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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빼앗긴 신의 아이들
작가 : 가브리엘
작품등록일 : 2017.5.19

살아있는 모든 자의 왕이자 신앙의 수호자로서
천 년 넘게 세상을 지배하던 라티움 제국의 콤네노스 가문이 무너져 갈 때
작은 나라 아키엔의 나이시아 가문과 제국의 방계인 앙겔로스 가문이 일어섰다.

꺼져 가는 촛불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콤네노스 가문과
잃어버린 이름의 신과 오래된 종교를 받아들인 나이시아 가문
미쳐버린 왕을 폐하고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앙겔로스 가문의

장구한 천 년 역사의 수도이자 신이 내린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노플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결전이 시작되리니…….

 
1. 아키엔 - 10
작성일 : 17-05-25 07:17     조회 : 280     추천 : 0     분량 : 1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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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칼레인 왕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후로 얼마 뒤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자신이 죽은 자들이 간다던 저승에 있는 줄만 알았다. 뭔가가 소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웅얼거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 가만히 주의를 기울여 보니 그것은 빗소리였다. 세상을 다 쓸어버릴 정도로 퍼붓는 소리였다. 저승에는 유황 비가 내린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저것이?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고개를 돌릴 기운조차 없었다. 그랬기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깨어난 것을 감지한 듯, 이내 저 멀리서 뭔가 흐릿한 것이 일렁이더니 반짝하며 빛이 터져 올랐다. 그것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수록 그것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궁중 내의임을 나타내는 청동으로 된 원형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순간 이 자가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궁중 내의라면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모를 리는 없을 터. 그러나 그러한 기분을 울컥하고 토해내려 하자 아랫배 근처에서 상상도 하기 싫은 고통이 올라왔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좋지는 않으시겠지요. 고자가 되어 버렸으니.”

 “너 이…….”

 

 뭘 믿고 이따위 소리를 해 대는지 몰랐으나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비참했다. 그랬기에 그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고통을 초인적인 노력으로 참아내며 손을 뻗어 내의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이었을 뿐, 그가 한 것은 그저 툭, 하고 그의 얼굴에 손을 댄 것뿐이었다.

 

 “움직이시면 안 좋습니다. 그냥 누워 계십시오.”

 

 욱하는 마음에 팔을 뻗었다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휘감긴 왕자를 바로 눕히며 내의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는 씩씩거리며 달아오른 감정을 다스리려 했으나 왠지 후드 밑으로 간신히 보이는 저자의 입술이 묘하게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진정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저 목소리, 분명히 들은 기억이 났다. 어디서 들은 거지?

 

 그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내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입을 열었다.

 

 “응급치료는 하였으나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거세형을 받고 멀쩡히 잘 살아간 사람은 드뭅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남성이 터질 때 충격을 받고 죽거나, 운이 따라서 살아난다고 해도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죽게 되지요. 그러니 전하께서 운이 매우 좋지 않다면 결국은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으실 겁니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전하께서는 이곳 아헨 탑에 유폐되셨습니다. 풀려나는 것은 지금의 폐하 사후이거나, 아니면 전하의 사후 이후일 겁니다. 조금이라도 전자에 희망을 두시려면 지금은 저에 대한 분노 따위는 가라앉히시고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닥치라고…….”

 “그 전에, 전하를 조금 더 살게 해 드리느냐,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게 해 드리느냐는 사실이 제 손에 달렸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시면 좋겠군요.”

 

 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열을 냈더니 잠시 진정됐던 고통이 다시금 꾸역꾸역 올라와 몸속을 휘감았기에 말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이런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왕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이상, 내의가 이토록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고통 때문에 그런 것은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간신히 마음을 다스린 왕자는 자신의 남성 위에 뭔가 묵직한 것이 올려진 듯한 기분이 들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내의가 자신의 그곳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치워라, 이 더러운……!”

