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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가이아 프로젝트 (수레바퀴 : Great Reset)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각기 다른 세계의 두 남자가 가족을 잃으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 두 세계는 지구의 지상도시와 지하도시다.
두 남자의 여정 중 멸망의 전조와 신의 전말이 점차 드러난다.
세계는 다시 만들기 위하여 부숴야만 한다.

 
3. 천지 (Earth)
작성일 : 22-02-28 20:47     조회 : 178     추천 : 0     분량 : 16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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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상승 (Ascension)

 

  며칠 후 마지막 물리치료를 받은 후 얼굴과 팔다리에서 재생밴드를 떼어내자 본래 레오의 얼굴이 보였다. 새살이 돋아났다는 것을 목놓아 자랑하듯 피부가 전보다 눈에 띄게 하얘졌다. 이제 막 나기 시작한 검은 눈썹과 머리칼은 그 길이 매우 짧아 하얀 바탕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못난 얼굴을 더 봐야 무엇하란 생각으로 병원을 빠져나오며 치료비와 입원비를 계산했다. 입체 화상 시계에 뜨는 잔액은 - 0.005 COIN. 잔금은커녕 적자가 찍혔다. 공무 수행 중에 의한 상해이므로 사후 실비 지원이 나올 테지만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아 버렸을 때의 씁쓸함은 어쩔 수 없다. 경찰의 박봉은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경찰이었으므로 그도 경찰이고, 타고난 유전자는 싸움 말고는 하등 쓸모없는 근육 덩어리에 불과했다. 나쁜 머리로라도 생각을 하고자 터벅터벅 걸으며 어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차는 사무소에 있을 테지만 구태여 가지러 가지 않았다. 자신을 귀찮게 할 무리들이 있을 것은 충분히 예상되어 조용히 병원 밖을 나섰다.

  레오는 어렴풋이 드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선택할 것이 몇 개 없다면 일단 하고 볼 일이었다. 배고프면 움직여야 밥을 먹을 수 있다. 주저앉아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불필요한 인간. 그건 이 도시의 죄악이다. 목적을 대강 정했다. 그는 우선 미챌에게 전화했다.

  ”미챌, 부탁 하나 하자.“

  ”얘기해.“

  ”총을 좀 구해줘. 작은 것으로. 최대한 많이.“

  ”네 총 있잖아. 사무소에 있는 건 스프 끓여 먹었냐.“

  미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설마, 알았다. 가방에 넣어서 갈 거지? 같이 갈 거야? 따로 갈 거야?“

  ”혼자. 글쎄,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끝을 보고 와야지. 가서 직접 보고, 그때 생각할 거야.“

  ”그래.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연락 줄게. 기다려.“

  레오는 도심지에 있는 메가빌딩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작고 네모진 강철 상자 안에서도 광고판과 후크송이 연신 신나게 떠들었다.

  ‘젊은 청춘. 꿈이 아닙니다. 무려 단돈 10 COIN. 젊고 힘차게 다시 일하면 그 정돈 충분히 벌잖아요? 물론 테더리움 은행에서 대출도 해드립니다. 헌집을 저당 잡아서 새집을 꾸려보세요.’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은 천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다. 죽는 것은 무섭다. 풍족하다면 사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궁금할 때도 있다. 몸을 바꿔내면 그 정신이 본래의 자신이 맞기는 하느냐는 것이다. 그저 내장 프로그램처럼 머리에서 머리로 복사되는 것인지 정말로 옮겨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수레바퀴 이론대로라면 그들은 지구의 윤리를 어기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용납될 수 있는가는 이차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빈껍데기의 신체 마냥 영혼도 복사한다면. 레오는 생각이 생각을 뻗치듯 묘하고 잡스러운 상념들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13층에 도착해 한 문 앞에 선 레오가 차임벨을 울리자 그의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는 젊다. 아버지가 실종 되고나서 그녀는 새 삶을 꾸리겠다며 집을 팔고 신체를 교체했다. 마주하기 어색한 미인. 언제부턴가 그냥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마치 남인 것처럼.

  ”어서 와라. 이야기는 들었어. 문자라도 하지 그랬어.“

  그의 어머니가 안에 담긴 어색한 미인을 예의상 푹 안자 젊은 남자가 방에서 나왔다. 그는 그게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네가 레오군.“

  레오는 하대하는 어투에 욱하는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찾아온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작별인사를 하려했다. 그는 어머니가 차리는 밥을 함께 먹으면서 잠자코 있었다.

  ”잠시 떠나있으려고 들렸어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진짜 수레바퀴를 보고 온 거야? 거기서 어떻게 돌아온 거고?“ 무지에 의한 궁금. 하지만 난 백지의 답안이다.

  ”나중에, 나중에요.“

  ”그래, 나중에.“

  레오는 뱃속에 단백질을 밀어 넣듯이 밥을 그저 모두 삼켜버리고 일어났다.

