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헬리안투스 리비안의 죽음
숲의 안쪽에서 들리는 낮은 저음에 헬리안의 눈동자가 위쪽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묵직한 발걸음이 천천히 제 앞으로 다가오자, 헬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곧이어 제 시야로 들어온 남자의 얼굴에 그대로 숨을 멈췄다.
머리를 감싼 두건과 코와 입을 가리고 있는 가면, 그 사이로 번뜩이는 커다란 청색 눈동자는 날렵한 눈매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긴장 풀어. 난 함부로 꽃을 건드리는 놈은 아니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그러나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순 없었다. 이 자도 저를 노리는 사내 일지 모르니까.
“흑발인줄 알았는데, 머리가 붉어졌네?”
“!”
“신기하네.”
“....”
“그나저나 용의 눈물이 리오에서 발견되다니.”
그제야 상황이 납득되기 시작했다. 용의 눈물은 오티움의 마법능력을 잠재우는 것은 물론, 온몸을 마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용의 눈물은 셀티오피에서만 구할 수 있을 텐데, 엘루드는 대체 어떻게 구한 것일까.
그는 더 이상 미동이 없는 엘루드의 몸을 수색하더니, 이내 약병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헬리안을 놀라게 했다. 엘루드는 활에 맞았지만, 여전히 그의 몸은 불타고 있었다.
그런 몸을 겁도 없이 만진다?
“이 병을 가져가진 않을 거야. 용의 눈물은 흔적조차 남지 않거든.”
그는 다시 약병을 엘루드의 몸 안쪽에 넣어두곤, 헬리안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불꽃을 건드린 녀석의 죄가 묻히게 되지.”
저를 도와주려는 사람인 건 맞는 것 같은데, 그의 표정은 어딘지 서늘했다. 심지어 이 와중에 장난기까지 보이는 걸 보면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 도와줄게.”
그의 커다란 팔이 내려와 볼을 쓰다듬자, 헬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지 마, 불꽃. 난 불꽃을 헤치지 않으니까.”
그의 커다란 손이 내려와 볼을 감싸자, 헬리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긴장 풀어. 헤치려는 게 아니니까.”
그 순간, 부드러운 무언가 제 입술에 닿았고, 놀란 헬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입맞춤이라니, 머릿속으로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떼어지지 않는 입술에 손끝으로 힘을 줘 불을 피워내려는 순간, 알싸하게 살아나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자, 입술 주변으로 굳어있던 감각들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고, 손끝이 움직여졌다.
힘없는 눈꺼풀을 깜빡이는 찰나 부드러운 입술이 떨어졌다. 얼굴을 보려는 순간, 아슬하게 걸쳐있던 가면이 그의 입과 코를 가렸다.
“오늘 본 불꽃은 비밀로 할 테니, 나중에 보자고.”
남자는 뒤돌아 가버렸고,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헬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풀어진 마비에 몸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
탁탁탁탁-!
“부원장님! 부원장님!!”
푸르스름한 새벽, 뒤늦게 눈을 뜬 치유사 메리는 촛불이 흔들리는 램프를 손에 들고 부원장실로 달려갔다.
왜 갑자기 잠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저 멀쩡히 환자의 차트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벌컥-!
“부원장님!!”
“아, 깜짝이야!”
집무실 책장에 턱을 괴고 졸고 있던 아메린느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뜨며 메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헬리안이 안 보여요!”
“아, 난 또 뭐라고! 헬리안이 안 보이는 게 하루 이틀이야? 어디 숨어서 잠이라도 자고 있겠지. 겨우 그거 가지고 이렇게 달려와서 사람을 놀라게 해?!”
아메린느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메리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랑 당직인데, 제가 실수로 깜빡 졸아버렸어요! 근데, 헬리안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아요!”
“아니, 그니까-”
“다 돌아다녀 봤는데 없어요! 치유원 다른 곳을 찾아도 안 보이고요! 숙소에도 없어요!”
“마구간엔! 가 봤어?”
