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로맨스
내 약혼자가 왕이 되었다
작가 : joinB
작품등록일 : 2022.1.26

집안이 순식간에 몰락해 결혼을 이틀 앞두고 기생이 되었다. 타고난 예능과 미모로 불과 1년만에 도성에서 가장 이름난 기녀가 되었고, 자신의 집안을 몰락시킨 왕을 뒤흔들어 기적에서 자신의 이름도 지우고, 벼슬도 떡하니 받았다. 그 왕마저 죽은 후, 들려온 소식. 자신의 약혼자였던 그 사람이 새로운 왕이 되었다는 것. 미련 없이 기생일도 접고 상단을 꾸려 살던 어느 날 알게 되었다. 왕은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자신의 아내가 되어달라 손을 내민다. 그녀는 잡았을까?

 
7
작성일 : 22-02-23 01:56     조회 : 184     추천 : 0     분량 : 8350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저 멀리 숨을 고르며 앉아 쉬고 있는 경혜의 유모였다.

 

 “저이에게 들켰다간 큰일이다. 어서 따라와.”

 

  태율은 지나가는 수레를 방패삼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약속한 장소에 다다르니, 비단을 구경하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주 마주하진 않았지만, 첫눈에 그 모습을 모두 눈에 담아두었다. 뒤꽁무니만 보아도 경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낭자.”

 “도련님!”

 

  어렵지 않게 만났다. 반가움에 하마터면 덥석 안아버릴 뻔했다. 그런 마음도 잠시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경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침에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그렇소? 다행이오.”

 “제 서신은 받으셨습니까?”

 “그것이...”

 “확인하지 못하셨습니까?”

 

  경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서운한 눈빛으로 태율을 바라보았다. 태율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경혜를 의심했던 마음이 산들바람에 훅 날아가 버렸다. 저런 눈빛을 보고 어찌 의심을 하겠는가.

 

 “아니오. 확인했소.”

 “다행입니다.”

 

  경혜가 활짝 웃었다. 태율은 경혜가 구경하고 있는 것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대와 잘 어울리는 색이오.”

 “그렇습니까?”

 “하지만 굳이 필요는 없겠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태율의 말에 경혜가 몸을 베베 꼬았다.

 

 “원래 그런 말을 잘 하십니까?”

 “그런 말?”

 “칭찬 말입니다. 아름답다느니, 예쁘다느니 하는.”

 “아낄 필요는 없잖소. 우리 집에선 이런 표현은 익숙하다오. 아껴두어 무엇 하겠소.”

 “참으로 행복한 곳이네요, 도련님이 사는 곳은.”

 “나는 어떻소?”

 

  경혜는 태율의 말에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어... 멋지십니다. 처음 봐요. 당신 같은 사람.”

 “당신. 좋은 말이군요.”

 “아, 아니... 그러니까... 그럴 의도는 아니고...”

 

  경혜의 모습이 귀여워보였는지, 태율은 당황해하는 경혜의 모습을 시선 하나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눈빛이 꽤 부담스러웠는지, 경혜는 태율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볼만 발그레졌다.

 

 “아,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바라보았구려. 미안하오.”

 “아닙니다.”

 

  태율은 경혜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었다. 이렇게 사려가 깊은 사람은 처음 만나는 터라, 경혜는 속마음을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서신을 주고받을수록, 너무 좋아졌다. 귓가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에 주위 소음이 막힌 듯 들리지 않았다.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소. 최근 생긴 가게인데, 같이 갑시다.”

 “네.”

 

  태율은 자연스럽게 경혜의 손을 잡았다.

 

 “사람이 많으니, 놓치지 마시오.”

 “놓지 않겠습니다.”

 

  태율과 경혜가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걸어가는 바람에 따르던 노비들이 두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태율의 노복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빤했기에 굳이 애써 뒤쫓아가려하지 않았다. 천천히 가다보면, 언젠가 닿게 될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와!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먹는 곳입니까?”

 “간식을 파는 곳이라오. 달달한 연백당이나 정과와 함께 차를 곁들여 먹을 수 있는 곳이라오.”

 “도련님은 와보신 적 있습니까?”