 

 순간, 내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촛불이 꺼진 것일까?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샅 위에 올려진 내의의 두 손도 보이고 있었다. 왠지 두 손만 허공에 둥둥 떠 있어 보이는 것이 대단히 꺼림칙해 보였으나 왕자는 곧이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의의 몸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그림자 속으로 숨은 것처럼, 그의 몸은 그림자에 잠식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것이 그의 손이었고 잠시 후, 그림자는 천천히 사라지며 내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왕자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의의 얼굴은 창백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파리했다. 좀 더 시선을 돌려보니 양쪽 뺨과 턱 부근 그리고 목 쪽에는 푸르스름한 검은 덩어리가 뭉친 것처럼 돋아나 있었다. 보기에 대단히 흉측스러웠다. 냄새까지 나는 걸로 보아 분명 무슨 역병에 걸린 듯했다. 저런 역병도 있던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광경에 대면한 왕자는 중요한 사실을 놓친 채 입을 열었다.

 

 “병에 걸린 것인가? 궁중 내의가?”

 “궁중 내의는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걸린 건 저 일 뿐.”

 “그럼 네놈은 내의가 아니란 말이냐?”

 “뭐, 일단은 그렇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누구지? 날 죽이라고 누가 보내기라도 한 것이냐?”

 “글쎄요. 그런 거였으면 전하께서 의식을 잃었을 때 이미 그리했겠지요. 게다가 이렇게 고통까지 없애 드리는 수고를 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무슨 말을 하는…….”

 

 왕자는 문득, 더는 몸을 휘감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아한 마음에 슬쩍 발을 움직여 보았다. 다리도 살짝 들어 보았다.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그토록 고통스러웠건만 지금은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호기심 반 기대 반, 왕자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의가 그런 그를 부축해서 바로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고 왕자는 잠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내의를 향했다. 이 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육체의 아픔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고통까지 사라져 있었다. 나락 저 너머까지 가라앉았던 비참한 심정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느낌이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대화하기가 힘드실 것 같아 고통을 잠시 잊게 하였습니다.”

 “난 그럼 죽은 거냐?”

 

 내의는 훗, 하고 가볍게 웃음소리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살아 계십니다. 지금은 신의 도우심으로 잠시 고통에서 벗어나 계실 뿐입니다.”

 “신? 그분을 말하는 거냐?”

 “신은 맞으나 칼케도니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신이지요.”

 “너의 신이라 함은?”

 “저는, 오래된 종교의 사제입니다.”

 

 왕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의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교도의 성직자가 이곳에 들어와 있다니? 게다가 그가 뭐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한 것일까?

 

 “처음 듣는 이름이군.”

 “신자 수가 적으니까요.”

 “그런가?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날 대화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터. 말하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넌 누구냐? 추상적인 것 말고, 알아듣게 이야기해라.”

 

 내의, 아니 오래된 종교의 사제는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볼에서 꿈틀거리는 검푸른 덩어리 때문에 흉측하게 보였다.

 

 “저는 보다시피 오래 살지 못합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나병이라는 것을.”

 “아니. 전염되는 것이더냐?”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 옮기지는 않습니다.”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염되는 것이고 이미 자신에게도 옮겨졌다고 이 자가 말했다면 무슨 반응이 나왔을까 스스로 궁금해하며, 왕자는 다시 열리는 그의 입을 주시했다.

 

 “제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전하께서 오래된 종교의 맥을 이어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나보고 이교도의 사제가 되란 말이냐?”

 

 고작 그딴 얘기 하려고 날 멀쩡하게 해 놓은 거냐고 소리치려는 순간,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저 전하께서 개종한다고 말씀을 해 주시는 것뿐, 실제로 하시든 말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를 우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것이더냐?”

 “말장난이라…… 이런 것을 느끼셔도 그런 말씀을 하시렵니까?”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자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고통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큭, 하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 보려고 하던 왕자는 점점 고통이 커지며 인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자 항복하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네놈…… 대단히 요망한 놈이구나. 결국은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핑계로 날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제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례를 무릅쓰고 저의 소망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종한다고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시면 전하께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이곳에서 풀려나시게 될 것입니다.”

 “하! 웃기는 소리로군 그래. 고통은 네놈이 어떤 요사스런 힘으로 없애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이곳에서 풀려나려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든가 내가 죽든가 둘 중의 하나라고 네놈이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무슨 수로…….”

 

 말을 하던 왕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의혹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검푸른 덩어리들에 느껴지는 고통 때문인지 잠시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 네 녀석이 아버지를…… 그래,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네놈이 바로, 그때 아버지 곁에 있던 놈이냐?”

