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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밀우유유전 (고구려 동천왕기)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위나라의 땅을 침략했다.
위나라에 호의적이던 고구려가 배신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참여한 장수 중 밀우는 고구려의 무사였고, 유유는 신라의 낭객이었다.
밀우와 유유는 멸망의 끝에 선 고구려를 구하며 전쟁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

 
1. 모래바람 (고구려사람 밀우)
작성일 : 22-02-28 19:59     조회 : 302     추천 : 0     분량 : 2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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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파아란 하늘이 초록빛 산을 감싸고 하이얀 구름을 품었다. 마른 하늘은 금세 비가 내렸고 집 문앞에 고르게 펼쳐진 흙들이 진흙이 되어 신발이 텀벙거렸다. 열여일곱살 되어보이는 사내아이가 가죽신이 질퍽거려 투덜거렸다. 아이는 눈썹이 굵게 진하고 광대나 꽤 나와 있었는데, 턱이 날렵하고 얼굴빛이 하야여 잘생긴 생김새였다. 아이가 진흙을 질겅질겅 밟아대며 투덜거릴 때 검은 살쾡이가 아이의 어깨를 디딤돌 삼아 풀쩍 뛰더니 돌담으로 올라타 사내아이를 보며 미야미야 울어대었다.

  “밀우야, 연습은 내일 하라. 이거이 비가 와서 원.”

  다른 사내아이가 목도로 비를 맞추듯이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밀우는 자기 키보다 1척가량 높아 보이는 돌담을 기어오르고는 씩씩대며 돌담에 걸터앉았다. 검은 삵이 이마를 밀우의 허벅지에 비비고는 비를 피하려는 듯 밀우의 무릎 위에 움츠려 앉았다.

  “풍 성님 어서 들어 가라요. 저는 이왕 오는 거 몸이나 좀 축이다 갈랍니다. 어차피 아버지도 내일 오신다는데”

  “그럼 그럴 바에 그 고아이나 들여보내고 대숲에 들어가가 빗속에서 대련이나 해보자우.”

  “비 맞으면 뭐시기가 달라지겠습니까. 어제도 그제도 맨날 성이 이기는데.”

  밀우는 목도를 겨드랑이에 끼고 손가락을 세가며 이야기했다. 둘은 형제지간으로 목도를 휘두르는 사내는 맏형 밀풍이고, 돌담 위의 밀우는 차남이다.

  “싸움은 병가지상사랬다. 늘 이기고 지고는 다른 문제고, 어떻게 싸우고, 그래서 언제 이기느냐가 중요한기다. 다시 해보라이.”

  밀풍은 발끈하며 말했다. 밀우가 다시 돌담 밑으로 폴짝 내려와 착지하니 물을 머금은 진흙이 촐랑 튀었다. 둘은 서로의 엉덩이며 어깨며 서로의 목도로 툭툭 치대며 돌담길을 따라 연이어 이어진 집들을 지나 가장자리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검은 살쾡이는 그 모습을 보며 미아오 하며 한움큼 울고는 돌담 뒤로 뛰어 내려가 자기 보금자리로 향하는 듯 했다.

  탁 타닥 하며 우거진 대나무 숲에 목도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구슬차게 내리는 비는 마치 숲을 감싸듯 하늘을 움켜진 나뭇잎들로 막히고 흘러내려 숲은 한 폭의 점막으로 된 물방울과도 같았다. 밀풍과 밀우는 서로 몸의 상단, 중단, 하단을 베어내고 쳐내고를 반복하며 수합을 이루었고, 그에 지루해진 밀풍은 연신 목도로 몰아세우더니 옆의 대나무를 발로 쳐내어 몸을 띄우고는 밀우를 향해 목도를 찔러내었다. 밀우가 목도를 쳐내자 밀풍은 곧이어 땅에 발을 딛고는 휘청거리는 밀우의 머리를 향해 뒷발을 휘두르었다. 밀우가 고개를 숙여 피해내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흩날리는 머리칼까지 가르었다.

  기세를 잡은 밀풍이 다시 상단, 하단, 중단 순서 없이 파상공세를 이으자, 다시 이루어지는 수합은 서로 치고 막는 일전이 아닌 일방적인 공격과 방어가 되었다. 연이어 계속되는 칼질에 차츰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던 밀우가 빈틈을 타고 목도를 대각으로 갈라보았지만 밀풍이 빠르게 대나무를 앞에서 몸을 돌리자 목도는 대나무에 텅 하고 걸릴 뿐이었다.

  밀풍은 다시금 옆의 대나무를 발로 쳐내고는 몸을 띄워 온 힘을 다해 목도를 찔러내었다. 밀풍은 밀우가 당연히 목도를 쳐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별안간 밀우는 왼손을 위로 뻗고 목도를 쥔 오른손을 몸 뒤로 당긴 채 무릎만을 낮춰 밀풍의 일격을 피해내었다. 밀우가 뻗은 왼손으로 밀풍의 발목을 움켜쥐고 무릎을 세워 일으키자 거꾸로 밀풍의 몸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오른손의 목도로 빠르게 밀풍의 가슴팍으로 내리꽂았지만 빗물을 가를 정도의 빠르기는 칼끝이 밀풍의 저고리 옷자락을 눌러내기만 했을 뿐 밀풍의 살갗에는 닿기 전에 멈추었다.

  밀풍은 땅바닥에 철푸덕 눕혀질 때 튀었던 진흙가루를 털어내며 배시시 웃었다.

  “범도술이라니, 굉장하구나이 밀우. 아바지가 아직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밀우도 웃었다.

  “살아남고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한다 말여요. 아버지 서고에 있는 걸 훔쳐냈는데 일러바치시면 안되기요.”

  “그거이 이왕 혼자 배운거 나도 미리 알려주라.”

  밀우는 밀풍을 일으켜주어 밀풍의 등과 엉덩이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진흙을 손으로 털어내 보았지만 털어지기는커녕 제 손만 더러워지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밀우도 스스로 털어내 보려했지만 더 더러워지기는 매한가지라 둘은 대나무 사이사이로 톡톡 떨어지는 빗물을 찾아 아이처럼 입을 헤 벌려서는 돌아다니며 손을 씻었다. 그리고 아직 잔흙이 번져 누렇게 된 손을 대나무에 벅벅 문지르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아 대련을 이어나갔다.

  “범도술은 호랑이와 같은 자세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거라요. 아바지가 하는 것이랑과는 다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함 보시요.”

  밀우는 왼발은 피고 오른발은 무릎을 접어 낮은 자세로 임하고는 목도를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밀풍의 앞에서 바람과 빗물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목도를 좌우로 상하로 그어내며 힘차게 움직였다.

