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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알타이르 관측 일기
작가 : 작도
작품등록일 : 2022.2.26

소외된 것들이 모여드는 웜홀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주 비행사였던 물리학자와 견우성, 알타이르로 떠난 연인의 이야기.

 
알타이르 관측 일기 - 7
작성일 : 22-02-26 18:18     조회 : 154     추천 : 0     분량 : 7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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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과 성태가 약 사오 년 간 몸담은 학교는 지방 주택가 근처에 위치해서 소위 대학가라는 것들이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을 상대하는 조그마한 술집과 노래방, 그리고 몇 체인들이 고작이었다. 십 년이 흐르면 강산마저 변한다는데 몇 년이 흐르더라도 아담한 대학가는 작고 복작거리는 채로 영영 머물 것 같았다. 정인은 누가 술에 취해 머리라도 박았는지 가장자리가 오목하게 파인 철제 테이블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막 끓인 어묵이 안주로 나왔다. 양은냄비에선 알싸한 청양고추 냄새와 함께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알루미늄 호일을 덮은 일회용 접시에 가지런히 펴진 파전은 이미 정인이 한 구석을 찢어 놓은 후였다. 성태는 젓가락으로 파전을 깨작이다 잔을 달라는 정인의 손짓에 순순히 잔을 건넸다. 그러고는 잔을 채우기 무섭게 입안으로 털어냈다. 와. 정인이 감탄사를 뱉었지만 정말 순수하게 감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좀 달리네.”

  “누나는 내 심정 몰라요….”

  “어, 그래, 나 다 몰라.”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올리면 테이블이 살짝 기울었다. 정인은 어묵 국물이 넘칠 듯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든 말든 성태는 손깍지를 끼고 뒷머리를 앞으로 당기며 고개를 테이블에 푹 처박을 뿐이었다. 음식을 나르던 종업원이 정인이 내뺀 술병에 부딪혔다. 말총머리에 얼굴만 한 금테 안경을 낀 대학생이었다. 정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급히 손을 거두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그런데 병은 그렇게 함부로 들고 계시면 안 돼요….”

  “미안. 소영아…. 오늘 얘가 아주.”

  바닥이 꺼져라 깊은 숨을 내쉬는 성태를 가리키며, 정인은 눈치껏 머리 곁에 검지를 세우고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소영은 다크서클이 푹 가라앉은 얼굴을 겨우 끄덕이더니 다시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갔다. 정인은 도로 동그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고 허리를 꺾었다. 그 순간 쇠 쟁반이 타일에 떨어지는 쨍한 소음이 가게 전체에 울렸다. 소영과 이름 모를 종업원이 함께 쟁반이며 그릇을 갈무리하는 광경이 보였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소주 한 병을 더 받을 요량이었지만 종강을 맞이해 분주해진 가게 안에서 소영이 정인을 신경써줄 여력은 도무지 없어 보였다. 정인은 어깨까지 길어진 단발머리를 손으로 어색하게 더듬었다. 성태는 간장 종지에 어묵을 꾹꾹 내리찍고 있었다.

  “먹을 정신은 있네?”

  “그것도 안 하면 송장이지. 술 마실 정신도 있는데 어묵 먹을 정신이라고 없겠어요.”

  “… 너 멀쩡한 거 같은데.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니야. 하나도 안 멀쩡해요.”

  성태가 의구심이 짙게 섞인 정인의 물음을 뚝 잘라먹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양 정인이 성태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성태는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어묵을 베어 물었다. 입에서, 또 미처 식지 못한 어묵에서 안개처럼 김이 나부꼈다. 정인은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고 성태는 절대 정인이 보는 앞에서 담배를 물지 않았지만, 정인은 무심코 그 하얀 기척이 성태가 내리 피우던 담배 연기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술병을 내려놓기 무섭게 정인이 찬물을 따라 성태 앞에 놓아주고 타박했다.

  “오뎅 완전 뜨거워…!”

  “입 다 뒤집어지겠다. 나 어쩌다가 이런 애랑 다니게 됐지?”