 

 그제야 형장에서 왕의 옆에 있던, 왕을 아버지라 부르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떠올라 왕자는 소리쳤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때와 달랐으나 풍기는 느낌이 흡사했다. 어둠. 음습한 차가움.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우울함과 죽음의 기운……. 이 녀석이 섬기는 신은 죽음의 신이 아닐까? 말만 사제라고 하고 사실은 악마를 숭배하는 놈이 아닐까?

 

 “네. 그때 서 있던 사람이 저입니다. 그리고…….”

 

 손을 뗀 남자의 얼굴을 보고 왕자는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푸르스름한 검은 덩어리들이 사라진 남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자신의 모습과 흡사했다. 훨씬 마르고 창백하기는 했지만 분명해 보였다.

 

 “스무 해 전, 전하의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워 있던 것도 저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젠 내 얼굴을 훔쳐 가기라도 한 것이냐?”

 “아닙니다. 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날, 보랏빛 출생의 타이틀을 거머쥔 것은 전하 혼자만이 아니니까요.”

 

 보라색으로 꾸며진 방에서 태어나 보랏빛 출생이라 불리는 영예로운 호칭의 근원은 라티움 제국을 지배하는 콤네노스 황실에 있었다. 제국의 수도인 비잔티노플의 블라케르나이 대황궁에는 침대부터 커튼까지 모조리 자줏빛으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그곳의 넓은 창문으로는 수도의 전경은 물론이고 그 너머로 펼쳐진 탁 트인 해안가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전망도 좋고 화려하기 그지없이 꾸며 놓은 이 방은, 평상시에는 비어 있다가 황후가 출산할 때가 다가오면 그 빛을 발하게 된다. 황후가 바로 이곳에서 아이를 낳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태어날 때 자줏빛 출생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며 이것이 없는 다른 형제보다 더 강력하게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줏빛의 보호를 받으며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굳이 그들이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모든 제국의 봉신들과 가신들은 자줏빛 출생이 아닌 황제는 섬기지 않았다. 그것이 대대로 이어온 라티움 제국의 전통이었다.

 

 그런 대국의 전통이 이런 소국에도 있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으나, 국왕과 후계자의 존재 자체를 더욱 고귀하게 하는 것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생산해 내기도 어렵고 또한 설혹 구한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사용했다가 제국의 견제라도 받는다면 문제였기에, 제국 내외부에 있는 크고 작은 가문들은 색깔만 달리하여 그것을 열심히 모방해왔고,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칼레인 왕자 역시 아키엔 왕국을 다스리는 나이시아 왕가의 정통 후계자임을 나타내는 보랏빛 출생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헌데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비록 나병인지 뭔지 하는 흉측한 병에 걸리긴 했지만, 왕자와 같은 얼굴을 가진 검은 로브의 사내 역시 자신 또한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왕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말은, 우리가 형제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단순히 형제를 넘어서, 한 얼굴 쌍둥이인 것이지요.”

 “하!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얼굴이 조금 닮았다고 하여 어디서 그런 시답잖은…….”

 “믿든 말든 그것은 전하의 자유입니다. 저는 전하께 그 사실을 믿어 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오래된 종교의 사제라고 말씀드렸을 뿐이지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창백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 그를 보니 왕자는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랬기에 중간에 자신의 말을 끊은 무례함에 대한 분노 따위는 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의문이 떠올랐다. 만일, 정말로 우리가 쌍둥이이었다면, 그랬다면 왜 나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왕실에서 후계자를 비롯한 왕의 아이들이 탄생할 때에는 여러 귀족이 입실하여 지켜보는 것이 전통이었다. 물론 과거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오는 바람에 왕비가 혼절해 버린 적도 있어서 지금은 귀부인들이나 궁정의 고위 관료들과 주교들로 입장이 제한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됐든, 출생에 대한 증인은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말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입막음을 하신 걸까?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 보자 뭔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물론 그 생각을 진행하도록 눈앞의 남자는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건대 제가 원하는 것은, 전하께서 오래된 종교의 맥을 이으시는 겁니다.”

