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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알타이르 관측 일기
작가 : 작도
작품등록일 : 2022.2.26

소외된 것들이 모여드는 웜홀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주 비행사였던 물리학자와 견우성, 알타이르로 떠난 연인의 이야기.

 
알타이르 관측 일기 - 5
작성일 : 22-02-26 18:09     조회 : 179     추천 : 0     분량 : 8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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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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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태는 떠나는 청명의 짐을 챙겨주며 걱정을 쏟아냈다. 러시아는 설원이 유명한 만큼 춥고 외로울 텐데 자신을 데려가진 못하더라도 옷이나마 따뜻하게 챙겨가야지 않겠냐는 것이다. 성태는 국제 택배가 가격도 비싸고 느린 데다 그렇게 보낸 박스들이 죄다 찌그러져서 배달된다고 투덜거렸다. 뒤늦게 겨울옷을 받을 생각일랑 말고 넉넉하게 캐리어 두세 개를 한 번에 채워 싸들고 가라는 것이 성태의 굳은 심지였다. 그 와중에도 청명은 남의 짐을 보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서 레몬 맛이 나는 사탕을 데굴데굴 굴렸다.

  한바탕 정리가 끝나고 나면 집안이 훤했다. 금방 입어야 할 외투 하나와 여벌 옷 몇 가지를 빼고 옷장에 남아 있는 청명의 옷이란 단 한 벌도 없었다. 거의 절반이 넘게 비었다. 집에 오는 택배의 팔 할은 성태가 주문한 물건이었고 새 옷을 장만하는 것도 대부분 성태였지만 실상 짐을 빼고 나니 커 보이는 것은 오히려 청명의 자리였다. 이제 진짜 떠나는 것 같아요. 걷어둔 암막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채 성태는 웃어보였다. 청명은 자신이 금방 돌아오리라는 허울 좋은 위로 대신 제 칫솔을 버리기 전에 욕실 타일이나 한 번 닦자는 이야기를 했다.

  창문을 활짝 열면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청명은 턱을 창틀에 걸치고 넘어갈 듯 아슬아슬하게 기댔다. 청회색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가 청명의 숨에 맞춰 푸스스 흩날렸다. 이윽고 뺨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자 방충망에 난 조그만 구멍이 눈에 띄었다. 손가락으로 그물을 매만졌다. 오돌토돌한 감촉이 어디선가 뚝 끊기더니 한참 이어지지 못했다.

  “원래 나 있던 거야?”

  성태는 과장을 조금 보태 청명만큼 커다란 캐리어를 끙끙대며 현관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명의 묻는 말에 가쁜 숨을 반 넘게 섞어 되물었다.

  “응? 뭐가요.”

  “방충망. 구멍 나 있잖아. 몰랐어?”

  “그러게, 여태껏 몰랐네.”

  청명은 창틀에서 고개를 떼고 성태에게 향했다. 쓰러지듯 벽에 붙어 앉자 성태도 기다렸다는 듯이 청명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자리를 잡았다. 창가에선 노랗게 일어난 먼지가 불그스레한 일몰에 번졌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근처의 큰길 모퉁이에 자리한 휴대폰 판매점에서 틀어대던 유행가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청명은 비 오는 날에는 블루스를 틀고 화창한 날에는 유행 지난 댄스곡을 트는 주점을 떠올렸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쥐 죽은 듯 거리가 조용하다. 그러자 그저께 있었던 일이 자연히 떠올랐다.

  일주일이면 떠날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십만 원 치의 장을 본 이유는 청명 자신이 빚은 흔적이 조금이라도 이 집에 오래 남길 바랐던 탓이다. 마트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도 아침마다 토스트를 해먹겠다며 호기롭게 집어들던 식빵은 진작 카트에서 내쳤다. 지난여름 샀던 두 봉지의 식빵은 반의반을 먹고 나자 푸르게 곰팡이가 슬어 모두 내버리지 않았나. 오래도록, 홀로 살아도 외롭지 않을 듯 가득하게 찬장을 채우려 했다. 청명의 모든 자취를 사랑해왔다던 성태에게 저 없는 고요만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성태의 처지 따위 생각도 않고 꿈이랍시고 무작정 통보한 러시아, 그리고 우주 행이었지만, 그래도 청명은 몇 년의 무모한 애정을 쪼이면서 충분히 풍화된 것이다. 딱, 얕게 자비로울 만큼만.