  성태의 머리카락이 비바람이라도 맞는 듯 휘날렸다. 정인은 비닐로 덮어둔 벽면에 삐죽 튀어나온 에어컨을 올려다보았다. 싸구려 폼폼에서 떼낸 것 같이 반짝거리는 조각들이 바람 나오는 구멍 앞에 빼곡하게 붙어 퍼득거렸다. 뜨거운 어묵을 삼키느라 고생깨나 했던 성태는 이제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을 손으로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한여름의 열기가 무색하게 에어컨 바람은 찼다. 정인은 젓가락을 한 쪽씩 나누어 잡고 파전을 마저 찢어놓았다. 한 젓가락을 들고 간장에 찍으려던 찰나, 초간장에 오징어 다리가 빠져 간장 방울이 곁으로 살짝 튀었다. 정인은 오징어를 걷어내고 익숙하게 소주병을 들었다. 성태의 잔이 또 비었다. 그동안 정인의 잔은 한 번도 비워지지 않은 채였다. 성태는 제 뺨에 양 손을 착 얹고 눈을 몇 번 깜빡대다 아랫입술을 내밀며 웅얼거렸다.

  “누나, 사람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넌 참 뜬금없다….”

  정인이 소주를 따르다 말고 가자미눈을 떴다.

  “몇 달 동안 내내 고민한 주제예요.”

  “석사 논문은 철학으로 낼 생각이니?”

  “아직 늦지 않았잖아요. 이참에 철학 대학원으로 환승?”

  “미쳐가지고. 너 같은 애가 뭐 하러.”

  정인은 한쪽 눈을 감고 뚫어져라 녹색 병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충 라벨 중간쯤에 소주가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성태 혼자서 단 몇 분 만에 반병을 마신 셈이다. 그쯤 되니 문득 겁이 났다. 정인은 성태의 자취방이 어디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까지 성태를 부축해 데려다줄 자신이 없었다. 정인은 성태보다 두 뼘이나 작았고, 만취한 성태는 종종 길가에 주저앉아버리기도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병원 신세를 지던 정인으로서는 그렇게 나자빠진 성태를 옮길 묘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정인은 소주병의 입구에서부터 라벨에 가려진 자리까지를 엄지와 검지로 짚고 성태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적당히 마셔. 이거 너 혼자 다 마신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특별히 친한 친구가 있어. 주변에 너 업어다 줄 사람도 없고. 확 길에 버려버릴까 보다.”

  “… 업어다 줄 사람? 그치, 없지.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지금 팍팍 꼬인 것 아냐. 그건 어떻게 알았대요.”

  “알긴 내가 뭘 알아. 엉망이네 진짜.”

  추위에 닭살이 돋는지 성태가 목을 부르르 떨었다. 정인은 묵묵히 파전 세 점을 연달아 입에 우겨 넣고 물을 반 넘게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는데 테이블에 웬 소주병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면 다시 좁은 통로를 다니며 그릇을 나르는 소영의 말총머리가 보였다. 평소에는 직접 서비스 달라고 갖은 애교를 부린 후에야 마지못해 주더니. 회식 2차라도 하는 분위기였으면 옳다구나 좋다고 받았겠지만 성태가 언제 인사불성이 될지 모르는 오늘 같은 날에는 낭패일 뿐이다. 그런 정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태는 허벅지 사이에 손을 끼우고 어깨를 움츠린 채 무슨 생각을 한참 하고 있었다.

  “말을 말자. 나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래서 이거 연애 상담이야? 너 애인 있는 줄은 몰랐네. … 팔자 좋다야. 연애도 하구.”

  “몇 년을 사귀었는데요. 그런데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고. 지금, 어. 유학 갔어요. 아마 앞으로는 더 먼 데 갈 걸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럴 거예요.”

  “야…. 사귀고 있는 건 확실해? 너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고?”

  “와. 그거 확실히 상처네.”

  턱을 괴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울상인 성태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정인은 제 입술을 손으로 한 대 찰싹 때렸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끔 성태를 힐난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배부른 고민이나 하며 세상 고난은 혼자 다 진 듯 머리를 싸매다 다음날만 되면 멀쩡해지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도 그런 본능이 오로지 성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인의 깊은 내면 일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인지 감당하지 못할 말을 쏘아붙인 후에는 자기 입을 때려야 속이 꼭 편안했다.

  달그락. 정인의 움직임에 맞춰 철제 테이블에서 그릇들이 떨어졌다가 일순간 다시 내려앉았다. 성태는 일렁이는 술잔의 표면을 바라보다 인생만큼이나 퍽퍽한 어묵을 우적우적 씹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사람 좋은’ 한정인은 마음이 잔뜩 불편해져버렸다. 예전부터 남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인가. 그럴 수도 있지, 비록 ‘아이’는 더 이상 아니지만. 착한 아이 ‘콤플렉스’일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수식은 모두 떼고 그저 ‘콤플렉스’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C-O-M-P-L-E-X. … 그런데 어쩌다 이까지 왔더라?