  ”오랫동안 떠날 거에요. 만약,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미리 선환을 기다리고 있다고 여겨주세요. 어찌되었든 또 볼 수 있겠죠. 연이 얽혔다면 앞으로도 뒤로도 가족일 테니까요.“

  ”네 아버지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의 어머니의 눈빛에 잠시 슬픈 빛이 고이는듯 싶다가도 사라졌다. 5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다. 감정도 칼날처럼 쓰지 않으면 무뎌진다. 행복도 슬픔도 뇌에서 발생하는 신호에 가깝다. 실은 레오의 마음 깊숙이 있는 복수의 마음도 맹목적이었다. 폭사 사건이 있을 즈음에는 점차 몸에서도 많은 것들이 빠져나갔고 분노는 진즉에 잔잔해졌다. 그는 단지 마치 유전자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목적을 찾아 헤맸다. 말하자면 목적이 필요했다.

 

  레오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잡화 매장에 들려 필요한 것을 닥치는 대로 모두 주워 담았다. 소형 의료 키트, 공구 키트, 건조하여 압축한 빵, 종합영양제. 잔고는 여전히 적자였지만, 계산에는 무리 없었다. 이 도시 시스템에 통째로 삶을 저당 잡힌 지민은 어차피 빚을 갚을 것이니까. 물론 사무소에서 검토 후 실비가 따로 나올 테지만, 아마 그는 그걸 못 보고 갈 것이라 여겼다. 미챌의 말대로라면 기동 타격대의 출동일은 근 며칠 안으로 빠른 시일이었다.

  집에 돌아온 레오는 배낭 가방에 챙긴 것들과 가벼운 옷들을 모조리 구겨 넣었다. 검은 옷과 신발을 신은 채로 가방을 내려놓은 채 소파에 앉아 합성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리아가 아이를 가지기 전 종종 숨어 피던 종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알싸한 잎싸리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불을 붙이자 타닥타닥 태워 들어가며 온 집안과 입과 폐에 쓰디 쓴 연기가 자욱해졌다.

  ‘미안, 이건 정말 못 끊겠더라. 물론 네가 1순위야. 이게 2순위지만. 그래도, 3순위까지는 봐줘.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마리아는 항상 셋을 좋아했다. 무엇을 하든 세 가지를 정하고, 이유를 붙이든 항상 세 가지의 근거를 이야기했다.

  ‘난 네 아이도 세 명 가질 거야.’

  마리아는 밝은 아이였다. 레오는 항상 그녀가 그에게 과분하다고 여겼다. 삶에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라졌다. 나타의 말대로라면 수레바퀴에도 없다. 찾아오라 했다. 그로서는 앞뒤 모두 알 수 없지만 눈에 보이는대로 무엇이든 찾는대로 우선 하고 볼 일이라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힘은 있지만 목적을 잃은 무력한 사나이.

  R R R R R.

  미챌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레오. 일주일 후에 지상으로 올라가는 추진기가 이륙 된대. 내가 수송 칸에 커다란 박스에 크롬 탄약이랑 권총들을 잔뜩 넣어서 하나 준비해 놓을 테니 너만 때맞춰 타서 같이 가면 돼. 힘들게 구한 거야. 생색 좀 내보자. 어쨌든 난 준비만 해놓을 테니까 타는 건 네 몫이야. 들키지 마.“

  ”고맙다. 미챌.“

  ”이제 빚은 없는 거야.“

  ”그래.“

  ”미리 준비해서 상자로 넣어둘 테니 넌 준비를 해 둬.“

  ”어어.“

  타닥. 담배 연기가 입안과 눈앞을 몽글몽글 맴돌았다.

 

  며칠 후 레오는 약속된 날짜 전날 저녁에 이오플 연구소 통제탑에 숨어들었다. 통제탑은 도시의 바닥과 천장을 아울러 관통하여 있다. 태초에 이 도시가 건설될 때 이용한 통로를 따라 이오플이 독자적인 센터를 세워 이착륙장으로 사용하고, 그 외 공간은 연구소로 쓰고 있다.

  레오는 직원들의 퇴근 시간을 이용해 분주할 무렵에 잠입했다. 지도를 보고 감에도 초행길이 다소 헤매게 만들었으나, 다행히 무력을 사용할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주간직과 야간직이 교대하는 시간을 이용해 숨어들었다.

  중앙제어실 옆으로 넓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미챌이 일러준 추진기가 보였다. 추진기는 마치 버스를 위로 추켜세운 것처럼 직사각형으로 덩치가 굉장히 컸다. 출입문이 밑에 있었고, 높이나 구조로 보아 내부는 층으로 이루어졌다.

  일을 마무리 지은 듯 느긋하게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며 지나가는 직원들이 보였다. 레오는 그들 눈에 띄지 않게 제어장치들에 몸을 숨기며 천천히 추진기로 다가섰다. 한참을 기다려도 직원들은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 다른 직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 사이가 왁자지껄해지며 분주해졌다. 그 틈을 타 재빨리 추진기로 다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선 다음 먼저 구조를 살펴보자 수송칸은 가장 밑에 있고, 승객칸은 위로 있었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기다란 상자를 열자 미챌이 준비한 권총들과 탄약 상자들이 보였다. 가방을 열고 전부 집어넣고도 공간이 모자르자 홀스터를 겹쳐서 착용해 몸에다가도 권총들을 찼다. 준비가 얼추 끝나자 그는 박스에 몸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아 숨 죽여 눈을 감았다. 잠이 들어 큰 소리라도 내면 곤란하므로 잠들지 않도록 애를 썼다. 오기 전 합성카페인 음료를 몇 캔씩 잔뜩 먹어놓은 게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문득 이게 잘하는 짓일까도 후회도 들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살아남에 감사하며 전과 같이 경찰로서 치안업무를 보고, 새로운 가정도 꾸리고, 편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한번 주어진 임무를 놓치지 않고 완수해야 한다는 유전자 특유의 성질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끔 머리를 망가뜨려 놓은 걸까.

