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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밀우유유전 (고구려 동천왕기)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위나라의 땅을 침략했다.
위나라에 호의적이던 고구려가 배신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참여한 장수 중 밀우는 고구려의 무사였고, 유유는 신라의 낭객이었다.
밀우와 유유는 멸망의 끝에 선 고구려를 구하며 전쟁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

 
4. 달빛 (신라사람 유유)
작성일 : 22-02-28 20:22     조회 : 194     추천 : 1     분량 : 1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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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눈을 떴다. 서면 닿을 것만 같은 돌무더기 천장이 먼저 눈에 보였다. 목은 으득하니 뻐근하고 온몸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뒤척이며 일어나다 여자는 기겁을 하며 벌떡 앉았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니 몸에 덮혀있던 옷가지가 스륵 내려가며 알몸의 몸이 보였다.

  “아아!”

  여자는 비명을 지르려다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옷가지를 다시 들쳐보아 자신의 몸을 보니 다행히 하의는 입고 있었으나, 그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기억을 돌아보려 한참을 애쓰며 눈을 굴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살수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몸을 못이겨 기절하였고, 중간중간 기억나는 검은 수염이 덥수룩히 있지만 분명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유다. 신라 경산 출신으로서 본래 출생은 가야국이다. 한층 더 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실상 고아에 가깝다. 신라와 가야가 국경을 두고 전쟁을 할 당시에 그 인방에서 갓난아기였던 그녀와 고모가 포로로 잡혀 왔는데, 가야가 이를 모른 척하고 군을 물리고 대치하였는데, 본국으로 귀송 중 사고로 인해 그녀의 고모가 죽는 바람에 그녀는 그녀의 출신을 영영 알지 못하고 당시 전쟁을 지휘했던 이벌찬의 가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또한 그녀가 나이가 차고 그녀의 성실함과 빠른 몸놀림, 예쁘장한 외모로 인해 그녀를 총애하던 이벌찬이 알려준 것이었기에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그녀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고, 다른 이야기는 더더욱이 들을 곳도 없었다.

  그녀는 장성하여 스무살이 되는 해에 신라 왕실의 비밀 사병집단인 풍월랑의 낭객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풍월랑은 왕실의 소속이므로 아무나 들일 수 없기에 반드시 고위관료나 왕족의 추천으로만 입단할 수 있었는데, 이벌찬의 추천으로 그녀는 들어갈 수 있었다. 낭객은 대개 어린 소년이나 젊은 청년을 성별에 관계없이 뽑아 능력을 기르는 데에 있어 많은 공이 들어갔기에 그 목숨이 매우 귀하고, 신분을 비밀에 부쳤다. 이는 더 나아가 신분을 쉽사리 알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대부분 잠행이나 암살집단으로 이용되고는 하였다. 그 중에서 유유는 몸이 왜소하고 무예가 날렵하며 뛰어나 암살지령에 자주 투입되곤 하였다. 또한 그간의 공적과 충심을 인정받아 십척검이라고 일러지는 비급을 교육받고, 서른이 되는 해에 짝을 붙여주어 각간에 준하는 고위관료로 임명하여 국내외에서 큰일을 할 수 있게 하겠노라며 약조를 받았다.

  이때 십척검은 매우 독특한 무예로서 사실상 암살요령에 가까웠는데, 이를 우연히 몰래 본 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십척에 다르는 거리를 일초가 안걸리는 단시간에 단 일걸음에 내딛어 대상인물의 턱을 단검으로 꿰뚫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본 이가 매우 적고, 보았다 한들 이 세상에 이미 없을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믿을 수 없는 소문이기도 하였다.

  유유가 스물 두 살이 되던 해에 이미 공적은 십수개에 달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지휘관을 제외하고 서로 간의 직위가 따로 없는 풍월랑 내에서도 꽤나 명망이 있는 낭객으로 자리 잡았다.

  유유는 여느 때와 같이 풍월랑의 병연장에서 연무를 하였다. 이벌찬이 따로 그녀를 불러내 이르기를 신라왕 김내해를 암살하되, 반드시 송곳으로 배를 찌르고, 자신이 건네는 주머니만 김내해에게 던지고 오라고 하였다.

  - 이유는 묻지 않겠으나, 왜 그래야 합니꺼?

  - 네가 일일이 알 것은 없으라. 죽이믄 안돼. 정당하게 왕이 바뀔 것이야. 니는 시키는 대로만 해삐라. 다 내가 챙겨줄끼야.

  - 알갔습니다. 어르신.

  유유는 당연히 묻지 않았다. 지휘관이나 스승이나 성골들이나 그 누가 무엇을 시키든 낭객은 알아서도 안 됐고 알 필요가 없었다. 유유는 그날 밤으로 기해 내해왕이 기거하는 궁궐로 들어갔다. 당당하게 명패를 차고 신분을 드러내며 들어갔기에 그녀의 신분을 아는 관병들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해왕이 있는 침궁 근처까지 다다르자 조용히 어두운 벽에 숨어 옷을 모두 벗었다. 옷을 벗으니 그 안에는 검은 옷이 따로 있었고, 검은 두건을 머리부터 턱 끝까지 감싸자 구멍이 뚫린 곳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제외하고 그녀는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본래 걸치고 있던 옷은 둘둘 말아 주머니에 있던 검은 천으로 감싸 등에 끈으로 매달아 봇짐으로 만들었다.

