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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밀우유유전 (고구려 동천왕기)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위나라의 땅을 침략했다.
위나라에 호의적이던 고구려가 배신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참여한 장수 중 밀우는 고구려의 무사였고, 유유는 신라의 낭객이었다.
밀우와 유유는 멸망의 끝에 선 고구려를 구하며 전쟁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

 
5. 동풍 (동천왕 요동정벌)
작성일 : 22-02-28 20:24     조회 : 191     추천 : 0     분량 : 2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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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햇빛

 

  바다의 지평선 너머 해가 동쪽 하늘에서 중천으로 넘어서자 밀우와 유유는 허기를 채울 요량으로 바다를 뒤로 하고 말을 타고 동안평성으로 나아갔다. 밀우는 문득 위나라가 요동에서 약조하였던 서안평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하며 안평성의 성문쪽으로 향하던 찰나 평야로부터 수천의 군사가 열을 지어 행진하여 오는 것이 보였다. 전열에 갑주로 무장한 수백의 군마들이 먼저 오고 후위로 그 배가 넘는 수천의 보병들이 열을 이루어 진군했다. 각기 중간중간마다 사람보다 큰 커다란 깃발이 들린 장대를 든 기수들이 있었는데, 그 깃발은 검은 천에 붉은 삼족오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저마다 각기 들린 수십의 삼족오 깃발에 동쪽으로부터 부는 바람에 휘날려 곧 고구려의 군대임을 소리없이 외치듯 자랑하니 그 기세가 제법 위엄이 있었다.

  밀우는 이 군대가 무슨 일인가도 싶어 호기심이 일었지만, 성문에 입성할 적에 경로가 맞부닺히면 불미스럽게 진입이 늦춰질까 하여 서둘러 이동했다. 하지만 성문에 채 다다르기 전에 군대의 속도가 예상보다 다소 빨랐는지 선두에 선 기수가 밀우와 유유를 제지하며 먼저 성문에 다다르기에 이르렀다.

  ”대고구려군이 안평을 진군하니 백성은 경거망동하지 말라. 대왕폐하가 지나가신다. 그대들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라.“

  기수의 말에 밀우와 유유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말에서 내렸다. 그를 보고 기수가 다시 행진하는 전열의 앞으로 돌아갔다. 군사들이 진군하며 성문 앞으로 나아갔다. 열명 이십명 삼십명 세는게 무의미할 정도로 끝없는 수의 군사들이 밀우와 유유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걸어갔다. 밀우와 유유는 기수에게 고개를 숙인 이후 그들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행군이 중간 즈음이 지날 무렵 검은 갑주에 붉은 각인이 새긴 갑옷은 여타 주위의 개마무사들과는 크게 다른 바 없었으나, 투구의 위로 길게 새꼬리처럼 달린 붉은 깃털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호위하는 보병들을 전후로 진군하고 그 가운데에 말을 탄 검은 개마무사들이 둘러쌓아 그 어떤 말보다 체격이 우람한 말을 타고 여유 있게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왕의 모습 같았다.

  왕으로 보이는 자와 주위의 호위무사들이 밀우와 유유를 지긋이 내려다보자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밀우를 알아본 듯한 한 사내가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그들에게 다가섰다.

  ”이거 밀우 아닌가? 동부로 돌아간 줄 알았건만 어쩐 일로 이 안평까지 왔다지? 소식을 들은 겐가?“

  밀우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한결 얼굴색이 밝아지고 전보다 더 늠름해진 득래가 있었다. 밀우도 내심 그가 반가웠지만 왕의 행렬 중에 그가 이러는 것이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웠다.

  ”득래님 그간 안녕하셨습네까? 득래님이야말로 안시성에 계시지 않았습네까.“

  ”유성주님이 요동에서의 공적을 칭찬하고 중앙에 주청하시더니, 일이 이렇게 되었다. 지금은 폐하의 근위대장으로 있지.“

  ”아니, 그것 참 경축드릴 일입니다. 허나 그간 본 득래님은 야전에서 말을 타고 뛰어다니실 분인데 왕실에 계시려면 답답하시겠습네다.“

  득래는 몸을 밀우에게 가까이하며 말했다.

  ”좀이 쑤셔 겨드랑이에 곰팡이가 필 정도네.“

  득래는 다시 몸을 가져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 안위보다 나라의 부름이 더 우선 아닌가.“

  ”그렇다면 돌아가서 폐하를 보필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반가운 분이지만 여기서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득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에 올라탔다.

  ”폐하께서 사석에 변방에서의 이러저러한 일들과 안위를 물으실 때, 자네 이야기도 조금 드린 적이 있네. 아마 폐하께서도 기억하고 계실게야.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득래는 다시 무리로 말을 타고 가며 왕의 옆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왕과 득래가 걷는 말을 멈추지 않고 속닥거리듯이 대화를 나누더니 왕이 밀우와 유유를 향해 지긋이 보며 손바닥을 까딱거리며 손짓했다. 유유는 정확한 사연을 알지 못해 밀우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밀우는 멈칫거리더니 유유의 등을 밀며 일단 가자며 청했다. 말을 타고 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말머리를 손으로 끌고 천천히 걸어갔다. 밀우와 유유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군을 따로잡아 왕의 옆에 당도했다. 손을 모으고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니 왕이 말했다.

  ”멈출 연유는 없으니 말에 오르게.“

  밀우와 유유는 말에 올라타 득래와 함께 왕의 옆에 섰다.

  ”그대 이야기는 들었네. 요동 근방에서 백성들이 일컫기를 정주산의 호랑이를 잡아먹고, 백호의 정기를 받았다지. 요동정벌에도 참여했고.“

  밀우는 부끄러워 했다.

  ”먹은 것은 아니오나, 나머지는 사실입네다.“

  왕 위궁은 허허 웃었다.

  ”뭐, 됐네. 동부대가 밀설의 아들이라고 이미 듣기도 하였고, 오히려 밀설이 스스로 자네를 들먹였다면 오히려 멀리 했을게야. 젊은 청년이 그 정도의 위명이라면 관심을 끌 법도 하다. 인행을 다녀온 지 얼마나 되었다지?“

  ”햇수로 약 3년 정도 됩네다.“

  ”스물둘 정도 되겠군.“

  ”그렇습네다.“

  ”요동과 안평의 소식을 듣고 온건가?“

  ”그것은 아니옵고, 관아일을 돕기 전에 경험차 여행을 잠시 왔습네다.“

  ”본인이 다녀와 놓고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나보구마.“

  ”송구스럽습네다.“

  ”득래.“

  왕 위궁이 옆에 있던 득래를 불렀다. 득래는 왕의 의중을 알아채고 이야기하였다.