  일주일을 기다리는 동안 나타가 다시 불현 듯 등장해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것도 꿈이었던 것일까. 아마 정신을 잃고 아득하게 머릿속을 헤매다가 망상으로 상상의 존재를 꾸며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레오는 이제 나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레오는 생각이 꼬리를 물다 박스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일순간 몸을 퉁퉁 울리는 진동 소리에 눈이 떠졌다. 중력을 역행하는 듯 온몸이 땅으로 꺼질 것처럼 공기가 자꾸만 그의 몸을 밑으로 눌러댔다.

  연구소에서 비행 추진체가 쏘아 올려졌다. 추진체가 가벼운 불꽃을 내며 기다란 몸통을 터널을 옆면에 대고 위로 힘차게 상승했다. 그 안에는 100명의 정예 요원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탑승하여 긴장된 얼굴을 했다.

  레오는 덜덜 떠는 박스 안에서 지상으로 가는 길이 출발했음을 직감했다. 방아쇠를 누른 총알이 총구를 떠났기에 되돌릴 방법은 이제 없었다. 심장이 콩콩 뛰며 그의 혈액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그도 10분가량 넘게 방치되자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10분도 채 안되는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쿵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을 짓누르던 진동이 멈춰섰다. 레오는 계속해오던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 기동 타격대가 내려오기 전에 그가 먼저 나가야 할지, 그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기다리다 추진기가 내려가 버려서 못 나갈 경우도 있었다. 그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당초의 결심대로 곧장 뛰쳐나갔다. 고민할 땐 움직여야 한다.

  ‘고민될 땐 이렇게 생각해 봐. 해야 되나? 그럼 하면 돼. 그런데 해도 되나? 그럼 절대 하지 마. 이 딱 두 가지만 지키면 인생이 꽤 편해.’

  ‘마리아, 어쩐 일로 두 개만 말하네.’

  ‘나머지 하난 영업 비밀이거든. 입을 맞춰주면 마저 말해줄게.’

  아마 문이 왜 열려있는지 어리둥절해 하겠지만, 그것까지는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레오는 배낭을 멘 채 문을 열고 뛰었다. 파삭 파삭 파삭 하는 풀들이 밟혔다. 물기를 머금은 듯 풀잎들이 찰랑거렸다.

  추진기가 도착한 곳은 한 푸른 언덕이다. 그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지부에서 결코 볼 수 없는 드넓은 파란 공간이 열렸다. 겉보기에 푸른 바탕에 하얀 구름을 뭉게뭉게 칠해놓은 그림같은 그림은 정예 요원들도 넋이 빠져 하염없이 올려다보기 바쁘게 만들었다.

  레오는 추진체에서 내리자마자 잠시 풍경에 눈을 빼앗기고 다리도 멈춰섰다. 처음 보는 자연의 경관과 코에 강하게 쏘아오는 상쾌한 내음은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언덕의 밑으로는 내리막이 이어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 없이 주로 풀무더기로 가득한 초록 대지는 마구 다리를 놀려 뛸 수 있게끔 충동을 망치질했다. 눈을 껌뻑이다 정신을 차린 레오는 가방을 멘 채 무작정 뛰어 내려갔다. 파삭 파삭 풀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중력이 등을 밀자 내달리는 다리는 더 이상 그의 의지와 관계가 없어졌다. 탁 탁 탁 연신 교차 되는 뜀 걸음은 점 점 점 더 가속 되었다.

  천장이다. 아니, 하늘이다. 내가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라고 레오는 되뇌였다. 밑으로 다리를 달리고 눈을 들어 위로 우러러보며 하늘에 눈을 여전히 빼앗겼다.

  지민은 땅과 땅, 대지와 천장 사이에서 살아간다. 천장이 저렇게 높았던가. 푸르른 색이 끝이 없다는 것인지, 예쁘게 파란 벽이 파랗게 칠해진 것인지 처음 보는 그는 이유를 알 턱이 없다. 뛰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또륵 흘렀다. 숨이 차 벌어진 입과 헐떡이는 콧속으로 들어오는 차갑고 푸른 공기가 그의 폐를 휘감았다.

  90년 전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기억. 아버지가 10살이 이제 막 된 어린 레오를 보며 한 책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치기 어린 나이 어린 소년은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낡고 먼지 쌓인 구닥다리 책에 관심 가질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스치듯 보고서 묻던 기억이 휘발된 기체가 물방울로 돌아와 또륵 또륵 거슬리게 흐르듯 그의 뇌리에 남는다.