 

  밀풍과 밀우는 고구려의 순노부족 가문으로서 국내성 동부에 위치하여 있다. 고구려는 당시 다섯 개 부족의 연맹형태로 대대로 왕을 배출하는 중부의 계루부족이나, 왕비를 선별하는 북부의 절노부족과는 달리 동부의 순노부족과 서부의 소노부는 초기 선왕 때부터 무관을 배출하는 집안으로서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부의 관노부는 백제와 교류하며 문관을 담당하였다. 형제의 아버지 밀검은 과거 족장의 위치를 가지는 대가로서 평양의 국내성에서 시행되는 제가회의에 소집되어 국사를 결정하고 있었다. 당년의 고구려는 연우가 승하한 후 위궁의 통치아래 있었는데, 성왕으로 추앙받던 할아버지 남무의 정기와 용기를 이어받았다 하여 온 나라의 기대가 부풀어 올라있었다.

  최근 중원대륙의 한나라가 분열된 후 위나라와 오나라로 쪼개어져 위로는 요령지방, 아래로는 안평지방을 통해 위나라와 오나라의 국경문제가 불거져 꽤나 골칫거리를 유발하기에 문제의 크기로는 북방의 부여와 남방의 백제를 논할 바가 아니었다.

  한편 쪼개어졌을뿐 아니라 위나라와 오나라는 중원의 장강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각축전을 벌임에 따라 천하는 혼란스럽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전쟁들은 징집된 군사들과 그 지역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는 장강 아래에서 오나라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손권이 이제 막 즉위하여 2대째 황제로 어린 나이에 부임하고 있는 조예를 업신여기고 있는 탓이었는데, 조예 본인이 덕망을 길러 선정을 펼치고 있기도 하거니와 사마의, 조진, 진군과 같은 개국공신들이 각 지방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며 오나라뿐 아니라 서방의 촉나라까지 국경을 견고하게 막아내어 끊임없이 북벌을 가하는 세력들의 고생들이 소득 없는 힘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부대가 밀설은 국경문제로 모인 제가회의 소집기간이 끝난 후 동부의 하믈촌으로 돌아왔다. 바람이 소나무 진액을 먹은 듯 따닷했고, 솜털과 모공이 눌러붙을 것 같은 한참의 여름철이었다. 촌락에 돌아오자 마을은 한창 바쁠 때였다. 말갈인들은 말을 사냥을 나가기 바빴고, 이주해온 한인들이나 토착 예맥인들은 가을철 작물 수확하기에 앞서 두루마기를 걷어붙이고 밭일에 한창이었다. 밀설이 호위무사들과 함께 거마를 거닐으며 촌을 둘레길을 따라 도니 주거인들이 일을 멈추고 저마다 환영의 인사를 건네었다. 밀설은 비록 나이가 지천에 찼으나 당대에 이름 높은 무사 출신이자 동부 밀씨 집안의 대가로서 그 힘과 직위가 명망이 높아 인방에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밀설이 집정소에 돌아와 그간의 일을 하부 관사에게 기록케 하고, 동부 지역 각 고을의 소족장 격인 주부들을 모으기 위해 먼 곳은 서신을 보내거나 가까운 곳은 사람을 보내도록 하였다.

  밀설이 일을 마쳐 집에 귀거하니 밀풍, 밀우 아들들과 아내와 딸이 맞이하였다. 꿩고기를 차린 식사를 마치고 밀풍, 밀우를 각종 무구류, 기구류가 있는 훈련소에 불러들여, 그간의 무예를 점검하고 부족한 것들을 짚으니, 저녁노을이 누룩누룩 져 어둑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개가 씩씩하여 밀설의 마음이 좋았다.

  다음날부터 밀설은 밀풍, 밀우에게 전장에서 스스로 익혀 저술하여 기록한 범도술을 알려주었는데, 범도술은 고구려 무사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져 오는 무술인 천지도의 변형된 형태였는데, 자세가 호랑이와 같다 하여 스스로 붙인 이름이었다. 무뤂을 굽히고 자세를 낮춰 사방의 어느 곳에서든 칼붙이와 같은 무구류의 공격이 들어올 시 먼저 튕겨내듯이 방어를 한 후 자세를 세워 힘있게 반격하여 불필요한 합수를 되도록 줄여 일격에 상대의 빈틈을 베어내거나 찌르는 형태로서 얼핏 굉장히 방어적인 무예로 비칠 수 있으나, 기본적인 반격 자세의 형태가 정해져 있고, 일격 자세에 있어 몸의 근육을 사용할 때에 훈련된 집중을 요하며, 능수능란히 임기응변을 해야 할 창조성도 필요하였기에, 힘있게 상대를 몰아치는 천지도에 비하여 그 수법이 교묘하고 지혜로워 단순히 말로써 건네 듣고 누구든 흉내 낼 수 있는 무예는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밀풍과 밀우가 탕 탕 소리를 내며 서로 목검을 부딪쳤다. 목검은 나무보다 가볍고 이파리보다 가볍듯이 자유로이 휘둘려졌다. 밀풍이 호랑이와 같이 몰아붙이고 공중에서 연신 몇 바퀴씩을 돌며 강세를 펼치면, 밀우가 곰과 같이 우직하게 막아내었고, 다시 밀우가 범과 같이 매섭게 찔러대면 밀풍은 이리처럼 교묘히 피해나가며 다시 공중에서 몇 바퀴씩을 돌았다.

  밀설은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따금씩 각기 “위를 노려라”라든지 “발걸음은 세 걸음을 넘지 마라”라고 하며 조언을 하였고, 둘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하는 건지 듣고도 좀체 하지 못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수합을 이루었다.

  이듬해 밀우는 고구려의 전통에 따라 열여덟이 되는 해에 무사인행 이라는 여행길에 올랐다. 무사인행이란 각 다섯부족 안에서 가문을 이루어 대대로 대가나 주부, 무사와 같은 중앙관료들을 배출하는 집안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 청년이 되면 그 해에 예비무사의 직함을 주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붉은 두건을 씌운다. 두건을 쓴 청년은 여행길에 홀로 올라 서부 사람은 동쪽으로 동부 사람은 서쪽으로와 같이 자기 고을의 반대 방향 국경으로 떠나는데, 이때 말 한 필, 숙식을 할 수 있는 짐 한 짝, 칼 한 자루, 활 하나만을 지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여행길 경로 중에 지방 고을 사람들은 청년의 붉은 두건을 알아보면 결코 숙식을 베풀어주지 않으니 대개 산이나 숲에서 몸을 보존해야 하는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고된 생활은 이 여행길을 떠난 청년 무사들의 자존심이기도 하여 스스로도 타인의 도움은 무사의 수치스러움이라고 여겨 결코 받지 않았다. 이때 고생하고 성장한 기억이 그들의 추억이 되어 삶을 나아감에 있어 저변에 지탱해주었다. 여행의 종착 목표는 각 국경의 성주격인 사자로부터 인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밀우가 떠나는 해보다 먼저 한 살이 높은 밀풍이 먼저 서안평 쪽으로 떠났었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다. 밀우는 위나라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 요동 쪽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밀우가 길을 떠나자 평소 자신을 따르는 검은 삵이 한 마리 졸졸 따라왔다. 돌아올 때 또 만나자며 수없이 내치려 하였지만, 그곳이 자기 자리라는 듯 말의 안장 뒤로 폴짝 뛰어올라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자 밀우는 어쩔 수 없이 말이 달릴 때 떨어지지 않도록 바구니와 같은 커다란 주머니를 달아 자리를 마련해 주고, 털의 빛깔이 칠흑처럼 검다 하여 검이라고 이름 붙이었다.