  청명은 온갖 인스턴트 음식과 얼마 되지 않는 식재료를 파란 종량제 봉투 두 개에 나누어 담고 마트에서 나왔다. 마침 바로 앞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면서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청명이 곧장 뒷자리의 문을 연 다음 자취방 근처 큰길가 편의점 앞에 세워달라는 말을 전했다. 나이가 지긋한 기사는 손이 곱는지 두둑한 장갑을 끼고도 기도하듯 손을 비볐다. 미터기를 켜는 손길은 그래도 날쌨다. 청명은 포말처럼 희고 뿌연 김이 이는 창문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문득 성태에게 장갑 한 켤레를 선물할 것을, 하며 때늦은 후회를 웅얼거렸다.

  택시에서 내리면 아까보다도 거세진 바람이 청명을 반겼다. 청명의 뺨이 세찬 바람에 쓸려 발개졌다. 걸음을 재촉해 편의점을 끼고 돌면 가로등이 드문드문 나간 길거리가 나왔다. 대학가에서 술을 먹고 반 시체가 된 학생들은 이 길을 침대 삼아 눕는다. 회식 자리에서 진탕 퍼마신 다음 팔자로 비틀대다 이 자리에서 난데없이 벽돌을 맞았다는 학부 기계과 삼 학년의 이야기가 아무리 학교에 공공연히 퍼진대도 학생들은 바뀔 생각을 추호도 않았다. 청명은 팽팽하게 늘어나 터질 것만 같은 봉투를 다시 바투 잡고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점점이 어두운 골목길 사이로 바람만 스산하다.

  어디선가 어울리지 않는 인디 음악이 들려왔다. 원룸촌은 대학가와 애매한 옛 동네 사이에 자리해서 은근히 아귀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마저 걸어가자 쨍한 네온 빛이 도시의 얼룩처럼 너저분하게 뜨였다. 바로 앞 전봇대에 나란히 기대고 선 쓰레기들 사이로 새하얀 종이가 흩날렸다. 임대라는 대문짝만한 글자 아래로 똑같이 인쇄된 여덟 개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청명은 익숙한 숫자에 그대로 시선을 들어 어색한 음악이 삐걱대며 흐르는 지하와 소자 한두 개가 빠진 간판, 그리고 주인 되는 사람의 열한 자리 전화번호를 훑어보았다. 다시 전단으로 돌아오자 그 누구도 번호를 떼어가지 않은 멀쩡한 에이포 종이가 들어올 뿐이었다. 아무래도 자리가 쉽게 팔릴 것 같지는 않았다.

  청명은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 돌아서서 성태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우산 꽂이에 종량제 봉투를 기대놓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가끔 성태가 집에 먼저 왔을 때는 비밀번호를 다 누르기도 전에 성태가 나서서 문을 열어주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그날은 성태가 어느 술자리에 간 탓에 아직까지도 집이 비어 있었다. 어깨로 문틈을 벌려둔 후 짐부터 밀어 넣자 급작스레 숨이 찼다. 부엌과 찬장을 정리해 채우기 전 벽에 무너지듯 기댄 청명은 성태에게 전화를 할지 일순간 고민했다가 결국 단념했다.

  바깥에서는 낭랑히 녹음된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잔향처럼 은은히 들려왔다. 청명은 쪼그려 앉은 채 십 년도 거뜬히 간다는 햄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읽다가 얕은 숨을 내쉬었다. 치부를 들킨 것처럼 다급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네가 불을 삼킨 사람처럼 아파했단 걸 느꼈을 땐 이미 많이 늦어버렸지….’

  “형, 그때 내가 다음 주 인천에 큰 눈이 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비행기가 못 뜰 정도로.”