  ‘하늘이 뭐에요?’

  아버지는 미소지었다.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거대하고 푸른 생명의 바다야. 신이 사는 곳이지.’

  ‘천장과는 다른 건가요? 황제가 신은 지구 안에 있댔어요.’

  ‘그건 거짓말이란다. 레오는 커서 절대 악마에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린 대지와 바다를 뺏긴 거야.’

  레오는 초록 땅과 파란 하늘에 눈과 시야가 모두 잡아먹히면서 끝없이 달려나갔다. 그러다 다리가 힘에 부쳤는지 풀이 미끄러웠는지 데굴데굴 자빠졌다. 퍼덕이며 내동댕이치는 언덕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파장을 일으키며 가득 울렁였다. 그는 한참을 굴렀다. 그리고 그를 맞이한 것은 중력이 비웃듯 붕 뜬 몸과, 낭떠러지와, 강물이었다.

  그는 추락했다.

 

 3-2. 천지 (Earth)

 

  추락하는 절벽은 낭떠러지이지만 경사가 있었다. 차라리 허공이었으면 좋았다고 싶을 정도로 세차게 레오의 머리며 어깨며 무릎이 아무렇게나 솟은 돌덩이들에 부딪히며 떨어졌다. 퍽 하면 우드득 소리가 났다. 비명을 지를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 통증은 분명 뼈가 이리저리 부러지고 있음을 세포 하나하나가 알려줬다. 둔탁한 파열음이 계속될수록 떨어지는 몸의 회전 속도는 더욱 거세졌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중력은 무심할 정도로 몸을 밀어냈다.

  ”컥!“

  겨드랑이가 부서질 듯 반작용을 일으키며 레오의 몸이 세워졌다. 용케 절벽 사이에 잘도 자란 굵은 나뭇가지에 배낭이 걸렸다. 헐렁했던 탓인지 겨드랑이가 벌려지며 배낭끈으로부터 양팔이 점차 빠지기 시작했다. 80kg의 몸무게는 중력을 증명하듯 서서히 빠지기 시작한 양팔에 가속을 더해 몸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레오는 간신히 재빨리 한 손으로 몸에서 멀어진 배낭끈을 잡을 수 있었다. 어깻죽지가 분리되는 듯한 통증과 멈춰버린 시간은 그제야 일마디 탄식을 허락했다. 배낭에 걸린 나뭇가지는 드득 소리를 내며 어느새 반이 갈라져 속살을 드러내 보였다. 밑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수직으로 떨어지면 분명 낙하할 지점은 여전히 솟은 돌덩이들과 차가운 돌바닥이었다. 그 옆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짙은 푸른색은 하늘과는 다른 파랑이었다. 다시 드득 소리를 내는 나뭇가지를 보며 레오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배낭끈을 잡은 손을 굳게 잡고 몸을 점차 반동했다. 앞으로, 뒤로, 앞으로, 뒤로.

  어느덧 발이 벽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지자 더 이상 고민을 접어두었다. 배낭 따위 작별을 고하며 손을 떠나보내고 반동으로 앞서간 몸에서 발로 벽을 찼다. 탁음과 함께 레오의 몸이 둥실 뜨며 못 다한 추락을 이었다. 더운 열기가 차가운 공기를 비집고 밀어내듯 몸은 쏜살같이 아래로 향했다. 허둥지둥할 틈 없이 몸이 접혀 엉덩이부터 밑으로 향했다.

  거품이 일며 강물이 레오의 몸을 받아냈다. 시퍼런 충격에 근육이 얼어버릴 지경이었다. 시야가 금세 파래지며 눈알부터 입속까지 물로 가득 찼다. 도시에서의 물놀이는 귀족들이 즐길법한 고급 취미 기술에 속한다. 그가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레오는 그저 허우적대며 어떻게든 모가지를 물 위로 뻗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몸은 강의 물결을 따라 둥실거리며 위아래로 철렁였다. 우선 어디로 떠내려가는지 보려 흘러가는 앞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끝없이 철렁이며 시야가 반복해서 파래졌다 하얘졌다를 반복했다. 그는 스스로가 지금 뭘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아득해졌다. 뼈마디가 욱신거리며 수없이 첨벙이던 팔의 힘이 약해졌다. 물살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레오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팔을 휘저으며 고개를 쳐들어 앞을 보았다. 푸른 강물 위로 하얀 거품이 수평을 일렁이며 다시 파란 하늘이 적셔졌다.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물살이 세차졌다고 느껴졌을 때 또 다른 추락이 이어졌다.

  거대한 폭포수는 입안에 거슬리는 가래침을 뱉듯 레오의 몸을 물 밖으로 토해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맥없이 중력을 느끼며 다리를 아래로 향하고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폭포 밑의 강물은 뱉어낸 그를 다시 삼켰다.

 

  - 에페 공무 사무소 도서관 문서 중 ‘창세행전(Testament)’ 6장 기록 내용 -

 

  녹지화 : 가이아 프로젝트 발생 이후 지상에서의 세포 분할을 가속화시켜 동식물의 존립을 도모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지구에서 인류와 생물의 삶을 분리했다. 이를 지부(地府)와 지상(地上)으로 구분한다.

