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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거짓말쟁이의 삶은 편하던가요
작가 : 허혜민
작품등록일 : 2022.2.28

첫사랑, 아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퇴원한 하나.
그녀는 아인을 찾기 위해 그를 닮은 Mr.피노키오를 만난다. 그녀는 Mr.피노키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와 함께 다니는데 그 과정에서 인생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 아인을 만났던 그때처럼. 하나는 그간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되찾아 간다.

 
1.
작성일 : 22-02-28 17:33     조회 : 342     추천 : 0     분량 : 10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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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

 첨벙거리는 남색 바다 위로 섬 하나가 둥실 떠 있다.

 섬엔 이름 따위는 없다. 다만 그 섬 안을 채우고 있는 도시의 이름만 있을 뿐.

 계란 노른자처럼 중앙에 위치한 곳은 썬시티라 불리며,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곳은 문시티라 했다.

 두 도시 사이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이 있다. 이 담장은 두 도시의 이름을 따와 이클립스 장벽이라 지어졌다. 누구도 이클립스 장벽을 쉽게 넘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 장벽 너머의 세계를.

 

 *

 

 “선생님 이거….”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여자 환자가 재원에게 초콜렛을 건넸다.

 

 “오늘 발렌타인데이래요.”

 

 재원은 환자가 건넨 초콜렛을 받고선 인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여환자는 자신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며 얼굴을 붉혔다. 여환자는 재원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그의 곁을 떠났다. 재원은 환자가 건넨 초콜렛을 주머니에 넣고선 복도 창문을 바라봤다. 바깥에는 남색 바닷물이 해안가에 닿아 첨벙거렸다. 부뚜막에선 배를 타고 온 손님들이 내렸고, 재원은 그 장면을 보면서 막연한 호기심을 품었다.

 

 ‘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바다. 그것은 낯설면서도 신비롭다. 바다는 썬시티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다. 하지만 오랫동안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울적해져 의도적으로 창문을 보지 않을 때도 있다. 바다는 마치 세상이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넓게 또 푸르게 펼쳐있지만, 정작 재원은 오래된 적색 건물 안에 갇혀 지낼 뿐이다. 휴림정신병원. 이곳은 환자도 의사도 하다못해 정원사조차도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다. 이곳은 섬의 유일한 정신병원이자 감옥이다. 재원의 인생은 바다와 달랐다.

 

 재원은 휴림정신병원의 정신과 의사다.

 180cm가 넘는 장신에 지적인 외모를 가진 그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정작 재원은 이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늘 흰색 뿔테 안경을 쓰고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을 읽거나 우편물을 확인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때때로 노트북을 들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가곤 했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휴림정신병원에서 유일하게 인터넷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재원은 늘 공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늘 혼자가 되기를 바랐고, 때때로 그가 사랑해 마다않는 환자들조차도 귀찮아했다. 지루한 이 병원 내에서 그가 유일하게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은, 실패했던 실험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2년 전, 썬시티에서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던 그 실험을.

 재원은 옛 기억이 떠오르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실험 자료들이 모두 불탔던 기억, 언론이 그를 두고 “자유라는 말로 선한 썬시티 시민을 유혹하는 악마.”라고 칭했던 기억. 재원은 단지 구원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을 쫓다 추락한 이카로스 꼴이다. 재원은 한 때 썬시티에서 이름을 날린 명의였고, 꿈 많은 청년이었지만, 비밀리로 진행했던 실험이 발각되면서 섬의 쓰레기통이라 불리우는 이곳, 휴림정신병원 발령을 받게 됐다. 재원은 분한 마음에 속으로 외쳤다.

 

 ‘썬시티 시민들은 자신을 잃어가고 있어. 그들을 구해줘야 해.’

 

 재원은 병원 휴게실에서 커피를 내린 후 별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깊고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전구는 수명이 다다랐는지 깜빡거렸고, 쥐 같은 작은 짐승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재원은 철문 앞에 다다랐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린 후, 문을 열었다. 끼익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철문 안에 있는 환자들이 보였다. 희고 고운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은 의자에 앉아 재원을 반겼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재원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재원은 실험을 시작했다. 환자들은 모두 붉고 투명한 알약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번호대로 그들은 fMRI 촬영 기기 안으로 들어갔다. 재원은 그들에게 감정을 유발하는 여러 사진들을 보여줬고, 사진을 보일 때마다 그들의 편도체가 적절하게 반응했다. 실험이 무사히 끝나고 환자들과 재원은 서로를 포옹했다. 재원은 인위적인 미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었다. 환자들은 재원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젠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아요.”

