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혹
로얄 호텔.
그녀의 숙소였다. 그렇다면 이 남자도 로얄 호텔에 묵고 있다는 말인가? 남자는 그녀의 심란한 마음도 모른 채 1층에 있는 바(bar)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우연일까? 아니면 인연? 훗, 인연은 무슨.
세계적인 호텔그룹에 다니는 호텔리어의 좋은 점은 각국의 계열 호텔에서 무료로 숙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로얄 호텔에 근무한 지 정확히 3년. 그동안 업무를 익히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석사 과정을 밟느라 쉬는 날도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석사 과정 논문을 제출하고 내년에는 대리 승진을 앞두고 있으니 그동안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었다.
그런데 그 상으로 주는 여행에서 그녀의 이상형인 남자를 만났다.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라면 정말 상 중에서도 큰 상이다.
[맥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같이 한잔할까?]
이미 술을 마시고 일을 벌인 그녀였으니 남자가 마시자는 술을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다.
남자는 종업원에게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시키고 그녀가 마실 맥주를 주문했다.
[저도 같은 거로 주세요.]
아, 류진휘.
이미 뱉어낸 말을 주워 담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그녀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깜짝 놀라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혼자 왔나?]
[친구가 함께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보기답지 않게 겁이 없군.]
종업원이 두 잔의 스트레이트를 내려놓자 남자는 잔을 들어 천천히 스트레이트 잔을 기울였다. 독한 술을 마시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그 시선이 어찌나 뜨거운지. 주희의 말처럼 동양 여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 건가. 아니, 남자가 불렀던 은지라는 여자도 한국인일 확률이 높으니까 남자는 취향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마셨다. 좀 더 머금고 있다가 삼키고 싶었지만 입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그대로 꿀꺽 삼키고 말았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홧홧함과 짜릿한 뭔가가 아래로 내려감과 동시에 뱃속이 뜨끈해지며 온몸에 열이 올랐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다가 아직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뜨거운 두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얽힌다.
파바박. 불꽃이 인다고 느껴졌다. 단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술에 취했나 보다. 아, 좀 전에 마신 맥주 때문인가.
그녀는 갑자기 목이 말랐다. 독한 술 때문인지 아니면 몸 중앙에서 이는 뜨거운 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목이 말랐다. 저도 모르게 붉은 혀가 나와 입술을 핥고 새하얀 치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반짝하고 빛났다.
유혹.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도 모르는 내부의 어떤 힘이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눈에서 강한 욕망이 느껴졌고 또 그는 그걸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 남자가 두 잔의 스트레이트를 다시 시켰다. 또다시 눈앞에 놓인 작은 위스키 잔.
남자는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건배라도 하듯 챙하고 부딪친 다음 그녀를 기다리지도 않고 단숨에 마셨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술을 털어 넣자 강인해 보이는 목 가운데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섹시하다. 술잔을 내려놓은 남자의 손이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자신의 입술을 훔친다.
그녀는 마치 따라 하는 것처럼 얼른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스트레이트 잔을 들어 한 번에 마셨다. 훅하고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얼굴이 빨갛게 물든 단풍처럼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 입술을 닦아 냈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그의 시선이 닳았다. 천천히 입술선을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는 회색빛 눈동자.
그 눈이 그녀의 귀로 옮겨 갔다가 귓불을 지나고 목선을 따라 내려온다. 이번엔 그가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시선 대신 뜨거운 입술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핥고 귓불을 물었다가 목선을 따라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아, 그 시선만으로도 눈길이 닿는 곳을 그가 손으로 어루만지고 입술이 닿는 것처럼 온몸이 짜릿한 전율이 흘러 저절로 목이 뒤로 젖혀지고 자연스레 입이 벌어졌다.
온몸이 불덩이를 삼킨 듯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그 열기를 뱉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힘줄이 툭툭 튀어나온 남자다운 그의 손등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검지로 그의 손등에 불거진 힘줄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생각해도 대담한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남자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마법사가 아닐까. 그녀에게 이상한 약을 먹이고 주술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살이지?]
그녀의 행동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가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어 온다.
[나이는 왜요?]
[한국인이지? 혹시 하은지를 아나?]
하은지. 그의 연인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찾지는 않을 텐데, 혹시 예전 애인?
한국이 아주 조그만 동네여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그녀가 은지라는 여자와 많이 닮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입에서 하은지라는 이름이 나오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기분이 나쁜 걸까, 자신이 뭐라고.
[이름이 뭐지?]
[류진휘.]
하은지를 묻는 그에게 그녀의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하은지가 아니라고, 전혀 상관없다고 꼭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류진휘?]
진휘는 그의 손등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남자를 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 한국 사람조차도 대부분 류진희라고 생각한다.
워낙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진희라고 알아듣더라도 다시 만날 일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남자는 정확히 진휘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제 이름을 처음부터 제대로 들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당신 이름은요?]
[처음이라고? 그거 영광이군. 내 이름은 제이 로저스.]
[제이 로저스.]
그녀는 남자의 이름을 한 번 불러 보았다. 강한 인상과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부드러운 느낌의 이름이었다.
[제이라고 불러.]
[제이.]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남자가 아니, 제이가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지폐 몇 장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어, 어.”
그가 잡은 손목이 아파 왔지만 그녀는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류진휘, 정말 오늘 사고라도 치려는 거야? 정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침착함으로 내부의 갈등을 잠재우고 말없이 제이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의 몸 안에 어딘가에 이런 무모함이 숨겨져 있었을까. 저도 모르는 일탈의 기운을 가슴 한구석에 잠재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무모함도 일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남자가 뿌려대는 저 짙은 야성과 암울한 신비로움,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그를 원하는 가슴속의 뜨거운 열정을 느꼈다.
그 모든 낯선 감정들이 외국이라는 환경 때문인지,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그가 그녀에게 마법의 약이라도 먹인 건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의 결론, 오늘 밤 그를 원한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못 이기는 척 자신을 이끄는 남자의 손에 몸을 맡겼다.
객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섰다.
제이가 25층을 눌렀다. 그 아래 있는 12라는 숫자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의 룸이 있는 층이다. 저 숫자를 눌러서 여기서 내려야 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그냥 눈을 감아 버리는 걸 택했다.
그 순간 마치 그 결정을 알아챈 것처럼 그녀의 몸을 엘리베이터 벽에 밀치며 그가 그녀의 두 뺨을 붙잡고 입술을 포개왔다. 두 입술 사이에 그녀의 아랫입술을 넣고 빨아 당겼다.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었다. 하지만 곧 그의 손에 잡혀 버린 두 손은 그의 한 손으로 포박당한 채 저항할 힘을 잃었다.
제 눈앞에서 동의를 구하듯 반짝이는 짙은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녀가 가쁜 숨을 토해 내다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움직임이 격해진다.
입술을 부딪쳐 강하게 빨던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다가 입안으로 뜨거운 혀를 밀어 넣어 주저하지 않고 휘감아 당겼다.
어느새 그의 입안으로 들어간 그녀의 혀를 혀뿌리까지 얼얼하도록 빨아 당기는 그 때문에 아찔한 통증으로 버둥거렸다.
하늘을 날다 그가 쏜 활에 맞아 떨어지며 날개를 파닥거리는 한 마리 새와 같이 그녀의 그 작은 버둥거림은 그에겐 아무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