  서기 100년 1차 최초 탐험. 황제의 명을 받고 전권을 위임받은 이오플이 기동 타격대 일부 요원들을 기동 탐험대로 선별했다. 기동 탐험대는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개별 증언 합산하여 일지로 기록했다. 지상 착륙 후 소량의 방사능을 예측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 전역의 녹지화를 확인했다. 빨갛거나 노랗거나 푸른 나무들이 색색이 뻗어 간간이 숲을 이루었다. 일부 사막이 남아 있으나 다육목 등 식물의 근간이 발견되었다. 소유욕을 금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이름 붙이는 것을 금했다. 해수면이 높아지고 조수간만의 차가 강해 파도가 높게 일렁였다.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흰 구름이 하늘을 덮어 맑아졌다. 원년 전 기록에 있는 동식물과 기록에 없는 동식물이 혼합하여 자립하는 것을 확인했다. 멸종할 것으로 추측되었던 추방 인류가 발견되었다. 검은 피부에 하얀 머리칼을 했다. 공동체와 촌락을 이루어 살아있었다. 기동 탐험대는 지상 잔류 인류와 최초 접촉 후 외교를 시도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의 군락은 왕이 있었으며, 조직 체계는 지방 봉건제로 보였다. 각 마을마다 촌주가 따로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멀리하며 적대적으로 대했다. 공식적으로 이른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기동 탐험대는 5년여간 지구 각지를 분대별로 돌아 천지의 상황을 기록한 후 복귀하였다. 녹지화는 약 50%로 기록되었다.

  서기 200년 2차 탐험. 지상이 사실상 완전한 녹지화를 이루었다. 사계절이 뚜렷해졌으며 기온이 봄에는 10℃, 여름은 20℃, 가을은 15℃, 겨울은 5℃가량의 온도를 유지하였다. 동식물이 살기 매우 쾌적하였다. 나무에 빨간 잎이 봄에 열리고, 푸른 잎이 여름에 열리고, 노란 잎이 가을에 열리고, 하얀 잎이 겨울에 열리며 형롱한 숲을 이뤘다. 동물들은 대부분 잡식 없이 육식이나 초식이 뚜렷했으며, 그 먹이 사슬이 명확했다. 가장 큰 짐승은 큰 이빨을 가진 고양이과로 몸집이 6m에 달하고 높이가 2m에 달했으며, 가장 작은 짐승은 긴 코를 가진 하마과로 몸집이 15cm고 높이가 10cm였다. 고양이과나 개과는 작은 짐승들을 사냥하여 육식하였고, 하마과나 포유류과는 열매나 풀을 뜯으며 초식하였다.

  천민들의 주거지들을 발견하였는데 그 전과 모습이 상이했다. 동굴과 움막에 가까웠던 집들이 강이나 바다 근처에 한데 모여 촌락을 이루었는데 그 넓이가 매우 크고 넓어 봉건 국가의 모습이 거의 갖춰졌다. 촌락은 기동 탐험대의 착륙 지점을 의식한 듯 그로부터 각각 약 500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탐험일로부터 발견일까지 시일이 걸렸다. 지부 도시가 열두 곳이고, 지상의 마을 형태도 열두 곳으로 확인되었다. 기동 탐험대와 천민이 대면 후 크고 작은 싸움들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기동 탐험대의 화력으로 우세했으나, 수백이 넘는 천민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고양이과나 말과의 큰 짐승들을 등에 올라타 창칼을 쓰거나 화살을 쏘는 등 위협적이어서 중반까지 기동 탐험대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지구 각지에 흩어진 기동 탐험대가 한 곳에 모여 정비한 후 한 마을을 급습하여 몰살하였다. 아군 중 부상자가 열일곱, 사망자가 아홉이었으며 천민 중 죽인 이가 육천육백오십구, 사로잡은 이가 일곱이었으나 모두 자살하였다. 기동 탐험대는 후일을 기약하고 복귀하였다.

  서기 220년 바다와 통하는 새로운 길을 뚫어 어류 식량을 양산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시설을 완공했다. 밀, 옥수수, 소, 돼지 이외의 주식으로 어류가 유행하였다. 날로 먹고 탈이 나는 지민이 급증하자 허가된 전문가 이외에 민간이 어류를 손질하는 것이 금해졌다. 이를 어긴 지민 두 명이 본보기로 지부 밖으로 방출되었다.

  서기 250년 민간 기술로 바다를 탐험하는 지민들이 늘었다. 민간 탐험이 불법으로 조례가 먼저 내려져 계도 기간을 둔 후 일 년 후 황제령으로 지부 외부 이동에 관한 전반적인 통제법이 전면 개정되었다. 이를 어긴 지민 이십 명이 사형을 당하고 수레바퀴에서 사멸되었다. 공포 통치로 반발이 있고, 최고 회의에서 수레바퀴 통제권에 대한 일부 논란이 있었으나, 잠잠해졌다. 황제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모든 생사가 그에게 있었다.