 

 2. 바다 너머엔

 

 *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쳤다. 비임상테스도, 임상테스도 모두 다 성공이었다. 재원은 노트북을 들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가 설하에게 메일을 보냈다.

 

 

 받는 이: sulhahaha@minimoni.com

 

 "설하씨.

 치료제 실험이 무사히 성공했습니다. 저는 정부에게 다시 서찰을 보낼 생각입니다. 정부도 치료제의 목적과 방향성을 알게 되면 반대하지 않으리라 믿어요. 곧 좋은 소식을 들고 연락 보내겠습니다. 그간 저를 굳게 믿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추신:

 오라클 클럽은 요즘 어떠한가요. 최근들어 정부가 암흑시장에서 취급하는 레베레티 제로를 강압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설하씨의 일의 걱정 됩니다."

 

 메일을 보낸 이후 설하에게서 곧장 답장이 왔다.

 

 받는 이: z.one1@minimoni.com

 

 "선생님. 안녕하세요.

 치료제가 완성됐다니 정말 기뻐요.

 저는 아직도 선생님께 상담 받았던 일을 떠올리곤 해요.

 공허함에 몸 부리치던 날, 선생님을 통해서 제가 제 감정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직도 노턴 약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전에 비하면 복용 횟수가 많이 줄긴 했어요. 발전했죠.

 오라클 클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부는 오라클 클럽 대표에게 2년간 클럽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했거든요. 물론 곧 2년이 다 되어간다는 게 문제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레베레티 제로를 찾는 이가 전보다 많아졌어요. 비록 실패한 약이지만, 썬시티 시민에겐 이마저도 없으면 감정 같은 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르니까요. 시민들은 약간의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레베레티 제로를 계속 찾을 생각예요. 그런데 레베레티 실험이 성공했다니. 언젠가 썬시티 역사에 선생님 이름이 새겨질 거예요.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을 돕게 계시잖아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추신:

 발렌타인 데이 날 초콜렛은 많이 받았나요? 선생님께 초콜렛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수신자불명으로 회신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재원은 설하의 메일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간 무채색으로 보였던 세상이 오랜만에 제 색을 되찾은 상태로 재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재원은 따뜻했던 과거의 재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재원은 곧장 사무실로 돌아가 크림색 종이 한 장과 몽블랑 만년필을 꺼냈다. 재원은 정부에게 보낼 서찰을 써내려 갔다. 치료제인 레베레티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말과 함께 약의 목적과 방향성을 간단하게 적었다. 편지는 미리 뽑아 놓은 논문과 함께 서류봉투에 밀봉했다. 재원은 병원 내 우체통으로 가서 봉투를 넣었다. 재원은 정부를 믿었다. 비록 썬시티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감정을 잃어가고 있지만, 분명 설득의 여지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로 정부에게 서찰을 보낸 것도 벌써 24번째다. 월에 한 번씩 보냈으니, 휴림정신병원에서 지낸 지도 2년이 됐다는 얘기다. 세상은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아도 빠르게 변했다.

 재원은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어제 섬을 방문했던 손님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보다 사람 수가 늘어난 것 같다. 착각일까?

 

 *

 정부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정부에서 몇 가지 절차를 더 거친 후, 안정성이 보장되면 약품 판매를 허가한다는 내용이다. 몇 날 며칠에 휴림정신병원에 사람을 보낼 테니 약과 생략되지 않은 실험 논문 모두를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다.

 재원은 편지를 읽고 곧장 설하에게 메일을 보냈고, 기뻐하는 설하의 답장이 왔다. 재원은 곧장 실험실로 가 온갖 자료들을 한데 모아 파일에 보관했다. 재원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자 모든 긴장이 녹듯이 씻겨져 갔다. 풀어진 긴장과 함께 재원은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바다와 바다 너머의 세계다. 휴림정신병원에서 2년간 바다를 지켜본 결과, 분기마다 한 번씩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검정 메르세데스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배에 승선하며 조용히 떠났다. 절차는 매번 같았다. 재원은 그들을 향한 질문들이 마구 떠올랐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이곳을 방문하는가?’

 

 재원은 바다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었다. 썬시티에선 바다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사실 바다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낸다. 재원이 만약 휴림정신병원에 오지 않았다면 그 역시 육지라는 땅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바다. 그것은 거대한 물 덩어리다. 그 안엔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생명체가 살고 또한 그 생명체는 3차원의 공간을 마음껏 헤엄친다고 했다. 재원은 인터넷에 올라온 바다의 사진을 찾아봤다. 맑고 투명한 물속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생명체. 재원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그러면서도 재원은 분기마다 찾아오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정부가 휴림정신병원으로 사람을 보낸다고 한 날짜까지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재원은 바다와 바다 너머의 세계를 알아보기로 했다.