  유유는 새벽이 달이 되도록 긴 시간을 기다렸다. 어둠이 조용해지고 인기척이 모두 한가해지자 그녀는 시종들의 눈을 피해 살그머니 몰래 궁으로 들어갔다. 왕의 침소 앞에 다다르자 여시종 한 명이 졸린 눈을 하며 고개를 흔들며 잠을 깨고 있었다. 유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옆으로 다가가 시종의 뒷목을 매우 세게 쳤다. 팍 소리가 나며 시종이 앞으로 쓰러지자 유유는 그녀의 어깨를 받쳐 들고는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이윽고 드디어 침소로 들어서자 내해왕이 새근대며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유유는 단숨에 문에서부터 발을 내딛어 한걸음 만에 내해왕의 앞까지 뛰어올랐다.

  쿡! 유유가 공중에서 내해왕의 옆으로 착지할 때에 이벌찬이 시킨 대로 손에 든 긴 송곳을 내해왕의 복부 즈음으로 추정되는 이불에 내리찍었다. 내해왕은 아닌 밤중에 자다 고통에 놀라 커억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잡고 눈알이 튀어나와라 동그랗게 뜨며 눈을 떴다.

  - 누, 누구냐.

  내해왕이 고통과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입을 뗐지만, 유유는 송곳을 쑥 빼고는 조용히 이벌찬이 건넨 주머니만 내해왕에게 던졌다. 그리고 유유는 뒷걸음질로 소리 나지 않게 문까지 빠져나온 다음 조용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내해왕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며 이불을 재끼고 옷을 걷어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복부가 타들어갈 듯 아팠지만 자신의 배는 빨간 점에서 피만 조금씩 흘러나올 뿐이었다. 내장에 구멍이 뚫렸을 것만도 같지만 배를 열어 확인해 볼 길이 없으니 내해왕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내해왕은 허둥대며 유유가 건넨 주머니를 열었다. 단지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이튿날 유유는 지난밤의 노고에 해가 중천에 뜰 때쯤이야 느즈막히 일어났다. 점심때가 될 때까지 유유는 머리만 대충 넘긴 채 방에서 뒹굴었다. 지겨움과 배고픔에 못이겨 창틀을 벌컥 열자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나다가 까악까악대는 까마귀 소리에 귀가 시끄러워 인상을 찌푸렸다.

  이틀이 지나도록 일주일이 지나도록 유유는 이벌찬에게서 소식이 없어 답답해하였다. 되려 다른 소식을 들은 것은 동료 낭객에서였다. 왕 김내해가 사위 석조분에게 세자를 준다는 것이었다. 유유는 그제서야 상황이 이해가 가였다. 나이가 어린 내해의 아들들 대신 장성하고 야욕한 사위가 왕의 자리를 탐내어 머리를 굴린 것이리라. 아마도 역모의 불명을 쓰기 싫어 내해왕을 평소 겁박하다가 풍월랑을 이용하여 최후통첩과 경고를 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유유는 권모술수가 가득하고 결벽의 성격이 있는 석조분이 자신이 이용한 도구를 대개 없앤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날 밤 동료 낭객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다가 자신의 목을 향해 칼을 찌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유유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칼에 베어 피를 흘리는 어깨의 고통을 참아내고 동료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눕혔다. 왜 그랬냐며 달려들어 따지는 와중에도 그가 차고 있던 단검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찌르니 분에 못이긴 유유는 동료의 얼굴을 주먹으로 수십번을 내려쳐 얼굴뼈를 부숴버렸다.

  유유는 하얀 두루마기를 대충 걸쳐내고는 칼을 들고 그대로 자신의 집을 뛰쳐나가 이벌찬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벌찬의 집문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인기척이 느껴져 칼을 뽑아 어둠 속을 베어내니 또 다른 동료 낭객이 그어진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벌찬이 이 오밤중에 무슨 일이냐며 뛰쳐나와 유유를 혼내다가 그녀의 몰골과 자초지종을 듣고는 아연실색하였다.

  - 조분이 이 자식, 내 범을 키워꾸마. 내 그 승질머리 알지만서도.

  이벌찬은 멍하니 서 있는 유유를 내버려 두고서는 좌로 우로 발걸음을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물어뜯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하였다.

  - 내 너를 아껴 고아인 네가 신라에서 부귀영화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풍월랑에 들인 것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네가 그랬듯 그놈들은 믿을 수 없다. 권력과 살인에 미친 살수들뿐이야. 내 그리 일렀건만 석조분이가 평소처럼 도구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면 넌 여기서 살 수 없어. 산다 하더라도 평생 도망치며 산이며 들이며 있겠지. 그래, 부여로 가라. 아니 부여든 고구려든 중국이든 어디든 상관없다. 조분 이 자식의 손에만 안 닿으면 돼. 그리고 혹여 복수할 생각 말고! 그냥 떠나라.

  이벌찬은 유유를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꺼이꺼이 울었다. 유유도 이벌찬을 안으며 눈물을 흘리고는 품에서 나와 이벌찬에게 납작 엎드려 절을 하였다.

  - 고맙습니다. 영감. 제 은혜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언제고 꼭 다시 뵐 수 있도록 천지신명께 빌어주세요.

  - 그래, 어서 가라.

  유유는 도망치듯 이벌찬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수십 명의 낭객들이 풍월랑에서 빠져나왔다.

