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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밀우유유전 (고구려 동천왕기)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위나라의 땅을 침략했다.
위나라에 호의적이던 고구려가 배신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참여한 장수 중 밀우는 고구려의 무사였고, 유유는 신라의 낭객이었다.
밀우와 유유는 멸망의 끝에 선 고구려를 구하며 전쟁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

 
7. 비와 바람 (밀우 결사항전)
작성일 : 22-02-28 20:28     조회 : 191     추천 : 0     분량 : 17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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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밀설은 서부의 국경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고 군을 소집하여 2천의 군사를 모으고 동부에서 출병했다. 최근 왕의 명으로 신라를 자주 침범하였으므로 이 이상 군사를 빼다가는 서부를 지원하러 가다가 동부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처지였다. 밀설은 신라와 그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밀풍을 후사로 두어 부탁하고, 밀우와 다른 촌락들의 가용한 무사, 호족들을 모았다. 날랜 속도로 가기 위하여 2천의 군사는 모두 말을 타고 무장했다. 시일이 늦춰지지 않기 위해 군량은 개인소지로 최소화했다. 유유 또한 밀우와 함께 나섰는데 그 옆에 수년이 흘러 눈에 띄게 몸집이 커진 검이가 위풍있게 서 있었다. 선 채로 그 높이가 사람의 허리까지 오고 어깨와 근육이 장대하니 외형이 자못 호랑이 못지않았다. 털의 빛깔이 여전히 검은 흑발로 치렁하며 눈은 샛노랗게 번뜩였다. 포악한 짐승과도 같은 모습에 밀우와 유유를 제외한 그 누구도 두려워하며 감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밀설 또한 출병할 당시에 검이가 아무렇지 않게 밀우를 따라나서자 다가서지 못하고 부디 부대에 해가 되지 않길 바라며 가만히 두었다.

  “딱히 물었던 것은 아니지만 두 번 다시 전쟁에 안 나서고 싶지 않았나예?”

  유유가 밀우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답하는 밀우의 얼굴은 딱딱했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으니 고구려의 사내로서 가야 하지 않으매. 내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야.”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더.”

  밀우는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냐.”

  “그럼 저를 지켜주세요.” 유유가 배시시 웃자 밀우는 크흠 하며 다시 앞만 보았다. 부대가 일제히 출발하려 하자 검이가 유유의 허벅지에 앞발을 올리며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유유는 녀석이 험악한 얼굴로 앙탈을 부릴 적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하였지만 안장주머니에 있던 말린 말고기를 입에 넣어주자 질겅대며 다시 내려갔다.

  동부군은 나흘 동안 노숙하다시피 하며 졸본을 향해 달려갔다. 파발이 먼저 이르기를 요동으로 오지 말고 곧장 졸본으로 오라 하였다. 동명성왕의 건국 이후 한창 국경을 놓고 힘을 겨루던 태조대왕의 시대 이후로 중국이 이렇게 고구려의 국경을 넘은 적은 전례가 없었다. 이례적인 위나라의 침공에 급보를 파견하였고 왕이 직접 나섰으므로 각 5부에서는 당연히 출병을 해야만 했다. 동부군이 이렇듯 지원을 가기 위해 쉼 없이 달리던 때 한차례 번개가 나무들을 내리치며 소나기가 쏟아지는 통에 진군속도가 더뎌지기도 했다. 별다른 큰 장비 없이 간이로 친 막사에 2천명이 머물며 숙영하니 사기가 점점 크게 떨어지고 불평도 많아졌다.

  한편 졸본에서 지지부진하게 혹은 평화롭게 서로 대치하던 고구려군과 위나라군은 틈이 벌어졌다. 틈은 고구려가 먼저 벌렸다. 구름의 색이 짙어지며 하늘이 빗물이 쏟아질랑말랑하자 위궁은 기습적으로 기병으로 적을 들이칠 계획을 하였다. 고구려는 빠르게 영채를 거두며 군을 진군시킬 준비를 하였다. 전과 같이 갑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을 앞세웠고 뒤에서 보병들이 맥궁을 들고 대기하였다. 관구검은 고구려군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관구검은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서서 사기를 북돋겠노라며 말을 버린 채 투구를 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왕기는 관구검이 일러준 대로 영채를 거두지 않고 군사들을 모두 준비시켜 지정된 자리로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관구검이 가장 선두에 나서자 주위의 병사들은 장군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굳게 긴장하며 경직되었다. 위나라의 보병들은 전과 달리 수직으로 5열을 이루되 수평으로 길게 1열로 섰다. 병사들은 정렬하여 서지 않고 자리에 구멍이 나도록 서로 대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독특한 무장을 하였는데, 방패 없이 양손에 쥔 창이 그 길이가 사람의 2배만 하여 매우 길었다. 또한 창을 든 병사들의 뒤에는 아무런 병기 없이 목재로 급조한 듯한 거대한 방패를 들고 있었다.

  “전군은 죽음을 각오하지 마라!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양발로 고구려의 땅을 밟을 것이다! 살아서 영광을 누려라!”

  관구검이 가장 앞에서 탄성을 내뱉자 1만의 군사들이 일제히 와아아 하며 함성을 질렀다. 위궁은 위나라의 기세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이내 돌격 명령을 내렸다.