 “지금, 빌어먹게도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된 내 앞에서 그딴 종교 개종이나 말하고 있다니,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너 같은 이교도 자식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화형이다!”

 “전하께서 고자가 되신 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화형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처럼, 전하와 함께,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은근히 고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그였다. 왕자는 지금이라면 고통도 느껴지지 않고 손발도 자유로우니 이놈을 두들겨 팬 뒤 짓밟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자신의 몸과 달리 눈앞의 남자는 긴 소맷자락 바깥으로 드러나는 팔과 손이라든가 다시 슬금슬금 검은 덩어리들이 피어오르고 있는 목 부분들이 상당히 가는 편이었다. 못 먹어서 피골이 상접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덮쳐 버리면 그대로 깔려서 제대로 버둥거리지도 못할 것이 확실할 정도로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왕자가 채 손을 쓰기도 전에 그것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위협하듯 말했다.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이대로 물러가면, 조금 전보다 더 큰 고통이 몰려들 겁니다. 전하께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이 세상을 떠나실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체. 빌어먹을…… 알았다. 원하는 걸 다시 정확히 말해라.”

 

 죽는 것도 싫고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또 느끼는 건 더욱 싫었다. 열 받아서 잠시 잊기는 했으나 지금 자신의 고통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남자의 알 수 없는 힘으로 잠시 사그라진 것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조금 전에 그랬듯이 자신은 온몸이 불타는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격렬한 고통에 휘말릴 터. 지금은 자존심 따위는 버려야 했다.

 

 “제게 이교도 어쩌고 하고 하셨지만, 전하의 칼케도니아에 대한 신심이 그다지 깊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니, 오래된 종교로 개종하시는 것에 그다지 큰 거부감이 들지 않으실 테지요. 전하께서 하실 것은 오직 하나, 개종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 주시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모두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왕자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개종하면 된다고? 아니, 실제로 개종하는지 안 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정말로 그냥 개종하겠다고 말만 하면 된다고?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이 뜬금없는 자비를 베푸는 남자에게 왕자는 의구심이 솟구쳤으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도 같았다.

 

 남자의 말대로 왕자는 칼케도니아에 대한 신심이 그다지 깊지는 않았다. 국교이기에 당연히 그냥 믿고 있는 것이고, 주일 미사에도 형식적으로 참여할 뿐 한 번도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왕국의 후계자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주교는 꽤 불만인 듯했으나, 왕조차 그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놓고 나서서 신심이 부족하다는 둥 혹독한 참회와 고행이 필요하다는 둥 하는 말은 꺼낼 수조차 없었다. 안 그래도 지금 제국에서 발생한 아리우스파와 같은 이단들과의 싸움으로 종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분열이 발생하고 있는 이때 괜히 그나마 잘 믿고 있는 왕까지 등을 돌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왕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왕자가 말뿐이라기는 하지만 이교도의 믿음으로 개종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체통도 잊고 펄펄 날뛰는 대주교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으나 왕자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왕자는 입을 열었다.

 

 “알겠다. 개종하겠다.”

 “전하의 존함과 오래된 종교의 이름도 넣어서 한 번 더 말씀해 주십시오.”

 “까다롭게 구는군. 알았다. 나, 칼레인 폰 나이시아는 오래된 종교로 개종하겠다.”

 “고맙습니다. 나, 칼리스토 폰 나이시아는 그의 개종을 받아들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의 몸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흡사 모래가 스러져 내리는 것처럼 남자의 머리와 어깨와 가슴과 손발이 쏟아져 내리며 바닥에 확 펼쳐졌다. 깜짝 놀란 왕자는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안개와도 같은 것이 바닥을 가득 메운 채 뭉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내 안개가 천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방 안 전체가 하나가 되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에 왕자가 어지러움을 느낄 무렵, 갑자기 안개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일어났다. 그리고 미처 놀랄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으, 으아악!”

 

 안개가 몸을 휘감는 순간, 거세를 당할 때의 고통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아니, 그것 이상이었다. 불타는 쇠꼬챙이가 몸 안에서 난동을 벌였다.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몸 전체가 불타는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에 왕자는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목구멍조차 타들어 갔기에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희뿌연 연기 같은 것밖에 없었다.