 

  유유는 자신이 잘 때 덮여 있던 두루마기를 걸쳐서 입어보았다. 널찍한 것이 사내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청년의 것일까. 누워있던 자리 옆의 모닥불은 거멓게 숯으로 변해 연기를 살살살 내뿜으며 천장의 바위틈으로 새어나갔다. 숯은 검되 발그스름한 불빛을 머금어 반짝거리며 알싸한 향을 냈다. 그 옆에 커다란 나뭇잎 위로 밀떡으로 보이는 동그란 것들이 보였다. 유유가 손으로 꾹꾹 찔러보니 놓아둔 지 시간이 흘러 겉이 가죽 마냥 탱글했지만, 먹을 수는 있어보였다. 그녀는 신라땅에서 떠나온 뒤로 무엇을 먹은 기억이 없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되려 감각 없이 아플 지경이었다. 유유는 떡만 한참을 치켜보며 옷가지를 덜덜 떨며 쥐어잡으며 가만히 있었다. 주위를 연신 둘러보고 밖으로 보이는 바위틈을 엿보았다가 다시 가만히 있다가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유유는 못참겠다는 듯 밀떡을 재빠르게 쥐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벌꿀을 묻힌 것 마냥 달게만 느껴졌다. 유유가 오물오물 씹고 있을 때에 인기척이 들리며 사내 하나가 바위틈 사이로 들어왔다. 유유는 허겁지겁 놀라며 먹던 떡을 모닥불로 던져버렸다.

  “아... 먹어도 되는디.”

  밀우는 멋쩍게 웃으며 앉았다. 그 옆으로 검이가 호다닥 쫓아오며 앉은 밀우의 무릎에 이마를 콩 콩 부비고는 그 옆에 함께 웅크려 앉았다. 유유는 사내를 경계했다.

  “누구지?”

  “당신이 칼로 찌른 사람.”

  밀우는 자신의 볼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의 볼은 벌겋게 부어오른 선이 뺨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유유는 그 선을 유심히 보고있자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숲을 헤쳐 도망치던 기억과 잠결에 칼을 내질렀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밀우가 답이 없는 유유를 향해 씨익 웃었지만 유유는 여전히 그 후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밀우는 침묵을 견디지 못했는지 자신의 집이 이 곳 근방에 있으며, 고구려의 무사 출신이라느니, 이 검은 삵의 이름은 검이라고 한다든지 유유가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서스럼없이 주절대며 모닥불을 나뭇가지로 뒤적였다.

  “사연이 있는 것 같네만? 그리고 그 떡 마저 먹으라요. 내 어제 가져온거끼네.”

  유유는 조용히 떡을 집어 들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라꼬. 여긴 어디고.”

  “아, 그라보니 소개를 안했으라. 낸 밀우라 하요. 여 하믈촌 출신.

  ”그짝이 날 구한기가? 이 옷이며 상처도 당신이 한기고?“

  ”그건 미안하게 됐수다. 내도 참 충동적으로.“

  ”...고마워예.“

  유유가 마저 잎에 있던 떡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뜻밖의 답을 하니 밀우는 웃었다.

  ”기운은 좀 차맀나본데, 갈 데는 있습데까?“

  밀우의 물음에 유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차차 야기합세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집으로 갑시다. 아바지께 설명해야지. 내 나가 있을테니 마저 추슬러 입고 나오라요. 멀지 않으매“

  밀우는 바위틈을 집고 나갔다. 유유가 다리에 덮여 있던 두루마기바지를 마저 주섬주섬 입었고, 검이는 말똥말똥하며 동그란 눈으로 유유를 지켜보았다. 유유가 약간 버거워 하듯 비틀거리며 바위사이를 나오자 밀우는 유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끈이 헐겁게 거의 다 풀려 약간 산발이 된 채 사내의 두루마기를 입고 가슴 둔덕이 봉긋하게 솟아있으니 그 모양새가 매우 괴이했다.

  ”크흠,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매.“

  밀우의 말에 유유도 의식했는지 팔짱을 꼈다가 계속 그러고 있을 순 없다 여겼는지 허리춤의 끈을 헐렁하게 풀었다. 두루마기상의가 너풀거리니 몸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밀우가 먼저 앞장서 걸으며 숲을 나와 하믈촌으로 갔다. 유유도 뒤따랐다.

  ”뭐에 쫓기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시체 두 구도 끌어다 강가로 던져버렸으레. 뒤쫓기지는 않을 겁네다. 온다 한들 동부의 관청이 있는 하믈촌까지 들어올 멍청이들은 아닐 것 같고.“

  유유는 밀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믈촌의 길게 늘여진 가옥들 사이를 지나 저잣거리로 들어서니 시끄러운 아낙네 소리, 뛰노는 아이들 소리, 구수한 향이 귀와 코를 간지럽히었다. 유유가 신라에서 보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둘이 나란히 다른 가옥들보다 조금 더 벽이 길고 공간이 넓어보이는 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로 목재로 이루어진 신라의 가옥보다 주로 돌담과 돌벽으로 이루어진 형태가 유유의 눈에 신기해 보였다. 집에 들어서니 밀우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반기었다. 밀우는 지난밤 가족들과 저녁을 지내며 뺨의 상처를 숨길 수 없었기에, 사실을 실토하여 그의 가족들도 이를 알고 있는 듯 하였다. 아버지 밀설이 오기 전에 몸을 씻어 단장하고 굶주려 보이니 끼니를 챙겨 먹으라며 밀우의 어머니며 여동생들이 성대하게 환대하고 안내하였다. 유유는 별 말없이 떠나는 밀우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가족들의 등쌀에 밀려 목욕을 하고 따로이 상을 차려 먹으며 하루를 보내었다.

  밀설이 관청에서 하직하여 집으로 돌아오자 사랑방에 조용히 누워 뜬 눈으로 휴식을 취하던 밀우의 여동생들이 그녀를 부르었다. 시종들이 자리를 내고 저녁상을 차려 앉는데 의자와 탁자에서 식사를 하던 신라와 달리 낮은 탁자에서 좌식을 앉는 식탁을 보자니 유유는 어떻게 앉아야 할지 어영부영하다가 반나절만에 마주친 밀우가 양 허벅지를 벌려 바르게 앉는 것을 보고 엉거주춤 따라 하며 앉았다. 밀우의 가족들이 하나둘 들어와 앉았다.