  ”위나라가 약조를 지키지 않았다. 안평을 아직 돌려받지 못한 셈이라.“

  밀우는 그렇냐며 답을 하려다가도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위왕 조예가 죽었다. 그리고 그 기세 높고 지혜롭다던 사마의가 병으로 관직을 내려놓은 모양이야. 조상이란 왕의 친인척이 국상에 올라 정권을 쥐고 휘두르고 있다는군. 그래서 약조를 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어이하였든 명분을 얻은 셈이기에 동안평에 미리 소집을 명하고 이렇게 출병하는 길이네. 서안평은 보름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우리 땅에 귀속 될기야.“

  밀우는 몹시 놀랐다.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왕이 답하였다.

  ”지금이 아니면 때가 안맞음이야. 위나라는 앞으로 내분으로 갈라질 듯 하니 선왕들의 뜻을 받아 요동까지 우리 땅을 확장하는 것은 짐의 몫이다. 하늘이 내려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예, 폐하.“

  위궁은 잠시 짐짓 밀우를 지긋이 보았다.

  ”이렇게 인연이 닿은 것도 하늘이 점지해준 것일 터일 것이다. 내 자네에게 중책을 맡겨볼까 하는데.“

  밀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하명만 하시라요.“

  ”위나라의 경계를 사지 않기 위해 국경에서 일체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오직 중앙의 중군만을 끌고 왔다. 해서 각 부의 무사들을 따로 부르지 않았는데, 자네가 동부 대표로 기마장에 위임해서 선봉에서 군을 한번 이끌어보게.“

  ”너무 과분한 일이옵네다. 폐하.“

  ”내는 결심이 섰으니, 상의는 득래와 하그매.“

  위궁은 밀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보며 나아갔다. 밀우는 어안이 벙해져 걸음이 늦춰지며 득래와 함께 서게 되었다. 득래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밀우에게 말했다.

  ”우선 잠시 군에서 떨어지고, 내 성에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면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오게. 가장 큰 객잔에서 먼저 정리를 하고 있으라.“

  ”예.“

  유유는 걱정스럽게 밀우를 보았다. 밀우는 괜찮다며 유유의 등을 밀어 말머리를 돌리게 하고는 자신도 함께 말을 달려 군에서 멀어졌다.

  밀우와 유유가 객잔에 가니 과연 거리가 꽤 분주했다. 저마다 군량을 달구지에 실어 나르는 장정들이 몇차례씩 이동하였고, 조별로 휴식을 가졌는지 무리를 이은 군사들이 병장기도 없이 저마다 열을 지어 움직였다. 저잣거리의 한켠에는 수십명의 나무를 깎는 노인들이 있었는데 창에 쓰일 장대와 화살촉을 달 살로 보였다. 대장간에서는 평소보다 철을 두드리는 운율이 빠르되 그 소리가 급박하였다. 땅 땅 거리는 쇳덩이와 물에 닿아 치이 거리는 쇳내음이 귀에 담겼다. 아낙네들은 저마다 모여 사내들이 어쩌구 가축이 어쩌구 하며 왕이 이 안평까지 행차하여 전쟁을 치른단 소식에 담화가 끊이질 않았다.

  왕은 성의 중앙관부에 기거하였다. 내일 중으로 떠날 수 있도록 관부 주위에 막사와 천막들을 옹기종기 설치하여 군사들이 자리를 지켰다. 왕은 전시에 준할 수 있도록 상을 들임에 있어 특별히 대접하지 말되 백성들과 관료들이 먹는 그대로를 가져오라 신신당부하였다. 관부의 시종들의 바닷가에서 나는 조기와 같은 생선류와 간이 슴슴하게된 메밀면을 내가며 그와 똑같이 군사들에게도 지급하니 저녁시간에는 관청이 왁자지껄 떠들썩하였다. 왕은 장내가 시끄러운 것을 오히려 기상이 씩씩하다 여겨 막사들을 직접 돌며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득래가 따로 마련하여준 막사에 잠자리를 들었다. 특별히 따로 떼어 다른 군병이 없이 쉴 수 있도록 배려받았다. 밀우는 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고, 유유는 그런 그를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옆으로 누워 쳐다보았다.

  ”걱정이 되십니꺼, 고민이 되십니꺼.“

  유유가 묻자 밀우가 답했다.

  ”둘 다.“

  ”잡념이 많으면 밖에서 검이라도 좀 휘두르고 몸을 푸시겠어예?“

  ”아이다. 소리가 나면 불필요하게 이목을 끌지 않겠으라.“

  유유는 조용히 뒤를 돌아 옷고리를 풀어 잠시 상의를 벗어두고는 가슴에 매여진 붕대를 풀어냈다. 갑갑한 족쇄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로움이 가슴뼈를 들썩였다. 그녀는 앞으로 당분간 전장에서 몸을 단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배낭에서 새 붕대를 꺼내 가슴에 새로이 칭칭 동여맸다. 어느덧 밀우가 등 뒤로 다가와 말없이 유유가 잡고 있던 붕대를 잡아내고는 그 자신 대신 동여매여 등 뒤에서 끈을 매듭지었다.

  ”고맙십니더.“

  밀우는 자리에 떨어져 있는 상의를 집어 들고는 유유의 몸에 덮어 주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유유는 그런 그를 빤히 하염없이 뒤돌아보고는 그녀도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검이는 웬일인지 오늘은 그녀의 허벅지 옆에 누워 뺨을 비비고는 그도 턱을 바닥에 괴며 잠들었다.

  유유는 날이 밝자 먼저 눈을 뜨고는 머리를 새로 질끈 묶었다. 그녀는 밖으로 잠시 나가 대야에 물을 뜨고 장막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니 검게 어두웠던 장막의 천이 햇빛으로 붉게 달아올라 그에 눈을 뜬 밀우가 가볍게 인사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대강 얼굴을 머리칼을 씻어내고는 지난밤 득래가 따로 챙기어준 갑옷의 끈을 서로 매어주며 입었다. 밀우는 긴장한 탓인지 코로만 숨을 쉬니 연신 코에서 황소바람이 나오곤 했다. 유유는 그런 그를 보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애쓰며 피식 웃었다. 여타 개마무사들과 같이 붉은 각인의 검은 갑옷을 입자 둘은 서로가 처음보는 서로의 모습에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밀우와 유유는 투구를 손에 잡고 겨드랑이에 낀 채 나갈 채비를 하였는데, 별안간 밀우는 투구를 내려놓고는 품에 있던 붉은 두건을 돌돌 넓적하게 말아 유유의 이마에 씌우며 묶었다.

  ”이건 무엇입니꺼?“

  유유가 묻자 밀우가 답했다.