 

 “……!!”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고통은 사라졌다. 하지만 몸을 잘게 부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의 후유증 때문에 그것이 사라졌음에도 왕자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뭔가 서늘한 기운이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끼고는 슬며시 눈을 떴다.

 

 방 안은 멀쩡했다.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자신이 난동을 피웠건만 자빠지거나 부서진 것 하나 없어 보였다. 물론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기에 별다른 물품들이 없기는 했으나 잘 정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을 거라고 짐작되는 침대의 끄트머리에는 의복 한 벌이 잘 개킨 채 놓여 있었다. 그제야 이 서늘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왕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대충 꿰어서 입어 보니 희한하게도 자신이 즐겨 입던 옷이었다. 이 옷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하고 의아해할 무렵,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철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끼익 하며 문이 열렸다.

 

 “앗, 전하, 깨어 계셨습니까.”

 “누구…… 아, 그대로군. 병문안이라도 온 건가? 아니지, 고자가 된 게 병은 아니니까…….”

 

 의외로 왕자가 멀쩡해 보이는데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지도 않은 모습에 그의 앞에 나타난 로데인 남작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그냥 넘겨 버렸다.

 

 “전하,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뭐라고?”

 “조금 전에 궁중 내의가 확인하였습니다. 침수 드신 뒤 조용히 숨을 거두신 것 같습니다.”

 

 왕자의 눈에서 빛이 폭발하는 듯해 남작은 고개를 조아렸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에 슬퍼하지 않을 아들이 어디 있겠느냐만, 왕자의 경우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반역을 일으킨 죄목으로 거세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지 기뻐할지 남작으로서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모두 빗겨가 버렸다. 왕자는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가셨다고? 정말…… 그 녀석 말대로?’

 

 그렇다면, 그 녀석이 아버지를 시해하기라도 한 건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 아헨의 탑에서 왕의 침실이 있는 궁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최상단에 있는 이곳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리는 판에 날아서 간다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왕자는 왠지 오싹해졌다. 혹시 날아서 가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 전에 그 녀석은 죽은 걸까 아니면 내 몸 어딘가에 기생이라도 하는 걸까?

 

 “전하,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부왕의 붕어를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왕자와 그런 그의 앞에서 망극이 어쩌니 하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왕자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다는 말이 고작 괜찮으냐는 말이었고 왕자가 자신을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자 남작은 입이 방정이다, 하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여기에 얼마나 갇혀 있던 거지?”

 “지금이 깊은 새벽이니 못 해도 반나절은 넘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선…… 편히 가셨느냐.”

 “내의의 말로는…… 고통 없이 가셨을 거라 했습니다.”

 “……그럼 나는, 이제 유폐에서 풀려나는 것이냐? 그것을 전달하러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지금 궁은 폐하의 급작스런 승하의 소식을 듣고 몰려 온 수도의 소영주들과 가신들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전하의 측근인 가르멜 백작께서 저를 서둘러 보냈습니다. 이미 전령을 일곱 영지로 모두 보냈으니 날이 밝는 대로 장례 절차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하오니…….”

 “알았다. 가자.”

 “네, 전하.”

 

 더 장황한 설명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유폐되긴 했지만, 그 유폐의 기간은 나이시아 12세의 죽음까지였다. 이제 왕이 죽은 이상 유폐는 끝났고 별다른 후계자가 없는 까닭에 나이시아 13세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칼레인 왕자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선왕의 후계이자 대리인이며 차기 국왕으로서 대주교와 함께 장례를 집전해야만 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왕자는 당장 풀 수 없는 것들은 머리 한쪽으로 미뤄놓았다. 지금은 느닷없는 반역에 휘말려 거세까지 당해 버리는 바람에 바닥으로 추락한 권위와 신망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숙부인 오르무스 변경백 역시 눈이 뽑히고 추방된 이상, 이 나라에 자신을 보좌해 줄 대영주는 가르멜 백작 외에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괜한 잡음이 생기기 전에 누구보다 스스로 바로 서야만 했다. 온전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과 동시에 여전히 자신이 정통성 있는 후계자임을 보여야만 했다. 그래야 모두의 인정과 존중 속에 차기 국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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