  ”그래, 얘기는 얼추 들었는데, 자네 얘기 좀 해보라.“

  밀설이 유유에게 물었다.

  ”지는 신라 풍월랑의 낭객이고, 사정이 있어 나라에서 도망쳤습니더.“

  유유는 밀우의 가족들이 보이는 호의에 무척 감복하여 구태여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되게 언행을 할수록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기도 하였다.

  ”이름이 무어라지?“

  ”유유입니더.“

  ”성은 있고?“

  ”성은 없습니다. 이벌찬 이용 영감이 저를 거두실 때에 고이 보전하겠다는 한문의 뜻으로 유유라 이름 지었습니다. 본래 가야국 출신이라 들었지만, 그 이외에는 알지 못하고 부모님도 뵌 적이 없어서리.“

  유유가 자신의 이야기를 서스럼 없이 풀어놓자 가족들은 입에 들은 것만 우물거리며 더 이상 젓가락질을 하지 않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다. 유유는 그 이외에도 일의 원흉인 신라세자 석조분의 이야기만 빼놓아 그저 한 대상이라고만 칭하되, 왜 되려 풍월랑에서 배신과 같은 지목을 받고 쫓기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람 이제 어떻게 하고 싶다지?“

  유유는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만 치다보이 여적 그런 생각은 자세히 하지 못했습니더. 그저 아직 살아내고 있습니더.“

  밀우는 유유를 가여이 여겼다.

  ”아바지, 애차피 어투로 보아 외국 출신인 것을 숨기지 못할 것인데, 행동은 자유롭되 신분만 시종으로 거두어두심이 어떠십네까?“

  밀설은 밀우의 말을 듣고 흐음- 하며 관심을 내보였다. 밀우는 잠시 유유의 행색을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라고 유유가 쫓기는 몸이라 하면 일말의 만약을 생각하여, 처음 보았을 때에도 남장을 하고 있었으니, 아직 수염이 안 난 어린 남자로 행색을 꾸미도...“

  밀우가 유유의 허락을 받듯 유유를 보며 말끝을 흐리자 유유는 잠시 생각하더니 수긍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세세하게 신경써주어서 고맙십니더.“

  ”그란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던가?“

  밀설이 돌연 물었다.

  ”올해 스물둘입니더. 어르신.“

  ”그냥 아바지라 부르게.“

  ”네, 아버님.“

  밀설이 풍월랑에서는 생활이 어떠하였느냐고 묻자, 유유는 자신이 주로 하던 암살 이야기는 빼놓은 채, 왕실의 사병으로서 개인 호위나 사사로운 진압이나 작은 싸움들을 왕실의 명으로 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어찌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기도 하였다. 유유는 거짓 없이 이야기하리라 하였으면서도 괜시리 자신의 치부라고 생각되어지는 점들을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것이 스스로도 의아하였다. 이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걸까 라는 자문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는 충분히 전달되었고, 이제와 실은 그렇지 않다며 무르거나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밀우 네가 데리고 다니도록 하그라. 곧 겨울에 안평으로 떠난다고 하지 않았던? 세상 구경도 하고 이래저래 경험도 쌓고, 오며가며 마주치는 무사들과 친분도 쌓고, 뭐 나쁠 것 없겠지비. 하지만 밀풍도 그랬듯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터이니, 돌아오는 대로 관아 일을 시작하라우.“

  ”네, 그라믄요. 아바지.“

  밀우는 웃었다.

  ”그리고 유유 자네는 언제 떠나든 구태여 별말은 하지 않을 터이니, 우선은 밀우의 시종으로 다니는 것이 좋겠구나. 그것이 불편하다면 몸이 낫는 대로 떠나도 괜찮다. 하지만 별 뜻이 없다면 이참에 밀우가 안평으로 떠날 적에 함께 가도 괜찮겠지. 안평에서는 부여도 중국도 가까우니까.“

  유유는 그녀를 배려하는 밀설의 이야기를 말없이 한참을 듣고 있다가 이내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탁자를 적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가족들은 무척 당황했지만, 어이하여 우는지를 이해할 것만도 같아 내버려 두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

  ”안 갚아도 된다우. 인연이란게 그런 것이지. 적국의 사람으로 만났다면 관례대로 대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 집에 들어왔으니, 내 사람이 아니더냐.“

  밀우의 여동생 하나가 벌떡 일어나 유유의 옆으로 가더니 꼬옥 안아주었다. 밀설은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니는 정말 괜찮아질 것이라. 꽃이 지면 열매가 맺는 법이매. 살아보고 싶다면 열심히 걸어 가보고, 하고 싶은 게 없다면 걸으면서 찾아 보기라.“

  ”네, 아버님. 그 말씀 잊지않겠습니다. 밀화도 고마워.“

  ”아니야, 언니.“

  어느새 코에서도 물이 줄줄 흘러나왔는지, 눈물콧물로 범벅된 유유의 얼굴이 웃기기 그지없었다.