 

  입술빛처럼 고운 꽃잎이 바람 따라 솔솔 흩날리던 봄에 길을 떠나, 벌꿀 같은 끈적임이 살에 달라붙는 여름이 지났다. 계곡물에 몸을 담기도 하고, 지방 예맥 귀족들의 통제받기를 거부하는 말갈 산적들과 칼 다툼을 벌이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일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풀잎이 발갛게 익어버리는 가을이 되자 몸을 씻어낼 때를 제외하고는 늘 쓰고 있던 붉은 두건도 노라붉그슴한 풀잎처럼 헤진 구멍이 송송 뚫리고 거멓게 익었다.

  크르릉, 밀우가 평양성 북쪽 이름 모를 산자락 안의 한 동굴에서 몸을 재우기 위해 자리를 펴고 눈을 감던 때에 성대를 긁는 굵은 마찰음이 귀에 들렸다.

  그르릉, 눈을 동그랗게 모든 신경을 귀에 기울이고 숨도 쉬지 않은 채 팔짱만 끼고 가만히 솜털 하나 움직이지 않으며 누워있자 다시 한번 마찰음이 들렸다. 밀우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을 것이라고 작정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밀우는 침착했다. 동공이 어서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눈을 깜빡일 찰나의 시간조차 아까워하였다. 천천히 휘날리는 잔바람과 먼지가 눈알에 붙는 것 같아도 이쯤의 가벼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분명 마찰음이 등 뒤에서 들렸기에 천천히 몸을 동굴 안쪽으로 돌렸고, 바닥자리에 있던 지팡이로 삼아 지니던 막대기와 칼을 집어 들었다. 왼손에 막대기, 오른손에 칼을 집어 들었기에 남는 손이 없어 칼을 바닥에 뉘이고 칼집을 발로 눌러 스르릉 칼을 빼어내었다.

  고막을 간지럽히는 쇠소리가 나자 으르릉 하는 마찰음이 훨씬 가깝게 들리며, 등 뒤의 밤하늘보다 더 검은 어둠 속에 은은하게 빛나는 두 개의 빛망울이 보였다. 밀우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고 싶어 눌러 앉히고 싶은 것처럼 침을 삼키었다. 눈알을 돌려 검이를 찾으니 하악 소리를 낮게 내며 등과 꼬리를 곧추세우며 동굴 벽을 등지고 있었다.

  밀우는 조용히 허리끈을 풀었다. 막대기에 칼을 두고 끈으로 동여매었다. 심장 소리에 맞추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끈의 끝자락이 손에 잡힐 때까지 빠르게 휙휙 돌려대었다. 끈을 묶어내자 막대기는 이제 더 이상 지팡이가 아니라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오른손바닥으로 막대기의 끝을 잡아내고 왼손으로 굳게 꼬나쥐었다.

  카르릉 소리가 고막을 때릴 만큼 가까이 다가오자 두 개의 빛망울은 이마에 王자를 새긴 범의 얼굴로 나타났다. 범의 얼굴은 밀우의 상체만 했고, 빛 털은 흰 눈처럼 새하얬다. 그 몸통의 끝은 어둠에 가려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범은 한 걸음 두 걸음 밀우를 유심히 쳐다보며 어슬렁거리며 어느덧 몸이 다 보일 만큼 가까이 왔고, 검이는 안절부절못하며 쉼 없이 밀우의 곁을 졸랑거리며 뛰어다녔다. 밀우는 근육이 아플 만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만큼, 힘있게 꼬나쥐던 밀우의 손바닥 근육이 덜덜 떨렸다. 기척 소리는 없고, 바람만이 귀를 간지럽히었다. 범과 밀우가 대치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검이가 벽 안쪽 어느 지점에 있던지 모를 작은 틈에 들어가 캬악 소리를 내었다. 밀우는 천천히 얼굴에 밀려오는 바람에 손눈썹이 흔들리며 천천히 작은 틈에 뒷걸음질 치었다. 창끝이 아직 비죽 나온 채 밀우의 몸이 거진 틈 안에 들어갔을 즈음 기척도 내지않으며 천천히 발을 옮기던 범이 뛰쳐 올랐다. 밀우는 철푸덕 등부터 쓰러졌다. 창은 아직 쥐고 있었다. 범의 머리가 틈 사이로 들어오려 할 때 옆머리와 귀가 부욱 하며 살갗이 스치며 피를 내었다. 범의 한쪽 앞다리와 머리가 들어왔지만 작은 틈 사이로 몸은 다 들어올 수 없었다. 답답함 탓인지 고통 탓인지 범이 탁한 울음을 지르며 이빨을 들어내었다. 그때 검이가 범 앞다리를 디딤 삼아 폴짝 뛰더니 날카로운 발톱으로 범의 오른쪽 눈알을 갈랐다. 고통에 찬 범의 괴음이 울리자 밀우는 곧장 몸을 일으켜 창을 범의 미간에 찔러넣었다.

  자세는, 완벽했다. 밀우에게 다음이란 시간은 없었다. 창은 놓을 생각이 없었고, 범의 머리뼈를 부술 각오로 찔러 넣었기에, 창 막대기를 쥔 손바닥은 마찰에 살갗이 밀려 피가 번지었다. 칼끝이 범의 미간에 박힌 채로 수초가 지나자 범의 눈은 밀우를 여전히 노려보는 듯 했지만 살기는 없었다. 밀우는 범의 머리에 꽂힌 창을 내려놓고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검이도 주저앉아 밀우를 보며 캬아아 울며 적막해진 동굴 속을 울음소리가 휘이 저으니 바람을 타고 밀우의 등을 타고 토닥이는 것 같았다. 밀우의 단전부터 올라오는 한숨이 바람결에 하이얗게 품어져 나왔다.