 

 *

 휴림정신병원 도서관의 책들, 인터넷 자료들, 종종 설하가 보낸 바다 너머의 세계에 관련된 금지된 서적들. 책상 옆에 자료들을 수북히 쌓아놓고 재원은 줄곧 글자만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캄캄한 저녁. 책장을 넘기다 만 재원의 손이 심하게 떨었다. 재원은 크레스센트에서 판매하는 금지된 서적을 읽고 있던 참이다. 책 페이지에는 <실종된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라는 부제로 글과 사진 몇 장이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에는 재원이 창문으로 본 것과 같은 장면이 있었다. 부두막으로 온 낯선 사람들. 그리고 검은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또 정부의 로고가 있었다. 재원은 책장을 넘겼다. 재원은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썬시티 시민들이 위험해….”

 

 재원은 책을 덮었다. 그러자 책상 위에 놓였던 편지가 작은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부로부터 온 편지다. 휴림정신병원으로 사람을 보낸다고 했던 내용의 편지. 그는 정부에게 치료제 따윈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정부는 왜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는 걸까?

 그러자 재원은 섬뜩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재원과 재원의 약이 원해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재원과 재원의 약을 없애려 오는 것이다! 당장 위험에 처한 것은 재원, 바로 그였다.

 

 *

 대낮의 휴림정신병원은 평소답지 않게 활기가 돋았다. 재원은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걸으며 병실 안을 노크했다. 병실 문 옆엔 유하나. 라는 세 글자가 적혔다. 재원의 노크에도 방 안은 고요했다.

 

 “하나씨. 안에 없나요?”

 

 노크를 하다가 재원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흰색 병실 안엔 아무도 없다. 연약한 스위피만 고개를 떨군채 꽃병 안에 들어있을 뿐이다. 재원은 급한 만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재원은 병원 내 휴게실을 둘러봤다. 이불보를 옮기다 만 조무사들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다. 휴게실 작은 텔레비전엔 썬시티 시내를 투어하는 여행 프로그램이 틀어져 있다. 재원은 멍하니 티비에 시선이 갔다. 그러자 조무사 중 한 명이 재원에게 다가와 수줍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썬시티 출신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썬시티는 정말 저런 곳인가요?”

 

 조무사는 작은 티비를 가리켰다. 티비 속엔 썬시티 시민이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재원의 고향, 썬시티는 정말인지 눈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곳이다. 넓은 도로 위엔 값비싼 차들이 달렸고 높다란 고층 건물은 태양 빛이 반사되어 광이 났다. 공원엔 운동하는 사람,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사람,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하나 같이 깨끗하고 질서정연했고, 또 행복해보였다. 태양처럼 도시 전체가 찬란하게 빛이 난다고 할까. 티비 밖 휴림정신병원은 죽어가는 자연과 죽어가는 사람뿐이기에 조무사는 티비 속 세계를 동경하는 동시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재원은 묵묵하게 말했다.

 

 “네….”

 "정말 부럽네요! 저렇게 멋진 곳에서 지내도 보시고."

 

 조무사와 재원은 다시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티비에선 썬시티 주민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곳이야말로 꿈에 그리던 유토피아입니다.”

 

 조무사는 그 대사에 질투는 잠시 접어두고 황홀경에 빠졌다. 썬시티라는 도시에 온갖 판타지를 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 옆 재원의 얼굴은 아주 잠시 일그러졌다. 썬시티의 밝음은 모두 가공된 행복일 뿐이다. 유리 진열장에 놓여 있는 어여쁜 인형처럼. 반면 문시티는 가공된 밝음 뒤에 숨겨진 어둠을 처리하는 처리반 같은 도시가 됐다. 재원은 정부의 이중성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거짓말쟁이’

 

 재원은 고개를 젓고 어서 하나를 찾기로 했다. 재원은 조무사에게 물었다.

 

 “조무사님 혹시 유하나라는 환자가 어딨는지 알까요?”

 “하나요? 저기 걸어오고 있네요.”

 

 하나는 손에 각종 꽃을 들고 공허한 눈빛으로 복도를 걸었다. 환자복만큼이나 흰 피부의 하나는 오늘따라 더욱 연약해보였다. 재원은 조무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하나에게 인사를 했다. 하나는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에 답했다. 재원은 하나와 함께 정원 밖으로 나갔다. CCTV가 없는 정원 구석에서 재원은 입을 열었다.

