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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시간의 편지
작가 : 일희삼
작품등록일 : 2022.2.14

받는 이, 받는 시간을 쓰면 과거든 미래든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전달되는 우표를 갖게 된 소영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1부 - 제 8화. 바뀌어버린 과거 (2)
작성일 : 22-02-24 22:38     조회 : 200     추천 : 1     분량 : 8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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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인 언니! 저랑 집 되게 가깝네요?”

 

 2004년. 과자 공장 공정 사무실.

 

 소영이 이제 막 첫 출근을 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 직원 명단을 작성하던 소영이 다인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보고는 반가워서 소리쳤다. 다인은 느린 속도로 목이 빠져라 타자를 치다 목의 뭉친 근육을 풀며 소영을 돌아봤다.

 

 “그래?”

 

 “언니 집 슈퍼 쪽 아니에요?”

 

 “응. 맞아.”

 

 “엄청 가까운 데에 살았구나…… 우리 집은 대로변 옆이에요. 슈퍼에서 쭉 언덕 내려오면 있는.”

 

 “신기하다. 왜 계속 몰랐지?”

 

 소영은 다인에게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우리 주말에 한 번 만나서 같이 놀아요.”

 

 “좋지!”

 

 두 여자는 주먹을 퉁치며 하이파이브 했다. 소영은 특별한 동기를 만난 것만 같아 마음이 들떴다.

 

 . . . . . .

 

 — 여보세요?

 

 “너 어디야, 이 새끼야.”

 

 다인의 목소리를 듣자 소영의 자제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너 뭐야. 왜 아까부터 무슨 낯짝으로 전화질이야.

 

 “어디냐고!”

 

 소영이 소리치자 저쪽에서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소영이 한 번 더 소리 지르려 할 때에야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1년 만에 연락해서 뭐하는 거야?

 

 — 누구야?

 

 — 차소영.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그 목소리의 얼굴을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방금 나관희지? 그 놈이랑 같이 있지?”

 

 — 관희한테 미련이라도 남나봐?

 

 “당장 나관희 바꿔.”

 

 — 야, 차소영. 술 마셨어? 제발 니 처지 좀 알고 까불어. 애 버리고 도망간 년이.

 

 “뭐?”

 

 뭐라고? 소영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애를 버리고 갔다니? 애라면…… 누구?

 

 — 그냥 무시해.

 

 저편에서 관희가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애라고?”

 

 소영이 물었지만 이미 전화는 끊겼다. 야— 소리 질렀지만 텅 빈 기계에 소리를 지른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전부 소영을 보고 있었다. 소영은 뒤늦게 자신이 거리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알았다. 다인과 관희가 함께 살고 있다면, 다인에게로 가면 됐다.

 

 “언니 집 슈퍼 쪽 아니에요?”

 

 소영은 명부에 있던 다인의 주소를 떠올리고는 중얼거렸다. 사거리에 표시된 표지판을 보고, 곧장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 . . . . .

 

 “무슨 일 났나?”

 

 삼겹살집에서 나온 재영과 석우는 소영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재영은 석우를 집으로 한사코 돌려보내려 했지만 아쉬운 마음에 재영과 걸음을 같이 한 석우였다.

 

 길목에 사람들이 서서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사람들의 중심에 소란의 원인이 있는 듯 보였다.

 

 “누나……?”

 

 두 친구는 소란에 말려들기 싫어 지나치려했지만 재영의 시야에 소영이 들어왔다. 건물 앞에서 곤란한 듯 서 있는 관희와 다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벌게진 눈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뭐? 누나? 소영이 누나?”

 

 재영과 석우는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소영 씨 진짜 미쳤어요?”

 

 이번엔 관희가 소리쳤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표정엔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었다.

 

 “나를 노골적으로 모르는 척 하겠다?”

 

 “우리 끝났잖아요. 갑자기 1년 만에 나타나서 왜 이러는 거예요!”

 

 “나 들어가서 경찰에 신고해야겠어.”

 

 다인 역시 참다못해 건물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소영은 이에 질세라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야, 어딜 가!”

 

 육탄전이 벌어지려 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소란을 막았다. 다인의 짧은 비명 소리가 골목을 타고 증폭됐다. 관희는 끝까지 소영이 다인의 머리칼을 놓지 않자 그녀의 팔을 붙잡고 비틀었다.