  “위나라의 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저 간악무도한 자들이 감히 우리 땅을 침범했으니 모두 죽여라. 전리품을 모두 내어줄 것이다!”

  위궁도 질세라 후열에서 선포하자 1만의 기병들이 동시에 땅을 내달렸다.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구름을 흔들었다. 구름이 소리에 깜짝 놀라 지리는 것처럼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비는 모래를 흩뿌리듯이 천천히 약하게 내렸지만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기병들의 투구에는 타다다다 하며 부딪쳤다. 고구려의 기병들이 위나라의 보병진에 부딪치려는 찰나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뒷열에 있던 방패만 들고 있는 보병들이 앞으로 나오며 자신의 몸을 가리고도 남을만한 큰 방패를 땅에 찍으며 버텨냈다. 방패는 두꺼운 목재들로 조합되어 만들어져 그 무게감과 두께가 상당해 보였다. 그리고 앞열에 있다가 뒷열로 물러선 창병들은 사람보다 2배 이상 큰 장창의 끝을 땅에 파고 묻어 오른발로 짓밟은 다음 창의 칼끝을 하늘로 향해 치켜들었다.

  폭렬한 굉음이 나며 기병들과 보병들이 부딪쳤다. 땅에 박혀 더 이상 뒤로 갈 데 없는 창의 칼날이 말의 갑주를 뚫자 말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넘어졌다. 한 마리가 넘어지면 두 마리가 넘어지고, 두 마리가 넘어지면 열 마리가 넘어지고, 열 마리가 넘어지면 백 마리가 넘어졌다. 군마는 목재로 된 방패벽을 뚫어내지 못해 나뒹굴었고 방패를 피해 뛰어 넘어 들어간 기병들은 꼿꼿이 바닥부터 세워진 창날에 온몸을 꿰뚫렸다. 고구려의 기병들이 벽을 뚫지 못해 전열이 무너지자 그 위로 위나라의 궁병들이 새로이 제작한 손쇠뇌로 쉴 새 없이 화살들을 쏟아냈다. 차갑고 가벼운 쇠뇌의 촉칼들은 궁처럼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바람을 가르며 고구려의 기병들을 향해 직사로 내뿜었다. 근거리에서 매섭게 꽂히는 화살들은 개마무사들의 사슬갑옷을 우습게 뚫어내며 몸을 관통하였다. 피를 머금고 관통한 화살은 그 뒤의 병사에게까지 날아가 가슴에 박혔다.

  위궁은 동공이 커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종일관 무심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있던 태자 연불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급하게 활을 더 빠르고 멀리 쏘라며 보병들을 재촉해도 기병들이 적진을 뚫지 못하니 오히려 화살은 아군의 등을 수없이 내리꽂았다. 위나라의 보병들은 제각기 커다란 방패 밑에 숨었으니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 목연의 칼을 받아라!”

  돌연 고구려군의 뒤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지며 위나라의 기병 1천명이 쏟아져나왔다. 필시 양맥의 골짜기를 통해 길을 돌아온 것이다. 위나라군은 며칠 전부터 미리 계책을 세워 실행한 듯 하였다. 위궁과 연불은 후열에서 느긋하게 있다가 매우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 하였다.

  “내 칼부터 받아라. 이놈!”

  보병들을 지휘하고 있던 유옥구가 말을 타고 튀어나와 어느새 다가와 위궁에게 접근한 목연의 언월도를 창으로 맞받아쳤다. 유옥구와 목연이 서로 수 합이 넘도록 창과 도를 부딪치는 와중에도 위나라의 기병들이 고구려의 보병진을 휩쓸고 다니니 아비규환의 지옥이 펼쳐졌다. 위궁은 기병들을 피해 도망다니며 검은 하늘을 보고 원망했다.

  유옥구는 목연만을 집중적으로 노리며 뛰어다녔다. 창을 한번 내질러도 말들이 달리는 통에 목연의 언월도에 막히면 다시 쫓아가고, 목연이 언월도를 내려치면서 달려가면 유옥구가 받아치며 반복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벌리며 싸웠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유옥구는 자세를 낮게 잡고 말고삐를 잡으며 전속력으로 목연에게 달려가 언월도를 머리 위로 피해내며 말머리부터 목연의 말을 들이받았다. 유옥구와 목연의 말들이 모두 쓰러지자 유옥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창을 붕붕 휘두르며 회전시키듯 베어냈다. 뒷걸음질 치며 창을 피하던 목연은 발돋움을 하더니 유옥구가 휘두르는 창의 장대를 단칼에 쪼개며 반으로 갈라버렸다. 유옥구는 당황하다가 공중에서 몇바퀴씩 돌며 떨어지려는 부러진 창칼을 잡아채고는 장대와 창칼을 양손으로 잡고 목연을 난타했다. 목연은 언월도를 양손으로 잡고 내리쳐지는 맹공을 받아내다가 발로 걷어차니 유옥구가 나가떨어졌다. 목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 언월도를 높게 쳐들자 그의 목에 어느 순간 날아온 창에 꿰뚫리며 고꾸라졌다. 개마무사 하나가 땅에 꽂힌 자신의 창을 뽑으려다가 목연의 목에 걸려 빠지지 않자 금세 포기하고 칼을 빼들며 주위에서 혼잡하게 싸우는 위나라 기병들을 베어냈다.