 

 “하나씨. 여전히 첫사랑에게 복수하고 싶으신가요?”

 

 하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퇴원시켜 준다면 뭐든 한다고 했죠?”

 

 이번에도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재원은 하나에게 붉고 투명한 알약을 건넸다. 하나는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집었다.

 

 “레베레티. 감정을 되살리는 약입니다. 이것을 문시티, 크레스센트 도시에서 설하라는 여자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요.”

 “그러면?”

 “그러면 하나 씨에게 자유를 드리죠.”

 

 하나는 약을 물끄러미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는 말했다.

 

 "언제 떠나면 되지?"

 "빠를 수록 좋습니다. 내일 어떤가요?"

 "알겠어. 그런데 재원."

 “네 하나 씨.”

 “그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상담을 해줘.”

 “고민거리가 있으신가요?”

 “사람들이 왜 사는지가 궁금해. 썬시티에서 지낼 때는 늘 양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았어. 하지만 이곳 휴림정신병원에서는 누구도 내게 뭔가를 바라지 않아. 누구도 내게 뭔가를 강요하지도 않고. 그게 오히려 날 괴롭게 해. 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어.”

 

 재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흰 가운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펜은 적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재원은 나무 아래 벤치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벤치는 앉기 위해 만들어졌고요.”

 

 재원은 하나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평소 지쳐 보였던 재원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누구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재원은 말했다.

 

 “하지만 하나 씨, 하나 씨는 그냥 태어난 거예요. 아무런 목적 없이. 하나 씨의 삶의 목적은 하나 씨 스스로가 부여하는 거예요. 타인이 아닌, 자신이요. 인생은 길죠. 그 이유는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이 주어진 겁니다."

 “하지만 나는 목적 같은 거 찾는 방법을 전혀 모르겠어.”

 “그저 느끼시면 됩니다. 낯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낯선 하나 씨를요.”

 

 하나는 재원이 하는 말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원은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덧붙여 말했다.

 

 “약은, 설하 씨를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시면 안 됩니다.”

 

 그 말과 함께 재원은 정원을 떠났다. 혼자 남은 하나는 물끄러미 약을 바라봤다. 붉고 투명한 알약이다.

 

 *

 그 날 밤 재원은 사무실에서 온갖 서류들을 가방에 넣었다. 재원은 흰 가운을 재원의 의자에 걸었다. 재원은 태연하게 서류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는 캄캄했다. 그러나 창 밖의 달빛이 재원의 모습을 비췄다. 그의 흰색 머리와 흰색 셔츠는 달빛에 파랗게 보였다. 복도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더 걸으니 깔깔깔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재원이 이곳에서 지낸 지도 2년이 지났지만 휴림정신병원의 밤만큼은 암울하고 꺼림직했다. 재원은 무사히 병원 밖 정원으로 나갔다. 이젠 커다란 대문만 통과하면 됐다. 재원이 몰래 복사한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낼 때 재원 뒤에서 재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재원 선생님.”

 

 재원이 뒤를 돌아보자 배가 불록 나온 경비원이 후레시를 재원에게 비추며 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하고 계시나요?”

 “그게….”

 

 재원은 생각한 후 답했다.

 

 “산책 중이었습니다.”

 “한밥 중예요?”

 “네. 조용히 사색하고 싶어서요.”

 

 경비원은 알겠다는 듯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이곳이 정신병원이다보니 낮에는 별의별 사고가 생겨 시끄럽긴 하죠. 그런데요 선생님 당분간은 늦은 시간에 산책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평소 푸근한 인상을 가진 경비원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예민해보였다. 계속 주변을 살폈고 얼굴에서도 걱정이 스쳤다.

 

 “무슨 일 있나요?”

 “엊그제 수상한 남자가 이곳에 들렀습니다.”

 “수상한 남자라뇨?”

 “정장을 입은 남자였는데, 그런 남자가 한 다섯명 정도 됐어요. 입원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곳에서 일을 하러 온 건 더더욱 아니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더군요.”

 “저 말입니까?”

 “네. 재원 선생님이요. 선생님 방이 어딨는지, 평소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주 코치코치 캐물었어요.”

 

 경비원의 말에 재원은 한층 더 초조해졌다.

 

 “그래서 알려줬나요?”

