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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밀우유유전 (고구려 동천왕기)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위나라의 땅을 침략했다.
위나라에 호의적이던 고구려가 배신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참여한 장수 중 밀우는 고구려의 무사였고, 유유는 신라의 낭객이었다.
밀우와 유유는 멸망의 끝에 선 고구려를 구하며 전쟁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

 
※사료 (삼국사기, 삼국지위서)
작성일 : 22-02-28 20:31     조회 : 189     추천 : 0     분량 : 15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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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료 – 삼국사기, 열전, 밀우와 유유전

 

  밀우와 류유는 모두 고구려 사람이다. 동천왕 20년(246)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니 왕이 피하여 달아났다. 위나라 장수 왕기가 추격하니, 왕은 남옥저(함남 지방)로 피하려고 하여 죽령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도망하여 거의 없어졌고 오직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곁에 있다가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추격하는 군사가 매우 가까이 오니 형세가 몸을 빼어 갈 수 없겠습니다. 제가 죽기를 결심하고 적을 막겠사오니 임금님은 몸을 피하여 달아나십시오.”

  드디어 죽음을 결심한 사람을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들어가서 힘을 다하여 싸우니, 왕은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아 스스로 호위하고는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상을 주겠다.”

  하부 사람 유옥구가 앞으로 나아와서 대답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마침내 싸움터에서 밀우가 땅에 넘어진 것을 보고, 업고 돌아왔다. 왕은 자기 넓적다리로 밀우를 베어주니, 한참 만에 다시 살아났다. 왕은 사잇길로 하여 이리저리 돌아서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으니, 왕은 더 계책이 없고 형세가 궁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동부 사람 류유가 왕의 앞으로 나와서 아뢰었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온데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제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오니 음식을 가지고 위나라 군사에게 가서 먹이고는 기회를 엿보아 적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약 제 계책이 성공하거든 왕께서는 곧 힘을 내어 쳐서 최후의 승부를 결정하십시오.”

  왕은 “좋다”고 말했다.

  류유가 위나라 군중으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장차 진 앞에 와서 항복을 청하고 형관에게 죽으러 갈 것이므로 먼저 저를 보내어 변변치 못한 물건이나마 종자의 음식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위나라 장수 왕기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으려 하자 류유는 칼을 밥그릇에 감춰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빼어 왕기의 가슴을 찔러 죽이고 자기도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사가 드디어 요란해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나라 군사는 요란하여 진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 방면으로부터 물러갔다.

  왕은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함에 있어, 밀우와 류유를 제일로 하여 밀우에게는 거곡, 청목곡을 주었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류유에게는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로 삼고, 또 그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 사료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전

  동천왕[동양]의 이름은 우위거(위궁)이며, 아명은 교체이고,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사기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왕은 전왕 17년에 태자가 되었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심정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잘랐다. 왕이 돌아와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왕후가 또한 시종으로 하여금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왕은 역시 성내지 않았다.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우씨를 왕태후로 봉했다.

  4년 가을 7월, 국상 고우루가 죽었다. 우태 명림 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

  8년, 위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하였다. 무당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조정에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10년 봄 2월, 오 나라의 왕인 손 권이 사신 호 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 나라에 전하였다.

  11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의 연호가 개정된 것을 축하하였다. 이 때가 경초 원년이었다.

  12년, 위 나라 태부 사마 선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손 연을 토벌했다. 왕이 주부 대가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16년,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하였다.

  17년 봄 정월, 왕자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19년 봄 삼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쳤다. 왕이 그를 후궁으로 맞이 하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 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 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왕은 곧 철기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 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관구 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가 죽령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방어하면, 왕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어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왕은 사잇길로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토록 하였다. 왕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서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전장으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등에 업어 왔다. 왕은 자신의 다리위에 밀우를 눕혔다. 밀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은 다시 사잇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 나라 군사를 위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되면, 그 때 왕께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 나라 군중에 들어가서 항복을 가장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이제 왕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하는데, 저를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 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 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 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 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왕은 귀국하여 공적을 평가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하고, 유유에게는 구사자를 추증하고, 또한 유유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이 전쟁 시에 위 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 나라 장수 관구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하였다. [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고도 말한다.

  22년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원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원이라고 불렀다.