 “나도 얘기만 들었소. 내 부모님은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오셨다오. 나에게 권유하시던데, 낭자와 함께 가봄이 어떻겠느냐고.”

 “두 분이 저를 생각하셨다고요?”

 “참으로 다정한 분들이오. 자, 들어가십시다.”

 

  2층의 큰 건물에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에 앉아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간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앉을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 앉을 수 있었다. 2층 귀퉁이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주인이 와서 주문을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큰 창 아래로 운종가의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이 꽤나 장관이었다.

 

 “주문 받으시오.”

 

  태율이 손을 들어 주인을 불렀다. 주인이 와서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종류별로 하나씩 모아놓은 구성이 있다 들었는데, 그것 하나 주시오.”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신선들이 먹었다는 선차도 있고, 이슬을 머금은 찻잎으로 우려낸 노아차도 있고, 어린잎으로 만든 작설차도 있습니다. 달달한 곡물차도 있고, 어여쁜 국화차도 있지요. 여름의 끝자락인지라 오미자로 만든 청으로 우려낸 오미자차도 조금 남아있습니다.”

 “나는 작설차로 주시오. 낭자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저는... 국화차로 주시오.”

 

  저마다 할 이야기들이 어찌나 많은지 운종가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가게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대화소리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경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녀가 함께 앉아 있기도 하였고, 사내들끼리 앉아 정치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낭자들끼리 와서 재미나게 수다를 떠는 이들도 있었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태율은 주위보다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주위를 보는 경혜를 보았다. 이리저리 굴러가는 땡그런 눈동자는 귀엽고, 코는 오뚝하면서도 동글한 끝마무리가 예뻤고, 사람들을 관찰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은 새빨간 연지와 어우러져 심장을 저리게 하였다. 고운 피부하며, 건드리면 갓 찧은 찹쌀떡마냥 말랑할 볼을 건드려보고 싶었다.

 

  두 사람의 동상이몽을 깨트린 이는 둘을 뒤따라온 노비들이었다. 태율의 노복이 태율에게 다가왔다.

 

 “여기 계셨네요.”

 “너도 저기 앉아 차 한 잔 하거라.”

 “저도요?”

 “그럼.”

 “예! 심봤네.”

 

  태율의 노복이 멀리 빈 자리를 찾아서는 경혜의 여종을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경혜의 여종은 경혜의 곁에 가려고 했지만, 노복이 이끄는 바람에 멀리 떨어져 앉을 수밖에 없었다. 노복은 재빨리 먹을 것을 주문하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주인이 뭘 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 이런 곳에 와본 적 없지?”

 “응.”

 

  경혜의 여종이 대충 답했다. 여전히 시선은 경혜에게 가 있었다.

 

 “여기가 지금 운종가에서 가장 입소문이 자자한 가게다. 아마 눈 돌아갈 걸?”

 “먹어본 사람처럼 말하네.”

 “당연하지. 우리 군대감께선 노비들에게도 이런 것을 사다주곤 하셔. 며칠 전엔 대감내외가 함께 나오셔서 나도 맛 좀 봤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랄까?”

 “어, 어.”

 

  그리고 주문한 다과가 나왔다. 형형색색의 예쁜 정과들과 솜사탕이 나왔다. 경혜는 예쁜 다과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예쁩니다.”

 “맛도 아름답소. 자, 이것부터. 녹기 전에 어서 먹어야하오.”

 “귀한 연백당 아닙니까?”

 “연백당을 아시오?”

 “그럼요. 아버지께서 궁에서 받은 것이라 애지중지 품에 가져오셔서 주신 걸요. 왕실에서나 먹을 수 있는 것이라 여겼는데.”

 “어서 먹어보시오.”

 “도련님도 함께 먹어요.”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으며 단맛이 온 입안에 퍼졌다. 입가에도 단 것이 들러붙어 녹아버렸고,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계속해서 핥게 되는 간식이었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요.”

 “진짜 맛있소.”

 

  경혜는 무아지경으로 단맛을 즐겼다. 너무 행복해서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다. 이 사내는 어찌하여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지. 행복해서 계속 웃음만 나왔다. 함께 웃으니 웃음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이것도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요.”