  ”이는 내가 무사인행 때 늘 쓰고 다니던 두건이라. 이 한 여름철에 땀이 무척 날 것이니 땀이 흘러 눈에 흘러 들어가지 않게 쓰는 거야. 그리고 빨간 색이 멀리서도 눈에 띄어야 내가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부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매.“

  ”네.“

  밀우는 유유의 머리띠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곤 다시 투구를 집어 장막을 나갔다. 유유도 머리띠를 매만지며 뒤쫓아 나갔다. 밀우와 유유는 밖에 있던 득래를 보고 목례를 하며 그가 가는 길로 따라나섰다. 그들이 각기 제 말을 타고 성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서니 각 삼군의 부장들이 병들을 군별로 한데 모아 집결하여 있었다. 득래는 중군으로 가 그 앞 열에 자리 잡았고, 밀우와 유유는 지난밤 일러받은 대로 전군의 앞으로 갔다.

  ”낸 동부 사람 밀우요. 전군을 지휘하는 왕명을 받았으니 그대들은 나를 따르라.“

  ”내는 선인 부장 답설입니다. 명하시는대로 제가 전달하여 인솔하겠습네다.“

  답설이라 소개한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를 차렸다. 안색이 거멓고 수염이 턱과 뺨을 모두 덮어 덮수룩하니 매우 야성스러웠다. 유유는 덤덤하게 밀우의 옆에 서서 왼손으로 괜시리 칼 손잡이를 매만졌다. 유유는 갑옷 안의 옷깃을 목 위로 끌어올려 자신의 입술과 턱이 가려지도록 하고 투구를 썼다. 머리칼을 가린 채 얼굴만 드러나면 매끈한 얼굴로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싶었다. 내리 찌는 뙤약볕에 땅이 지글거릴 정도로 입에서 나오는 숨결이 뜨거웠지만, 그보다 이가 더 중할 것이라 여겼다.

  삼군이 모두 성 밖의 지평선을 보며 대열을 이루고 그를 지휘하는 장수들이 성문을 보며 일각이 지날 정도로 기다리자 왕 위궁이 호위대를 대동하며 성문을 지나 중군으로 합류하였다. 왕이 합류하여 득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득래가 앞을 돌아 바라보며 구름이 일렁일 만큼 쩌렁쩌렁 외쳤다.

  ‘대고구려 출병! 기함!”

  “고려! 고려!”

  5천명의 군사들이 제각기 일시에 창을 땅에 두 번 두들기며 외치니 실제로도 땅이 울릴 기세였다. 밀우는 진지하게 안광을 내며 답설에게 지시하였다.

  “출병.”

  답설이 뒤를 보며 외쳤다.

  “출병!”

  전군을 선두로 하여 5천의 군사가 십(十)자의 형태로 흙먼지를 뿜어내며 나아가니 장관이 펼쳐졌다.

 

  고구려군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사흘을 세워 진군하니 해가 중천에서 넘어갈 즈음 서안평성 앞에 당도하였다. 동안평에서부터 이끌고 가는 공성 병기 탓에 속도가 더뎠다. 정탐꾼에 의해 출병 사실이 전달되었는지 성문은 굳게 닫혀있고, 인근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군의 앞에 있는 것은 돌로 지어진 성과 흙과 나무와 뙤약볕 뿐이었다. 병사들은 바다와 같은 빛을 내는 하늘에서 내려치는 햇빛에 비지땀을 흘렸다. 씻지 않고 땀이 흐르고 흘러 옷과 갑옷을 적셔 쉰내를 내니 제각기 고통에 시달렸지만 왕의 군대라는 미명하에 그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안평태수 전주는 군사들의 급보를 받고 급히 성벽에 나아갔다. 전주는 약 이틀 전부터 동안평에서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전보와 고구려왕이 직접 군을 끌고 서안평으로 향한단 전보를 동시에 받았었는데, 벽을 보강하고 민병을 모으는 데에 힘썼지만, 군의 수가 모두 모아 4천 남짓으로 고구려의 5천 군사에 비해 비교적 부족하였다. 전주는 여차하면 항복하고 본국으로 도망갈 요량으로 수하들을 모아 의견을 물으려 했지만, 고구려의 공성 병기가 접근해오고 있다는 급보에 멍해져 기력을 잃었다. 그들은 분명코 성을 점령할 생각으로 오는 것이기에 사신을 보낼 여유와 시간이 모두 부족하였다. 전주는 어쩔 수 없이 전군 수성 방어를 명하였지만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해 주위 사람 모두 불안해하였다.

  고구려군은 군을 셋으로 나누어 나아갔다. 좌군과 우군이 각기 성문의 양옆 성벽을 향해 운제 사다리를 끌며 각기 커다란 방패를 앞세우고 나아갔다. 중군은 성벽을 향해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댔는데 모두가 맥나무 목각을 사람의 키만큼 기다랗게 다듬은 맥궁으로 시위를 당기니 그 거리가 위나라군에 비하여 월등하게 길어 서안평성의 병사들은 어찌할 줄 모르며 그들도 맞써 화살을 쏘다가도 숨기에 바빴다. 고구려의 후군은 각기 앞뒤로 나누어 앞에서 충차를 이끌고 성문을 두드리고 뒤에서는 벽력거로 돌을 줄에 감아 튕기어 날려대니 커다란 돌무더기들이 성안으로 날아 들어가 가옥과 사람들을 으깨었다. 벽을 올라타는 고구려 군사들은 벽을 무사히 넘어가는 이가 8할 정도로 사다리에서 떨어지거나 적의 창과 화살에 찔려 죽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문을 부수는 병사들도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큰 방패를 치켜세워 들었지만, 방패 사이를 피해 날아드는 화살을 맞고 팔이나 다리를 다치기도 하였다. 날아오는 화살과 돌멩이에 옆에 있던 동료가 피를 흘리며 넘어지면 자신도 그리 될까봐 걱정하는 공포가 삽시간에 퍼지기도 하였는데, 각기 장소에서 전장 지휘를 맡은 부장들이 끊임없이 외치고 독려하니 쉽사리 도망가지 않고 병사들이 용기 내어 나아갔다.

  밀우와 유유는 기병대 1천을 뒤에 두고 적의 거리가 닿지 않는 성문 앞의 평지에서 성을 바라보며 대기하였다. 성은 아비규환이며 지옥이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작은 인형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조종당하며 이리 구르고 저리 떨어지며 투닥거렸다. 고구려의 벽력거에서 날려 보낸 바위가 우연히 성벽에 맞기라도 하면 그 곳에 있던 위나라의 병사들은 수면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처럼 공중에 날아다녔다. 밀우와 군사들은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현실감이 도무지 없기에 무덤덤했다.

  한참을 기다렸을까, 잠시를 기다렸을까, 성문이 열리는 움직임이 보이며 미리 정해진 신호를 알리는 붉은 깃발이 성문에서 펄럭였다. 그들이 충차를 옆으로 치우는 움직임을 보였다. 밀우는 반사적으로 심장이 뛰어오름을 느끼며 외쳤다.

  “전군 돌격!”