  그저께, 자정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던 성태는 청명이 바깥으로 나와서야 저편 골목길 벽에서 겨우 일어났다. 누가 해코지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하는 잔소리가 청명의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성태는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청명은 제대로 서 있기도 버거워 하는 성태의 구겨진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성태를 냅다 들쳐 업었다. 알코올에 달뜬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때면 문득 가슴이 뻣뻣했다.

  청명은 성태를 찾아내기까지는 급히 내달렸지만 성태를 업은 이후로는 유난히 느리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전기가 나간 가로등 아래 군청색 그림자 속에 멈춰 선 청명은 성태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나누려 애썼다. 힘겹게 들이마시던 성태의 호흡이 잠깐 끊겼다가 느리게 폐에서 끌려 나왔다.

  “혀엉.”

  “… 그 정도로 취했으면 잠이나 자. 그대로 침대에 눕혀줄게.”

  어느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하늘은 환한 보랏빛이었다. 한껏 묽은 물감을 붓으로 내던지듯 찍은 모양새였다. 청명은 고개를 꺾어 뿌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가 성태가 무어라 마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다음 주에…. 7일 뒤 수요일에, 엄청 눈이 올 거래. 인천에선 폭설에, 험한 눈바람까지 날린대요….”

  “그게 오면 뭐가 어떤데.”

  “그게요.”

  하얗게 엉긴 결정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청명은 이미 눈이 오고 있으니 다음 주에도 눈이 오진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는 함부로 먼저 하지 않았다. 성태는 청명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가 순간 맥이 풀리듯 늘어졌다. 한참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과연 성태의 손등에도 눈 한 조각이 날아들었을까. 차라리 공기가 너무 차서 그렇다 둘러댈까 생각하던 찰나에, 성태는 어느새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었다.

  비행기 편이 취소되면 그냥 나랑 살아요.

 

  “… 그나저나 기억하네. 필름 끊긴 줄 알았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나도 울었고 형도 울었잖아요.”

  “그것도 기억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청명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슬쩍 반대편으로 피했다. 여태 평생의 목표로 삼은 일, 그리고 결심이 한 사람의 존재로 요동치는 것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이 지구를 떠날 결의조차 없이 희미한 꿈을 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피어올랐다. 몇 초 동안 성태는 그저 미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청명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 시선이 와 닿자 청명은 더욱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청명의 자신에 대한 의심이 점차 확고해져 입안이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릴 때쯤에서야 성태는 도로 한 마디를 이었다.

  “별 얘기 아니야. 그때 일 잊어달라는 거였어요.”

  “… 응?”

  “그럴 리 없겠지만, 눈이 펑펑 와서 비행기가 못 뜨더라도 여기로 돌아오진 말라고요. 짐 싼 거 다시 풀기도 힘들고, 그래. 형 칫솔도 없을 테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청명은 헛숨을 들이켰다. 성태를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놀람의 연속이었다. 점차 어둡게 번지는 창밖의 풍경이었지만 이 방을 늘 비추던 네온사인은 오늘따라 흔적조차 없다. 그제야 안 사실이 있다면, 해질녘 성태의 방이 꽤 황량하고 차다는 것이었다.

  “너, 오늘따라 매정하다.”

  “… 이젠 나도 형을 좀 닮아보려고.”

  성태의 두 눈은 어느 봄날, 라이터 불빛이 비치던 순간보다도 진지해보였다. 성태의 말뜻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들은 청명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헤어지자는 소리를 이렇게까지 멋없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소리가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청명은 아무 질타도 하지 않고 입에서 막대사탕을 빼냈다.

  처음으로 노랫소리가 없는 저녁이었다. 손님이 드나들지도 않는 자리를 누군가 벌써 사갔는지, 아니면 팔리지도 않은 자리를 지레 뺐는지가 괜히 궁금했다. 그러는 동안 방은 더 어둑해져 그림자 몇 가닥을 구분하기도 어려워졌다. 고장 난 현관의 센서등이 이따금 빛을 내는 것 말고는 어디에서도 기척이 나지 않았다. 청명은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돌아오는 성태의 귀갓길을 상상했다. 촌스러운 네온사인도, 이름 모를 철 지난 노래들이 흘러나오던 주점도 없는, 정확히 절반이 뚝 떨어져나간 방. 청명은 외력 하나 작용하지 않는 그 순수한 고독의 크기를 과학적으로 가늠해보다 그만 포기해버렸다.