 

  유유는 가족의 보필로 약방을 오가며 그간의 상처를 치료하였다. 자상의 흔적이 지워질리는 만무하였지만, 신체의 큰 손상 없이 전과 같이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밀우와 유유는 함께 지내며 무예를 수련하고 책을 읽을 읽었다. 촌의 이목을 보아 신분상으로 유유가 밀우의 시종으로 속하기는 하나 밀우는 유유를 결코 부리는 법이 없었다. 되려 그녀를 마치 동료처럼 대하는 그가 유유는 그점이 무척 고맙기도 하면서도 부담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유유는 항상 머리를 정수리부터 묶고 가슴에는 붕대를 칭칭 감아 사내의 옷을 입었는데, 겉보기에는 예쁘장한 소년처럼 보여 자세히 보면 갸우뚱할 수는 있지만, 이목이 있는 곳에서 말수를 매우 아끼고 목소리를 굵게 내는 흉내를 수십일 넘게 반복하니, 유유 스스로도 마치 그것이 본연의 목소리인 것처럼 익숙해져 젊은 소년이라고 속이기에 무리가 없어 보이기도 하였다.

  둘은 종종 무예를 대련하기도 하였는데, 유유가 십척검과 같은 암살기법은 모두 제외한 채 밀우를 상대하니, 자주 힘에 부쳐 밀리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유유의 바람같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공중을 제비처럼 돌 때는 밀우도 그를 신기해하며 배우고 싶어 하였는데, 이는 여자의 몸으로서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밀우가 그를 똑같이 흉내 내보려 해도 분명한 신체의 차이와 한계가 존재하였다. 한편 밀우가 즐겨 찾던 대숲은 더 이상 가지 않기도 하였다. 만약을 생각하여 불필요한 접점을 없애는 게 상책이라 여긴 탓이었다.

  유유는 밀우보다 2살 가량 연배가 높았지만, 표면상의 신분으로 유유가 그를 시중하는 모양새였기에 밀우님- 이라 칭하며 말을 높이고, 밀우는 그녀를 하대했지만, 그것이 딱히 불편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문제는 유유가 저잣거리를 지날 적마다 그녀를 흠모하는 스물도 안되는 어린 소녀들이 점점 하나둘씩 늘어가 그것이 매우 골치 아팠다. 흠모하는 자제를 둔 관청의 관료나 촌락의 호족이 밀설에게 찾아와 혼인약조를 요구하면 밀설은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회피하며 난처해하였다.

  밀우는 겨울철이 되기만을 기다려왔었다. 또한 햇빛에 비춘 눈길이 따듯하고 눈길이 쌓여 강이 얼면 쉽게 건널 수 있다 생각하여 눈이 언제 오나 오매불망 기다렸다.

  어느날 밤 창틀의 한지가 차박차박 젖는 듯 하여 밀우가 창문을 열어보니 과연 눈이 함박함박 예고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검은 바탕지에 하얀 꽃송이가 날리는 듯 하여 그 모습이 매우 예쁘다고 여긴 밀우는 한참을 창밖을 쳐다보다가 문을 열고 밖을 나섰다.

  ”스으읍- 후우우---“

  밀우는 돌담에 번쩍하고 딛고 올라가 코로 떨어지는 눈을 빨아들이며 향취를 맡았다. 눈꽃이 콧털에 닿아 팟 하고 터지며 물방울이 코를 간지럽히니 재채기가 나왔다.

  ”에취!“

  밀우는 올해 들어 처음 눈에 담는 첫 눈에 괜한 설레임이 밀려왔다. 밀우는 돌담에서 내려와 집 가옥의 벽을 딛고 타서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에 올라 주저앉아 밤하늘과 별과 눈을 보니 처마 밑에서 유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밀우님, 거기서 뭐하십니꼬? 앗, 눈이 내리네.“

  ”유유도 올라오라.“

  내려다보는 밀우를 보고 유유는 살며시 웃고는 자신도 가옥의 벽을 딛고 타서 지붕으로 올라갔다. 유유는 밀우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내일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인사하고 떠나려고. 유유도 올거야?“

  유유는 밀우를 지긋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릴기라 생각했어. 들어가면 가져가고 싶은 짐을 좀 챙겨두라. 어찌면 마지막 밤이 될 테니까이, 좋은 꿈 꾸고.“

  밀우가 유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이자 유유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며 귀가 빨개지곤 고개를 돌려 다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밀우는 토닥이던 손을 내려놓고 말했다.

  ”유유는 어디 가고 싶으라? 이제 좀 정했나?“

  유유는 여전히 다른 하늘을 보며 답했다.

  ”전... 일단 당분간 밀우님 따라 안평을 가볼까 합니더. 머리와 가슴이 굳었는지 아직 아무런 결정도 하질 못하네요. 이대로 그냥 밀우님 시종으로 살까봐요.“

  밀우는 바닥을 짚고 있는 유유의 손을 덮썩 손으로 덮었다.

  ”진짜 시종이 될거면 이대로는 안돼. 일을 안하잖아. 무술만 하고 책읽는 시종이 어딨어.“

  유유는 무척 당황해하였다.

  ”그,그럼 호위무사로 해주세요.“

  ”오, 호위무사. 그것도 괜찮겠네. 그럼 안평까지 잘 부탁해. 나는 꼼짝도 안할테니.“

  밀우가 짖굿게 굴자 유유는 고개를 돌려 밀우를 쳐다보았다.

  ”네, 주공. 그러셔도 됩니더. 눈이 거세지는데 이제 그만 들어가소. 소리가 나서 나와본겁니더.“

  유유의 말대로 눈이 점점 거세져 머리칼이며 속눈썹이며 하얀 눈발이 덮이고 있었다. 밀우는 알았노라며 유유의 손을 잡고는 그녀를 일으켜 지붕을 폴짝 뛰어 내려왔다.

