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직원들 회식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삐쳐서, 몸 상태를 핑계로 불참하고 나온 태성의 박신배 이사는 토요일 오후를 어떻게 보낼지 난감해졌다.
사람 사는 게 그렇다.
정신없이 바삐 살다가 직장이라도 그만두게 되면, 취미생활도 없이 평소에 자기 관리나 지인들에 소홀했던 사람은, 갑자기 시곗바늘이 느려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틀씩이나 외박을 하고 집에 들어갔다가, 동거하는 여자로부터 생활비도 안 주면서 돌아다닌다고 심하게 바가지를 긁혔었다.
가족들과 별거하면서 우연히 만난 여자인데, 애정 같은 건 당초부터 없었고, 홀아비 수발용으로 데리고 사는 정도다.
‘어디 데려가서 콧구멍 바람이나 쐬어줄까? 에이 뭘. 나중에 전도금 170만 원 받는 데서 50만 원만 떼어줘도 대접이 달라질 건데, 남세스러운 외모에 데리고 다니기도 그렇고, 그만두자!’
결국 이른 귀가는 포기하고, 그저께 무진전기 김 전무가 부산서 올라오면 한턱 크게 쏘겠다고 했던 얘기를 떠올린다.
‘어제 올라와서 견적도 봤을 거고, 만나서 금액이랑 Y 아파트 동향도 들어서 이재성 사장 기죽일 정보를 확보하는 게 좋겠지? 오늘 저녁이 어떤지 전화해봐야 되겠다!’
막 김태경 전무한테 전화 걸려고 하는데, 동남무선 안병욱 이사 번호가 먼저 뜬다.
"그래요, 박 이사요. 안 이사가 웬일이고?"
안 이사는 나이도 6살 아래고, 처음 태성 이사로 만났을 때 안 이사는 부장이어서, 함께 술 몇 번 먹고 나서는 반말 섞어가며 말한다.
(영업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예, 박 이사님. 보내준 견적은 잘 받았습니다. 가격을 낮게 맞춰 주셔서 감사 인사나 드릴까 해서요. 점심은 드셨습니까?”
사실, 견적은 나갔지만, 박 이사는 그 내용에 대해서 금액조차도 모르고 있다.
안 이사를 지금 만났다가는 창피만 당할지도 모른다.
"하이고,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을`인 내가 먼저 부탁 인사를 드려야 되는데, 감사 인사를 다 받고! 내가 오늘 결혼식만 없었으면 식사 대접이라도 할까 했는데, 헤헤."
-“결혼이요? 아이고! 박 이사님, 새장가 드십니까? 축하합니다! 하하~”
안 이사가 재치 있게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하여튼 고맙소. 저기.. Y 아파트만 성사되면 내가 안 이사 코 한번 비틀어 줄게!"
-“예~ 감사합니다. 코는 좌우로 두 번 비틀어 주시고요, 제가 결혼 축의금 보내게 계좌번호 좀 찍어 주십시오.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아이고, 이러면 내가 다음에 또 장가가야 될지도 모르겠는데, 괜찮겠소? 하여튼 고맙소. 안 이사! 주말 잘 보내시오. 헤헤."
박 이사는 얼마나 부쳐올지는 몰라도 `갑`인 동남에서 감사 접대 대신으로 뜬금없는 돈을 받게 생겼다.
계좌번호를 찍어 보내고 김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전화를 받는다.
-“아, 그래 박 이사. 내가 급히 뭐 좀 하느라고.. 그래, 견적은 잘 받았소! 가격 6억에 맞추느라고 애 많이 썼겠네. 허허.”
"아따, 아직도 회사에 있습니까? 토요일인데 뭐 하시느라고 아직 퇴근도 안 했습니까? 견적은 우리가 다 만들어 보내서, 무진은 마진만 더하고 제출하면 될 건데. 하하."
통은 크면서도 일 처리는 꼼꼼한 성격의 김 전무라서 보나 마나 원가 분석을 하고 앉아 있구나 싶으면서도, 가급적 얼른 만나야 실컷 먹고 다른 재미도 보여달라고 부탁할 거니까, 너스레를 떤다.
-“아, 이왕 태성 하고 손잡고 Y 아파트 따내기로 했는데, 만에 하나 내가 실수라도 하면, 태성 이 사장 뵐 면목도 안 서고 큰일 아니오? 시방, 돌다리 좀 두들기고 앉아 있는데, 돌대가리로 두드리니까, 영~ 정 발이 안 받고 대가리만 아파 죽겠네. 허허~ ‘가급적 늦게 만나야 비용이 적게 들겠지?’”
능구렁이 김 전무가 퇴근 시간이 늦어지겠다고 암시를 준다.
"그럼, 저번에 뭐.. 한턱 크게 쏘신다던 말씀은 물 건너가는 겁니까? 나는 기대하고 이틀이나 쫄딱 굶고 있는데!"
-“아이고, 그러면 안 되지! 남아일언 중차대인데, 내가 박 이사랑 상의할 일도 있고 해서 그러잖아도 전화 걸려고 했지! 음.. 저녁때 만납시다. 8시면 너무 늦겠나? 어떻소?”
"저야 뭐 얻어먹는 놈이 시간 정할 권리나 있습니까? 그럼 어디서 만나 뵐까요?"