 

 재영이 놀라 사람들 틈을 비집으려하는데 어느새 석우가 관희에게 다가가 그를 밀쳤다. 관희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석우가 넓은 손바닥으로 어깨를 밀어버리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너 뭐야!”

 

 “그러는 넌 뭐야?”

 

 석우는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소영을 붙잡고 관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큰 체구에 소영이 완전히 가려졌다.

 

 “누나, 괜찮아?”

 

 재영이 누나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재영을 알아보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소영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이제 막 먼지를 털며 일어나는 관희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인데……’

 

 “미친놈들. 내 인생에서 꺼져!”

 

 관희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다인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지금 니 매형이 바람피우고 있잖아. 나를 버렸어. 나를 버렸다구……”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소영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 가슴을 쾅쾅 쳤다. 사람들이 더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단 자리 피하자.”

 

 석우가 재영에게 말했다. 재영은 누나를 부축하고는 석우가 사람들 틈을 비집어 만든 길로 빠져나갔다. 소영은 마치 힘없는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 동생의 품만 의지했다. 그녀의 눈에선 그녀의 통제와 상관없이 틀어놓은 수도꼭지 마냥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고마워.”

 

 세 사람은 재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소영은 조금 진정이 된 듯 스스로 어느새 제 힘으로 서 있었다.

 

 벌써 하늘은 어둑해졌다. 멀리서 비행기 한 대가 착륙을 준비하는 지 고도를 천천히 낮췄다.

 

 “고맙긴. 어서 들어가.”

 

 “연락할게.”

 

 “어.”

 

 재영은 소영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석우는 소영의 작은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거기에 서서 바라봤다.

 

 

 

 소영은 제 신발을 채 벗지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 얼마나 힘없이 쓰러졌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팔꿈치와 바지 엉덩이가 흙먼지로 물들어 있었다. 재영은 누나의 신발을 벗겨주고 자신도 신발을 벗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소영은 오로지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침부터 계속.”

 

 “내가 꿈을 너무 심하게 꿨나봐. 근데 분명 꿈이 아니었는데……”

 

 재영은 소영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따듯한 바닥에 앉혔다. 소영은 조금 안정을 취한 듯 제 다리를 끌어 모아 두 팔로 안았다. 두 눈이 퉁퉁 부어 동생이 얼핏 제 누나인 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건지 알려줘. 그 미친놈 집에는 왜 찾아간 거야. 다 잊은 거 아니었어?”

 

 “몰라.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재영은 옷장에서 편한 옷을 꺼내 소영에게 건넸다. 소영은 그 옷을 건네받아 품에 꼬옥 안았다.

 

 “일단 씻어. 그러고 나서 얘기하자.”

 

 

 

 뜨거운 물이 소영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샤워기에서부터 일어나는 뜨거운 김이 그 날의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온도를 조절하지 않고 속절없이 떨어지는 뜨거운 물 때문에 소영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갔지만 하지만 앞서 흘렸던 눈물보다는 뜨겁지 않았다. 그 눈물에는 현서가, 2년 간 관희에게 고통 받았던 아픔이, 갑자기 바뀌어버린 과거와 현재가 담겨 있었다.

 

 현서.

 

 처음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가 떠올랐다. 기괴하게 부른 배가 순식간에 꺼지면서 한 생명이 빛으로 나왔다. 아이의 울음은 소영과 닮아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아이는 그저 펑펑 울 뿐이었다. 지금 소영의 심정이 딱 그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화장실 옆에 딸린 보일러실에서 오래된 보일러가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돌아갔다.

 

 

 

 “웬 우표야?”

 

 마음의 안정을 찾은 소영이 동생에게 금빛의 우표를 건넸다. 회중시계가 그려진 우표는 도금을 한 듯 형광등 불빛을 머금고 희미하게 빛났다.

 

 “내 말 다 믿을 거지?”

 

 재영은 누나의 눈을 바라봤다. 붓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눈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단단해 보였다. 절대 거짓말이 나올 눈빛이 아니었다.

 

 “응. 무슨 얘기를 해도 다 믿을게.”

 

 동생의 다짐을 받아냈음에도 소영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느 누가 이 얘기를 믿을 수 있을까. 그 증거로 우표를 보여줬지만 아직 소영도 받아들이거나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쩌면 재영에게 하는 말은 본인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내가 어젯밤에 말야. 현서를 데리고 밤거리를 걷고 있었어.”