  신경을 타고 이온의 형태로 흘러가는 신호는 100m를 10초 안에 주파한다. 하나의 신경에 수어 개의 신경이 붙고, 또 그 수어 개의 신경에서 다시 수십 개의 신경이 갈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은 페스트균을 닮았다. 빠르기도 더럽게 빠르고, 일단 자체로 더러운 구석이 있다. 한 번 묻으면 이미 걷잡을 수 없다는 점도 비슷했다.

  진짜 세균이든 생각이든 소독을 하려면 알코올이 특효였다. 정인은 술잔의 매끈한 면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잔을 그대로 꺾어 들이켰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술병에 입을 대고 정수기 통 바꿔 끼우듯 쭉 마셔버렸다. 성태는 잠깐 놀란 눈이었지만 곧 제 본론으로 돌아왔다. 영리하긴. 정인이 속으로 우물거렸다.

 

  그날은 열대야였다. 에어컨 바람이 몹시 찼던 가게를 나오자마자 건조한 열풍이 뺨을 때렸다. 정인은 제 걸음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성태를 끼고 움직여야 했다. 성태는 이미 인사불성이 된 지 오래였다. 빨간색 앞치마를 두른 소영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정인의 등을 받쳐주었지만, 소영이 나올 수 있는 곳은 골목이 다였다.

  낡은 대학가의 골목을 나오면 제법 한산한 대로변이 나왔다. 원래부터 입지가 안 좋기로 유명한 동네라 지하철조차 지나가질 않았다.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서 심야 버스가 아니면 모두 끊긴 후였다. 정인은 성태의 자취방 근처에 심야 버스 노선이 있는지 잠깐 생각했지만 곧 단념했다. 다행이라면 성태가 사는 동네는 대학가 근처의 원룸촌이라 걸어서 이십 분이면 갈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대학가는 특이하게도 강변이었다. 그런대로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탈 수 있을 만큼 소담한 하천이 학교 앞으로 지나갔다. 토러스교를 건너면 오래된 아파트들이 바로 나오지만 두 사람이 갈 곳은 그쪽이 아니다. 도로 옆의 좁은 인도에는 가드레일이 강변과 도로 쪽으로 한 층씩 서있다. 가까운 신호등까지는 오백 미터를 족히 가야 했다. 강둑에서 자라난 들풀 사이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이따금 미진하게 올라왔다. 정인은 앞으로 넘어질 듯 고개를 무릎 높이까지 박은 성태의 팔뚝을 콱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습기가 쩍 올라붙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뚝뚝 흐르자 정인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늦게 찾아온 장마는 늦게 돌아가는지, 지난주 하루걸러 한 번 꼴로 비가 오던 것조차 무색하게 또 다시 하늘에는 먹구름이 꼈다.

  정인은 비 오는 날이 늘 싫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불호에 굳이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대로라면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다. 기숙사에서는 덜 마른 빨래에서나 날 법한 균의 내음이 등천할 테고 정인을 포함한 모두는 변할 것 없는 일상과 장마의 너절함에 질려 섬유 향수를 곳곳에 뿌릴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혁신이 시작되는 곳. 정문에 내걸린 대학의 자랑스러운 슬로건을 되짚었다. 그러나 학교 천장에서는 언제나 빗물이 샜다.

  살아가는 매 순간은 불행과의 타협이다. 불행이라고 별 거창한 구석은 없다. 변하지 않는 모든 것이 불행이었다. 학문을 다루는 것은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기를 다루는 일보다는 자연사를 앞둔 아흔 살 노인을 다루는 일에 가까운 것 같았다. 전자의 도약은 양자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정작 전자의 집합인 인생은 지나치게 연속적이다. 윤 교수는 그 권태에 익숙해지라며 정인의 등을 쳤지만, 정작 그럴 때마다 고개 돌려 본 성태는 한 번도 권태로웠던 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정인은 처음으로 재능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다.