  아사라히 내리는 빗물에도 땅이 점차 젖어 들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위나라 기병들의 말발굽질을 피하면서 땅을 짚고 가는 유옥구의 손과 무릎은 어느새 진흙으로 더러워졌다. 유옥구는 쓰러졌다가 힘겹게 일어나고 있는 자신의 말을 일으키며 왕을 찾아 헤맸다. 칼을 뽑아 군사들을 헤치며 찾아다니자 힘겹게 싸워내고 있는 왕 위궁과 태자 연불을 발견했다.

  “폐하, 어서 도망치셔야 합네다! 제가 퇴로를 뚫겠습네다! 따라 오십시오!”

  위궁이 분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자 피가 번져 나왔다.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던 위궁은 주위를 아비규환의 주위를 둘러보다 알았노라며 유옥구를 따라나섰다. 유옥구가 땅에 널부러진 나팔을 칼로 잡아채고는 온몸에서 숨을 모두 뱉어낼 것처럼 힘차게 불었다.

  뿌우우우우- 나팔소리가 나자 고구려의 군사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구검은 이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군사들을 다그치며 전부 뒤쫓게 하였다. 위나라군은 말이 도망가면 엉덩이를 찌르고, 사람이 도망가면 등을 찔렀다. 위나라의 칼질은 물레방아 돌듯 쉼 없이 고구려군의 등 뒤를 베어냈다. 전투의 양상은 다르게 바뀌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되었고 위나라군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이날 고구려의 군사 1만 8천 명이 사망했다. 포로는 없었다.

 

  밀설의 동부군은 졸본의 평야에 도착했다. 애써 도착한 곳의 풍경은 군사들을 절망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온 사방과 산들이 붉게 물들었다. 한여름에 가을이 찾아온 것처럼 수천 수만의 빨간 단풍빛 혈흔들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시체가 산을 이뤘고 냄새를 맡고 쫓아온 까마귀 떼 수백 마리가 하늘을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이 떠나면 포식할 것처럼 탐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것만도 같았다. 한 병사가 시신의 수가 얼마인지 손가락으로 세 보려다가도 포기해버렸다. 숫자가 무의미했다. 실상 떼죽음이라고 보아도 될 만큼 이미 눈으로 셀 수 있는 경지를 넘었다. 1만인지 2만인지 알 수 없었다. 셀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사실상 전멸이었다. 그 누구도 고구려군이 끝장났다는 말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밀설은 차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밟을 땅이 부족하여 나아가려면 시체를 밟든 피를 밟든 해야 했다. 버려진 병장기도 셀 수 없었지만 차마 그 누구도 회수할 용기를 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런 처참한 광경은 본 적 없었다.

  밀우는 눈과 귀가 먹먹해졌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누군가의 아들이, 누군가의 형제 1만이 넘게 죽었다면 부모 자식 형제를 잃은 가족은 대체 몇일까. 이들을 장사나 제대로 지낼 수 있을까. 지낸다 한들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무엇 때문에 이들이 온 것이며 무엇 때문에 이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운 것이며 무엇 때문에 사지를 잘리고 머리를 베었을까.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명확했다. 위나라가 국경을 넘었고, 싸움을 걸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왔다. 그렇다면 자신은 보복과 구원을 위해 위나라의 군사들을 모조리 죽이면 되는 것일까. 우리가 당했으니 우리도 그들의 국경을 넘어야 할까. 서로 넘고 넘어 그들 또한 보복의 명분으로 또 온다면 다시 이 짓을 반복해야 할까. 한쪽이 모두 끊어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사슬이 눈에 아른거렸다.

  ‘우선 가야 한다.’

  무사의 자제로 태어나, 무사로 자라났으니,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면 일단 가야 했다. 숙명이든 사명이든 포장된 단어로는 해설할 수 없었다. 무력함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었다. 뱃속 깊이 끌어 오르는 비참함이었다. 죽어있는 말도 떠다니는 까마귀도 목이 잘린 시체도 피에 번져 숨이 죽은 풀도 그의 참담함을 증가시켰다. 도망친다 한들 그 자신도 살기 위해 라는 명분으로 살육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잡아먹을 것이고 풀을 뜯어 먹을 것이고 삶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자들을 죽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 것인가. 지키고 싶은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자신은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밀설은 사람을 여럿 보냈다. 그는 우선 왕을 찾았다. 사람들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나자 밀설이 외치며 물었다.

  “혹시 폐하가 계시느냐?”

  각기 떨어진 무리들이 제각기 없다며 외쳤다. 밀설은 고민했다. 밀우가 밀설에게 다가가 말했다.

  “폐하가 도망 중이시라면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가 계셔야 나라를 구할 수 있습네다. 각지의 군사도 더 모아야 합네다.”

  “내 생각도 맞다. 하지만 수도는 어쩐다지? 폐하가 국내성으로 가셨을까? 저들이 이렇게 승리에 도취 되었다면 분명 수도로 향할 것이다. 성의 백성들을 지켜야 해.”

  백성을 지켜야 한단 밀설의 말에 밀우는 동조되어 입을 다물었다.

  “군을 나누어야겠다. 나는 수도로 갈 터이니, 너는 백방으로 폐하를 찾아라. 다시 파발을 보내 군을 더 모아야겠다.”