-“그러면, 저녁은 각자 미리 먹고, 거기.. 요새 용산역 근처가 벅적거리고 물이 좋다던데, 그리로 한번 가 보는 게 어떤가? 나는 여기서 30분이면 되니까!”
용산역 근처에 10만 평 규모의 ‘국제업무지구’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벌써 건물 부지를 고르는 대형업체와 그에 따른 부동산, 금융 관련 업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때아닌 유흥업소가 난무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예, 전무님 좋습니다. 그럼 이따 8시에 용산역에서 만나겠습니다."
김 전무 통화를 마치고 보니 안 이사가 20만 원이나 부쳐왔다.
`이게 웬 떡이냐? 오전에 회사에서는 왕따당하고 기분 더러웠는데, 대림역 뒷골목도 아니고 물 좋다는 용산역 신 개척지로 진출해볼 마당에, 두둑한 예비 자금까지 들어오고, 오후에는 액땜 끝나고 일진이 좋은 모양이다. 크흐~`
어디에 가서 점심을 먹고 뭘 하며 저녁때까지 시간을 때울까 고민하는데, 핸드폰이 또 울린다. 안 이사한테 입금 확인 문자를 보낼 걸 그랬나 생각하며 열어본다.
‘엉? 이건 또 뭐야? 정현종이가 웬일이야!’
놀랍게도 우주통신 정선규 사장 아들 정현종 부장 전화다.
"아, 정 부장. 박 이사요. 잘 지냈소?"
정 사장을 직접 상대한 작년까지만 해도 정 부장한테는 반말을 쓰곤 했는데, 올해 들어서 거리감을 느끼고부터 말을 조심하고 있다.
다행히 며칠 전에 정 사장을 만나서 은근한 대접을 받은 터라, 오랜만의 통화지만 그다지 부담이 가지는 않고 오히려 반갑다.
-“예~, 박 이사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거 너무 오랜만에 전화드려서 정말 송구합니다.”
"아. 그래요, 괜찮아요. 엊그제 정 사장님 뵀는데 뭘. 그래, 무슨 일로?"
-“아, 예. 사장님 지시로, 박 이사님을 급히 꼭 좀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혹시 점심 전이시면 지금 시간이 어떠신지요?”
이거야말로, 오늘이 무슨 횡재 수 있는 날인가?
로또 복권이라도 하나 사둬야 되겠다.
용산역 근처에 있는 우주통신 정 사장과 저번에 점심을 함께한 단골 식당 도가니탕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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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래방에서 회식을 마치고 동료들과 헤어진 윤지은 주임은 단둘이서 얘기 좀 하자는 한충석 대리를 데리고, 노래방에서 30분 거리의 친구 김세희가 매니저로 있는, 바(bar) "붐"으로 향했다.
"바 붐이 뭐 하는 데에요?"
"대학교 때 친구가 매니저로 있는 스탠드바예요. 지금 배도 덜 꺼졌고 어데 다른 데 가기도 그러니까, 거기서 조용하게 얘기하기 편할 거예요. 괜찮죠?"
월요일 저녁에 들렀었지만, 매니저 된 후로 너무 잘난 체 해 보이는 친구 세희한테, 이렇게 준수한 상급자 한 대리도 사실상 내 지시를 따라야 할 정도로 내가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윤 주임이다.
이제 막 가게 문을 연 시간이라 손님이 없는, 바 "붐"에 들어선 윤 주임은 한 대리를 창문 쪽 테이블을 가리키며 먼저 가서 앉게 하고, 카운터에서 놀란 눈으로 반기는 세희와 먼저 얘기를 한다.
"어머, 얘 지은아. 저 핸섬 보이는 누구니? 너무 잘 생겼다! 너 설마 애인 생긴 거야?"
"애인은 무슨! 우리 회사 영업 대린데, 오늘 전체 회식이 있었거든, 좀 전에 끝나고 내가 뭐 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데리고 온 거야."
"영업 대리면 너보다 높은데, 맘대로 데리고 다녀? 계집애 진짜 서열 3위 맞는가 보네! 힝~ 지은이 너, 다시 봐야겠는데!"
세희가 부러운 눈매로, 그러나 진정 친구 지은을 축복해 주는 마음으로, 활짝 웃으면서 좋아한다.
지난번에 앉았던 테이블에서 햄 치즈 안주를 주문하고 맥주를 마시며, 윤 주임과 한 대리는 처음으로 두 사람만의 술자리를 갖는다.
"윤 주임 친구는 젊은데, 벌써 매니저예요? 얼굴이 잘생겨서 특진한 건가?"
한 대리가 슬쩍 윤 주임을 추켜세워준다.
"내 친구들은 다 예쁘고, 똑똑해요. 나만 좀 빠지지! 히~"
윤 주임도 싫지 않은 척 은근히 자기 자랑을 한다.
"웨이트리스도 꽤 예쁜데요! 여기는 미인들만 뽑는가 봐요. 하하."
한 대리가 맥주 날라왔던 주영란을 가리키며 여기로 따라오기 잘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맘에 들어요? 애인 있으면서 곁눈질하지 마세요, 한 대리님! 근데 나한테 할 얘기가 뭐예요? 얼른 듣고 나는 집에 가서 신랑 밥 지어 먹여야 돼요!"
한 대리가 다른 소리를 하면서 뜸을 들이고 있는데, 아까 노래방에 따라왔던 깍두기 두 명이 조용히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다가, 윤 주임 뒤쪽의 테이블로 와서 살며시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