  “나는 닮지 말아야지.”

  이미 많이 늦어버린 것들이 있었다. 청명은 성태와 자신의 관계가 그러하리라고 믿었다. 성태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청명을 붙잡기 위한 처절한 이면이 있다는 것을 청명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바뀌지 않아야 할 몇 가지 명제들이 존재했다.

  “형.”

  성태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뜨였다. 잔인한 처사란 것을 직감했어도 청명은 쉽사리 입술을 떼지 않았다. 맞붙은 연한 살이 끈적하게 올라붙었다. 성태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점차 목덜미로 내려갔다. 성태는 더 물러날 곳도 없이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혀끝에 닿는 맛은 아리게 달았다. 완연한 어둠에 감겨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말로, 줄 하나에 매달려 한두 톨의 먼지와 함께 어딘지 모를 심연을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너는 끝끝내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해, 언제나 그럴 거야. 청명은 놀랍도록 무덤덤한 눈이었지만 성태의 시선이 그 검은 눈을 알아볼 만큼 충분히 어둠에 익었을지는 서로 모를 일이었다. 여태 평정을 유지하던 성태는 그 한 마디에 모래성이 무너지듯 움츠러들었다. 청명은 계속해서 굽어드는 성태의 어깨를 손으로 느리게 더듬었다. 무릎으로 성태의 허벅지를 딛고 바스락거리는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었다. 성태는 청명의 가슴에 귀를 대고 뒤늦게 느슨한 호흡을 토해냈다.

  “… 나도 언젠가는 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성태야…. 전에 내가 말했지.”

  청명은 성태가 창문의 방충망에 난 구멍을 하루 빨리 메우길 바랐다. 제 칫솔로 타일의 물때를 지우고 나서 모가 사방으로 뻗치면 망설임 없이 버리길 바랐다. 청명의 빈자리를 타인으로 채운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청명과는 달리 성태는 홀로 존재해도 영영 완벽하고 찬란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것은 청명이 성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넌 너무 꿈이 커.”

 

  그리고 다시 스프링 튀는 소리가 났다.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화면에는 시뮬레이션 창 대신 화면 보호기가 켜져 있었다. 청명은 위태롭게 코끝에 걸린 안경을 올리고 바닥에서 종이를 주워들었다. 개교기념일에 맞춰 총장이 돌린 디지털시계는 네 번째 숫자의 맨 윗부분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세 시 이십… 팔 분. 어렵사리 숫자를 읽은 청명이 긴 숨을 내뱉었다. 고작 십오 분을 잤다.

  청명은 주운 종이를 두 번 반으로 접어 바지주머니에 넣고 텀블러를 집어 바깥으로 나왔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음에도 뜨거운 공기가 훅 끼쳤다. 방금까지 살결에 스치던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흩어져버렸다. 자연과학동을 나와 오 분 정도 걸어가면 학부 물리학 수업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건물이 나온다. 바로 건물로 들어가지 않고 뒤로 돌아가면 적갈색 판자로 깔끔하게 포장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그렇게 나선을 따라 반 바퀴를 돌면 청명이 늘 담배를 피우는 테라스로 곧장 갈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을 빼면 청명은 의식적으로 하루 두 번 이상 테라스에 방문했다. 강의가 끝난 후, 그리고 오후 시간의 산책. 조교수로 임용되어 몇 년 만에 학교로 돌아왔을 때 생겨난 버릇이었다.

  청명은 건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가득 받아왔다. 정수기에 거꾸로 꽂힌 물통 속에서 수면이 울렁이는 것이 보였다. 매일같이 해왔던 행동 속에서 오차는 없었다. 청명은 텀블러를 들고 테라스의 한 구석으로 갔다. 키가 유난히 작고 구부정하게 자라는 나무가 보였다. 손목을 부드럽게 꺾으면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물이 검은 흙으로 고여 들었다.