  “2천의 군사도 많지 않은데 이를 절반으로 나누어 가셨다가 변을 당할까 염려됩네다.”

  “일은 사람이 꾸미되 성패는 하늘이 정한다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결국 모른단 말씀이지 않습니까.”

  밀설은 인상이 구겨졌다.

  “그럼 지금껏 노숙하며 달려온 군사들을 데리고 또 다시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 폐하를 찾아 사방팔방 떠돌아다니리? 하고 싶은 게 그것이더냐.”

  밀우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가 답했다.

  “그럼 제게 사람을 열명만 붙여주십시오. 폐하를 찾는 대로 지원을 부르겠습니다. 국내성을 방비하시다가 그때 와주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밀우의 말에 밀설은 고민하다 수긍했다.

  “몸조심 하거라. 나라는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사람은 다시 세울 수 없다.”

  묘한 말에 군중이 웅성거렸지만 밀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밀설은 사람 열을 뽑아 각 5부로 파발을 보내고 다시 사람 열을 뽑아 밀우의 옆에 남게 하였다. 유유와 검이는 따로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밀우의 옆에 섰다. 밀설은 밀우의 몸을 꽉 껴안고는 군을 몰아 헤어졌다.

 

  밀설을 비롯한 열둘의 군마들은 쉼 없이 높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초원을 내려다보아 왕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일행은 밤을 꼬박 세고 반나절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졸본의 밑 지방인 죽령까지 왔다. 사람과 말이 모두 거친 숨을 내쉬고 해가 거의 저물어갈 때 산맥의 골짜기에서 한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밀우가 먼저 앞에 달리고는 말에서 내려 들키지 않도록 조심히 내려다보니 고구려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은 없지만 고구려군이 분명해 보였다. 밀우와 일행은 기쁜 탄성을 내며 언덕을 가로질러 고구려군의 무리로 향했다. 하지만 내려 가다보니 고구려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리가 짧은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 위나라의 군사들도 고구려군을 향해 진군해오고 있었다. 고구려군은 정비를 위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도망치는 중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고구려군의 규모가 눈에 띄게 확연해졌다. 천명 남짓이었다. 일행은 모두 절로 탄성을 내며 비탄에 빠졌다. 합류해도 결국 위나라의 군세에 자신도 죽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병사 한 명이 말굽 소리를 반대로 내며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밀우는 말릴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경계해라!”

  달려오는 밀우의 일행을 쳐다본 고구려군 병사가 외치자 밀우는 미리 밀설이 준비해 준 고구려의 깃발을 장대도 없이 손으로 흔들며 병사의 경계를 풀었다.

  “동부 사람이오. 경계를 멈추시오. 지원을 왔습네다!”

  일행이 그 어떤 병기들 들지 않은 채 깃발을 흔들며 가까이 접근하자 고구려군 병사들이 들었던 창과 활을 내려놓고 왕에게로 인솔하였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습네까. 신은 요동에서 보았던 동부 사람 밀우입네다.”

  왕은 피폐한 얼굴이었다. 몰골이 많이 죽고 땀으로 범벅되어 투구가 불편해 보였지만 그는 벗을 생각이 결코 없어 보였다. 밀우와 왕은 말을 타고 걸어가며 이야기했다.

  “오오, 그래 밀우 자네 기억나지. 요동의 백호. 그런데 지원은 달랑 열뿐이던가. 다른 군사는 모두 어디에 있나.”

  “수도를 방비하기 위해 국내성으로 갔습네다. 폐하가 수도로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동부대가의 판단이었습네다.”

  위궁은 탄식했다. 그와 한편 사람 허리 높이만큼 크기가 장성해진 검이가 밀우의 옆에서 걷자 위궁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검이를 바라보았다. 검이가 콧바람을 흥 내며 입을 쩍쩍 벌렸지만 위궁은 몸에 깃든 체면 때문인지 왕으로서의 위엄 때문인지 주위의 다른 군사들처럼 움츠러들지 않았다.

  “비라도 흠뻑 내려 흔적이 지워졌으면 좋겠지만, 비가 그치가가 땅이 질어서 우리 군이 이동하는 경로를 모두 적에게 보여주니 큰일이야. 옥저성까지라도 무사히 가면 방비할 길이 있을 텐데. 밀대가는 파발을 언제 보냈던가?”

  “어제 보냈습네다.”

  “빨라도 보름이나 지나야 지원이 오겠군.”

  남부의 옥저성은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땅이 비옥하여 군량이 충분하고 방비가 잘 되어있는 편이었다. 또한 옥저성과 남부의 군사들을 합친다면 분명 반격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도중에 잡히지 않고 퇴각하는 것이 위궁의 최선이었다. 밀우는 곧장 자신을 따라온 병사들 중 다섯을 골라 다시 국내성으로 돌려보냈다.

  밤이 되고 언덕으로 올려 보낸 정탐꾼이 돌아와 쫓아오는 위나라군이 영채를 쉬고 있다고 고하자 위궁도 군을 세워 가지고 있는 자재들을 끌어모아 천막만으로 간략하게 막사를 치도록 명했다. 양맥에서 급히 퇴각하느라 모든 보급품을 놓고 왔기에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루종일 굶은 군사들을 위해 부족한 군량이나마 준비하고 있다가 다시 급보가 들어왔다.