  와아아- 하는 웅장한 괴성과 함게 1천필의 말과 1천명의 군사들이 말을 박차며 성문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의 뒤로 모래바람이 뿜어졌다. 1천의 날알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움직임을 하듯 그 뒤로 하나의 갈색 구름이 날아드는 형세였다. 수백척의 거리를 지나 성문이 코앞에 닿을 때까지 당도하자 열려있는 성문의 뒤로 위나라의 군사들이 제각기 창이나 칼을 들고 몸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성문의 옆으로는 문을 뚫은 고구려의 보병들이 하늘을 막던 커다란 방패를 앞으로 내어놓아 자신의 몸을 막으면서 길을 비켜주듯 일렬로 밀집했다. 이로써 개마무사들은 성문으로 향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달려가는 기병들의 앞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장애물들이 막아서자 밀우와 개마무사들은 모두가 익혀둔 기마창술로 왼손으로 창을 거꾸로 꼬나쥐고 오른손바닥으로 막대의 끝을 쥐어 잡았다.

  쾅! 폭팔하는 듯한 폭음과 함께 고구려의 기병대와 위나라의 병사들이 부딪쳤다. 군마를 입은 말은 부딪히는 사람의 살과 뼈를 꺾어버리고, 사람이 든 창은 찔리는 이의 갑옷을 뚫고 살점을 찢어냈다. 1각의 반의 반도 안되는 순식간에 1천의 군마가 5백이 채 안되어 보이는 병사들을 짓밟으며 뛰어나갔다.

  밀우는 기병대의 가장 앞에 서서 달려나가며 가장 먼저 부딪쳤다. 오른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파오며 자신의 들고 있던 창은 적의 배에 꽂힌 채 놓쳐 버렸다. 놓쳐 버린 창의 장대는 밀우의 턱을 치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입안의 이까지 전해져오는 진동에 몸이 들려버릴 뻔했으나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장에 다시 앉았다. 하지만 부웅- 하며 밀우의 눈이 질끈 감아지며 몸이 공중에 떴다. 밀우가 타고 있던 말이 적들을 밟고 넘어지며 그와 함께 밀우의 몸도 공중으로 내팽개쳐졌다.

  ’요동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밀우는 새삼스러웠다. 감겼던 눈이 떠지며 땅바닥이 보이자 손으로 짚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가 덜컹덜컹 거리며 머리뼈를 쥐흔들었다. 밀우는 무릎을 꿇으며 간신히 앉자마자 돌아간 투구가 시선을 가리고 투구 끝에 묻은 진흙이 얼굴을 더럽히자 훌쩍 벗어내었다. 멍한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 자신이 적들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밀우는 들고 있던 투구를 칼을 들고 달려오는 병사의 머리를 후려치며 버렸다. 일순간 서넛일까 대여섯일까 셀 수 없는 병사들이 자신을 주목하며 제각기 창을 찔러내 왔다. 밀우는 허리춤의 칼을 빼들고 날아오는 창의 막대를 발로 차고 뛰어오르며 병사의 머리를 위에서부터 내려쳤다. 땅에 착지한 밀우는 자세를 낮게 잡고 무릎을 굽혔다. 다른 창들이 찔러대며 날아올 때마다 왼손으로 창을 잡아내고 오른손의 칼로 적의 목을 베어내기를 반복했다. 창이 오른편에서 찔러오면 피해내면서 창을 등으로 밀어내며 회전하면서 적의 아무데나 베어냈다. 밀우의 칼이 춤을 추며 적 사이를 지나닐 때마다 코나 입을 베이면 피를 뿜어내며 근육이 덜렁거렸고, 갑옷을 베면 베어진 사슬이 뭉개지고 부숴지면서 살점을 파고들었다.

  한편 창 없이 칼만 들고 달려 나가던 유유는 적들과 부딪치기 직전에 타고 있던 말을 발로 딛고 공중에서 날아올라 춤을 추듯 칼로 회전하며 순식간에 적 두셋을 베어내며 땅에 닿았다. 기마술이 익숙지 않았던 유유는 말들의 돌진에 혼비백산하는 적들을 감정 없이 뒤에서 목을 노리며 베어냈다. 자신을 알아챈 적들이 달려오자 유유는 창을 피해 달아나면서 시선을 자꾸만 가리는 투구를 벗어던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화살이 날아오며 유유의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번지며 쓰라림이 몰려왔다. 유유는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땅을 기다시피 하며 적들 사이로 파고들며 발목이나 종아리를 수없이 베어냈다. 천조각과 살조각으로만 이루어진 적들의 다리는 무방비로 피를 내며 주저앉았다. 유유는 쓰러진 적들의 얼굴이나 몸을 밟고 뛰어다니며 자리를 도망쳤다. 낮은 자세로 무릎을 굽히며 달려가던 찰나 그림자가 지며 왠 몸뚱이 하나가 자신을 덮쳤다. 유유는 무게에 못 이겨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유유는 깔린 몸을 돌리며 자신을 덮친 몸뚱이의 배를 칼로 찔러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작 배에 칼을 찔린 몸의 주인은 이미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며 유유의 얼굴로 피를 뚝뚝 떨구었다. 유유가 일어서자 그 앞에 밀우가 남의 피로 물든 유유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나타났다.

  밀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유유의 정수리를 헝그러트리곤 유유의 팔을 잡아채어 자신의 등 뒤로 두었다. 밀우와 유유는 서로의 등을 서로에게 맡긴 채 앞다투어 달려오는 적들을 베어냈다. 밀우는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연신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고, 유유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돌려내며 칼춤을 추었다.

 

  한 무리의 고구려 기병대가 성문에서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갔다. 그들은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성안의 각 구석구석으로 달려 나가 미리 안장에 준비한 횃불에 불을 붙여 마을을 제외한 관청 건물로 보이는 모든 곳에 불을 질렀다. 출병 전에 서안평은 침략이 아닌 점령의 목적이므로 절대 백성을 약탈하지 않음을 왕이 신신당부를 하였기에, 불을 질러 혼란만을 안길뿐 그 누구도 수탈하는 군사는 없었다. 고구려군은 각 시가나 고을을 돌며 고구려의 깃발을 펄럭이니 안평의 위나라 백성들중 한족들은 제각기 집에 숨어 벌벌 떨었고, 예맥인들은 한데 모여 고구려군을 환영하며 절을 하였다.

  고구려군이 성내의 마을들을 점령하고 깃발을 세우자 항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성벽에 있던 안평태수 전주는 수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중앙관부로 도망쳤다. 모든 성벽과 시내의 주요한 거점들이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제각기 장소들마다 위나라 군사들이 항복하여 무기를 버리고 살기 위해 무릎을 꿇으니 그제서야 고구려왕 위궁이 1백의 호위대를 이끌고 위엄있게 말을 걸으며 성으로 들어섰다. 이에 성내에 있던 군사 일부가 합류하여 5백의 군사들과 왕 위궁이 중앙관부까지 나아가자 이미 관청에는 하얀 깃발을 건물에 달아놓은 채 안평태수 전주가 투구를 벗고 머리를 풀어 고개를 땅에 박으며 조아리고 있었다. 위궁은 말에서 내리지않고 전주를 내려다보았다.