  이튿날 밀우와 유유는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마도 내후년 봄이 찾아올 때에 자신도 함께 찾아오지 않겠노라며 인사를 건네며 나갈 채비를 하였다. 말 두 필을 준비하고, 오랜 기간 가지고 다닐만한 말린 말고기육포를 한아름 담아 안장에 걸어두었다. 여벌의 옷가지는 보따리를 두어 등에 메고 칼은 허리춤을 만들어 허리에 찼다. 역시나 검이가 졸랑졸랑 따라오자 밀우는 역시 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있을 주머니를 따로 자신의 안장에 마련해두었다. 밀우의 여동생 밀화가 그간 정이 다소 들었는지 꼭 가고싶은 데가 없으면 그냥 돌아오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길을 떠나는 유유를 꼬옥 안았다. 밀화보다 키가 다소 큰 유유가 무릎을 꿇으며 자신도 밀화를 안아주었다.

  밀우와 유유는 눈이 그쳐 땅에 쌓인 눈길을 말을 타고 걸어갔다. 소복소복하니 들리는 눈꽃이 뭉개지는 소리가 듣기에 마음을 편케 하고, 밟히는 말의 발자욱이 한치의 오차없이 나란히 있어 그 모양이 매우 예뻤다. 밀우는 무엇이 그리 신이 난 건지, 소복하는 눈길에 기분이 좋은 건지 유유에게 장난을 쉴 새 없이 치기도 하였다.

  ”수염이 영 나질 않네. 붓으로 그려줄까.“

  ”그러지 마시지예.“

  밀우는 어느새 먹을 어디서 꺼내 들었는지 자신의 눈썹 사이를 검게 칠해 그 사이를 이었다.

  ”하지 마시라요.“

  밀우는 유유의 옆구리를 찌르는가 하면, 유유가 타고 있던 말의 엉덩이를 내리쳐 느닷없이 달리게 하기도 하였다.

  ”장난치지 마시라요. 죽고 싶으십니꺼.“

  밀우는 알았노라며 손사래를 쳤다. 유유는 피식 웃다가도 밀우와 눈이 마주치려 하면 웃음기를 가시고 먼 산의 풍광을 바라보았다. 높은 산이 많지 않고, 낮은 산이 평야를 둘러싸는 형태를 가진 신라의 경상땅에 비하면 우거진 높은 산을 끼고 숲을 도는 형세의 고구려땅은 무척 대조적이어서 풍경을 바라보고 사뭇 다른 향취를 맡는 것만으로도 유유의 마음에는 안정의 바람이 불었다. 몇 군데의 비슷한 촌락을 거쳐 밀우가 이르기를 평양지방이라는 곳에 이르자 경상땅과도 비슷한 평야와 고원이 드넓게 펼쳐졌다. 겨울의 눈을 머금고 하얀 백발의 머리칼을 날리는 밀밭이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밀우님이 지난해 여행하실 적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껏 하믈촌이나 제 이야기만 하시고. 생각해 보니 전 이 나라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군요.“

  유유는 평양의 객잔에서 소금을 치고 삶아내서 잘라낸 돼지고기들을 젓가락질하며 물었다.

  ”왜 안 물어보나 했지비.“

  밀우가 웃자 유유는 시선을 고기로 돌려 다시 젓가락질하였다.

  ”제가 묻지 않아도 혼자 이야기 잘 하시지 않습니RJ.“

  ”물어야 답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마음을 나누는 기지. 네 이야기부터 해보라.“

  ”전 말싸움을 하려 물은 것이 아입니더.“

  ”내도 너와 싸우기 싫어라.“

  ”지금 싸우고 계십니더.“

  밀우는 껄껄 웃고는 과거 떠나면서 마주친 말갈인들과 혈혈단신으로 싸워 도망친 이야기, 동굴에서 자다가 하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 안시성주의 요청으로 위나라의 요동성까지 원정하여 전쟁을 경험한 이야기 등을 말해주었다. 밀우가 다채로운 표정과 손짓으로 이야기를 펼치니 유유는 응 응 거리고 끄덕이며 턱을 괴고 경청하였다.

  ”전쟁이 무섭지는 않았습니꺼.“

  ”유유도 해보았다고 하지 않았나. 왠지 나보다 유유가 더 경험이 많지 않을까 싶은데.“

  밀우의 말에 유유는 아차 싶었다. 말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자신은 암살을 주로 행했을 뿐 사람이 수백 수천명씩 모여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년 씩까지 서로 대치한 채 싸움보다는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는 전쟁은 그를 원정 나가본 동료에게 이야기만 들어보았지 자신은 가본 적이 없었기에 말의 구멍을 메우려면 말을 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전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 작은 데에만 동원 되었어서 잘은 모릅니더.“

  ”그런가?“

  밀우는 별안간 골똘히 생각에 잠겨하는 듯 하였다.

  ”물로이 내가 살인을 안해본게 아냐. 유유를 구할 때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거리낌 없이 칼을 베기도 했고, 말갈인들에게서 도망칠 때나, 요동성에서 전쟁을 할 때에도 세 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열명은 넘게 베었을테고, 그들이 살았든 죽었든 나도 알 수 없으라.“

  ”그래서 무서벗나예? 그럴 때마다?“

  ”아니.“

  밀우가 고개 숙여 젓가락질하는 유유의 한 올 가닥 빠진 머리칼을 손에 집어 귀에 꽂아주니 유유는 몸을 들썩이며 움찔했다.