 

 ※ 사료 – 삼국정사, 위서, 동이전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 물(澗水)를 식수로 한다. 농사지을 좋은 땅이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은 음식을 아껴 먹는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 벼슬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 衣), 선인(先人)이 있는데,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동이의 옛말에 따르면,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族)이 있다.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졌다.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과 의책(衣)을 받아갔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溝)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관직을 설치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로 불린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 비록 왕은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嫡統)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 절노부도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大加)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다. 그 명단은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卿인)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모임이 있을 때 좌석 차례에선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위치에는 앉지 못한다. 나라 안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부경(京)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 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다. 길을 걸을 때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쓴다. (중국의)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한다. 나라의 동쪽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낸다.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말로 미리 정한다. 여자의 집에서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짓고 서옥(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궤배(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 부모가 그 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금,은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모두 복속되었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구려는 대수(大水: 압록강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작은 강이 있다.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小水: 佳江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 곳에서 좋은 활이 생산된다.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왕망(王莽)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를 징벌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억지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을 넘어 도망한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주, 군, 현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도에게 전가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칠 것을 명하였다. 우는 구려후 도를 만나자고 꾀어 목을 베고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삼국사기 유리왕 31년 기사에 따르면 장수 연비(延丕)의 목이 베이었다고 함)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 8년(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이 보인다. 상제( 帝), 안제(安帝) 연간(106-124년)에 구려왕 궁(宮 : 태조왕)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므로 디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몰래 군대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였다. 후성(侯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볍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삼국사기에는 백고가 태조왕의 아우 신대왕이다) 순제(順帝), 환제(桓帝) 연간(126-167)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였다.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 영제의 연호, 172-177) 연간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해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196-219)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이끌고 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가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다. 지금 고추가 박위거(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와 요동이 힘을 합쳐 반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위궁(位宮이라 하였는데 이이모가 죽은 뒤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동천왕) 이 바로 이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장정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 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른다.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景初: 위 명제(明帝) 연호. 237-239) 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위 제왕(齊王)의 연호. 240-248) 3년에 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5년에는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에게 격파당하였다. 그 때의 사실이 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

 

 ※ 사료 – 삼국정사, 위서, 관구검전

 ...상략

  이듬해(경초2년=238년), 황제가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보내 중군(中軍,중앙군)과 관구검 등의 군대 수만 명을 통수하게 해 공손연을 쳐서 요동을 평정했다. 관구검이 그 공으로 안읍후(安邑侯)로 올려 봉해져 식읍이 3,900호에 달했다.

  정시(正始: 제왕齊王 조방曹芳 240-248) 중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킴)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梁의 음은 渴)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 수천명을 참획했다.

  구려(句驪)의 패자(沛者)로 그 이름이 득래(得來)인 자가 있어 수차례 궁(宮)에게 간언했으나 궁(宮)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봉호(蓬蒿,쑥)가 자라나는 꼴을 곧 보겠구나.” 그리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온 나라에서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에 명해 그의 묘(墓)를 허물지 않고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처자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궁(宮)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正始)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후략

 

 ※ 사료 – 삼국정사, 위서, 선제기

 ...상략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문의(公孫文懿-공손연.※)가 모반하자 선제를 경사(京師)로 불렀다. 천자가 이르길,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계(上計-상책)입니다. 요수(遼水)에 의지해 대군(大軍)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次計)입니다. (그러나) 만약 앉아서 양평(襄平)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오직 현명한 자만이 능히 자신과 상대방(의 역량)을 깊이 헤아려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遼水)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당시 궁실(宮室)을 크게 수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군려(軍旅-전쟁; 군대)가 더해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피폐해졌다. 선제는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옛날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영건(營建)하고 소하(蕭何)가 미앙(未央)(궁)을 지었으니 오늘날 궁실(宮室)이 미비한 것은 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수 이북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안팎으로 노역이 많아 사세상 이들을 함께 병행할 수는 없으니, 의당 안의 일(內務→궁실 수축)은 잠시 그만두어 한 때의 위급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경초(景初) 2년(238년) 우금(牛金), 관구검(胡遵) 등과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수도)를 출발했다. 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西明門)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司馬孚),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溫)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을 하사하고 군수(郡守), 전농(典農)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

  고향인 온현에서 부로(父老-노인)와 고구(故舊-옛 친구,지인)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선제는 탄식(嘆息)하고 창연(悵然)해하다 감흥이 일자(有感) 노래(歌)를 읊었다.