  “가신들과 관료들을 한데 모으라.”

  득래가 말을 전하였다. 전주는 우물거리며 뒤에 무어라 전하니 관부에 숨어있던 관료들이나 장수들, 시종들이 슬그머니 차례차례 모여들었다. 뿔뿔이 흩어져있던 고구려군사들이 점차 관부와 궁을 에워싸며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점차 많아졌다. 전주가 보기에도 꼼짝없이 갇힌 노릇이었다.

  밀우와 유유는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흙과 피를 뒤집어쓴 채 넘어지며 주인을 잃은 말들을 잡아탔다. 밀우는 말을 타고 고구려 군사들이 이동하는 쪽으로 움직이려다가 다시 말에서 내리고서는 땅에 떨어진 주인 잃은 고구려군의 투구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볼썽사납다. 써라.”

  유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 흉하답니꺼.”

  “합류해서 민머리로 있으면 모양 빠지지 않더냐. 그 얘기가 아니매.”

  밀우와 유유은 휘날리는 고구려의 깃발과 치솟기 시작하는 불길들을 따라갔다. 뒤늦게 따라가는 그들은 가는 족족마다 이미 개마무사들이 짓밟고 지나간 위나라군의 시신들이 즐비했다. 거리는 시체가 쏟은 피로 흥건했고, 아무렇게나 떨어져 나간 머리나 팔다리가 돌담과 건물 사이로 굴러다녔다. 간간이 보이는 고구려군의 시신도 보였다. 누구나 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은 살이 베일 때에 끝이 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자신도 무예로 헤쳐 나갔을 지언정 오늘 역시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었다. 전장의 삶은 투쟁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극단적인 선택지였다. 오히려 팔다리가 잘리는 부상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밀우와 유유가 걸어가며 스쳐 지나가는 골목에는 어깻죽지가 갈라져 숨을 헐떡이는 병사도 있고, 배에서 갈라진 내장을 자신의 손으로 주워 담으며 눈물을 쏟는 병사도 있었다.

  밀우와 유유가 성의 중앙에 위치한 관부로 가자 왕 위궁이 위엄을 내보이며 군사들을 대동하였다. 군사들이 백여명은 족히 되어 보일 위나라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를 왕이 무어라 무어라 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모여들어 위나라 사람들을 포박하였다. 포박하고 있을 동안 점검 가까워지니 왕의 말도 들렸다.

  “다 모인 건가?”

  “예, 그런 듯 하옵니다.”

  “그럼 이제 모두 죽여라.”

  왕이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을 위로 쳐들더니 아래로 고꾸라트렸다. 그와 동시에 칼을 빼 들고 있던 근위대 수십명이 무릎 꿇고 손발이 묶인 위나라 사람들의 목을 쳐냈다. 비명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항복하여 사람을 모두 모았거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얼굴이 새하얘진 전주가 왕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위궁은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모이라고 했지, 살려준다고 한 적은 없다.”

  전주가 다시 고함을 치려했으나 이미 목이 분리되어 목소리가 식도에서 끊겨버린 전주의 입은 입 모양만 벌린 채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다. 이를 목격하고 눈이 동그래진 밀우와 유유가 말을 달려 나갔다. 그들이 도착하였을 땐 모든 상황이 끝나 머리가 베어진 시체가 백여구가 넘었다. 밀우의 눈에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고 겉보기에도 값비싼 옷들을 입은 것이 귀족들이 분명해 보였다. 밀우가 무어라 물으려 득래를 보았지만, 득래가 밀우를 보고는 몸을 휙 돌려 부장들에게 성을 정리할 것을 지시하느라 바쁘니 그는 아무것도 묻지 못하였다.

  위궁은 애초에 위나라 관료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자비롭게 본국으로 돌려보내면 위나라 조정에서 동쪽 국경을 유심히 살피고 재빠르게 돌려받으러 군사를 꾸릴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였기에 행한 조치였다. 또한 본인은 안평 뿐만 아니라 요동까지 확장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위궁은 성내의 시신과 불탄 가옥들을 수습하면서 방을 붙였다. 잔존할 한족 백성들은 본래의 살림 그대로 내버려 두고, 타지로 이동하기를 희망하는 백성들은 소유물들을 값을 쳐주어 성을 나가도록 살피었다. 이는 한족 백성들 사이에 공포가 퍼져 앞으로 있을 국경 분쟁에 이로움을 취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일련의 계책을 밀우도 들은 바가 있기에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항하지 않는 자들을 처형하던 것은 그 나름대로도 충격적이어서 밀우는 군사들이 성내를 수습할 적에 득래의 막사를 찾아 나서서 물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왕의 명이 있던 사실과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음을 알게 된 밀우는 별다른 말없이 수긍하고 장막을 나섰다.

 

  왕이 직접 관청의 객실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삼군의 장수가 모두 모였다. 밀우 또한 유유를 뒤로 대동하고 나섰는데, 대부분의 부장들이나 마궁수들 또한 참석하였기에 눈에 띄지는 않았다. 왕이 중심 끝부분에 있고 그 밑으로 두 개의 열로 의자들이 길게 놓였다. 정해여진 좌석은 없으나 실상 신분 순으로 앉았는데 밀우는 동부 밀가 출신이자 전군의 선봉장 자격으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뒤로는 유유가 앉았다. 왕이 전시유지를 명하였기에 그 누구도 갑옷을 벗지 않았다.

  “짐은 이대로 요동까지 갈까 하는데, 경들 의견은 어떠하느냐. 먼저 보낸 정탐꾼은 아직 소식이 없는가.”

  왕이 말했고, 득래가 답했다.

  “파발이나 소식이 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네다. 이렇게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사오나 요동은 그 땅이 크고 주목으로 있는 관구검과 태수 왕기는 일전에 함께 전장에 나선 적이 있습네다. 이곳 안평의 전주에 비하면 그들의 용맹함과 담대함은 비할 바가 안 됩니다. 일시에 들이친다면 우리의 기병대가 우세하니 우위를 점할 수 있겠으나, 싸움이 길어진다면 우리의 보급선이 길어져 곤경에 처할 수도 있습네다. 또한 요동과 땅을 같이하는 요령과 요서는 그 길이 편리하고 가까워 쉽게 지원할 수 있습네다. 만약 싸우고자 하신다면 서부의 군을 모두 모아 대군을 소집하는 것이 알맞을 것입네다.”

  왕은 귀담아 들었다.

  “맞는 말이매. 그럼 양평은 어떠하느냐.”

  “양평은 저와 선봉장인 밀우가 지낸 적이 있고, 지리에 밝으니 점령할 수 있다면 수성하기 이로울 것입네다.”