  ”오히려 신이 났매. 광기에 휩싸이는 게 두려워 정신을 차려보려 하면 어느덧 나도 미쳐있는 것 같더라고. 그게 전쟁이었던 것 같으라. 그래서 한가지 결심한 게 있지비.“

  ”그것이 뭐라요.“

  ”이왕 개가 되어 물어뜯을 기면.“

  ”그칼 꺼면?“

  ”내가 지켜야 할 게 있을 때 고민 없이 물어뜯자.“

  ”이상하군여.“

  유유는 웃었다.

  ”지금은 어떤디? 언제고 신라로 돌아가서 널 죽이라고 한 자들을 베고 싶니? 아니면 어디 가고 싶은데가 있니?“

  ”이 정도면 충분합니더. 원흉이 뻔히 누구인지도 알고, 실제로 몸의 상처 몇 개 말고는 크게 당한 것도 없으니, 복수니 뭐니 할 꺼리도 안됩니더. 단지 이벌찬 영감이 조금 신경쓰일 뿐이지예.“

  ”상처는 지금 어떠련지 모르겠네. 니 보여줄래?“

  ”짓궃군요.“

  밀우는 어흠 하며 딴청을 피웠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고구려의 수도가 나올 거야. 물론 왕은 당연히 볼 수 없고, 단지 지나가다 쉬기만 할 거지만 그래도 볼 만 할끼야.“

  평양에서 졸본의 국내성은 그리 멀지는 않았다. 선대왕 유리성왕 때 졸본성에서 천도하였었는데, 평야를 감싸는 환도성을 천연의 방벽으로 두고 평지에 드넓게 세운 곳이었기에 그 규모가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밀우와 유유는 동부의 하믈촌에서부터 중부의 평양을 거쳐 서부의 안평으로 갔다. 하나의 지방부를 건널 때마다 시일이 대략 한달 즈음 걸렸다. 이는 여로의 목적이 크게 급하지 않았기에 말을 뛰지 않고 천천히 유유자적하게 걸은 탓이기도 하였다. 종종 객잔과 같은 숙박에서 방이 부족하여 한 방에서 잠자리를 청할 경우 함께 이부자리에서 잠들기도 하였는데, 밀우와 유유 모두 크게 개의치 않으며 편하게 잠을 이루었기에 애로사항이 다행히 다소 없는 편이었다. 문제는 몸을 씻기 위하여 목욕을 할 때에 객잔의 욕실에서 바가지를 쓰든 강가나 호수에서 몸을 담구든 유유가 그 어떤 이도 없이 항상 혼자 하기를 고집하였기에, 남장을 하고 있는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는 밀우는 이해하였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타인의 의아함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국내성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밀우와 유유는 국내성을 끼고 있는 산맥의 산길을 돌았다. 구태여 산을 오른다 한들 길이 나지 않은 거친 숲에 힘이 들뿐더러 산맥을 끼고 있는 환도성의 성벽이 산 일대를 가로막고 있으므로 국내성을 거치기 위해서는 환도성을 통과하여야만 했다. 국내성을 중심으로 환도성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니 매우 옹골차고 굳건한 형세라고 볼 수 있지만, 이는 거꾸로 환도성이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국내성이 고립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밀우는 본인도 인행길에 환도성을 거쳤을 뿐 국내성을 발을 들여 본 적이 없었기에, 시일이 다소 소요된다 한들 한번쯤은 가볼 요량에 일정을 다소 무리하기도 하였다.

  환도성은 생각보다 삭막하였다. 돌무더기로 가득한 성곽을 내세우고 병영과 연장들이 가득하니 이는 오직 군사적 용도로만 쓰는 성임이 분명하였다. 이는 나라의 시조가 말을 타고 달리며 유목을 하던 부여의 유랑인들이었기에, 그러한 성향이 군사적으로도 기병 위주로 꾸며져서 성벽이란 적을 가로막는 역할만 할 뿐 직접적인 것은 서로 맞대어 부딪힌다는 것이 이념으로 굳어졌다라고도 볼 수 있었다.

  밀우가 문에서 신분과 명패를 밝히고 들어가니 환도성은 큰 무리 없이 지나닐 수 있었다. 이른바 석무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돌무더기 벽과 집들을 지나니, 멀리 병연장으로 보이는 한편에서 수백의 한 무리가 말을 타고 떼로 몰려다니며 원을 도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검은 사슬갑옷과 투구를 입고 말 또한 검은 사슬마갑으로 군마를 이루어 겉보기에 무겁기 짝이 없었으나, 그 몸놀림이 날렵하면서도 묵직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흙먼지쌀에 눈살이 찌푸려지며 두려움을 심기에 충분해 보였다.

  ”고구려의 군마란 굉장하군요.“

  유유는 감탄했다. 신라에서도 기병은 당연스레 있는 것이었지만은, 그들은 주로 무장을 하지 않은 가벼운 말과 활로 무장하였기에 고구려에 비하면 쾌속하고 날쌘 군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무거움과 가벼움인 확연히 다른 점으로 비교되었기에 놀라움이 배가 될 수 있었다.

