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엘로이 맥칸은 리온 제국의 유일한 여성 기사였다.
그녀는 높은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황국 셀티오피의 블랙시드 기사단 단장으로 올라섰고, 황제가 가는 길목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런 그녀가 검은 병사 토벌단 시험장의 정 중앙에 나타났다. 평소와 같이 날카로운 모습으로.
스겅-!
“컥! 푸흑!.... 커으.. 읍....”
장검에 베여 쓰러진 사내가 붉은 피를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탈락-!”
시험장 왼편의 사다리 의자에 앉은 시험 감독관이 외쳤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가차 없이 울릴 때마다 부상당한 출전자와 운이 안 좋게 숨을 거둔 시신들이 수레에 수차례 실려 나갔다.
붉은 수건으로 검의 날을 닦아낸 엘로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검 끝의 포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사방에서 바라보는 관객들은 마치 시시한 경기를 보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왼편의 탁자에 앉은 시험 보조 데프론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로 벌써 232명 째....”
나무 탁자에 놓인 시험 대기 명단을 살펴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블랙시드 기사단에 들어온 지 2년. 훈련장에서 술을 마시다 본의 아니게 땡볕으로 나와 피바람을 목격하게 됐다.
단지, 시험관으로 선출된 이유 때문에.
“사망자는?”
옆에 앉아 두 팔을 겹쳐 팔짱을 낀 블랙시드의 총사령관 아단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14명입니다.”
“14명이면 적네.”
“지금 이 시험장에만 14명이고, 이곳까지 오기 전에 죽은 자들은 더 됩니다.”
“흐음.... 이대로 계속 가도 되려나?”
걱정을 하는 그의 얼굴은 무감각했다. 목소리는 가벼웠고, 애초에 이런 사태를 예상했다는 듯 눈빛에는 미동이 없었다.
“단장님을 시험 관문 상대로 올린 건 너무 불합리한 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폐하의 명인 걸 어째.”
“그거야 그렇지만...”
“무엇보다 넌 맥칸에 대해 아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만, 모르는 녀석들은 어떻게든 저 자그만 여자를 이겨먹겠다고 쉽게 본다고.”
데프론이 쓴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 시험장까지 온 녀석들은 누가 시킨다고 해서 온 게 아니었다. 다 그녀를 얕봐서 자발적으로 들어온 것일 뿐.
그걸 아는 맥칸 또한 겨우 시험장에 들어온 녀석들을 골라가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출전자들은 알량한 자존심으로 맥칸에게 덤비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맥칸의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와 얇은 다리는 검사의 단련된 굴곡이 아니었고, 아름다운 외모는 황제의 침소에 들어가 그를 유혹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블랙시드 기사단에 처음 입단하던 날 자신의 시험관이었던 아단 베어릴 사령관을 단숨에 무너뜨린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화제다. 왜소한 몸에 여린 손목이 그렇게 가뿐히 단검을 휘둘러 상대를 쓰러트릴 줄은 몰랐으니까.
“사실입니까? 입단 시험 날에 사령관님의 목에 검을 겨눴다는 게.”
“그날부터 저 녀석이 단장에 올라서는 날까지 몇 번 갈구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이겨봤자 나을 것 없는 상대는 동료로 만드는 게 최선이야.”
스겅-
푹-!
“커윽!”
다음 출전자가 1분도 채 되지 않고 맥칸의 검에 당해 쓰러지자, 데프론이 다시 미간을 좁혔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소중한 인력을 잃는 기분이 드네요.”
“전쟁이 시작되면 나약한 놈들은 죽게 돼 있어. 그런 녀석들이 여기서 걸러지는 것뿐이야.”
“이건 시험이지 않습니까.”
“전장은 시험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곳보다 더 치열하고 피 튀기는 곳이지. 병력을 모으겠다고 백성들을 모으는 순간 민심은 두려움으로 움츠러들고,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아. 자진해서 나서게 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지.”
아단의 말에 데프론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강제성을 없애고 대가성으로 토벌단을 모집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허나, 이렇게 미리부터 죽는 걸 보는 건 안타까웠다.