  다음날 밀우는 범의 사체 가죽을 칼로 갈라내어 흐르는 계곡물에 씻어내었다. 크기로 보나 하얀 빛깔로 보나 이는 젊은 추억의 강한 방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후 이를 어깨부터 등까지 걸치고 여행길에 오르니 보는 이마다 감탄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막과도 같이 노란 흙발이 흩날리는 서부의 한 성에 다다르니 성문 벽에 근무하는 노병이 밀우를 보며 말하였다.

  “그대의 양 어깨에 걸친 망토는 필시 정주산의 주인인 호랑이일터인데, 그를 헤친 거뎁까?”

  “사람과 짐승은 한낱 피물이니, 그가 정기를 지녔다 한들 그가 저를 해치려 했고, 저는 그를 죽여 정기를 이어받은 셈이니, 그렇다면 제가 정주산의 주인이 되는 셈이 아니겠습네까?”

  밀우는 당당하게 답하였다. 눈빛은 매서웠고, 범의 가죽 망토는 여행길에 노랗게 색이 바랬지만 털 밑의 가죽은 하얀 빛을 잃고 있지 않아 그 위엄이 아직 살아 있었다. 마침 밀우의 안색이 햇볕에도 잘 타지 않아 하얀 편이었고, 그를 따라다니는 검은 삵의 존재도 눈에 띄니, 훗날 서부 사람들은 입과 입을 통해 그 둘을 백호와 흑표라고 불러 칭송하였다. 확연히 티가 나는 둘은 목적지인 안시성에 도착할 때까지 백호라고 불리며 인근의 산적떼나 말갈인도 그들에게 함부로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중국 대륙의 위나라에서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요령지방의 양평성주인 공손연은 위나라의 전신인 한나라 때부터 요동성을 지배한 공손씨 집안의 호족이다. 위나라의 초대 무제로 추대받는 조조가 일전에 하북지역을 놓고 원소와 전쟁을 벌이던 때에 원소의 세력을 이기고 잔존세력을 원소의 아들들을 쫒기 위해 요동까지 이르렀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공손연의 숙부인 공손강이 그들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쳐 양평후 직위에 봉해지고 동쪽의 고구려나 북쪽의 흉노를 막는 요령지역 도독으로 임명되었었다. 이후 공손강의 조카인 공손연이 장성하면서 천성이 구세고 싸움을 좋아하며 문무를 아울러 총명하니 주위의 기대를 받았는데, 가신들이 공손연을 추종하면서 공손강이 입지를 잃어가자 공손연이 끝내 공손강을 힘으로 밀어내고 숙부를 살해하고 자리를 빼앗았었다. 조조의 손자인 조예가 위나라의 2대 황제로서 변방에 불필요한 힘을 쏟지 않기 위해 공손연을 요동 태수로 공식적으로 황명을 내려 임명하니 요령 지방에서 공손연의 위세가 대단했다.

  얼마 뒤 오왕 손권이 사신을 보내 갖가지 금은보화를 주며 공손연을 연왕에 봉하며 동맹을 맺기를 청하였는데, 공손연은 중원의 조예가 두려운 나머지 그들의 목을 베거나 감옥에 가두어 베어낸 머리들을 조예에게 보냈었다. 조예가 이를 가상히 여겨 그를 대사마 낙랑공에 봉하여 위로하였는데, 공손연이 이를 만족하지 못하고 연왕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포하였다.

  공손연이 연왕 즉위식을 하며 가신들을 모아 연회를 열었는데, 대장군으로 임명받아 은빛의 빛나는 갑옷을 차고 기녀들이 따르던 술을 받던 가범의 낯빛이 안좋았다. 이에 공손연이 의아하며 물었다.

  “이 좋은 날에 그대는 왜 이리 울상이오?”

  가범은 낯이 흑색빛이 되며 우물쭐물 하였는데, 공손연이 재차 묻자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신, 폐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껏 저는 공손 주공들을 모시면서 성은을 받으면서 충직하게 지냈습니다. 중원땅 황실에서 주공에게 상공의 작위를 내리면서 대접한 것이 결코 소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를 배반한다면 실로 불손한 일이 될 것이옵니다. 더구나 중원에는 사마의, 조진, 곽회와 같은 용병에 능한 장군들이 있어 지금껏 서촉의 제갈량도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거늘, 하물며 주공께서 무슨 수로 어이하여 그들과 대적할 일을 만드십니까?”

  그러자 공손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그에 답도 하지 아니하며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러고는 좌우를 호령하더니 당장 가범을 결박지어 목을 베라고 명했다. 이를 지켜보던 승상 윤직이 옷자락이 휘날리며 공손연 앞에 엎드리더니 간언했다.

  “페하, 가범의 말이 옳습니다. 성인도 말하기를 국가가 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요즘 성 안에 괴이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근자에는 개 한 마리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쓰고 몸에 하얀 옷을 감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람행세를 하는가 하면, 성 남쪽에서는 한 백성이 밥을 지었는데 솥뚜껑을 여니 그 안에서 쪄죽은 어린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또한 양평 북쪽 저잣거리에서는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구멍이 생기더니 그 속에서 시뻘건 고깃덩이 같은 것이 솟아 나왔는데, 그 둘레가 수척이나 되고 머리는 이목구비까지 다 있는데 손과 발이 없으니 아주 기이한 현상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하도 이상해서 칼로 찌르고 화살도 쏘아보았으나 상처도 나지 않고, 정체도 알 수 없었다 하옵니다. 그리하여 한 점쟁이가 점을 쳐보고는, 형체는 갖췄으나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입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니, 이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려면 이런 것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요동땅 넘어 안평지방에 하얀 호랑이의 가죽을 걸치고 붉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용맹한 무사가 그 근방의 도적 떼를 소탕하고 다닌다고 백성들 사이에 입소문이 자자한데, 근자에 돌아다니는 개의 형세가 그와 같으니 실로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마땅히 흉한 것을 피하고 길한 곳으로 나가시며, 경거망동하셔서는 결코 아니 될 줄로 아뢰옵니다. 폐하.”

  “듣기 싫다. 이 무례한 놈들.”

  이를 듣던 공손연은 발끈 화를 냈다. 그리고 호위병들에게 윤직과 가범을 함께 묶어 저잣거리로 끌어내 목을 베도록 명하니, 그들은 어안이 멍한 표정으로 힘없이 끌려나갔다. 연회장 밖을 넘어 끌려가던 가범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들자 뒤에 따라가던 호위병이 그의 목을 칼로 그었다. 가범의 피가 윤직의 얼굴로 튀었고, 그의 얼굴에 창백해졌지만 곧내 그의 목도 호위병에 칼에 날아가 머리가 공중에 붕 뜨었다. 궁궐은 적막해졌고, 연신 혼자 술을 따라 마시던 공손연의 사악한 미소만이 남았다.