  “수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정확한 이는 소식이 오는 대로 알 수 있겠으나, 상비군의 규모는 대략 2천쯤 되고 거주하는 백성은 1만쯤 됩네다.”

  “그람 파악 되는대로 다시 논의하지.”

  왕은 그 이외에도 군을 이끎에 있어 군사들의 애로사항과 군량의 여부를 물었다. 부족한 목재와 군량은 서안평 백성에게 값을 주고 사도록 하고, 장차 있을 원정에 동원될 군사를 제외한 후군 장수들과 그 휘하의 1천 군사는 서안평에 남아 고구려의 지역임을 확고히 인식되고 바뀔 수 있게끔 하였다. 밀우는 사소하게 묻거나 지시하는 일에 예 예 하며 답하였고,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밀우와 유유는 군이 재출병을 위한 정비를 하기까지 휘하의 부장들과 유대감을 가지기 위해 수시로 자리를 함께하며 전술훈련을 도왔다. 밀우는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어투는 강하게 하되, 모르는 것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묻고 아는 것이 있으면 잘 알려 주었다. 유유는 줄곧 밀우를 호위하며 크게 입을 열지 않았다. 시일이 나흘 가량 흐르자 부장들, 개마무사들과 친분이 다소 생겨 농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거리에는 점령전 이후 피로 칠갑이 된 거리와 벽들, 집채들을 치우고 닦기에 바빴다. 수습된 시체가 위나라 사람 2천구, 고구려 사람이 5백구였다. 고구려 군사의 시신들은 몸을 닦고 천으로 감싸 목관에 넣었다. 5백개의 목관을 수레에 태우고 사람을 딸려 보내면 국내성에 보내면 중앙 사직에서 장사를 지낸 후 가족에게 돌려보낸다. 위나라의 시체는 서안평성에 남은 한족 백성들이 장사를 지내고 땅에 묻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한족의 문화대로 장사를 지낼 적에 왕 위궁이 기약 없이 행차하여 절을 하고 가니 한족 백성들이 울며 감격하였다. 왕은 이후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하루 동안 흰옷을 입고 색이 있는 요리를 먹지 않도록 하여 추모했다.

  추모일 다음 날에 요동의 정탐꾼이 서안평으로 돌아왔다. 득래는 그를 먼저 맞이하여 간략한 질의를 하고는 왕에게 소식을 알렸다. 왕은 소식을 듣고 회의를 소집하였다. 정탐꾼이 말했다.

  “요령주는 주목 관구검이 중앙의 일로 자리를 비우고 낙양으로 가 부재중이며, 오직 왕기만이 양평을 잠시 두고 요동에서 일을 보고 있습네다. 양평은 반군을 진압한 이후 사병을 두고 있지 않아 관병만 약 1천명이 있습네다.”

  “지리는 어떻더냐.”

  “양평은 가뭄으로 땅과 숲이 마르고 물이 부족하여 백성들이 곤란을 겪고 있으며, 땅이 단단하니 진군과 보급을 함에 있어 이롭습네다.”

  “하늘이 주신 기회구나! 삼족오가 이 위궁을 어여삐 여긴다.”

  왕 위궁은 크게 기뻐하며 삼군을 돌아보며 정비상태를 물었다. 잔존할 후군을 제외하면 출병할 수 있는 군사가 3천5백명이고, 서안평의 말을 모두 거두고 소유한 말을 모두 합치니 말이 2천필이 넘었다.

  왕은 보병들에게 말을 나눠주어 기마훈련을 하게끔 명했다. 다시 사흘 정도 지나 성문 앞에 모두 집합하여 출병을 명하니 때는 초가을이 되었다.

 

  고구려는 3천5백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군사를 나아갔다. 모래가 가득한 땅에 바람은 입김처럼 뜨끈했다. 구름이 하얗고 푸른 하늘에서 햇볕이 노랗게 내려쬐었지만 여름처럼 크게 덥지는 않았다. 보급하는 후군은 공성병기는 모두 두고온 채 목재와 병기만을 달구지에 실었다. 그 외 전군, 우군, 좌군이 모두 말을 타니 진군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사흘 이내에 양평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유는 땀을 흘리며 이마에 매둔 붉은 두건이 검게 될 정도로 물들었다. 밀우가 조용히 다가와 유유의 눈썹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고는 등을 토독이니 유유는 피식 웃었다. 일평생 경상일대에서 산, 들, 숲에서 사계절을 보낸 유유에게 사막의 날씨는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두 차례 숙영하며 사흘이 지나자 양평성이 눈앞에 목도하였다. 출병하며 미리 달려보낸 정탐꾼이 돌아왔다.

  “적이 크게 놀라 아무런 방비도 이루지 못했습네다. 군사는 아직 1천명 가량입네다. 왕기는 요동성에 있는데 우리의 소식을 들으면 군을 끌고 달려올 것이 분명합네다. 허나 요동에 그의 사병이 몰려있고 그 수가 2천에 달해 매우 많습네다.”

  위궁은 짐짓 고심하더니 결단했다.

  “전 삼군에 알려라. 오늘 중에 쉬지 않고 성을 치고 나올 것이다. 모두 약탈해도 좋다.”

  득래는 놀라며 말렸다.

  “폐하, 왕기는 용맹한 자입니다. 오늘 보복할 일을 만들어주면 그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군을 물리고 대군으로 다시 오시지요.”

  “칼을 빼어 들었으면 나뭇가지라도 베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군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것은 선대왕도 한 적 없고, 나 또한 할 일이 아니다. 금은보화와 부녀자들을 모두 수탈해오면 먼 길을 달려온 중부의 군사들도 기뻐하며 위로받을 것이다. 경은 토 달지 말라.”

  득래는 내심 아- 하며 한탄했다.

  ’폐하의 호연지기는 분명 화를 부를 것이다.‘

  고구려의 군사들은 진영을 치고 운제와 사다리를 제작했다. 단시간에 만들어낼 수 있도록 경계병과 보급병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투입되었다. 밀우도 무사들을 인솔하여 한창 땀을 내며 목재를 운반했다. 별안간 나팔소리가 났다.

  뿌우우-

  밀우도 소리에 놀라 진영의 벽 너머를 보았다. 위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말을 끌고 성문을 나오며 달려오고 있었다. 군사 수가 부족함을 깨닫고 기습할 틈을 노리다 고구려 군사들이 병기를 제작하며 바쁘고 방심할 때를 노린 것이 분명하였다.

  “전군 무기를 들어라! 전군 승마!”