“치유원 정문이 열려 있었어요! 정문 앞에 이게 떨어져 있었고요!”
메리가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신발 한 짝을 들어 보이자, 익숙한 가죽 구두에 아메린느의 표정이 굳어졌다.
덜커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선 아메린느는 메리와 함께 치유원 복도를 달려갔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치유원을 지키는 보초병들을 불러 근처를 수색하라 명한 그녀는 뒤늦게 치유원에 모두가 그 시각 잠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숲과 도시 인근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 비가 그친 리오나린은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안돼-에!!! 안돼에... 허헉.... 헉...흐읍..”
“헬리-아안!!!”
“안돼에...흡..흑...”
치유원 숲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기사의 시신이 발견됐다. 근처 강가에는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주검이 찢어진 치유복을 입고 둥둥 떠 있었고, 수사관과 치유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위 치유사들은 어린 견습 치유사들을 끌어안고 울었으며, 부원장 아메린느는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궁은 발칵 뒤집혔고, 기사의 몸을 수색한 결과 투명한 약병이 나오면서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다.
"용의 눈물?!"
“감히 전하의 총애를 받는 치유사를 건드려?!”
“안 그래도 단장 달고 치유원을 그렇게 들락거리더니! 이 몹쓸 놈 같으니라고!”
“그 몹쓸 놈까지 죽었는데 어쩌려고!”
“피안타 가문이라고 했지?”
“레논님은 지금 어디 계셔?”
“쓰러져 누워계신대!”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헬리안님을...레논님을 이을 유일한 천재 치유사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리오나린의 사람들은 헬리안의 장례를 치르며 슬픔에 잠겼다. 소문은 리오나린을 떠나 리오 전체에 퍼져 피안타 가문은 손가락질을 당했고, 그들은 도망치듯 리오를 떠났다.
아리따운 미모의 치유사 헬리안투스 리비안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대외적으로는.
***
헬리안이 죽고 열흘이 지났다.
슬픔에 잠겨 있던 리오나린은 점차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녀는 잊혀져 갔다. 반면, 그녀를 곁에 두었던 치유원 기숙사 친구들인 레서와 펜시, 메리는 부원장 아메린느의 부름으로 늦은 밤 부원장실에 불려 갔다.
“메리 골드, 펜시 아지스, 레서 셀라딘.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 시간부로 하는 이야기들은 절대 바깥에서 발설해선 안 돼. 알겠지?”
아메린느의 엄숙한 표정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 수 있지?”
“네, 약속할게요.”
“물론입니다, 부원장님.”
펜시와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레서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야..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돼요?”
겁먹은 레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하자, 아메린느는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럼, 레논님이 너희를 가만 두지 않으실 거야.”
“....그럼, 그냥 안 들으면 안 되나요?”
레서의 말에 펜시가 어깨로 툭 치며 속삭였다. 궁금하지 않냐고.
그제야 레서는 궁금하긴 했는지 달라진 표정으로 아메린느를 바라보았다.
“지..지키겠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레서의 답에 그제야 아메린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크룩 치유원 지하에는 오래전부터 몰-래 치유를 받아야 하는 환자들을 아주 조용-히, 은-밀하게 치유해주는 치유사가 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는 아메린느에 세 여인은 집중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치유사의 이름은 아무도 모르지. 환자들 또한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부르는 하나의 이름은 있지. 얼굴 없는 치유사.”
“얼굴 없는.... 치유사요?”
“얼굴이... 없어요?”
겁먹은 레서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메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얼굴이 왜 없어요? 얼굴이 없으면 치유를 어떻게 해요? 눈으로 상처를 봐야 치유를 할 거 아니에요?”
메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아메린느는 말했다.
“물론, 그 치유사는 얼굴이 있어. 눈도 있지. 다만, 치유를 하는 동안엔 검은 두건을 쓰고 얼굴을 가려야 해. 그래서 얼굴 없는 치유사라고 불리는 거야.”