  “위나라군이 친 것은 거짓 영채였고, 말을 몰아 쫓아오고 있습니다. 속히 이동하셔야 합니다!”

  경계를 서던 척후병이 위궁의 장막을 뛰쳐 들어오듯이 해치고 들어와 고했다. 위궁은 먹던 떡도 내팽개치고 다급하게 장막을 나와 말에 올라탔다. 영채에 퍼지는 급보에 밀우도 급히 나가 밖을 보니 저 멀리 간간이 횃불을 들고 쫓아오는 잔영이 보였다. 뿜어지는 흙먼지를 보아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분명 군마들이었다.

 

  고구려군은 애써 쳐둔 천막을 버리다시피 하며 달아날 준비를 하였다. 말을 탄 기병들이 먼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내달려 위치를 확인했다. 때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서서히 위나라군이 있는 북쪽방향으로 불며 시야를 찌푸렸다. 땅을 헤집고 밟고 지나가도 흐르는 비에 짓뭉개진 흙이 다시 질어지고 물러져 흔적이 지워질 수 있었다. 그러려면 저들이 접근하여서는 안됐다. 필시 저들을 막아내야 흔적을 놓친 위나라군이 고구려군을 쫓을 수 없음이 분명했다. 밀우는 물을 내리는 밤하늘과 젖은 땅과 불어오는 바람을 번갈아보다 고민에 휩싸였다. 밀우는 유유를 한참을 쳐다보다 말했다.

  “먼저 기병들과 가 있으라. 난 폐하를 잠깐 모시고 갈게.”

  유유는 망설이다 끄덕이며 말들이 있는 쪽으로 합류했다. 검이는 밀우의 곁에 남았다. 하늘이 붉은 탓일까 검이의 본래 노랗던 눈도 벌겋게 보였다. 밀우는 황급히 직접 군사들을 재촉하고 북돋으며 인솔하는 위궁에게 다가갔다.

  “폐하, 지금 추격하는 군사들이 점점 가까워져 오니 형세가 군사를 쉽게 빼어 갈 수 없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비가 내려 흔적을 지울 수 있으니, 결사항전하여 막아내는 군사를 세워두면 반드시 옥저성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겁니다.”

  위궁은 한탄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마당에 대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밀우는 결연히 말했다.

  “제가 하겠습네다. 제가 죽기를 결심하고 적을 막겠으니 폐하는 몸을 피하여 달아나 주십시오.”

  “오직 그것뿐이 살길이더냐.”

  “폐하가 사셔야 군을 재건하고 적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왕이 있어야 나라가 있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백성들이 삽니다. 제가 해보겠습네다.”

  왕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감정에 겨운 얼굴을 하며 주위의 근위대를 불렀다.

  “근위대는 모두 밀우와 함께하라. 나는 군사들과 함께 가겠다. 무리한 이야기를 부탁해서 미안하다. 부디...”

  위궁은 말끝을 흐리다 마저 뱉었다.

  “죽음을 각오해다오.”

  열명의 근위대는 술렁이는 듯 움찔하는 듯 하다가 결연하게 답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내겠습니다.”

  밀우는 어기적거릴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곧바로 칼을 빼들고 위나라군이 달려오는 쪽을 향해 말고삐를 세차게 흔들고 내달렸다. 근위대도 제각기 밀우를 따라 쫓아갔다. 말들이 달려 나가고 별이 반짝이자 하늘을 쳐다보던 검이는 밀우를 따라나섰다.

  유유는 저멀리 달려 나가는 밀우를 발견하고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가려다가 주위 군마들의 뜀박질에 휩쓸려 등 떠밀리듯이 움직였다. 일순간 구름과 별이 반짝하게 빛났다.

 

  밀우는 위나라군을 향해 달리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섰다. 땀과 비에 갑옷이 축축해져 몸이 무거웠다. 밀우가 말에 선 채 갑옷의 끈을 모두 풀어내고 온몸의 갑옷과 투구를 벗어 땅에 던져버리자 근위대들도 그를 따라 했다.

  “우린 죽기를 각오했으니 단 한 놈도 지나가게 하지 않을 겁네다. 두렵다면 도망가도 좋습네다.”

  한 근위대가 우렁차게 말했다.

  “우린 대고구려의 왕실을 지키는 무사들입네다. 그런 망발은 오히려 우리를 욕되게 하는 거요. 대고구려를 위해 이 목숨 여기서 바친다면 영광입네다.”

  그가 말을 마치자 응수하듯이 다른 모든 이가 맨몸에 칼만 빼어 든 채 외치며 말을 달려 나갔다. 밀우와 검이도 함께 달려 나갔다. 멀리 보이던 위나라의 횃불이 불꽃 모양이 모두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비가 거세지자 횃불도 점차 꺼트려져갔다.