 “자, 이것도 먹어보시오.”

 

  태율은 자신의 손으로 정과를 집어 경혜의 입에 넣어주었다. 손끝이 살짝 경혜의 입술에 닿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촉에 태율은 숨 쉬는 것을 잊을 뻔했다. 달달한 것을 계속 먹어서인지, 차를 연거푸 마시게 되었다. 어느새 간식을 모두 해치우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은 만날 때마다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즐거워하니, 나도 즐겁소.”

 “매일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게 말이오.”

 “행복합니다.”

 “낭자. 그대에게 궁금한 것이 있소.”

 “응?”

 “혹, 나 말고 다른 사내와도 마주한 적이 있소?”

 “아... 두어 번 집을 찾아오신 분들은 있습니다. 왜요?”

 “그렇군.”

 

  경혜는 태율이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금방 파악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여려 집과 혼사 문제를 논의했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일 것이었다. 경혜는 이 오해를 빨리 풀어야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는 도련님뿐입니다. 매일 안부를 주고받고, 매일 만나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는걸요.”

 

  경혜가 태율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마음을 분명하게 전했다. 그러자 태율이 민망한 듯 차를 한 모금 하더니 말을 꺼냈다.

 

 “내가 수학하는 서당에 벗들이 있는데, 그대와 마주했다는 이야기를 하여... 오해를 했다는 것은 아니오. 다만,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았을 뿐이오.”

 “왜 확신이 생기지 않으신 거죠? 저는 한 치도 거짓으로 마음을 전한 적이 없습니다. 제 눈빛이, 저의 행동과 말이 어영부영했나 봅니다.”

 “그렇지 않소. 내 문제요. 내가 괜한 상상을 하였소. 이리도 어여쁘고, 대단한 집안의 여식이 설마하니 나를 좋아할까, 예의상 그런 것은 아닐까.”

 “괜한 상상을 하셨네요. 제 마음은 하나뿐입니다. 두 갈래, 세 갈래로 찢어질 수가 없어요. 당신이 찢으면 모를까.”

 “절대, 그럴 생각 없소. 죽으면 죽었지.”

 

  태율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경혜가 피식 웃었다.

 

 “화가 날뻔 하였는데, 이곳의 분위기며 다과가 맛이 좋아 봐드렸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두 사람은 헤어져야했다. 경혜는 태율의 손끝을 잡고는 좀처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태율의 손끝을 잡고 손 그네를 타다가 이내 손을 놓았다.

 

 “또 만나요.”

 “또 만납시다.”

 

  경혜가 먼저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태율은 경혜가 사라진 쪽에서 한참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혜와 함께한 시간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경혜의 흔적이 아직 달달하게 남았다. 또 언제고 만날 수 있을까. 특별할 것 없던 운종가가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함께 걸었던 걸음이 닿은 모든 길이 이제 특별해질 예정이다.

 

 ***

 

  왕은 늦은 시간에도 끝나지 않은 일과에 지쳐가고 있었다. 상소문은 읽고 읽어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왕의 앞에는 좌찬성 윤재상이 앉아있었다.

 

 “그 자리가 지루하지 않은가?”

 “당치 않사옵니다.”

 “내가 왜 무명무실한 자리에 그대를 앉힌 것이라 생각하는가?”

 “신이 성심을 어찌 헤아리겠나이까.”

 “자네를 아껴서야.”

 “예?”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그보다 높은 지위를 그대에게 주지 않을 생각이네.”

 “전하...”

 “나도 알고 있네. 내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는 대신들이 궐 밖으로 나가서는 어떤 꿍꿍이들을 하고 있는 지 말이야. 대강은. 그러니 내 실록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적은 치세로 기록되지 않겠는가?”

 “전하! 당치 않사옵니다.”

 “여식을 핑계로 명문가들과 만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네. 어떤가, 나에게 도움이 될 집안이 있겠는가?”

 

  재상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전하!”

 “역모를 꾸미는 집안이 어디 한 둘이겠나. 허나 자네 딸은 하나뿐일세. 하나 밖에 없는 여식을 그렇게 보내지 말게.”