  다음날 공손연은 무장독립을 주장하던 간신 비연을 대장군으로 삼고, 양조를 승상에 임명하여 군을 소집하였다. 먼 중원땅을 공략할 요량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무력시위를 할 셈이었다. 사병과 관병을 모두 모아 세우니 그 수가 무려 3만 명이고 말이 3천 필이 넘었다. 비연과 양조를 각각 도독과 부장으로 군을 지휘케 하여 전후좌우 진을 세워 하북지방의 업성 근처까지 당도하여 영채를 세우니 그 위세가 대단하고 3만명의 발길질을 따라 흩날리는 흙먼지가 매우 장관이었다. 이를 보던 각 크고 작은 성의 초소들은 불을 피워 이 사실을 황실에 알렸고, 그 소식이 위황제 조예에게 보고되기까지 몇 시차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 공손연은 자신의 건재함과 힘을 대외로 알려 독립을 인정받기 위하여 협상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군에는 군량을 조달할 후방부대를 길게 이끌어 규모가 크게 보이게끔 하였고, 자신과 호위부대는 천천히 진군하여 며칠이 지나서야 지에 당도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조예는 크게 놀라 서촉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은 후 이제 곧 조정으로 돌아온 사마의를 황실로 불러내었다. 태위 사마의는 황제와 승상 다음가는 고위 관료로 줄곧 서촉의 제갈량과 대적하였는데, 수차례에 걸친 제갈량의 북벌을 매번 막아내었고, 끝내 제갈량이 전쟁의 피로를 몸이 이겨내지 못하여 사망하여 북벌이 흐지부지 끝나자 후일을 직속 수하 곽회에게 일임하고 조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마의는 위나라의 전쟁 영웅으로서 공신과도 같은 우대를 받았는데, 그 기세가 대단하고 기질이 용맹하고 지혜로우나, 조정에서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 황실이나 주위 가신들의 존경을 받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마의는 황궁에 칼을 차고 들어와 절을 한 후 황좌에 앉아있는 조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본디 황실에서 신하된 자는 그 어떤 칼도 찰 수 없으나, 오직 사마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조예는 사마의를 공개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조예는 공손연의 일을 걱정하여 사마의에게 대책을 물었다.

  “짐이 늘 공손연을 후하게 대해줬거늘, 그 역적이 모병을 꾀하고 하북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그 수가 서촉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들었소. 어찌해야 하겠는가?”

  사마의는 자신 있는 태도로 답했다.

  “신의 휘하에 있는 사병 1만이면 능히 적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조예가 걱정스럽게 재차 물었다.

  “경이 그 역적에 비하여 그렇게 적은 군사로 먼 길을 떠나서 땅을 수복하기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폐하, 싸움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적은 군사로도 뛰어난 계책과 지혜로써 어떻게 용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지금껏 오래도록 폐하의 큰 복을 받아 이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당연히 보답해야 할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이 노신은 반드시 공손연을 사로잡아 폐하께 그 역적의 머리를 바치겠사옵니다.”

  “그렇다면 경의 생각으로는 공손연이 어떻게 움직일 것 같은가?”

  사마의는 지체 없이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공손연이 신의 군사를 보고 달아난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양평을 지키면서 대군을 막는다면 그것은 중책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동성에 앉아 지키기만 한다면 이는 하책이온데 어떤 식으로 나오든 공손연은 반드시 신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서촉을 다녀오느라 경의 몸이 피로한 건 내 알겠으나, 정국이 위급하니 너그러이 봐주시게. 그럼 이번 원정길에 왕복으로 얼마나 소요되겠는가?”

  “4천리 길이니 가는데 1백일, 역적을 치는데 1백일, 돌아오는데 1백일, 쉬는데 60일을 잡는다면 1년이면 충분합니다.”

  조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동안에 동오나 서촉에서 다시 쳐들어온다면 어쩐다지?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동쪽의 고구려도 신경 쓰이고.”

  사마의는 여전히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신이 이미 방어할 계책을 마련해두었고,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낼 것이옵니다.”

  조예는 답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여 사마의로 하여금 즉시 군사를 일으켜 공손연을 정벌하도록 황명을 작성토록 지시하였다. 사마의는 황실을 하직한 후 부하와 아들들을 시켜 군을 준비케 하고 준비 되는대로 길을 떠나 공손연의 군이 하북에 머물든 요동으로 물러가든 그 앞에 진을 세우도록 명했다. 또한 장남 사마사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도록 하여 원군을 요청케 하고, 차남 사마소는 자신보다 먼저 군을 인솔하여 진군토록 하였다.

  이 소식을 공손연의 정탐꾼이 분위기가 수선해진 저잣거리에서 듣고서 말을 타고 쉼 없이 달려 양평성에 있던 공손연에게 알렸다. 공손연은 사마의가 진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라하며 3만 군사를 요동으로 돌려 회군토록 하였다. 그리고 성채 주위에 녹각과 말뚝을 둘러쳐서 전시 태세를 갖추도록 명했다.

 

  사마사는 사마의의 지시를 받자마자 그 즉시 집에 있는 가족에게 기별을 고한 후 친위 장수 왕기를 불러 시종 다섯을 모아 수도 낙양의 황하강에서부터 반도방향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범선을 탔다. 조정이나 황실의 명이 없이 독자적으로 사신을 나간다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처우를 여유 있게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사마의의 판단이었다. 또한 사마사로 하여금 고구려의 변방 군세를 이끌고 요동성으로 합류할 계획이기도 하였다.

  사마사의 부장 왕기는 요령지방 출신으로 변방의 병사출신이다. 후한시대 말부터 성행하여 약탈을 일삼던 흑산적이 있었는데, 사마사의 사졸 출신으로 흑산적 토벌에 임하다가 용맹한 모습이 사마사의 눈에 띄어 하급무장 마궁수로부터 상급무장 위장군까지 상승한 개천에서 용이 난 것과도 같은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로 변방에서 활약하여 북방지역의 선비족이나 오환족 또는 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의 언어까지 능통하진 않아도 대략 구사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까지 겸비하여 사마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사마사는 고구려의 수도 방향이 아닌 국경지역인 안시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왕기가 그간 몇차례 고구려와 국경을 대고 교류했을 적의 기억으로 고구려는 지방자치가 강하다고 주장하였기에, 요동을 위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안평 구획 문제를 구실삼아 북동쪽의 안시성 병력을 출병시킬 요량이었다.