  밀우는 드디어 위나라의 기병들을 맞닥뜨렸다. 부딪치지 않았다. 그는 집요하게 기병들의 얼굴과 목만을 노리며 칼을 베면서 내달렸다. 검이는 세차고 용맹하게 날아다니며 군마들을 물어뜯고 발톱으로 헤집었다. 검이의 발톱은 그들의 갑주를 종이 자르듯 찢었다. 열한명의 무사와 한 마리의 삵이 날뛰며 휘젓자 기병들이 요란해졌다. 밀우는 횃불을 들고 있는 병사들만을 찾아가며 베어냈다. 횃불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며 어둠이 짙게 내리자 적아를 쉽게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근위대는 자신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기병들을 쫓아가며 창으로 찔러 죽였다. 한참을 이리저리 달리던 밀우의 말은 어느덧 창에 찔려 밀우를 내동댕이쳤다. 옷깃이 베인지 살결이 베인지 온몸의 근육이 괴성을 질렀다. 어디가 어떻게 다친 지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밀우는 자신이 베어낸 병사가 떨어트린 칼을 집어 들었다. 양손으로 칼을 들어 마구잡이로 칼을 내리치며 달려갔다. 말에 부딪혀 데굴데굴 구르다가도 벌떡 일어나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몇이나 죽였을까. 몇이나 죽었을까. 세지 않았다. 시체와 죽은 군마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온몸이 진흙밭이 되었다. 밀우는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듯 유유의 몸놀림처럼 공중을 돌며 칼을 회전시켰다. 힘이 빠졌는지 단칼에 죽이지 못한 병사들의 칼질에 밀우의 몸이 이곳 저곳 베어졌다. 쓰라리도록 고통스러웠다. 철푸덕 넘어지면 진흙이 칼에 베인 상처의 틈을 메꿨다. 양손의 칼을 놓친 밀우는 창을 집어 들어 주위를 붕붕 돌렸다. 퍽 하며 장대에 맞는 이도 있었고 창날에 베이는 이도 있었다. 창 하나가 밀우의 옆구리를 스치며 들어왔다. 까딱하면 배가 뚫렸을 그 창으로 잡아채어 바꿔 든 창으로 연신 찔러댔다. 어깻죽지가 베어져 앞으로 고꾸라지면 앞에 있는 병사의 다리를 잡고 쓰러지며 발목을 꺾어 부숴버렸다. 휘날리는 칼을 피해 옆으로 구르면 바닥에서 집어 든 칼로 병사들의 발등을 찍고 무릎을 베었다.

  밀우는 점차 눈동자가 어둠에 적응됐다. 동공이 커지며 빛을 빨아들였다. 적아가 거의 구분될 정도로 시야가 밝아졌다. 피와 진흙을 뒤집어쓰고 양손에 칼을 든 밀우는 악귀가 현생한 것처럼 보였다. 눈꺼풀에 묻는 진흙을 손등으로 비비며 털어내자 눈앞까지 다가온 칼날이 보였다.

  ‘여기서 끝이구나.’

  삶의 순간들이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을의 모습, 칼의 모습, 대나무의 모습, 칼의 모습, 가족의 모습, 칼의 모습, 유유의 모습, 칼의 모습, 검이의 모습이 지나갔다. 하지만 검이는 현실이었다. 눈앞까지 다가온 칼날이 오랜 상처가 남아있던 밀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굳게 닫혀있던 상처를 벌려냈다. 검이는 칼을 내리치던 주인의 목을 물어뜯으며 바닥에 뭉갰다. 밀우는 엉덩방아를 찧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검이는 밀우를 보호하듯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다가오는 병사들을 할퀴거나 물어뜯었다. 검이의 모습도 한쪽 눈을 잃은 채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진흙을 뒤집어썼다.

  왜 그랬을까. 밀우는 문득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생각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작별을 못해서일까. 삶이 아쉬워서일까. 이루고 싶은 게 있어서일까. 정리되지 않았다. 그저 꼬인 실타래였다. 속은 메스껍고 눈은 감겨오고 온몸이 고통으로 요동쳤다. 신음은 거친 숨소리로 대신하여 입에서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검이의 맹렬한 공격에 주춤해진 병사들이 잠시 밀우와 대치하며 눈치만 보고 있자 주변의 풍경이 밀우의 시야에 점차 들어왔다. 근위대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땅바닥에 파묻힌 수백의 시체를 보고 있자니 우선은 막은 것 같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밀우가 무릎을 휘청이며 틈을 보이자 다시 창과 칼이 제각기 아무렇게나 여러 곳에서 날아왔다. 오른칼로 창을 막고 몸을 돌려 왼칼로 적을 베면 다른 칼에 왼쪽배를 찔렸다. 왼칼로 칼을 막고 오른칼로 적을 내려치면 다른 칼에 등을 베였다. 밀우는 휘청거리면서도 반격과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무예는 이미 진즉에 없었다. 누가 더 처절하고 맹렬하게 버티느냐의 진흙탕 싸움이었다.

  밀우는 젖먹던 힘까지 함성을 내지르며 공중을 돌며 양손의 칼로 적진을 다시 휘저었다. 칼을 이리 치고 저리 치다가 적의 방패에 어깨부터 몸이 튕기며 나가떨어졌다. 칼을 떨어트리며 공중에 날아가던 밀우는 땅이 아닌 검이의 엉덩이에 부딪히며 떨어졌다. 밀우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강제로 손으로 잡아 일으키며 다른 손으로 검이의 엉덩이털을 붙잡았다.