  환도성을 지나 푸른 숲에 하얀 눈발이 덮힌 산맥을 뒤로하고 드넓은 갈색빛 밀밭이 펼쳐진 평야가 드리운 수백 수천의 가옥이 밀집한 국내성이 시야에 잡혔다. 실상 국내성은 성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성벽은 방어적인 기능은 실상 전무 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 안에 밀집된 가옥과 높은 석조물이 거대하게 구성되어 있으니, 사람과 마을의 중심이라 일컬어 도시라고 이름 지을만 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국내성의 저잣거리를 돌며 이리저리 구경하였다. 저잣거리의 풍경은 여타 다른 촌락과 향취와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저잣거리의 규모 또한 남다르게 거대하였기에 객잔이며 대장간이며 곡간이며 그 종류의 다양함과 거대함에 놀라워하였다. 유유가 가장 기뻐하였던 것은 기다린 꼬챙이에 꽂힌 돼지고기였는데, 도무지 무엇으로 염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달콤한 향과 고기를 꼬챙이에 끼고 손에 들고 먹는다는 기이함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였다. 밀우는 남의 이목이 있을 때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평소답지 않게 거리를 촐랑거리며 꼬지를 들고 다니니 그 모습이 흐뭇하여 국내성을 들어오는 길에 나가는 길에 몇 개씩을 쥐어주며 동행하였다. 도무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유가 평소 일부러 굵게 낮고 내던 목소리를 잊고 청량한 목소리로 꼬지의 향이 무어냐 장사꾼에게 물으니 중국에서 들여온 팔각이라 알게 되었다. 소년의 몸을 한 청년이 소녀의 목소리로 물으니 의아하여 어안이 벙한 장사꾼이 밀우를 쳐다보자 밀우는 눈썹을 찡긋하며 자리를 떠나기에 바빴다.

  밀우와 유유는 평양지방을 떠나며 안평으로 향했다. 일전에 평양에서 요동 방향으로 가던 것에 비해 안평으로 향하는 길은 밀우도 처음이었기에 산을 돌아 길을 찾다 보니 동서남북의 방향을 잊어 길을 헤매기도 하였다.

  겨울이 모두 지나 봄이 되고 꽃이 만개하였다가 다시 땅에 떨어져 갈 무렵 즈음에 도착한 안평의 모습은 밀우의 눈에도 꽤 생소하였다. 숲이 우거지되 흙이 낭자하니 나무의 푸르름과 흙의 갈적함이 뒤섞여 묘한 풍취를 내었다. 이른바 흡사 사람의 발이 수십년간 지나 풀이 나지 땅에 나무의 뿌리가 박혀 자라나기 시작하는 태초의 태동처럼 보였다. 이맘때쯤 중부나 동부에서는 분홍히 빨갛고 노란 꽃들이 피고지고하며 색색이 영롱한 구름잎을 흩날려야 하지만 이곳은 사막 위에 갓 태어난 숲처럼 소나무 같은 강인함이 드세게 외치는 것 같았다. 밀우와 유유는 평야가 아닌 언덕에 빼곡히 자리잡은 촌락과 동안평성을 잠시 무시하고 바다 쪽으로 말머리를 향했다.

  바다로 향하는 길은 흙의 체취도 점차 바뀌어져 갔다. 흙알은 돌멩이가 되어 서로 무리를 이어갔고, 모래알은 점차 얇아져 갈색의 소금들처럼 바닥을 뭉텅하게 흩뿌려놓았다.

  유유가 별안간 말을 내달려 뛰어나가자 밀우도 뒤따랐다. 운동삼아 잠시 밖에 내어둔 검이도 발바닥을 내달리며 밀우와 유유를 쫓았다. 몇분간 내달리자 눈을 가로막던 소나무들이 걷어지며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거대한 푸른 물도 보였다. 그 아래엔 이젠 노랗다못해 하얀 모래알들이 짙게 깔린 구름처럼 바닥을 덮고 있었다. 유유가 먼저 도착하여 말에서 내렸다. 유유는 말에서 내리며 발을 바닥에 딛자마자 모래알들이 푸욱 꺼지며 유유의 몸도 함게 모래알들로 거꾸러지며 엎어졌다. 유유는 일어서며 모래를 손에 쥐어보았다. 모래는 주먹을 쥔 손가락 사이사이로 아스라이 사르르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유유는 감격스럽게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밀우도 뒤늦게 도착하여 말에서 내리자 유유처럼은 아니지만 그도 옆으로 모래알들에 엎어졌다. 말들은 지나온 길에 흙모래가 아닌 잔디로 풀을 뜯으러 가려 했으나 그들도 말굽이 모래에 빠져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밀우와 유유는 서로를 일으켜주며 물이 첨벙대는 바다로 향했다. 물이란 것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은 분명 강가나 호수와는 다른 것이었다. 거대한 포용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둘은 나란히 가죽신을 벗고 발가락으로 모래알을 오므렸다 폈다하며 발바닥으로 쥐어냈다가 물가까지 다가가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물이 첨벙대며 거품을 일으키며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가 이내 다시 밀려 사라졌다. 물에 손을 넣어보니 넣지 않은 것처럼 손이 모두 보였다. 햇빛이 투명하게 맑아내며 둘의 그림자를 모래알로 비추었다.

  밀우는 잎이 살아있는 굵은 나뭇가지들을 꺾고 주워와 모래알들 위에 꽂고 걸쳐 올려내어 뼈대를 만들었다. 유유는 손바닥만한 커다란 이파리들을 밀우가 쌓아올린 나뭇가지 위에 촘촘하게 올려놓아 막을 이루었다. 몇차례 숲과 모래밭을 왔다갔다하며 쌓아올리니 두사람이 누울만한 장막이 만들어졌다. 어느덧 태양이 내려앉으며 개와 늑대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어두침침해졌다.

  태양이 바다의 수평선 아래 몸을 반만 숨기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양이 화살을 쏘듯 하늘 위로 빨간 빛을 쏘아내고, 그 밑으로 바다에 물감을 흘리듯 빨간 물을 적셨다. 태양이 바다를 물들이며 그 빛은 주황색이 되었다.

  유유가 감탄을 하며 몸의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팔로 다리를 감싸고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밀우가 장막 앞 모래밭에 모아둔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니, 해변에는 두 개의 태양이 빛을 발하며 두 명의 사람을 맑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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