 “당연히 알려주지 않았죠. 그러자 이번에는 단발 머리 여자에 대해 물었습니다. 최근에 퇴원한 그 여자 말예요. 수상한 사람들 같아 바쁘다는 핑계로 내보내긴 했는데 영 깨림찍해서 이렇게 밤마다 경비를 돌고 있는 거예요. 재원 선생님 조심하세요. 정부에서 보낸 사람들 같은데 행동이며 표정이며 모든 게 이상했습니다.”

 

 재원의 표정은 파랗게 질렸다. 푸드득 하고 하늘 위로 까마귀가 날았다. 경비원은 재원에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이만 병원 안으로 들어가시죠.”

 

 경비원은 손전등을 병원을 향해 돌렸다. 경비원은 손전등이 비춘 방향으로 걸었지만 재원은 꼼짝하지 않았다. 경비원은 그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재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선생님…?”

 “경비원님 저는 오늘 이곳을 떠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곳을 떠나 다시는 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 휴림정신병원은… 그보다 이렇게 나가시면 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재원은 주머니에서 복사한 열쇠를 꺼내 커다란 대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그러나 열쇠는 돌아가지 않았다. 재원은 열쇠꾸러미에 있는 다른 열쇠를 꽂으려 했지만 경비원이 자기 열쇠를 대문에 꽂아 문을 돌렸다. 대문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경비원은 푸근한 미소로 말했다.

 

 “제 아들이 썬시티에서 선생님께 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 이후 상태가 많이 호전돼 지금은 무려 선생님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세상의 빛이예요. 어떤 일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일이라 믿어요.”

 

 재원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재원은 경비원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휴림정신병원을 나왔다. 그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휴림정신병원을 눈에 담았다. 시들어버린 꽃과 나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적갈색 건물, 건물을 에워싼 담장넝쿨은 마치 재원을 감싸는 족쇄 같아 늘 불쾌했다. 재원은 본관 꼭대기에 걸려 있는 다리 짧은 적십자가를 바라봤다. 재원이 의사가 되기로 한 것은, 푸르게 빛나는 저 십자가처럼 누군가를 구해주기 위함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까만 하늘엔 보름달이 세상을 은은하게 비췄고, 달 아래의 파란 인간은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재원은 허허벌판의 공터에서 불을 지펴 자료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재원 뒤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재원이 뒤를 돌자 차가운 금속이 재원의 이마에 닿았다. 총이다. 경비원이 말한대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재원 앞에 나란히 섰다.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재원에게 물었다.

 

 “약은?”

 “처분했습니다. 치료제 실험이 성공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환자는 왜 퇴원을 시켰지?”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남자는 웃었다.

 

 “넌 휴림정신병원이 정말로 병원이라고 생각하나? 그곳은 쓰레기통이다. 필요없는 사람들을 한 데 모아두는 곳.”

 

 남자는 재원에게 다시 물었다.

 

 "약은?"

 "실패한 약이라 처분했습니다."

 "환자는 왜 퇴원시켰지?"

 "아픈 곳이 없어 퇴원시켰습니다."

 

 남자는 재원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는 재원에게 말했다.

 

 “너, 진실을 알고 있는 거지?”

 

 재원은 침을 삼켰다. 재원이 입을 열려고 하자 커다란 총성 소리가 크게 울렸다. 새들은 다시 또 푸드득 소리를 내며 하늘 위로 날았다. 재원의 손에선 마저 태우지 못한 서류가 떨어졌다. 바닥 위로 떨어진 서류 상단에는 “신약, 레베레티: 잃어버린 감정을 되살리다.” 라고 적혔다. 서류는 재원의 피로 젖어갔다. 그로 인해 감정이라는 글자가 붉게 번졌다.

 

 받는 이: sulhahaha@minimoni.com

 

 “설하 씨.

 설하 씨에게 부탁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긴 게 아닐까 걱정도 되네요.

 완성한 치료제, 레베레티는 정부에 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설하 씨가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시기상 설하 씨에게 위험을 안긴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탁할 곳이 설하 씨 밖에 없더군요. 정부의 억압이 잠잠해질 때쯤, 어디든 좋으니 레베레티를 팔아주세요. 오라클 클럽이 그 장소로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라클 클럽에선 이미 레베레티 제로가 판매되고 있으니까요. 설하 씨 앞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검은색 단발머리에 고양이 눈매를 한 여자입니다. 이름은 하나, 유하나예요. 그녀를 통해 설하 씨에게 레베레티를 전하겠습니다.

 

 추신:

 정부를 믿지 마세요. 대신, 설하 씨의 생각, 감정, 경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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