  강을 건너는데 열흘, 바다를 건너는데 열흘, 서안평에서부터 안시성까지 나흘에 걸쳐 말을 타고 이동하니 사마사 일행은 도합 한달을 채 넘기지 않고 고구려 국경에 도착하였다. 일행이 어느 밀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말이 들려왔다. 왕기가 어눌한 고구려말로 위치를 물으니 고구려인들은 그들과 다란 복색의 그들을 보고 놀라워하면서도 경계하였다. 넓게 펼쳐지는 초록빛 밀밭이 아무 시선에 걸리는 것 없이 광활하게 펼쳐지자 보는 이의 마음이 탁 트이기도 하였다. 보이는 것은 밀이요 그리고 또 밀이었다. 바람이 말의 엉덩이를 미는 듯 밭의 잎싸리를 가스란히 뉘었다. 바람의 방향대로 길을 청하니 그것이 안시성으로 향하는 동쪽이었다.

  안시성의 성곽은 차라리 토벽에 가까웠다. 바위가 끼인 듯 돌이 끼인 듯 이물질도 많았지만 오랜 시간 비와 바람을 견딘 것처럼 흙임에도 흙이 아니었기에 보기에도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사마사는 성문에서 소개를 한 뒤 사졸들의 호위를 받아 어느 한 가채로 모셔졌다. 그 가채는 빈객이 머무르는 숙소 같았는데, 귀객과 문객들이 지내는 곳이 따로 나누어져 있어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위나라에서 볼 수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둥그런 장식들이나 지붕이 눈에 띄었는데 이국감에 보기에 좋았다. 사마사와 왕기가 식탁에 앉아 고구려의 반응에 따라 대처할 일을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를 나누고 대접하는 식사를 차려 받았다.

  이튿날 사마사는 다시 사졸들의 호위를 받아 관청의 한 중앙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엔 우람한 풍채의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칼을 차고 상석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 눈에 띄는 붉은 두건의 하얀 청년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검은 삵이 앞다리를 웅크리고 앉아 매섭게 올려다 보는 것이 기이하고 예사롭지 않았다.

  “어서 오라요. 내는 안시성주 유옥구라우.”

  우람한 풍채의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주님. 저희는 위나라에서 온 사절로서 고구려의 성주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왕기가 예의를 차리며 손을 포개며 앞으로 내밀고는 답하였다. 사마사는 중국말로 인사를 건넨 다음 웃으며 시종을 불러 황실에서 보내온 선물이라며 갖가지 형태를 가진 금붙이들과 도자기나 악기와 같은 진귀한 물건들을 진상하였다. 유옥구는 그 중 종류별로 가장 작은 하나씩만을 성에 두되 나머지는 국내성의 왕에게 전달하라며 직접 살펴보며 지시하였다.

  유옥구가 묻고 왕기가 답하였고, 왕기가 묻고 유옥구가 답하며 몇 가지 인사치레와 상호의 국외상황 소개를 하였다. 유옥구가 뜻을 알았노라며 방문의 이유를 물었다.

  “요동땅에서 집안을 일으켜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공손씨 호족을 아실 겁니다. 그 무리중 공손연이라는 망덕한 자가 스스로 천자라 칭하며 독립을 하였는데, 말은 가볍고 행동은 잽싸되 그 일대의 군사를 상당히 무겁게 일으켜 위나라를 위협하니, 이는 우리 위나라의 위험일 뿐만 아니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의 위험이기도 하옵니다. 그리하여 안평일대를 서안평과 동안평으로 나뉘어 국경을 가로질러 그 곳의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안평을 고구려의 산하에 두고, 요동과 요령을 위나라에 두어 각기 국경을 온건하고 평화롭게 가르고자 함이니 이를 성주께서 참작하시어 각 지방의 복속을 확실케 하고자 말씀을 드리옵니다.”

  유옥구는 왕기의 말을 듣고는 골똘히 쳐다보며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위나라는 무엇을 원하고,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는 거요? 우리는 남의 나라의 내전에 대해서 침입할 명분도 그 수에 대적할 병력도 없다만.”

  “저희 사마태위께서 성주께서 직접 열어보시라며 주머니를 하나 주셨습니다. 한번 보시지요.”

  사마사가 옷에서 손바닥만 주머니를 꺼내곤 왕기에게 건넸다. 왕기는 다시 그를 받아 유옥구에게 다가가 정중히 건넸다. 유옥구가 주머니를 열어보니 종이가 몇 겹으로 접혀 있었다. 제지가 굉장히 하얀 것이 아주 질이 좋은 것이었다. 종이를 펼치자 지도처럼 보이는 붓그림이 있었는데, 가운데에 양평성으로 보이는 궤적을 바탕으로 公, 馬, 柳, 高 등 이름의 성씨와 부대로 보이는 원형이 방향과 순서를 나타내며 그림을 그리어져 있었다. 또한 요동지방의 중요한 지점으로 쓰일 협곡이나 산맥들이 모두 표기되어 있었다. 이를 처음 보는 유옥구가 보기에도 그 숫자와 명칭과 그림이 명확하고 간단하여 용병을 크게 어떻게 하고자 함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유옥구는 사마의라는 인물의 탁월함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한눈에 병법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신산이구만 기래. 알았우. 내 폐하께는 서안평을 구획하고자 작은 병사를 일으켜서 곧 성과를 내리라 보고할 터이니, 어디 한번 잘 해보시라. 단 우리는 기병 5백, 보병 5백만을 보낼 수 없다는 점은 이해해주고. 허나 내 사람들이 타지에서 부질없게 죽는 것은 원치 않으니 최정예를 골라 파견을 내보도록 하겠소.”

  유옥구는 옆에 칼을 차고 서 있던 붉은 두건의 청년을 보며 지긋이 바라보았고,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청년은 밀우이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이는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출병일은 성주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사와 왕기가 감사를 표하며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유옥구가 밀우에게 말했다.

  “밀우 자네의 무사인행은 내 이미 인장을 찍어두었으니 마치는 길이겠지만, 어찌 한번 모험에 올라보겠는가? 내 자네의 용맹함을 믿기도 하고, 장차 큰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세상 경험을 조금 더 쌓아 보는 게 좋을 것 같네매.”

  밀우는 기세가 씩씩했다.

  “마다할 일이 있겠습네까, 성주님. 제 필히 저 한족녀석들이 다른 마음먹지 않도록 잘 살펴보며 아군 형제들을 보호하겠습네다.”

  유옥구는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가 내 아들내미이면 좋을 정도로 씩씩한 녀석이로구만. 동부의 밀가 녀석은 필시 삼족오의 배려를 받은 것이야. 떠나기 전까지 술이나 한잔 하자래.”