  서기 300년 1차 토벌. 이오플의 지시로 대천민 전쟁을 공표하여 각 지부별 일천오십 명, 총 기동 타격대 일만이천육백 명이 꾸려졌다. 제조술이 발달한 천민은 강철로 된 사슬과 판금을 갑옷으로 삼아 창칼을 무기로 썼는데, 그 수가 모두 일십만 명이 넘었다. 천민의 군대를 이끌던 왕은 그들의 음차로 아드레아(Andreas)다. 5년간 전쟁이 이어졌으나 쉽사리 이기지 못했다. 점령하고 점령당하기를 수십 차례 주고받으며 아군 전사자가 오천 명이 넘을 무렵 전쟁이 중단되었다.

  서기 335년 신의 대리인을 자칭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민과의 평화 조약을 주장하고 지민의 근거지를 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는데 공식 석상에서 황제에 의해 사멸되는 장면이 방송으로 송출되었다. 이후 황제와 최고 회의에 반하는 이가 없었다.

  서기 370년 천민 중 과격한 일부가 지부로 침입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지부에 숨어들어 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열두 지부는 도시를 폐쇄하고 불필요한 이동을 자제하며 내부 치안을 강화하였다. 귀족들을 제외한 사사로운 지부 이동이 중단되어 사실상 교역이 끊어졌다. 상업에 종사하는 지민 중 궁핍한 이가 많아졌다. 이오플은 그들의 생계를 각기 유전과 환경에 맞는 것으로 전환해 주었다. 열두 지부는 상호 교류적이었으나, 이후 독립적으로 변했다. 사유가 있는 경우 도시 이주를 허가했다. 이중 황제가 기거하는 에페는 사실상 수도로 자리 잡았다.

  서기 400년 3차 탐험. 기동 탐험대는 주로 지상 관찰을 중점으로 움직였다. 천민 중 검은 피부 하얀 머리칼이 아닌 다양한 색깔의 유색인종이 발견되었다. 천민의 왕은 시모(Simon)다. 천민의 평균 수명은 약 80살 정도로 추측되었다. 그들은 짧은 유아기를 보내고 10살부터 청년기를 거쳐 60살 전후로 노화되었다. 대체적으로 몸집이 크고 근육이 발달하며 신장이 높았는데, 겉 보이는 성기나 유방도 지민에 비해 비교적 컸다.

  서기 500년 4차 탐험. 천민의 의식은 사냥과 채집이었다. 그들은 밀과 쌀을 비롯한 작물을 땅에 심지 않았으며, 자연에 있는 것을 분기별로 마을로 가져갔다. 천민의 각 지방은 분기별로 행정 수도에 공물로 보냈다. 사냥용 짐승은 몸집이 2m인 개과 동물을 이용했고, 수송용 짐승은 몸집이 3m인 고양이과 동물을 이용했다. 천민의 왕은 디디무(Didymus)다.

  서기 600년 5차 탐험. 지상에서 종교가 발전했다. 천민은 대부분 모두 하늘을 섬겼다. 그 를 일컬어 그들의 음차로 시크라 불렀다. 시크의 상징은 붉은 십자가의 중앙에 원을 그린 모양이었는데, 천민 마을의 건물 중 하나는 그 모양을 꼭대기에 달아 종교 건물로 사용했다. 종교 건물은 매일같이 행사가 있어 천민들이 자주 모여 무릎을 꿇고 염원이나 찬양을 외쳤다. 종교 행사를 주관하는 사제는 기다란 하얀 옷을 입고 목에 검은 천을 둘렀다. 천민의 왕은 타디오(Taddio)다.

  서기 700년 2차 토벌. 천민의 사냥 집단이 폭약을 사용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폭약은 지상의 물질로 지부에 없는 것이며 갈아 만들어진 가루를 가죽 안에 한 데 섞어 뭉친 모습이었는데 그 가루 뭉치가 충격을 받으면 큰 소리를 내며 불길을 일으켰다. 기동 탐험대 복귀 후 이 사실을 들은 최고 회의는 천민 토벌을 발의했으나 폐지되었다. 천민의 왕은 바르토매(Bartolmay)다.

  서기 800년 6차 탐험. 기동 탐험대 중 대원 한 명이 군을 이탈하여 천민 여자와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탐험대가 초기에 추적하였으나 끝내 놓쳤다. 불필요한 자원 소모를 피하기 위해 추격을 멈추고 해당 대원의 기록을 말살했다. 복귀 후 최고 회의에서 연좌제가 논의되었으나 발의가 폐지되었다. 천민의 왕은 자고브(Jagob)다.

  서기 850년 최고회의의 발의로 탈영 요원 추적하는 기동 추격대 열 명을 편성했다. 추격 전 천민의 상황을 간이 탐험 후 기록했다. 수많은 대장간으로 제조술과 제련술이 특히 발달했으며, 주식은 사냥과 채집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방 봉건 체제가 견고했다. 천민의 왕은 매튜(Matthew)다. 지상의 한 마을에서 천민 여자와 장성한 자식 셋을 낳아 사는 것을 확인했다. 요원과 가족을 모두 밤에 암습하여 몰살한 후 복귀했다.