“검은 병사는 어차피 불로 태우면 죽는 거 아닙니까?”
“불에 태워도 죽는 건 아니야. 굳어버리는 거지. 굳혀서 아예 흔적조차 없이 태워야 사라지는 거고.”
데프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검술 가지고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험을 치르는 거지. 검술 외에 그 이상을 가진 녀석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아단의 말에 데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맥칸은 머리도 좋았다. 그녀가 단기간에 단장의 자리에 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총명한 머리는 인재를 고를 줄 알았고, 상대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는데 능했다. 그래서 황제는 시험의 최종관문에 그녀를 세우기로 했다. 그녀를 기준으로 하면 누구든 최고를 뽑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최고들을 모아두면 적어도 죽여도 죽지 않는 검은 병사를 무찌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사령관님은 서북 전쟁에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검은 병사들이랑 싸워 보셨습니까?”
데프론이 영웅담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묻자, 아단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접경지에 주둔했었지.”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림으로 보기엔 검은 괴물같이 생겨서 눈은 시뻘겋던데요. 정말 그렇게 생겼습니까?”
아단은 얕은 숨을 쉬었다.
"나도 그림으로만 보고 싶다."
"...예?"
데프론이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그의 손은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검 집에 검을 뽑아 들어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사람의 형태를 지녔으나, 사람이 아닌 그것. 그것은 온통 검은색의 괴물이었다.
그들은 칼로 베어도 죽지 않았고, 갈라진 몸으로 돌아다녔으며, 사방에 흩뿌려진 검은 피는 지렁이처럼 꾸물거리며 인간의 몸속으로 침투해 또 다른 검은 병사를 만들어 냈다.
베어도 죽지 않는 존재가 나타나자 전쟁에 참여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말 그대로 패닉에 도달했다. 끝이 없는 공포에 세상이 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순간. 거센 불길이 퍼지며 검은 병사들을 덮쳤고, 그들은 자지러지듯 발악했다. 서서히 굳어가며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꿈틀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고, 말로만 듣던 지옥 불을 보는 것 같았다.
“붉은 눈은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된 녀석들이지.”
아단의 말에 데프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온통 다.. 말입니까?”
“눈동자 또한 흰자는 사라지고 검은색이라 어디가 눈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지.”
“그럼... 사령관님은 그들을 죽여 보셨습니까?”
“죽였지. 불씨가 답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묵직한 아단의 답변에 데프론은 입을 다물었다.
토벌단이 모집되면 곧 제국을 돌며 토벌전에 참전해야 하는데... 과연, 제가 그 안에서 버틸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데프론이 소리 없이 한숨을 쉬는 순간, 아단의 눈이 한층 가늘어졌다.
“저거.... 여인 맞지? 사낸가?”
아단의 말에 고개를 돌려 시험장 입구를 바라본 데프론은 미간을 좁히고 눈을 깜빡였다.
하얀 프릴이 달린 셔츠에 짙은 붉은색 정복을 입은 자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붉은 가면을 쓰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이.
“머리는 여인 같은데 복장은 사내군요.”
“체구도 여인이야.”
“그러게요.”
“손에 검도 없이 들어온 건가? 시험은 어떻게 통과하고 들어온 거지?”
검은 둘째 치고 불 붙일 활이라도 가지고 나왔다면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빈손으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걸까.
***
시험장의 객석에 앉은 모두가 수군거리며 붉은 가면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반면, 여인을 마주한 엘로이는 손에 든 검을 아래로 내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이 제국에 유명한 기사라 할지라도 무기조차 들지 않은 자에게 검을 휘두르는 건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대체 이 여인은 무슨 연유로 저런 사내의 차림을 하고 나타난 것일까.
“검을 들지 않고 이곳까지 올라왔나?”
“그렇단다.”
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마치 아랫사람에게 말하듯.
그러나 생각보다 젊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엘로이는 얕은 숨을 쉬었다.
“빈손으로 나와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지?”