  밀우가 주위를 보며 쩌렁쩌렁 외쳤다. 밀우가 외치니 모두가 전달하듯 큰소리로 서로에게 같은 말을 외치며 목재를 내려놓고 분주하게 병장기를 찾고 말을 찾아 진영 안을 휘저었다. 어느새 말을 타고 달려온 유유가 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밀우가 손을 잡자 유유는 밀우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안장 뒤에 태웠다. 말을 달려 잠시 안가 자신의 말이 보이자 밀우는 안장을 발로 딛고 공중에 날았다. 밀우는 말 안장에 엉덩이를 착지하여 말머리를 돌리며 배를 차 말을 달려냈다. 순식간에 고구려 군사들의 반할 이상이 진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군 쐐기!”

  밀우는 가장 앞으로 나가 뒤를 보며 외쳤다. 밀우의 외침에 말을 모든 기병들이 일사분란하게 가운데를 비운 삼각형 모양으로 일렬로 주욱 섰다. 2천명 남짓한 군사들이 말굽을 드득이며 땅을 내치니 흙먼지 뽀얗게 일었다.

  “전군 돌격!”

  열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한 밀우가 외치며 말을 내달려 뛰쳐나갔다. 뒤따라 와아아-! 하며 2천의 기병들이 말을 달렸다. 달려오는 위나라의 기병들은 고구려의 진영을 감싸서 먹을 듯이 일렬로 달려왔다. 고구려의 기병들은 전열의 형세가 뾰족하여 위나라의 군사를 찔러 뚫을 듯이 달려갔다. 고구려군의 뒤로는 위궁의 지휘 아래 일렬로 집결한 보병들이 제각기 활을 들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위나라 군사들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쾅-! 흙먼지를 내뿜던 두 무리의 수천 군마들이 부딪히자 갑주가 깨지고 병기가 부러지며 폭발음을 냈다. 땅이 울렸다. 말머리까지 갑주로 싸인 고구려의 군마가 맨살의 위나라 군마를 들이받자 위나라 군마가 철갑에 두려움을 짓고 고개를 돌렸다. 고구려 군마 말머리의 사슬갑주는 위나라 군마의 목살을 거칠게 뜯으며 지나갔다. 들이받힌 말이 쓰러지면 그 위를 지나가는 말들이 말굽으로 사정없이 밟으며 지나갔다. 말의 근육과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들이받힌 말에 올라타 있던 병사는 쓰러진 말가슴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빼어내려 안간힘 썼지만 세차게 달려오는 군마들의 발길질에 본인도 걷어차이며 머리뼈가 부숴졌다. 그 위로는 고구려군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며 일어나지 말라는 듯 쓰러진 자들과 말들의 몸을 찍어댔다. 화살비는 자비가 없었는지 고구려 군사들의 등을 찍어대기도 하였다.

  밀우는 창이 없이 자신의 칼로 좌우를 연신 회오리치듯 베어내며 말을 달렸다. 잠시 수초 내달렸을까 달려오는 위나라 기병의 창을 몸을 숙여 피해냈다. 피해낸 창은 말의 엉덩이를 찌르며 밀우의 말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밀우는 데굴데굴 구르며 떨어졌다.

  ’또 다시!‘

  밀우는 안면을 흙바닥에 처박으며 절망했다.

  “피해!”

  투구를 쓰지 않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한 기병이 급하게 말을 대각으로 달려 피해내며 외쳤다. 밀우는 그의 옆을 다다닥 거리며 스쳐 지나가는 말들의 발길질을 느꼈다. 얼마나 가까웠는지 땅을 차는 말굽 소리가 귓등과 고막을 때렸다. 밀우는 칼끝을 땅에 짚고 무릎을 꿇으며 일어섰다. 한 차례 파도가 지나간 것처럼 위나라 기병대의 가운데 열이 쓸려나가고 고구려의 기병대는 성벽 길을 따라 길게 돌며 다시 돌아오게끔 전열을 회전했다.

  ’이는 천운이다. 아직 죽을 때가 안됐구나.‘

  순간 푸른 하늘에 구름이 생기며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는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밀우가 하늘을 보니 고구려군이 시위를 쏘아낸 화살들이 다시 비를 내리려 하늘을 덮고 있었다. 밀우는 절망했다. 별안간 캬아아- 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보급군에 있을 검이가 어느새 달려 온건지 한 커다란 방패를 앞발로 쳐대며 울고 있었다. 밀우는 황급히 검이가 바닥에 밟고 있던 큰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가 방패를 위로 하고 몸을 가리자마자 소나기가 내렸다. 검이는 낮게 주저앉은 밀우의 무릎 밑에 함께 주저앉았다. 방패를 퉁퉁퉁퉁 치는 것이 우박과도 같았다. 소나기가 지나간 듯 그림자가 사라져 방패를 내리자 그 앞으로 비를 맞고 쓰러진 위나라 군사들이 족히 백여명은 되어 보였다. 아직 남아있는 위나라 군사들은 여전히 고구려의 본진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그 뒤로 말머리를 다시 돌린 고구려 기병대들이 쫓고 있었다.

  방패를 내던진 밀우는 문득 유유의 행방이 궁금했다. 이마에 동여맨 빨간 두건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전긍긍했다.

  “막아라!”

  일순간 화살소리가 자욱하며 성벽에서 외침들이 들리자 밀우는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유유가 홀로 말을 타고 반쯤 열려진 성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화살들이 찰랑거리는 유유의 꽁지 머리칼과 갑옷을 무수히 스쳐 지나갔다. 성문이 2척 가까이 닫혔다. 유유는 쏟아지는 화살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계속 말을 달려나갔다. 말머리가 닫혀가는 성문 앞까지 당도했을 땐 1척 가까이 닫혔다. 유유는 말의 배를 세게 차며 계속 달리게 하고는 몸을 일으켜 안장을 발로 딛고 비스듬히 섰다. 성문이 완전히 닫히려고 할 때 말의 머리가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윽고 말의 몸뚱아리가 닫히려는 성문에 끼이며 말이 크르르 신음에 찬 괴음을 질렀다. 유유는 벌어진 틈을 향해 안장을 발로 딛고 도약하여 성문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럴 수가!”

  성내의 병사들이 매우 놀라며 일부는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유유는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나비처럼 칼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칼날이 주위를 스칠 때마다 부딪히는 병사들의 몸을 아무렇게 베었다. 창이 내질러오면 허리를 꺾어 피했고, 칼이 내려쳐 오면 다시 몸을 도약하여 공중에서 칼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얼굴이며 팔과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부상자들이 속출하였다. 유유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성문 좌우의 밧줄을 잘라내었다. 장력이 약해서 성문의 틈이 헐거워지자 고통에 몸무림치던 말이 몸을 들썩이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성문의 틈이 더 벌어졌다.