  유옥구는 술자리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 주위에 묻고는 그 누구도 퇴청하지 아니하고 껄껄 웃으며 응하자, 가신들과 밀우를 이끌고 궁 밖으로 나갔다. 유옥구와 일행은 궁에 자리잡지 않고 저잣거리까지 나가 한 주객에서 식탁을 차리었는데, 그 능숙함이 한 두 번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유옥구는 그 성질이 호탕하고 친근하여 성내에서 매우 인망이 높았는데, 길을 지날 적마다 웃으며 인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밀우는 출병하는 전날 밤 방에서 궁에서 하사한 갑옷을 챙기었다. 그동안 으레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 갑옷의 팔뚝 쪽에 단단하게 묶어두었다. 공식적으로 인장을 받아두었거니와 앞으로 국외로 나감과 동시에 여행길이 아닌 전쟁길이었기에 갑옷과 투구를 써야하므로 자신의 신분을 알리는 목적인 두건은 이제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밀우는 이부자리에서 그릉 대며 졸고 있는 검이를 지긋이 보았다.

  “돌아오기 전까지 성주님을 잘 보필해 드리라. 쓸데없이 귀찮게 해드리지 말고이.”

  검이는 알았다는 듯 졸다가 하품을 하였다. 밀우는 그를 보고 웃으며 다시 갑옷을 이리 저리 살펴보고 동여매고는 몸에 걸쳐보았다. 아직 끈을 매지 않아 단단하진 않았지만 딱히 성한 곳은 없어 보였다. 밀우는 어릴 적 가족을 따라 가끔 바람쐬러 산이니 계곡이니 소풍을 떠나기 전날 밤 가슴이 설레듯이 심장이 뛰어왔다. 두근대는 소리가 옷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아 잠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자리에서 뛰어봐도 볼을 몇 차례 세게 때리어보아도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후우우우- 차라리 문밖을 나서 차가운 밤공기를 가슴에 들이마시니 한결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 밀우의 삶은 늘 주체적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듯, 제자가 선생을 대하듯, 동생이 형을 대하듯, 친구가 동기를 대하듯, 자기 자신이 서 있었고 그를 상대하는 상대가 있었다. 그 어떤 소속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하물며 전쟁이랴.

  두근거림에도 현실감은 없었다. 어린아이 같았지만 아이처럼 칭얼댈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이제 열여덟이 된 다 자란 성년이고, 장차 동부 사람 밀씨 집안의 자제이자 무사로서 고구려인의 몫을 다해야 한다는 자부심과 자존심과 부담감이 공존했다.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이며 말갈인이며 산적이며 상대해보지 않은 것도 없었다. 사람을 처음 칼로 찔러 그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희미한 죄책감과 경멸감과 이상 모를 희열감도 알고 있었다.

 ‘내는 호랑이가 될 것이다.’

  밀우는 얼굴 피부를 스치는 검은 바람을 느끼며 다소곳 중얼거렸다. 진심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였다. 늘 늑대와 같은 강한 존재가 되고자 열여덟 인생토록 단련하였지만, 자신이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안개와 같았다. 단지 심장이 뛰고, 발로 땅을 디디고 있으며, 때가 되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입에 넣으므로, 그것으로 살고 있다고 느꼈다.

  수없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만사의 스쳐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버지의 말마따마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눈을 뜨고 바라보고 살고 있는 이 푸른 초원의 세상에서 혹은 지금 몸을 지내고 있는 노란 모래의 세상에서 굳굳이 나무처럼 뿌리내려 서 있을만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밀우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이 무사인행의 목표 중 하나였다. 이제 그것을 요동에서 찾기를 바라며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닭이 울기 전 밀우는 눈이 떠졌다. 잠이 통 오질 않아 뒤척이다 눈을 감았다 뜨니 창틀 사이로 밝은 달이 보였다. 지난밤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환한 달이었다. 마치 잠든 새 누가 몰래 촛불을 켜주어듯이 달을 켜준 것만 같았다. 밀우는 멍하니 쳐다보다 탁자의 대야에 있던 물로 얼굴을 헹구고 씻어내고는 머리칼을 대충 빗어 넘겼다. 곤히 잠든 검이의 등을 몇 차례 쓸어내리고는 갑옷을 챙겨 입어 끈을 수차례 동여매고 투구를 썼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잠시 몸을 둘러보니 검은 빛이 꽤 볼만하였다.

  밝았던 달과 검스름했던 하늘빛이 서로 발갛게 비슷해질 무렵 문밖을 나서니 시시껄걸 몰려가는 병사들이 있는가 하면, 연인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와 손을 고옥 잡고 가는 병사도 있었다. 가족들과 눈물짓는 상봉과 인사말을 건네기도 하는 집도 이따금씩 두어 집도 눈에 띄었다.

  밀우는 병연장으로 걸어가 행정관이 나누어주던 창과 활, 화살통을 주어받고, 이미 얼추 모여 있던 보병들 사이에 끼어들어가 섰다. 유옥구가 그더러 일반 사졸로서 참여하여 사람을 죽고 죽이는 싸움이 무엇인지 바닥부터 경험해보라고 신신당부한 터였다. 물론 이 보병부대는 안시성의 사병으로서 평소 군사 훈련과 방진과 같은 병법을 함께 배웠으므로 이를 잘 알지 못하는 밀우가 폐가 될 수도 있겠지만은 그런 훈련을 고향에서 배우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눈칫밥으로 따라가지 못할 것도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발굽소리들이 세차게 나며 흙먼지 사풀사풀 날아오르니 기병들이 갑옷과 창을 차고 한손으로 말머리를 메며 들어왔다. 그 수가 들은 바와 같이 5백은 되어 보였는데, 5백도 이렇게 아찔하게 중압감이 드는 것을 사서나 구전으로 전해 듣듯이 1만이나 되는 말들이 자신의 앞에서 달린다면 그것이 대체 어떤 두려움을 일으킬까 상상도 되지 못했다.

  병연장에서 좌측에 기병부대, 우측에 보병부대, 전방에 지휘하는 장군과 다섯의 호위무사들이 정렬했다. 장군은 득래란 인물로 수염이 검게 정갈하게 나고 눈이 작으면서도 부드러운 빛을 내었는데, 유옥구가 중히 쓰는 인물로, 평시에는 성내 치안을 담당하는 주부로 있었다.

  “대 고구려! 전군 출병! 기함!”

  득래이 병연장을 흔들 듯이 우렁차고 힘찬 소리로 외치자 1천명 가량의 병사들이 일제히 창끝을 땅에 탁 내려치며 “고려!”라고 외치었다. 그리고 연달아 다시 창을 내려치며 “고려!”라고 외치니 땅이 울리었다.

