를 남김없이 앗아갔다. 소멸해가는 몬스터의 빛의 무리 속에서 현성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으득 갈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