 

 “현서?”

 

 “응. 내 딸. 너도 예뻐했잖아.”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나 딸.”

 

 “그러다 길에서 한 잡상인을 만났는데, 그 할아버지가 이 우표를 팔고 있었어.”

 

 소영이 우표를 가리켰다. 우표가 아까보다 더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누나 우표 수집하는 거 좋아하잖아.”

 

 재영은 소영의 우표수집 앨범을 떠올렸다. 실제로 재영이 몇 번 그녀에게 우표를 선물하기도 했었다.

 

 “근데 그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어. 받는 사람과 장소, 시간을 적고 이 우표를 붙이면 그게 미래든 과거든 그 시간에 편지가 갈 거라고.”

 

 “어?”

 

 재영은 제 손에 들린 우표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차마 우표를 내려다보지는 못하고 소영의 갈라진 입술에만 집중했다.

 

 “처음엔 그냥 미신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러고 나서 집에 갔는데. 나관희 그 자식이 강다인이랑 입을……”

 

 “그 두 사람은 ……그럼 나관희가 누나의 남편이고, 강다인이라는 사람이랑 바람을 피운 거야?”

 

 “응.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여기로 왔어. 그리고 너랑 현서가 잠에 들어있는 사이에. 내가 편지를 쓴 거야. 나관희를 만났던 2년 전 그 날로. 나 자신한테. 나관희랑 절대 엮이면 안 된다고. 그리고 이 우표를 붙였어.”

 

 “그래서 누나가 책상에서 자고 있었고, 일어나자마자 편지를 찾은 거구나.”

 

 “맞아.”

 

 아직 혼란스러웠지만 소영의 말을 듣고 나니 아침에 한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조금은 됐다. 하지만 완전히 믿기에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얘기였다.

 

 “그럼 그 편지가 정말로 2년 전으로 갔고, 2년 전의 누나가 편지를 받고는 나관희랑 엮이지 않은 거네.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이랑 모르는 사이가 됐고 누나 딸은 없어졌다…… 왜냐면 그 사람이랑 결혼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까.”

 

 “……응.”

 

 소영은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재영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바뀌고 난 뒤였다. 분명 소영이 아는 세상이 아니었다.

 

 관희도, 다인도 전부 바뀐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 둘이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재영 역시 바뀐 세상에 살고 있었고 공장 사람들도 그랬으니까. 세상 전체가 소영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 거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게 더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믿기 어려운 얘기긴 한데…… 그 잡상인한테는 가 봤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재영이 물었다.

 

 “응. 근데 없더라. 다시 편지 써보려고도 했어. 나관희랑 결혼을 하라고.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재영도 혼란스러웠다. 소영이 거짓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디테일했다. 소영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정말로 편지 한 통으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건데 재영이 뒤돌아본 지난 2년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쩌면 재영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가설도 세워봤지만 그것 역시 터무니없었다.

 

 “역시 못 믿는 구나.”

 

 소영은 마지막 희망을 잃은 듯 재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물론 누나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미친 짓을 하고 다닐 리가 없다는 거 잘 알아. 그런데……”

 

 “응?”

 

 한참 고민하던 재영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마치 해서는 안 될 말을 한다는 듯 표정이 조금은 심각해졌다.

 

 “누나 그 날 일 다 잊은 거 아니었어?”

 

 “그 날? 무슨 날?”

 

 “……아니야. 누나. 우선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일단 좀 쉬어야 해.”

 

 소영의 눈은 어느새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이미 너무 많은 혼란을 겪은 그녀였다. 소영은 이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령 관희와 다인의 결혼과 같은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심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 이상 놀라는 건 사치였다.

 

 “나 집에 데려다줄래?”

 

 “오늘은 여기서 자.”

 

 “아니야. 집에 가고 싶어.”

 

 “누나 혼자 못 두겠어.”

 

 “집에 가고 싶어.”

 

 소영은 저도 모르게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누나.”

 

 “가야겠어.”

 

 “……알았어. 가자. 데려다줄게.”

 

 재영이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소영은 책상에 있는 우표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갑자기 일어나 피가 돌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쾅쾅 울리는 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고 잠시 세상을 깜깜하게 만드니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소영은 신발을 구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

 

 

 

 재영은 누나의 빠른 걸음 폭에 맞춰 걸었다. 숨이 찼지만 소영은 아랑곳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하자 그제야 소영이 멈춰서 재영을 돌아봤다.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진짜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푹 자고 일어나.”