 “전하!”

 

  어디선가 불어온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때문인지, 왕의 얼굴엔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등불에 비춰진 왕의 얼굴은 더욱 괴로워보였다. 왕은 답답할 때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버릇이 있었다. 역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왕은 연거푸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어의의 권고로 좋아하던 연초를 피우는 것도 하지 못하니, 답답함이 더 심해졌다.

 

 “내 부탁이 있네.”

 “하명하소서.”

 “하수군의 아들을 지켜주게.”

 “예?”

 “태율. 그 아이가 내 후계가 되었으면 하네.”

 “어찌... 화수군은 양명군의 아들입니다. 양명군은 선왕을 위협한 역모 죄로 유배를 간 것이 아닙니까? 하온데 어찌 후계로 삼으시옵니까?”

 “내 할아버지께선 나의 숙부였던 양명군을 후계로 삼길 원하였다네. 허나, 세상이 원치 않았지. 아버지께서도 그걸 익히 알고 계셨고, 하여 왕위에 오르자마자 도성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동래로 쫓아 버렸다네. 차마 죽일 순 없었지. 밉긴 했어도, 가장 친했던 아우였으니까.”

 

  태율의 할아버지인 양명군은 후궁의 자녀로 태어났고, 차남이었다. 누구보다 왕의 재목이었으나, 후궁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차남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났던 존재였기에, 선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도성에서 먼 동래로 쫓아버렸다. 섬으로 유배를 보내려 하였으나, 그래도 가장 아꼈던 아우였기에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도록 육지에서 먼 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1년에 한 번, 혹은 3년에 한 번씩 몰래 찾아와 만났다고 한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태율이 태어나기까지, 동래에서 수십 리 떨어진 도성의 눈치를 매일 봐야했던 양명군은 태율이 태어나 돌잔치를 한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나에겐 후사가 없네. 아무래도 할아버님의 안목이 맞는가 보이. 나는 태율이를 내 후사로 삼을 생각이네. 이젠 피가래가 나오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어. 내가 원하던 세상은 아직 한발짝도 떼지 않았는데 말이야.”

 “전하... 쾌차하실 수 있사옵니다.”

 “나의 이상을 잘 아는 사람은 나의 벗, 재상. 자네뿐일세. 다 죽고 자네뿐이야. 자네마저 나를 배반하지 말게. 나의 죽음은 내가 죽은 벗들이 남긴 벌일 것일세. 그 아이에게 내 이상을 알려주게. 세상은 왕이 바꾸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 자리는 누구든 앉을 수 있어. 하지만 그 이상과 세상은 하나밖에 없네.”

 “예. 그리하겠습니다.”

 “자네의 딸이 나를 미워하진 않으려나.”

 “똘똘한 아이니, 이해할 겁니다.”

 “그래주면 참 좋겠군.”

 

  당사자는 모르는 둘의 혼사가 제 3자의 입으로 정해졌다.

 

  새벽에 물을 긷던 여종, 막순이가 손이 시린지 발을 동동 굴렀다. 옷소매를 아무리 끌어내려도 찬 기운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떨리다 못해 턱이 딱딱 부딪쳤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찬 공기가 목구멍으로 들어와 목구멍이 아렸다.

 

  행랑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제 막 잠에서 깬 유모가 황급히 신발을 신고 후다닥 뛰어갔다. 별당으로 뛰어간 유모가 향하는 곳은 별당의 아궁이였다. 아궁이의 불씨는 이미 다 꺼져가고 있었다.

 

 “에구머니나, 이를 어째!”

 

  유모는 급히 땔감을 넣고 바람을 후후 불어넣었다. 나무를 잘게 부수고 부숴 넣자, 불씨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얼굴에 검정이 묻도록 아궁이의 불씨를 겨우 살린 유모는 앞치마로 대충 옷의 검정을 쓰윽 닦고는 경혜가 자고 있는 방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손만 방 안으로 쭉 들여서는 바닥에 손을 얹었다. 경혜는 아직 잠들어 있었고, 방의 온기는 이제 막 식는 중이었다. 유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유모가 방에서 나오자, 유모의 아들 윤이가 마당에 서 있었다.