아메린느의 말에 세 명의 여인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데, 의문이 들었다. 많고 많은 크룩의 치유사 중에서 왜 하필 자신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오늘부터 너희는 그 얼굴 없는 치유사를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될 거야.”
"예?"
“저희가요?”
“왜 저희가....?”
그녀들이 굳어진 표정으로 묻자, 아메린느는 입가를 느슨하게 올리며 인자하게 말했다.
“그 치유사가 너희를 지목했기 때문이야.”
***
“아니, 할 일도 많은데 대체 우리가 왜 누구 심부름을 해야 하냐고! 고위 치유사가 된 지 몇 년인데 누구 뒷바라지를 하라는 거야!”
오른손에 램프를 들고, 왼손은 치유복 치맛자락을 잡은 메리가 걸음을 옮기며 한탄을 했다. 반면, 그녀의 뒤로는 팔을 붙잡고 바짝 붙어서 걷는 펜시와 레서가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거 맞지?”
“나... 나 토할 것 같아.”
레서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하자, 메리가 잔소리를 했다.
“아까 저녁 많이 먹어서 그런 거잖아! 그리고, 어차피 여긴 치유원 지하실이야. 맨날 이 위에서 일했는데, 뭐가 무서워? 문제는 왜 우리를 지목했냐 이거야!”
메리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짜증을 내듯 말하자, 레서는 가슴을 붙잡고 말했다.
“아, 나 속 진짜 안 좋은데..? 어떡하지?”
“참아봐, 좀!”
레서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가던 펜시는 앞서가는 메리를 겨우겨우 뒤따라갔다.
다행히 복도는 그리 어둡지 않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 걸린 램프 등이 통로를 비추고 있어 오히려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바닥은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자주 왕래를 하는 모양이었다.
“먼지가 없어. 진짜 여기 누가 사나 본데?”
한참을 걷던 메리가 신기하단 표정으로 바닥과 벽을 살피며 말하자, 펜시도 고개를 돌려 램프 등을 바라보았다.
“램프 등도 깔끔해. 자주 닦는 것 같은데?”
“근데 왜 우리를 지목했을까? 우리에 대해서 아는 것도 아닐 텐데?”
레서가 한참 뒤에서야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자, 메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참 빨리도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잘 때 치유원 위로 올라와서 몰래 보나?”
펜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레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직 설 때 본 적 있어? 얼굴 가린 치유사?”
펜시가 고개를 젓자, 메리가 미간을 좁히며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치유할 때 얼굴을 왜 가리겠어! 보여주면 안 되니까 가리는 거잖아! 근데, 치유원으로 올라와서 우리를 보겠어?!”
그제야 레서와 펜시가 짧은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덜컹-
“힉!”
“어!”
“어억!”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마찰음에 그녀들은 멈춰 서서 굳어버렸다. 놀란 표정으로 숨을 죽인 그녀들은 복도 끝을 바라보았고, 곧이어 끼-익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자신들도 모르게 벽으로 바짝 몸을 붙여 숨었다.
“나온 것 같은데?”
메리의 말에 펜시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떻게? 가? 말아? 그냥 다시 올라가?”
“나.... 나 진짜 토할 것 같아.”
레서가 입을 벌린 채 울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메리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너 그냥 토해.”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메리는 걸음을 옮겨 앞으로 성큼성큼 움직였고, 그제야 펜시와 레서도 따라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치유복을 입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 없는... 치유사님?”
메리가 램프 등을 들어 자세히 보려고 하자, 상대는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세 치유사를 마주했다.
“가까이 오십시오.”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메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자, 옆에서 같이 서 있던 펜시와 레서도 눈이 커져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헬리안?”
메리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자, 얼굴 없는 치유사가 제 머리를 감싸고 있던 두건을 벗어던졌다. 벗겨진 두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제야 익숙한 얼굴을 기대하며 걸음을 옮기던 메리는 그대로 멈춰 섰다.
“!"
굳어진 그녀들의 표정에 헬리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헬리안은 그녀들이 예상했던 얼굴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헤.... 헬리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