 

 “내 말 믿어줘.”

 

 “응, 믿어.”

 

 “아니, 넌 안 믿고 있어.”

 

 “……들어가. 나 갈게.”

 

 “나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단 말야!”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해.”

 

 재영도 조금씩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지금 소영은 너무나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게다가 1년 전 그 날. 그 사건 이후로 소영은 더 이상 유쾌하고 친절한 누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되돌리지 못할 만큼 망가져버렸다.

 

 

 

 재영은 뒤를 돌아 가버렸다. 소영은 가로등이 만든 거리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재영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밤이 어두워진 거리는 어느새 길고양이의 울음소리도 없는 고요한 공허로 돌변했다.

 

 소영은 깊은 한숨을 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 . .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석우는 문득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TV를 끄고 기지개를 피며 침대로 갔다. 그는 소영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석우가 고등학교 신입생이던 시절. 소영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그녀에겐 남자 친구가 있었고 3학년 교실 앞을 어슬렁거리다 선배들에게 욕을 된통 먹은 적도 많았다. 키가 너무 큰 그가 눈에 띄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앞둔 날. 소영이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남자는 소영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석우는 그의 뒤를 밟았다. 그리곤 인적 없는 곳에서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그가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석우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석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때린 날이었다.

 

 사람을 한 번도 때려보지 않았던 그는 중지가 골절되고 손목뼈에 금이 갔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석우는 한동안 숟가락으로만 밥을 먹어야했다.

 

 침대에 드러누운 석우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아까는 괜찮아?”

 

 “어. 방금 누나 집에 데려다주고 가는 길이야.”

 

 확실히 재영은 바깥에 있는 듯 수화기 너머로 바람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무슨 일이래?”

 

 “몰라. 복잡해. 다음에 만나면 얘기해줄게. 너 입대하기 전에 한 번 또 보자.”

 

 재영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석우는 소영이 걱정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직 그는 소영에 대한 석우의 마음을 몰랐다.

 

 그때 갑자기 수화기 너머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아까 지나갔던 슈퍼 앞인데 누가 유리창 깬 거 같은데? ……잠깐만.”

 

 “누가 술 먹고 행패라도 부렸나?”

 

 석우는 핸드폰을 쥔 손을 바꿔 들고는 누운 채로 다리를 꼬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전화가 끊겼나 화면을 보기도 했다.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갖다 대고는 별 일 없음 끊겠다고 얘기하려는 순간.

 

 “어어—”

 

 재영은 뭔가에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하더니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 윽! 아!”

 

 누군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재영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여보세요? 차재영?”

 

 석우가 불길함을 느끼고 재영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석우는 상체를 일으켜 수화기 너머에 집중했다.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진 듯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재영 역시 아무 대답도 없었다.

 

 황급히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겨우 몇 시간 전과는 확연히 다른 찬바람이 옷소매를 파고들었다.

 

 

 

 가로등이 몇 개 없어 밤하늘과 거리가 구분되지 않는 어두운 거리. 인적 하나 없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좁은 바람 터널을 통해 바람이 휘몰아쳤다. 석우는 옷깃을 붙잡고 쉼 없이 뛰었다.

 

 그나마 널찍한 슈퍼마켓에 다다르자 바람이 어느 정도 멎었다. 숨을 고르며 깨진 유리창 조각이 즐비한 거리를 내려다봤다. 거기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아스팔트를 물들인 검은 물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기괴하게 퍼져 있었다. 순간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석우의 콧속을 찔렀다. 검은 물이 피라는 걸 알게 됨과 동시에 쓰러져 있는 사람 역시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라는 걸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차재영!”

 

 석우가 황급히 재영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제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배와 가슴에 수도 없이 뚫린 구멍에서는 희미한 심장 박동에 따라 피가 쿨럭쿨럭 새어나오고 있었다.

 

 석우는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를 했다. 얼굴도 완전히 피로 물든 친구를 내려다보니 헛구역질이 나왔다. 피비린내가 끊임없이 목구멍을 날카롭게 찔렀다.

 

 “도와주세요!”

 

 석우는 애절하게 소리쳤다. 외투를 벗어 차가운 재영의 몸을 덮었다.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그 무거운 나무도 바람에 흔들리는데. 재영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 무거운 적막을 뚫고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하늘을 날카롭게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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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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