 

 “식었어요?”

 “아니. 다행히 불이 꺼진지 얼마 안 되었나보다. 아휴, 노망이 들었나. 요즘 왜 이리 깜박한담?”

 “늦은 시간까지 바느질을 하셨잖아요. 그래도 아가씨가 아직 주무시니 다행입니다.”

 “내가 못살아.”

 “오늘 날이 춥습니다. 방에 가서 솜옷이라도 더 껴입고 나오세요, 어머니.”

 “오냐. 너도 솜바지 챙겨 입었니?”

 “예. 햇솜이 좋긴 좋네요.”

 “날이 계속 추워지려나 보다.”

 “땅이 밤새 얼어붙었어요. 조심히 걸어 내려오세요.”

 

  윤이의 말에 유모가 몸을 옆으로 비틀어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왔다. 아직 서른 중반의 나이였지만, 어린 날부터 집안 노비로 온갖 일을 하다 보니 관절이 하나 둘씩 뻐걱거렸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특히나 더했다. 아마도 윤이를 뱃속에 가지자마자 윤이의 아비와 야반도주를 하다 걸려 멍석말이를 하다 맞은 영향이 클 것이었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유독 무릎이 그랬다.

 

 “윤아, 사랑아재한테 가서 계단에 뿌릴 소금 좀 얻어 와라. 아씨 넘어지실라.”

 “예, 어머니.”

 

  윤이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유모의 뱃속에 있는 윤이를 살리고 대신 죽었다고 했다. 도망치다 산에서 미끄러져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남편 없이 임신한 몸으로 도망을 칠 수가 없어서 유모는 다시 주인에게 돌아갔고, 다리를 절뚝이는 유모를 본 재상이 싼 값에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윤이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집안 노복들이 아버지였고, 삼촌이었다.

 

 “아재. 어? 벌써 꺼내고 계셨네요?”

 

  소금은 귀해서 주인이 가장 믿는 노비에게만 소금 창고 열쇠를 맡겼다. 사랑아재라 불리는 노복은 이름이 없다. 그저 사랑채의 행랑에서 먹고 잔다고 하여, 사랑아재라 불린다. 이제 오십이 다 되어가는 가장 최고령 노비였지만, 그는 여전히 부지런하게 할 일을 하고 있다.

 

 “유모가 소금 뿌리라던?”

 “예. 별당이 꽁꽁 얼어서요.”

 “연못 근처라 그런가, 거기가 유독 습해.”

 “그런가 봐요.”

 “자! 여기 있다.”

 

  사랑아재가 바가지에서 소금을 퍼서는 윤이에게 건넸다. 윤이는 바가지를 들고는 손에 한 주먹 들고 걸어가면서 바닥에 슬슬 뿌리며 별당으로 걸어갔다.

 

 “아이고, 고놈 똘똘하네.”

 

  주인이 걸어갈 길 어디든 위험했다. 서리와 진눈깨비가 만든 얼음 바닥은 소금에 금방 녹았다. 새벽부터 집안 노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이 집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이는 안채의 윤씨였다. 일어났다기 보단, 한숨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 맞았다. 간밤에 재상이 퇴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감께선 아직 퇴청하지 않으셨느냐?”

 “예, 마님.”

 “연통도 없으시고?”

 “예.”

 “걱정이구나. 어찌 연통도 없이 퇴궐을 하지 않으셨는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집안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2 12 2022 / 2 / 23 171 0 4854   
11 11 2022 / 2 / 23 179 0 5273   
10 10 2022 / 2 / 23 180 0 4894   
9 9 2022 / 2 / 23 167 0 5817   
8 8 2022 / 2 / 23 183 0 6372   
7 7 2022 / 2 / 23 185 0 8350   
6 6 2022 / 2 / 23 172 0 6474   
5 5 2022 / 2 / 23 184 0 7114   
4 4 2022 / 1 / 30 180 0 5966   
3 3 2022 / 1 / 26 177 0 7806   
2 2 2022 / 1 / 26 195 0 6673   
1 1 2022 / 1 / 26 299 0 7684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야릇한 호레이쇼
joinB
기다림
joinB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