  그 사이로 밀우와 검이가 말의 안장을 딛고 쏜살같이 들어왔다. 밀우의 얼굴을 기억한 병사들이 몇 있었는지 어 어 하며 엉거주춤하였다. 밀우는 고민하지 않고 앞에 있는 그 누구든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고 올려베고 그어버렸다. 그 힘이 세고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부딪히는 창을 자르고 가죽갑주를 찢어내고 살을 베었다. 검이는 밀우의 등 뒤에 서 있다가 달려오는 병사가 있으면 그의 팔을 물거나 얼굴이나 목을 발톱으로 그어버리며 겁에 질리게 하였다. 칼에 베어지는 병사들의 피가 튀며 밀우의 얼굴이며 상체를 뒤엎었다. 피를 뒤집어쓴 밀우는 마치 빨간 악귀처럼 보였다. 한쪽에서는 밀우가 한쪽에서는 유유가 칼춤을 추며 병사들을 도륙하니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군사가 성 밖에 있었기에 성내가 조용해지는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도망치자 조용해졌다. 힘이 빠져 칼끝을 땅에 대고 숨을 몰아쉬던 밀우와 유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밀우가 성문의 오른짝을 밀자 유듀도 왼짝을 밀었다. 성문이 열렸다.

  성문이 열리자 수백의 고구려의 기병들이 두두두두 들이쳤다. 얼굴까지 내뿜어지는 흙먼지에 밀우와 유유는 저절로 기침을 하며 팔을 내저었다. 먼지가 가시자 그들의 앞에 득래가 말을 탄 채 섰다.

  “그대들은 정녕 호걸이구만. 성문이 열릴 줄은 몰랐다.”

  득래는 갈 길을 가려다가 다시 멈추고 돌아섰다.

  “잠시 쉬다가 본진이 들어오면 따라오게. 무리하지 말고.”

  득래가 다시 갈 길을 가자 그 말에 힘이 빠진 건지 유유가 벽에 등을 기대며 풀썩 주저앉았다. 머리나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밀우는 황급하게 달려가 유유를 살폈다. 상처는 크지 않았다. 화살이나 칼들이 수없이 스치고 지나가 살결에서 흘리는 피로 보였다. 밀우는 땀과 피로 젖어 갑갑해 보이는 그녀의 두건을 벗겨 피를 닦아냈다. 어지러워 보이는 유유가 고개를 까닥이며 휘청이자 밀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아 품어 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유유는 자신의 머리가 밀우의 가슴에 닿자 잠에 빠지듯 눈을 감았다. 어느새 다가온 검이는 밀우의 어깨에 올라타 밀우와 유유의 피묻은 얼굴을 번갈아 가며 핥았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밀우는 그도 잠이 들었다.

 

  “쉬라고 했지비, 자라고는 안했는데.”

  밀우는 자신의 뺨을 두드리는 인기척에 눈이 떠졌다. 웃음기를 머금은 득래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해가 중천에 떠 있었건만 지금은 해가 서쪽으로 져 있는 것 같았다. 밀우는 화들짝 놀라며 아직 품에 있는 유유를 살폈다.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흔들자 유유는 하아- 하고 아픈 숨을 내쉬며 가늘게 눈을 떴다.

  “우리는 돌아갈 것이매. 몸이 힘들면 가마에 타도 좋다. 우선 상처를 치료부터 해야겠으라.”

  득래의 말에 밀우는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이제 끝난 겁네까?”

  “그래. 우린 국내성으로 간다.”

  밀우의 시야에 빨간 물방울이 잡혔다. 득래가 손으로 이마를 스윽 닦아내니 물이 사라졌다. 말에서 떨어질 때 머리를 찧은 것이 분명했다. 주위의 군사들이 밀우와 유유의 몸을 일으키며 부축했다. 밀우는 힘없이 몸을 맡겼지만, 밀우의 몸에서 떨어진 유유는 번뜩 정신이 차려졌는지 부축하는 군사들의 손을 뿌리쳤다.

  “지는, 저는 괜찮습니더. 대장님을 살펴주시지요.”

  누가 보기에도 다친 것이 확실해 보였지만 유유는 도움을 끝끝내 확고히 거부하며 무리에서 떨어졌다. 득래는 좋을 대로 하라며 유유에게 말을 내주었다. 유유는 주춤거리더니 밀우의 손에서 빨간 두건을 뺏어 들 듯 가져왔다. 밀우는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유유가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말에 타고 밀우가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 옮겨지지 검이는 두리번거리더니 유유의 안장에 올라탔다.

  고구려군은 양평성을 나와 긴 행렬을 이루며 국내성으로 길을 잡고 돌아갔다. 가장 맨 앞과 뒤로는 말을 탄 기수들이 호위했고, 그 가운데에 보병들이 위치했다. 보병들의 뒤로는 부상자들과 그를 돌보는 군사들이 탄 가마들, 시신을 나르는 수레, 군량과 목재를 채운 달구지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군이 양평에서 수탈한 금은보화들과 손을 포박하여 걷게 하는 족히 3백여명은 될듯한 젊은 부녀자들이었다.

  이마의 부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 금세 가마에서 나와 말을 타게 된 밀우는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질 듯 크게 놀라 득래에게 따지려 들었지만 과정과 사정을 알게된 유유가 극구 말려 말하지 못했다. 말리는 유유의 뺨과 목, 귓볼에 눈에 띄는 자상의 흉터들이 있었다. 밀우는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 괜찮느냐 물었으나 유유는 신경 쓸만한 것이 아니라며 웃어넘기었다.

  밀우는 국내성으로 가는 길 와중에 연신 뒤돌아보며 포로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숙영을 할 때마다 전리품마냥 부녀자들을 막사 몇 군데에 몰아넣고 차례로 들어가 겁탈하는 병사들을 볼 때마다 밀우는 괴로움을 참지 못했다.

  “이러려고 나라를 위해 나선 것이 아니다.”

  “전 알고 있습니더.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꺼.”

  유유는 매일같이 밀우를 위로하였지만, 밀우는 마음의 병이 커지듯 눈밑이 어두워졌다. 밀우는 어서 진군이 끝나기를 손꼽아 날을 세며 기다렸다. 하루는 밀우가 득래에게 고해 무리에서 이탈하여 고향길로 방향을 바꿔 갈 길을 가고 싶다고 하였으나, 국내성에서 공을 논해야 하니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을 들을 뿐이었다.

  보름에 걸쳐 진군하자 익숙한 국내성이 시야에 잡혔다. 밀우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무어라 하든 두 번 다시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 밀우가 유유에게 다짐 비슷한 하소연을 할 때마다 그녀는 알겠노라며 그러려라며 북돋았다.

  “여행의 막바지가 오는 것 같다. 어떻게 하고 싶으라?”

  밀우가 진지하게 묻자 유유도 진지하게 답하였다.

  “이제 익숙해져 가니 그냥 밀우님의 호위무사로 계속 있을까 합니더. 괜찮습니꺼?”

  “당연히 괜찮다. 계속 있어 주라. 근데 고향이 생각나지는 않나?”

  “사람이 곧 고향이죠. 마지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대상이 있는 곳. 땅은 그냥 배경일 뿐입니더.”

  유유가 희미하게 웃으니, 밀우도 보름 만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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