  “천지가 개벽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 리를 깨끗이 하고 온 세상을 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귀로(歸老-관직을 사양하고 노인으로 여생을 보냄)해 무양(舞陽)에서 대죄(待罪)하겠노라.” (※ 당시 사마의는 무양후)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지나고 갈석(碣石)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문의(文懿-공손연)는 과연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의지해 견벽(堅壁)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에게 맞섰다.

  선제가 대군을 결집해(盛兵)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賊)이 정예병을 다하여(盡銳) 이를 향해 나아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賊)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遼水)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作長圍) 적(賊)을 내버려두고 양평(襄平)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作圍)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선제가 말했다,

  “적(賊)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을 공격하면 그 계책에 곧바로 떨어지게 되니 이는 바로 왕읍(王邑)이 곤양(昆陽)에서 치욕을 당한 원인이었소. 옛 사람이 이르길,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고 있다 하더라도 부득불 나와 더불어 (성을 나와) 싸우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라 했소.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巢窟)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襄平)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陣)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賊)은 선제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선제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逆擊)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襄平)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당초 문의(文懿-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聲援)하고 문의(文懿)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공(司馬公)은 용병에 능하고 변화(變化)가 신(神)과 같아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所向無前) 동생(공손연)이 심히 염려되오.”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霖潦) 홍수가 나 물이 평지에서도 수 척에 이르자 삼군(三軍)이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선제가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都督令史)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적(賊)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司馬)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上庸)을 공격할 때는 8부(部)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一旬之半) (※) 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孟達)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한 달로 1년을 도모하는 셈이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소? 병력은 넷으로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설령 그 중 절반을 잃더라도 도리어 당적할 수 있었소. 그리하여 사상자를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는 군량으로 더불어 경쟁한 것이오. 지금은 적의 군사가 우리보다 많아 적은 굶주리고 우리는 배부르며, 큰 비가 내리는 것이 이와 같아 공력을 펼칠 수 없으니, 비록 급히 서두른다 한들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경사(京師)를 출발한 이래 적이 공격하는 것을 우려하진 않았으나 다만 적이 달아나는 것을 걱정했소. 적의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우리의) 위락(울타리,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우마를 약탈하고 땔나무 캐는 것을 노략질한다면 이는 일부러 그들을 내몰아 달아나게 하는 것이오. 무릇 병(兵)은 궤도(속임수, 기만술)이고 일의 변화에 잘 대처해야 하오. 적이 그들의 군사 수 많음과 비오는 것을 믿고 이 때문에 비록 굶주리고 곤궁해도 속수(束手-손을 묶고 항복함)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천자가 말했다,

  “사마공(司馬公)은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合圍)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방패, 전차, 사다리, 충차를 쓰며 화살과 돌을 비 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이무렵 색이 희고 망렵(芒鬣)이 있는 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梁水)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文懿)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相國) 왕건, 어사대부 유보(柳甫)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면박(面縛-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임)할 것이라 청했다. 선제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王建)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文懿)에게 고했다.

 “옛날 초(楚)나라와 정(鄭)나라는 대등한 나라(列國)였으나 정백(鄭伯)은 도리어 웃통을 벗고 양(羊)을 끌며 초나라 군을 영접했다. 나는 황제의 신하로 지위가 상공인데 왕건 등은 나에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니 어찌 초나라,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리!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文懿)가 다시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선제가 위연에게 말했다,

  “군사의 대요(大要)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 것뿐이다. 너희는 면박(面縛)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내 무얼 어찌하겠단 말인가?”

  문의(文懿)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 돌출(突出)하자 선제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 가의 장성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신구(新舊)를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인골을 쌓은 것. 일종의 전승기념비)을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戶), 30여 만 구(口)를 거두었다.

  당초 문의(文懿)는 숙부인 공손공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綸直), 가범(賈範)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간절히 간언하니 문의(文懿)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선제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 등의 묘(墓)를 봉(封-흙더미를 쌓아 북돋음)하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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