  한 사람이 병에 걸려 병원에 들락날락할 확률, 차종과 사고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사는 삶은 빈 독에 물 붓는 이 순간보다 조금이나마 즐거웠을까? 노교수가 제시했던 답과는 별개로 이 물음에 대해 스스로 자답해야 하는 순간이 오곤 한다. 정인은 아니오, 라고 단호히 대답했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이 순간이 마냥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성태가 오늘 저를 붙잡고 하소연한 것이 고작 연애 나부랭이에 관한 거라면 더욱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서러운 기분이었다. 정인은 술기운에 애꿎은 가드레일을 발로 찼다가 우는소리를 하며 성태에게 머리를 박았다. 성태는 그대로 종이인형처럼 넘어지더니 한 박자 늦게 투덜거렸다. 성태의 푸른색 셔츠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났다. 방금까지 하던 복잡한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듯 정인의 두 뺨이 불그스레해졌다. 쓰러진 성태 곁으로 정인은 우두커니 멈춰 섰다. 대로변으로 하얀 견인 트럭이 반파된 승용차를 끌며 지나갔다. 정인은 술김에 그의 보험료가 다음 달 얼마나 오를지 가늠하다가 풀썩 엎어졌다.

  “성태야, 성태야아. 박성태.”

  “누나, 나 머리 아파….”

  “술 마셔서 그래.”

  거짓말이다. 방금 넘어지면서 가드레일에 머리를 부딪친 탓이다. 정인은 천연덕스레 대답하면서도 눈치껏 성태의 뒤통수를 꾹꾹 눌러보았다. 혹은 나지 않았다. 성태는 아까부터도 그랬지만 걸을 기력이 없는지 구겨진 이불처럼 가드레일에 기댈 뿐이었다. 밤바람이 미지근한 만큼 걸음도 무거웠다.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돌아본 정인은 에라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아버렸다. 여태 다리에 걸렸던 무게가 한 번에 척추로 몰려들었다.

  “그러게 적당히 좀 마시라니까….”

  “어떻게 적당히 해….”

  “그렇지! 연애, 그거 소중하지. 그래서 종강을 맞이하기 무섭게 최선을 다해 마셨지, 응. 알아. 알아.”

  “아니, 그것도 그거인데요…. 적당히 하면 날 안 봐 주잖아.”

  “또 그 얘기야. 나 네 연애 듣기만 해도 질려…. 집 가자며.”

  새벽으로 치자면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견인 트럭을 끝으로 도로를 지나는 차는 드물었다. 술집보다도 더 외로운 공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축축한 공기가 땀방울을 타고 엉겼다. 갑자기 닭살이 돋는 기분에 정인은 뒤에 기대앉은 채로 서너 시간 동안 들었던 성태의 푸념을 드문드문 떠올렸다. 연애 상담, 그까짓 거 고개 몇 번 끄덕여주고 맞장구나 쳐주다가 상대 입장에서 매서운 말 한두 마디 하면 그만이지. 정인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성태가 제 딴에 열심히 정리해서 늘어놓았던 기승전결이 도무지 정확히 잡히질 않았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인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가 뿌연 한숨을 내쉬며 성태를 응시했다. 귀까지 빨갛게 익은 채 성태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늘은 백야처럼 점차 밝아졌다. 이윽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지는가도 싶었다. 성태는 진눈깨비처럼 무겁게 떨어지는 몇 가닥의 비를 그대로 올려다보았다. 습기 어린 무거운 대기가 성태의 두 어깨 위로 침몰했다. 정인은 성태가 균형이 맞지 않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웅얼거렸던 속삭임만은 잊지 못했다. 차라리 눈이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 번도 우주의 끝이 어떤 형태일지 궁금했던 적이 없어요.”

  “뭐어.”

  어처구니없다는 듯 정인이 곧바로 되물었다.

  “그렇잖아, 찌그러지든 터져버리든, 내가 알 바야….”

  성태는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로 목을 가누었다.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숨이 유난히 옅었다. 정인은 걸어오며 방금까지 했던 생각을 도로 떠올려내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짓씹었다. 따뜻한 뺨을 감싸 쥐었다. 저 멀리에서 자동차 한 대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끼이익.

  “… 가자.”

  입맛이 유난히 썼다. 혀끝에 감돈 소주 한 잔이 꽤 오래 짙었다. 정인은 비가 굵어지니 어서 일어나자며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성태를 타일렀다. 성태는 더 이상 푸념하지 않고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가 일어섰다. 정인이 성태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태조차 진작 알고 있었던 듯싶었다. 성태는 일어나서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힘없이 꺾이는 오금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정인의 운동화 끈이 풀렸지만 묶을 새가 없었다. 당장 바닥을 본다면 잊고 싶었던 것들이 그림자에서부터 기어 올라올 것이다.

  도망치듯 걷던 정인이 한 일 분쯤 후에 뒤돌아 성태를 바라보았다. 오십 미터 뒤에서 성태가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 정인은 그제야 몸을 숙이고 최대한 빠르게 끈을 맸다.

 
작가의 말
 

 성태와 정인의 대학원 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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