  위나라 병사는 아직도 많았다. 수십일까. 백명일까. 이제는 끝이라고 여겼다. 더는 움직일 힘이 몸에 없었다. 대체 어쩌자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다시 칼을 집으려는 찰나 검이가 뒷발로 밀우의 몸을 강하게 차버렸다. 밀우는 언제 있었는지도 모를 수풀이 우거진 언덕을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검이는 언덕을 다가서지 못하게 하려는 듯 병사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다가 목과 입에 창이 꿰뚫리며 숨을 거뒀다. 밀우는 언덕을 굴러 내려가며 어둠에 집어 삼켜졌다.

 

  유유는 밀우가 결사항전으로 퇴로를 막고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밤이 지나서야 뒤늦게 알고 분개하며 왕을 찾아갔다. 유옥구가 그녀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먼저 제지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유유는 눈에서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며 분노를 삭히지 못했다. 유옥구는 지리를 잘 아는 자신이 찾아오겠노라며 오랜 설득 끝에 간신히 그녀를 돌려보냈다.

  밤이 새도록 위궁과 고구려군은 밤낮없이 꼬박 달려 죽령을 빠져나왔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해가 번쩍 뜨면서 눈물을 뚝 그치듯 멈췄다. 햇빛은 강렬하게 내리쬐면서 땅을 굳혔다. 위궁은 하늘이 돕는다며 기뻐했다.

  한편 졸본에서부터 고구려군을 뒤쫓던 위나라군의 왕기는 끝내 흔적을 놓치면서 화를 벌컥 냈다. 왕기는 군을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라며 5천 군사를 끌고 남하했다. 절반의 5천 군사는 관구검이 이끌고 국내성으로 갔다.

  왕의 군대가 옥저까지 다다르자 옥저성의 지원군 1천명이 모두 말을 타고 나타나 남부 장수가 울며 절을 하고 합류했다. 보급자재와 군량이 넉넉해져 마음이 놓인 위궁은 군사들을 쉬게 하기 위해 영채를 치고는 부장들을 장막으로 모아 소집했다.

  “충신 밀우가 짐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런 호걸과 같은 자는 대고구려의 보물이 아니겠느냐. 만약 밀우를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후하게 상을 주겠다.”

  위궁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묻자 유유에게 약조를 해놓은 유옥구가 대차게 일어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밀우는 신과도 연이 있어 잘 알고 있사오니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유옥구는 그 길로 장막을 나와 홀로 영채를 나섰다. 이제 곧 말을 달리려고 할 때에 유유가 벼락같은 속도로 유옥구의 말을 따라잡았다.

  “검이도 보이지 않습니더. 머라카시든 저도 무조건 갈 겁니더. 말리면 제 손에 죽을 겁니다.”

  유유의 강경한 기세에 유옥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함께 나아갔다. 유옥구와 유유는 죽령에 들어서며 큰길로 나아가지 않고 수풀을 해치며 중턱을 헤집고 다녔다. 유유의 눈에서는 눈물기가 마르질 않았다. 중턱에서 찾을 수 없어 결국 둘은 고구려군이 버려두고 간 천막들이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가 그로부터 역으로 움직였다. 과연 길을 따라 걸어가니 피와 시체가 즐비한 곳이 나왔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올라오자 유유가 급박하게 뛰어가며 전투가 있던 곳곳을 샅샅이 파헤쳤다. 유유가 말에서 내려 얼마나 수많은 시체들을 들어 옮기고 해쳤는지 본인의 손과 옷도 벌겋게 물들었다. 유옥구는 말에 선 채 찬찬히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눈으로 담으며 눈에 띄는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는데 개미 하나 지나지 않을 정도로 무척 고요했다. 시체의 수는 백이 넘어 보였다. 혹은 이백도 더 되어 보였다. 얼마나 처절하게 치열하게 싸워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체들은 피가 떡이 지고 진흙으로 비벼져 신상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갑옷을 입지 않고 있는 자들은 모두 고구려의 근위대들이었다. 유옥구는 이를 착안하여 유유에게 갑옷을 입지 않은 자를 찾아보라며 외쳤다. 유유가 매섭게 노려보자 유옥구는 자신이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아아, 자신은 이미 밀우를 죽은 사람 취급했노라.

  유유는 머리뼈에 창이 꽂힌 채 엎드려 있는 검이의 시신을 찾아내고는 구름이 소리에 부딪혀 떠나갈 듯 통곡을 하며 울었다. 유옥구도 급히 유유의 곁으로 가 그녀를 말없이 위로해주었다. 유옥구는 불현듯 검은 삵의 뒤로 묘한 점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가 엷게 얼룩진 수풀들이 언덕 밑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유옥구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검이의 시신을 붙들고 울고 있는 유유를 내버려두고 언덕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유옥구는 깜짝 놀랐다. 언덕을 한참을 내려가니 피떡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과 옷 전체가 빨갛게 된 채 누워있는 밀우를 발견했다.

  “밀우! 살아있나!”

  유옥구의 외침에 유유도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동안 유옥구는 밀우의 상태를 보려 뺨을 수없이 쳐봐도 숨은 미세하게 쉬는 것 같지만 반응이 없었다. 가슴이 들썩이는 것을 보니 분명 살아있었다. 유유는 얼굴이 한껏 더러워진 채 밀우의 몸을 무릎에 둔 채 껴안으며 울었다.

  “밀우님! 제가 왔어요. 왜 저를 버려두고 혼자 간 건가요. 대체 왜 그런 건가요. 제가 지켜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유가 안도와 한탄과 비난을 모두 퍼붓자 죽은 듯 미동 없던 밀우의 손이 유유의 뺨으로 향했다.