여인은 두 손을 허공으로 들었다. 순간,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손끝을 통해 화르륵- 피워져 시험장의 테두리를 감쌌다.
“부.... 불?”
“불이야?!”
시험장에 있던 모두가 놀라움에 떠들썩해졌다. 멀찍이서 바라보던 아단과 데프론도 눈동자가 번쩍 뜨여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제일 놀란 것은 엘로이였다.
자신의 주위로 원을 그리듯 불길이 이어지자, 엘로이의 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여인이 마법사라면 오티움에서 시험을 보면 된다. 그러나 오티움으로 가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레니에 크룩. 불을 관장하는 오티움이다. 검은 병사 토벌단에 지원한다.”
순간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엘로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레니에 크룩이라고?”
“내 이름을 아는 모양이구나.”
“레니에 크룩은 20년 전에 처형당해 죽었다.”
“맞아. 황제 릭먼 크레이그의 손에 죽었지. 지금 네 주인으로 있는 그 인간에게.”
여유로운 목소리는 가면에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었다. 해서 그녀가 긴장을 했는지 정말 여유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 시험은 검은 병사를 토벌하는 토벌단원을 뽑는 시험이다."
"알고 있다."
"20년 전 검은 병사를 만들었던 장본인이.... 다시 출몰한 검은 병사를 토벌하겠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내가 만들지 않았다. 오명을 쓴 것뿐이지. 해서 그 오명을 벗기 위해 왔다."
엘로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가면을 벗어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여인은 가면 너머로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였다.
빛을 받아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익숙해 순간 엘로이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벗지 않고는 토벌 단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럼, 황제를 만나게 해 주면 된다. 황제의 앞에서 가면을 벗도록 하지. 제법 재미있는 그림이 펼쳐지겠네.”
엘로이의 눈동자가 한층 가늘어졌다. 그녀는 레니에 크룩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능력은 토벌단에 필요하다.
생각을 거듭하던 엘로이는 점점 제 다리 쪽으로 느껴지는 열기에 시선을 내렸다. 단순히 원형의 모양으로 불길을 낸 줄 알았는데, 그 불길이 점점 더 작아지면서 저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정도 능력이라면 전장에 나가서 검은 병사를 무찌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금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머뭇거리던 엘로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시험관 대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통과!”
시험장에 울리는 우렁찬 엘로이의 목소리에 관중석에 있던 모두가 놀라서 감탄을 뱉어냈다. 그것은 몇 시간 만에 나온 첫 통과였다.
***
“폐하, 토벌단 지원자 중 한 여인이 폐하를 뵙고자 합니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살피던 릭먼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인?"
"예, 폐하."
"여인이 맥칸을 이겼다고?"
그의 앞에 보고를 하러 온 보좌관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인이 맞습니다. 맥칸 단장이 직접 통과를 외쳤다고 합니다, 폐하.”
사내도 아니고 여인이 엘로이를 이겼다니. 엘로이와 같은 능력자가 나타난 것일까?
놀란 릭먼은 재차 확인하듯 물었고, 보좌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니 말했다.
“헌데, 폐하. 그 여인의 이름이... 조금 특이합니다."
보좌관이 불안한 표정으로 목을 흐흠- 가다듬으며 말하자, 릭먼은 미간을 좁혔다.
"이름이 무엇이길래."
“레.... 레니에... 크룩이라고 합니다.”
“뭐?!”
순간, 릭먼의 눈동자가 충격과 당황으로 동요하자, 보좌관은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말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명확하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머리색과 눈동자의 색이 매우 흡사, 아니... 비슷하다고 합니다.”
“레니에 크룩과 말이냐?”
“예, 폐하.”
“죽은 그 레니에 크룩과 말이냐?”
릭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확인하자, 보좌관은 입술을 달싹이며 확인사살 하듯 말했다.
“불의 능력도... 쓴다고 합니다.”
“!”
릭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레니에 크룩은 20년 전 제가 처형시켜 죽였다. 사칭을 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불의 능력까지 쓴다니.... 그녀는 대체 누구인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