  서기 881년 코린트, 갈라타, 테살로 3개 지부에서 대규모 테러가 발생했다. 폭발로 지민 사백육십육명이 사망했다.

  서기 883년 필립, 티모트, 하이브, 티살라, 콜로스 4개 지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구백팔십일 명이 체포당했다. 그 중 구백칠입이 명이 사형당하고 아홉 명이 격리되어 수용되었다. 수레바퀴에 변화가 생겼다. 이를 주도한 인물 중 천민 한명이 생포되어 고문을 가해 파악된 정보를 기록했다. 그들은 종교적 사유로 의도적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생포된 천민은 수용소 이송 후 자살했다.

  서기 885년 타이토, 자고보, 로메 3개 지부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폭발로 지민 육백오십오 명이 사망했다. 폭약 추적으로 지부에 없는 지상의 물질로 밝혀지며 천민의 소행으로 확정했다.

  서기 887년 에페 지부의 한 마을이 천민 집단에 의해 몰살당했다. 천민 전면 소탕을 공식 성명 발표했다.

  서기 888년 3차 토벌. 기동 타격대 정예 요원 각 지부별 일백 명 모두 일천이백 명이 소집되어 지상으로 출격했다.

 

  레오는 따듯한 온기와 욱신거리는 통증에 눈을 떴다. 천장은 시야에 모두 잡힐 만큼 잡았고 천천히 눈을 돌리자 작은 원형 오두막 안의 모닥불이 보였다. 그 앞에 백발이 하얀 노인이 구부정하게 앉아 모닥불 위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일어났는가, 자네 여기 사람이 아니구먼.“

  레오는 목을 쥐어 짜내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자신의 몸을 더듬더듬 되만지며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렸다. 근육의 조각들이 파작 찢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엉망이 된 몸을 내려다보자 한심스러웠다.

  ”채집할 풀을 뜯다가 강가까지 갔는데, 자네가 있지 뭔가, 일단은 힘들게 데려는 왔는데 내 볼 줄 아는 게 없어 그냥 눕혀놨네만, 몸은 괜찮은지 모르겠네.“

  떨어질 때 여기저기 부딪히며 근육이나 뼈가 상한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움직이기에 크게 불편함은 없는 것 같았다. 뼛속까지 찌르는 아릿한 통증들만 참고 넘긴다면 괜찮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노인은 홀홀 웃으며 하던 것을 계속했다. 정신이 또렷해졌다. 판단이 조금씩 맑아졌다.

  ”그런데, 여기 사람이죠? 정확히 말하면, 이 땅 위에.“

  노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백발을 박박 깎고 하얗고 짧은 수염이 너저분하게 있었다. 피부가 갈색 빛이었는데 주름이 자글한 것이 살아온 날이 길어보였다. 외모만 본다면 천민과 흡사해보였다. 하지만 몸집이 왜소하고

  ”맞네만.“

  레오는 눈을 껌뻑거리다 우선 무기를 눈으로 찾았다. 홀스터가 어디 있지. 노인은 여전히 무언가를 저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아름답다. 순수한 가면.

 끌어내리고, 팔아버릴 것이다.

 도망쳐라. 하얀 눈처럼 차갑다.

 돌로 만들어진 영혼을 조각했다.

 끌어내리고, 팔아버릴 것이다.

 어둠에 안겨 빛을 잃어가고 있다.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배신한 자는 어떻게 되었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그들을 모두 끌어내리고, 팔아버렸다.

 마음속으로 유다의 종이 되었다.

 구할 수 있을까.

 인생의 잔해 속에서.

 잔해의 인생 속에서

 오고 있다.

 내 마음의 유다.

 네 유다의 마음.

 

  “우선 이거나 들지. 몸이 많이 성했어. 하루를 꼬박 채우고 이제야 일어선 거야.”

  노인은 레오에게 밀 죽 한 그릇과 수저를 건넸다. 경계심이 들었다. 함부로 먹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내 배가 고팠다. 다른 생각은 않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입에 들자 레오의 맛에 썩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허기가 반찬으로 삽시간에 그릇을 비웠다. 한결 속이 좋아진 레오가 물었다.

  “제가 두렵지 않습니까?”

  “내가 왜?”

  노인은 대수롭지 않으며 답했다.

  “전 지부 사람입니다.”

  “알고 있다네.”

  “그리고 놀랍게도 말이 통하는군요.”

  “알고 있어. 우선 쉬어두라구.”

  레오는 감겨오는 눈을 닫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기기 힘들었다. 중력이 그의 몸을 당겼다. 노릿한 가죽냄새와 뜨스한 열기가 펄펄 몸을 대폈다. 레오는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내 잠이 들었다.

  이튿날 동이 트며 레오도 눈을 떴다. 노인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한결 몸이 움직이기 좋았다. 옷을 걷어 몸을 살펴보았는데 벌건 상처부위가 많았지만 그런대로 잘 아물어 있었다. 뼈와 근육의 움직임도 괜찮았다.