  병연장 사열대에 유옥구가 개마무사를 상징하는 붉은 삼족오가 그려진 검은 갑옷과 붉은 칼집에 있는 칼을 차고 올랐다. 살짝 더운 기운에 얼굴에 땀이 맺힘에도 불구하고 유옥구는 풍채와 위엄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할 것이매. 동명성왕이 이룩하신 과업과 대업을 이룩했고, 이룩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룩할 것이라. 한족놈들이 서안평을 인질삼아 요동출병을 요청하였다. 우리는 그에 응하여 안평을 돌려받지만, 우리의 최종목적은 요동 넘어, 만주 넘어, 북평을 넘어 중국과 그 광활한 대지를 두 눈과 두 발과 두 손으로 밟고 올라서고 움켜쥘 것이다. 이는 미약한 시작이라. 내는 그것을 볼 것이고, 대 고구려의 대왕 폐하도 그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제군들도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니 죽어서 돌아오는 놈은 내 그 시체를 매질할 것이고 살아 돌아오는 놈은 내 그 얼굴을 위로해주고 보답할 것이다. 삼족오의 칼로 대륙의 피를 머금고 와라. 너희는 이 뙤약볕을 적시고 부수는 홍수가 될 것이다. 이상.”

  유옥구가 연설을 끝내고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터벅터벅 내려오자 1천명의 병사들이 창으로 땅을 동시에 탁탁 치며 “고려! 고려!”라고 외치며 응하였다. 땅이 울리었다.

 

  밀우는 여타 보병들과 함께 소와 달구지를 이끌었다. 50필에 달하는 달구지에는 약 1년가량 1천명을 먹일 수 있는 군량과 진을 칠 수 있는 천이나 목재 등이 있었다. 군량은 주로 말고기를 말린 육포와 밀이나 옥수수를 뭉친 떡이 주식이었다. 수송이나 취사를 겸하는 후방부대를 따로 두지 않았기에 병사들 스스로 찾아 하루 식단만큼 자율적으로 해먹는 구조였지만, 전쟁에 나선 순간 모든 이에게 귀속되는 군법의 탓인지 아니면 지휘장군 득래의 지엄함 탓인지 그 누구도 훔치거나 투덜대는 이는 없었다.

  병사들이 사막지역을 달구지를 끌고 이동하며 시시콜콜 잡담이나 야설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밀우는 묻는 말에만 답하며 크게 어울리지 않았다. 성질이 드센 예맥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해보았자 괜한 시비가 붙어 일을 키워보아야 장차 사기에 있어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기에 출신을 물어도 동부 타지에서 도망왔다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숙영을 하면 득래, 사마사, 왕기와 같은 장수들은 한 천막에서 식사나 회의를 같이 하였고, 병사들은 제각기 함께 이동한 집단이나 본디 친한 또래 집단끼리 어울려 군에서 허용한 만큼만의 곡주 한잔을 들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하면 한쪽에서는 수박이나 씨름을 하며 넘쳐나는 힘을 과시하곤 하였다. 밀우는 그마다 항상 조용한 무리와 어울려 식사와 곡주를 먹거나 전열 끝으로 잠시 나와 앉아 밤하늘을 쳐다보곤 하였다. 하늘을 수놓는 별들 중에서도 특히 빛나던 일곱 개의 별은 고향에서 볼 적에 서쪽에 가까웠는데, 이곳 타지에서 보자니 동쪽에 가까워 그것이 신비롭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갈을 닮았다, 저것은 칼을 닮았다, 요것은 거북이를 닮았다 하며 별들을 이어 붙여 이름을 붙여보기도 하니 소소히 재밌기도 하였다. 점을 치는 고위관료들이 하늘의 뜻을 추론하는 것을 천문학이라고 명명하여 밤하늘의 별과 별똥별을 연구하기도 한다고 들었지만 국내성 수도에 발도 들여보지 않은 밀우가 그런 것을 접할 리는 만무하였다. 훗날 그러한 학문을 배워도 즐겁겠다는 상상이 들기도 하였다.

  밀우는 가죽신발과 발싸개를 잠시 벗어 발을 주무르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진채의 일렁이는 산발적인 불꽃을 쳐다보았다. 수십여 개의 불꽃은 각기 서로 모여 하얀 점막처럼 막을 이루어 검은 밤 장막을 들추어내는 것도 같았다. 예쁘고 황홀하지만 이질적이고 위험하였다. 밀우는 자신도 이 불이라 여겼다. 이 거대함은 홍수가 아니라 화염이라 여겨졌다. 그리고 그 안의 나무들, 지푸라기들, 돌들. 오늘뿐 아니라 내일뿐 아니라 싸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꺼지지 않을 불이라 여겨졌다. 자신도 그 불의 소모품이리라.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였다. 밤하늘의 달은 휘어진 칼과도 같았다. 서린 빛을 내고 하늘 아래 하얀 점막을 내리치면 반으로 가를 만큼 날카로워 보였다. 하지만 밀우가 모래밭에 누워 골아 떨어질 때까지 선 채로 잠을 자던 말들이 눈을 뜨어 푸르릉 지평선 밑에 숨은 해를 부를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모래바람은 조용하였다.

  고구려군은 사막을 건너고 건너 낮에는 행군하고 밤에는 숙영하였다. 이십여 일이 지났을까 삼십여 일이 지났을까 잠을 몇 번 잤는지 열 손가락으로 헤아리지 못할 만큼 밤이 지난 다음 날 밭과 촌락이 보이고 성이 보였다. 아지랑이에 성곽이 흐물거려 보였지만 분명코 목적지였다. 불필요한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하여 성곽이 눈에 흐릿하게 보일 만큼 군은 길을 크게 돌았다. 인근에는 돌산과 협곡이 서너 개 있었고, 그 이외에는 밭과 모래뿐이어서 군을 숨길만 한 요지는 보이지 않았다.

  협곡을 끼고 돌아 평야로 나오자 한 무리의 기병대가 군을 맞이하여 나왔다. 선봉에 있던 사마사와 무리가 만나고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방향을 잡아 함께 이동하니 모래바람 넘어 거대한 진채가 보였다. 1만명에 달하는 위나라의 군세였다.

  밀우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위나라의 군세가 이토록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데 다른 진채에 주둔 중인 반군은 그의 수 배에 달하는 3만명이라니. 머리로 함부로 상상이 되지 않을뿐더러 이렇다 할 이해 가는 부분도 없었다. 본인의 착각이라 여겨진 점도 있었다. 자신은 화염이 아니라 성냥개비에 붙은 초라한 불꽃으로 여겨졌다. 후 불면 꺼져버릴 불꽃이었다. 고구려군은 일순간 술렁했지만 그것은 위나라의 군세에 압도된 것이지 요동이 아니었다. 요동은 요동일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위나라의 수백 개의 푸른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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