  옮겨 심은 분재는 이 한 그루를 빼고 모두 죽었다. 정확히는 죽었다기보다 도무지 상태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서 미관상의 이유로 뽑아내버렸다는 데 가깝다. 가지와 이파리를 꺾이며 평생 살아온 것들을 맨땅에 옮겨 심었다가 도로 내버리면서 대는 핑계가 고작 미관상의 이유라니, 가혹해도 좀 가혹한 게 아니었다. 물이 땅으로 스며들면서 검은 자국을 연이어 남겼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만약 그때 망설이지 않고 커피를 뿌려버렸다면 분재들은 차라리 죽어서 이 땅을 벗어났을까, 하는 엉뚱한 가정이 청명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자라나는 단 한 그루의 분재는 그런 생각조차 부끄럽게 만들었다.

  분재는 제대로 된 나무 그늘 하나 못 만들었다. 청명은 햇빛을 받으며 바로 그 앞의 벤치에 앉았다. 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치어다보면 다시 아까 전 꾸었던 꿈이 흐린 영상으로 겹쳤다. 청명은 곧이어 몰려드는 녹진한 더위에 나무에 붓고 남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자세를 고치는데 바지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마찰음이 났다. 그제야 종이의 존재를 다시 자각한 청명이 천천히 종이를 꺼내들고 펼쳤다. 종이를 도로 읽느라 고개를 숙인 덕에 종이에는 잔뜩 그늘이 내려앉았다. 턱을 타고 미처 다 못 마신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뒤늦게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지만 이미 종이에는 동그란 흉터가 점점이 번진 후였다. 멀거니 그 자국을 바라보던 청명은 홀린 듯 꿈속에서 있었던 모든 대화들을 되짚었다.

  “모스 부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청명이 급히 펜을 찾았고, 그 다음으로는 핸드폰을 찾았다. 셔츠와 바지의 주머니를 모두 더듬었지만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청명은 무작정 구둣발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요즘 누가 그런 걸 쓰냐며 면박을 주던 성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청명은 우습게도 모스 부호의 대부분을 잊어버린 후였다. 우주로 나서고 지구에 귀환하기까지 청명은 성태에게 연락을 남긴 적이 없었다.

  다급히 출입증을 찍은 다음 계단을 오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청명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곧장 자신의 오피스로 뛰어 들어갔다.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팔꿈치로 책상을 딛고서 모스부호 표를 검색했다. 돌아오기까지는 고작 이 분이 걸렸다. 바깥에서 다른 교수의 오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청명은 잠깐 동안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손톱을 부딪쳤다가 곧 갈피를 잡고 펜을 이리저리 휘갈겼다.

  “시작하는 신호를 알릴 수는 없다. 나타낸다 해도 오히려 암호가 복잡해져서 해석하기 어려워지겠지. 모스부호의 대부분은 점과 선의 개수가 한두 개로 한정되어 있으니까, 매 자릿수는 신호의 개수라고 보면 될 거고…. 한국어 모스부호 중에서 두 번 이상 점선이 교대하는 문자는 아홉 개. 1로 표현할 수 있는 모스부호는 아, 혹은 어. 자음과 모음의 개수는 열한 개. 다섯 글자에 받침 하나거나, 네 글자에 받침 세 개….”

  점차 청명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절망에 부딪힌 마냥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사고 회로 속에서 노란색 삼각형 속 빨간 느낌표가 들어찬 경고 표시가 튀어 올랐다. 시뮬레이션 창에서 오류가 발생한 이유가 꼬리에 붙은 몇 마디의 메시지 때문이라면 성태와 청명의 관계 속에서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성태의 목적은 언제나 청명이었고, 청명의 수단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라는 사소한 몇 마디의 차이, 고작 그것 때문에.

  “‘보고 싶어요’.”

 
작가의 말
 

 네가 불을 삼킨 사람처럼 아파했단 걸 느꼈을 땐 이미 많이 늦어버렸지, 심규선 님의 Domino 속 가사입니다. 추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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