  “네 냄새가 나는구나. 미안해. 괜한 마음에 객기를 부렸구나.”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왜 그런 겁니까. 왜”

  “이 나라를 지키고 싶었다. 난 고구려의 사내니까.”

  “그럼 전 무어란 말입니까.”

  “넌 내 사람이니, 너도 고구려의 동부 사람이지.”

  이야기를 나눌 동안 유유가 울음을 그칠 기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유옥구는 둘을 잠시 내버려두며 둘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밀우가 다시 쥐죽은 듯이 잠잠해지고 유유도 울음을 그치자 유옥구는 유유를 토닥이고 그를 등에 업쳐 메었다. 그 길로 언덕을 올라 밀우를 말에 태우고는 자신의 허리에 밀우의 몸을 끈으로 동여맸다. 뒤를 돌아보니 유유는 검이의 시신을 그대로 둘 수 없었는지 그 자신도 검이의 시신을 힘겹게 질질 끌고서는 말 위에 올려 자신의 허리에 끈으로 동여맸다. 둘은 큰길로 나아가며 뛰어갔다.

  유옥구와 유유가 한참을 말을 몰다 앞길에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여 언덕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길을 돌아가며 올려다보니 과연 위나라군이 끈질기게 고구려군을 쫓고 있었다. 길의 방향으로 보아 옥저로 가는 길임이 분명했다. 유옥구는 탄식했다. 끝나지 않는 위협과 위기에 처한 고구려의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그 원인이 자신이 안시성에서 위나라의 국경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위협하여 생긴 것 같아 죄책감도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둘은 길을 돌아 달려 왕이 있는 옥저로 향했다.

 

  유옥구는 옥저의 영채에 도착하여 왕의 막사까지 말을 달렸다. 유옥구의 만류로 유유는 그 이상 가지 못하고 따로 변두리로 이동하여 검이의 시신을 땅에 묻어주었다. 유옥구가 자신이 왔노라며 외치고 밀우를 내려놓자 왕 위궁이 장막을 뿌리치며 달려 나왔다.

  “살아있더냐!”

  “그렇습니다. 폐하. 살아있습니다.”

  “고구려의 축복이다. 어서 안에 들여라.”

  유옥구가 밀우의 몸을 장막 안으로 들여놓자 위궁은 자신의 옷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무릎과 넓적다리에 밀우의 몸을 기울여 베었다.

  “답하지 않아도 좋으니 짐의 말이 들리는 고개를 끄덕여라.”

  밀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고구려의 충신이자 짐의 은인이자 만백성의 영웅이다. 내 그대와 같은 용맹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짐은 이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위궁이 강경하고 말하고 따듯하게 어루만지자 밀우가 눈을 뜨며 기운을 차렸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격인지 아픔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부디 적들의 손에서 이 땅을 구해주십시오.”

  “알았다. 내 꼭 그리 할 것이다.”

  위궁은 의무병들을 모두 불러 밀우를 간호케 하고 그 어떤 무엇보다 그의 보전을 최우선순위로 삼게 하였다.

  “위나라군이 옥저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큰길을 보니 우리 군의 흔적은 많이 지워졌지만 그들이 이동하는 방향을 보아 며칠 내로 옥저도 당도할 것 같습니다. 심히 염려됩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유옥구가 지나오며 본 일을 말하자 위궁은 탄식했다.

  “아아, 이 고구려의 시련이 끝나질 않는구나. 국내성과 각 5부의 소식은 아직이더냐.”

  “예, 아직 소식이 없사옵네다.”

  “알았다. 소식이 오는 대로 바로 알리라.”

  하루가 지나자 고구려의 군사들은 기운을 다소 차리는 것 같았다. 위궁은 정탐을 통해 위나라군이 빠르게 오고 있음을 전해 듣고 군량의 절반 이상을 소모할 정도로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유유는 검이의 시신을 눈에 잘 보이는 언덕에 묻고 목석을 세웠다. 작은 칼로 파내어 비문을 ‘흑묘검’이라 새겼다. 이후 유유는 밀우가 누운 막사에서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고 하루종일 그를 보살폈다. 살과 근육이 많이 상했을 뿐 장기나 뼈와 같은 몸의 중요한 부분들이 크게 다치지 않은 밀우는 하루 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렸지만 일어설 정도는 안되었다. 유유는 갑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편한 옷차림으로 밀우의 옆에 항상 앉아 수발을 들었다.

  “이리 와 누워. 이상하게도 네 향과 얼굴이 생각나더라.”

  밀우가 팔을 벌리자 유유는 그의 옆에 누워 팔을 베어 누웠다.

  “...제가 없는 곳에서도 저를 생각했나요?”

  “응.”

  “저를 좋아하나요?”

  “응.”

  “어째서죠?”

  “글쎄. 생각 안해봤는데.”

  “이유가 없나요?”

  “이유가 있으면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것이지 않을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네요.”

  “너는 나를 좋아하나?”

  유유는 대답을 안했다. 아무런 말이 없어 밀우가 고개를 돌려 유유를 보자 유유는 고개를 숙여 밀우의 상처 가득한 가슴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그러면 됐다.”

  둘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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