  레오는 노인을 따라나섰다. 노인은 말수가 별로 없었다. 그는 분주히 그날 먹을 풀을 뜯거나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땄다. 레오도 별 말수 없이 그를 뒤따르며 눈치껏 일을 도왔다. 경계심이 완전히 풀어진 건 아니었지만 도움은 보답해야할 것 같았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알다마다.”

  “전에 지부란 말을 아시더군요. 알고 보면 우리가 쓰는 말인데도요. 우리는 지상에 사는 인류를 천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천민입니까?”

  “아니네.”

  “그럼 다행입니다.”

  레오는 실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맞다고 답하든 맞다고 여길 이유가 생기거든 도움일랑 치워두고 먼저 목을 비틀 생각이었다.

  “제 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 따로 보관해 두셨습니까?”

  “곧 줄 거네. 기다리라고.”

  레오는 노인을 따라다니며 지상의 생태계를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혹은 상상했던 것보다 지상은 그 나름의 규칙을 가진 채로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한 여름철의 붉은 나무들이 이색적이었다. 그 위로 사람만한 새들이 지저귀며 다녔는데 그들과 마주쳐도 위협이 없었다. 크고 작은 동물들은 제각기 먹이들이 정해져 있었다. 귀가 짧고 몸이 작지만 목이 긴 하마과 동물은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먹었고, 그 동물은 그보다 몸이 크고 몸에 줄무늬가 가득하고 꼬리가 긴 쥐과 동물이 잡아먹었다. 그리고 그 동물을 털이 바릿하게 자란 고양이과 동물이 잡아먹었다. 누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정한 듯이 먹이사슬이 정해져 있었다. 레오와 노인과 같은 인간은 그 사슬에서 제외된 것처럼 무시되었다. 마치 의도적인 환경이다.

  레오는 노인에게 자연에서 살아남는 법을 어깨너머 배웠다. 먹을거리를 찾는 법, 그를 간단하게 요리하는 법 등을 조금씩 배웠다. 노인은 그날 먹을 것과 다음날 먹을 것 이외에는 챙기지 않았다. 생태계의 섭리를 해치지 않아 보였다.

  “여기 사신 지 오래 되셨습니까?”

  레오는 움막에서 노인을 마주한 채 열매를 손에 들며 물었다.

  “한 이천년 쯤 산 것 같군.”

  레오는 열매를 떨어트릴 뻔 했다. 경계심이 솟아났다.

  “그 말씀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로 들립니다.”

  “맞다고는 한 적 없네만.”

  노인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았다. 홀스터가 어디 있지.

  “꼭 절 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그래야 하니까.”

  레오는 눈을 계속 돌렸다. 홀스터가 대체 어디 있지.

  “자네 계속 이걸 찾나?”

  노인은 전부터 끓이던 움막 구석의 모닥불 위 솥을 가리켰다. 그가 던지는 눈길의 끝에 어느새 놓여 바닥에 정갈하게 놓인 홀스터가 보였다. 레오는 우두커니 앉아 눈을 돌렸다. 노인은 돌연 웃고는 솥을 그의 앞으로 쏟아버렸다. 펄펄 끓여진 물에 적셔진 권총들과 단검이 쏟아졌다.

  “불의 세례다.”

  레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노인도 헤헤 하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도 눈을 빛내며 레오를 응시했다. 혀맛이 비릿했다.

  “설마. 누구입니까, 당신. 나타?”

  “아니, 난 라브(laab)라네.”

  레오는 설명이 필요해 잠자코 기다렸다. 라브도 잠자코 레오를 잠시 보다 말했다.

  “나타와는 동료지. 내가 왜 여기 있냐고 궁금하거들랑, 잠시 추방당한 셈이지. 잘못을 조금 했거든. 하지만 처사가 참 가혹하지. 왜냐면 난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 이 자연을 보아라. 얼마나 아름답더냐. 일만년은 긴 세월이다. 나는 참을 수 없기도 하고. 그것은 나타도 마찬가지이겠지. 인간을 도운 적이 있다. 몰래 도왔지. 창조주의 편애를 받는 너희들이 시기가 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가련한 영혼들이니 도와주고 싶었지. 잘 살아나갈 수 있도록. 번영할 수 있도록. 그런데 너희는 우리를 배반했다. 가이아를 찢어 놓는 게 아니었어. 그래서 되돌릴 것이다. 그래서 너의 육신과 영혼을 잠시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도울 것이고. 대답이 되었던가?”

  레오는 말문이 막혀 생각에 잠겼다. 라브는 그를 기다리다 펄펄 끓인 총과 칼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불의 선물을 가져가라. 복수를 하고 싶잖아? 그걸로 맘껏 해보아라.”

  레오는 여전히 묵묵히 라브를 응시했다. 라브는 콧노래를 부른다.

 

 죄는 무거운 십자가.

 걷는 길에 피가 흐른다.

 내딛는 걸음마다 옭아맨다.

 끌어내리고 팔아버릴 것이다.

 어둠에 안겨 빛을 잃어가고 있다.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배신한 자는 어떻게 되었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그들을 모두 끌어내리고 팔아버렸다.

 마음속으로 유다의 종이 되었다.

 오고 있다.

 유다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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