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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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현 > 지금 들어갈 거야
김예현 > 안 자고 기다리면 얼굴 볼 수 있겠네
천사님 > 데리러 가고 싶어
...
데리러 갈까라고 묻는다면 거절하려고 했다. 다만 너무 간절한 화법은 거절하기 힘들고 서연재는 그걸 잘 알았다.
김예현 > 주소 보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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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가 급하게 재킷을 어깨 위로 걸쳤다.
"뭐 하냐, 그거 김예현 거 아니야?"
"그래서 가져가는 거야, 여름 저녁은 이제 제법 쌀쌀해."
"어디 가는데? 걔 옷 가지고 이상한 짓 하지 마라."
"그런 말 안 해도 예현이가 싫어할 짓은 안 해."
그러고는 급하게 현관문을 밀쳤다.
쟤도 참.
저렇게 지극정성 아니어도 된다니까.
대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는 문을 반쯤 연 채로 방에 들어갔다. 혼자 잠드는 건 조금 외로우니까 김예현이랑 서연재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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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기다렸어?"
"... 나 앞으로 맨날 밤에 들어갈 거야, 일일이 다 데리러 오게?"
제법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연재는 땀을 흘렸고, 고마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기 몸부터 챙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응, 매일매일 데리러 갈게. 걸칠 겉옷도 챙겨 왔어."
"너는 왜 나한테 정성스러워?"
"응?"
자꾸 얘한테 틱틱 대면 안 되는데. 편해졌다고 이러면 안 되는데. 네가 백대빈이냐.
생각과 달리 내 입에서는 까탈스러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고백했는데 일주일도 넘게 안 받아주고 헷갈리게 하는 사람을 뭐가 좋다고 챙겨 줘? 어쩌다 케이크 하나만 같이 먹자 해도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하고. 나는 너한테 준 게 없잖아. 지금도."
"너는 나한테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알려줬잖아."
"어?"
별안간 서연재가 내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무, 뭐, 뭐야."
"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야. 너는 늘 내가 다정하고 정성스럽다는 말을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쳐 내는 것을 잘 해.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도 천사 치고는 제법 잘 하고. 그냥 내가 너를 보고 웃고, 너를 생각하고, 너를 사랑하는 모든 일조차 네가 알려준 거야."
"..."
"..."
"... 어."
"그리고 너는 나 헷갈리게 안 했어, 그때 내가 그랬잖아. 나중에 제대로 고백 하겠다고."
"맞아, 네가 그랬지."
정신이 혼미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사람이 손이 잡히면... 한 손이 두 손한테 잡히면은 이렇게까지 멍해지는구나.
"우리가 만난 계절이 지기 전에 고백하고 싶었는데, 아직 여름이라 다행이야."
"어어 그러게."
"좋아해, 예현아."
"......"
"이건 제대로 하는 고백이니까 너무 나 힘들게 하면 안 돼."
연재가 씨익 웃고는 깍지 낀 손을 풀었다.
분명 풀렸는데 심장이 옥죄어진 것 마냥 나는 온몸이 찌릿했다.
귀찮은 일이 아니었어.
나를 흐트러지게 만드는 일도 아니었어.
나는 서연재를 좋아한다.
"... 나도 꼭 제대로 대답할게. 이제는 답을 알았거든."
"응, 가자 예현아."
고백한 사람 치고는 태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슬쩍 보니 쟤 손도 빨갰다.
그래서 손을 푼 거였어?
귀여워. 감정을 확신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고 주체가 힘들었다.
연재도 백대빈도 이래서 이랬구나.
한 번 알아채면 계속해서 입안이 간질거려서.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나도 사랑을 할 수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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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이미 연재가 했잖아. 나도 좋아해? 식상해. 사랑해? 이건 너무 주책 맞나.'
생각을 하다가 연재를 보니까 연재는 뭐에 홀린 듯이 넋이 나가 있었다.
"너 표정 되게 안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어?"
"... 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기분 좋다고 너무 다정하게 굴었나.
아직 내가 좋아하는 걸 얘는 모를 텐데 괜히 혼란만 안겨 줬네.
머쓱해서 말을 돌리려고 했는데 연재가 입을 뗐다.
"싫은 게 아니야. 그냥..."
"응."
"... 부끄러워서."
"응?"
"그냥 짧고 담백하게 얘기할 걸 괜히 주절거리다가 너무 오버한 거 같아서..."
"..."
입이 달싹 거린다.
아니야.
너 많이 멋졌고 나도 지금 너처럼 멋진 대답을 생각하는 중이야.
하지만 이걸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예현아.
"...... 오버 안 했어."
"다행이다."
그래도 주절주절하는 게 나쁘지 않다는 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좋아."
"어...!????"
"주절주절하는 것도 좋은 거 같아. 그냥..."
"좋아해 줘서 고마워."
입술 밑을 타고 흐르던 간지럼이 가슴팍까지 향했다.
"도착했네."
"그러게."
"데리러 와 줘서 고..."
"우웅?"
"고... 마워."
이상하게 연재에게 하는 말은 백대빈에게 하는 말보다 어렵고 고맙다는 말은 감사하다는 말보다 힘들단 말이야.
"이제 해 주네, 기다렸어."
"어..., 기다려준 것도 상당히 고...... 마워."
"좋다."
"..."
"우리에게는 내일도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
이 정도면 내 마음을 이미 아는 게 아닐까.
천재적 예의와 노력적 다정이 섞인 그의 말은 합리적 의심을 만들었다.
"그래. 그러자."
"응, 내일도 학교 잘 다녀와."
"너도 밥 챙겨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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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가 손을 흔들며 둘째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내일 만나 예현아."
"어,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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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문제집을 펼쳤다.
모든 고민은 해결되었고 나는 내 감정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재를 홀릴 완벽한 대답만 생각해 내면 돼.
그니까 공부 좀 하자!!!
'좀'이라고 외쳤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연필을 든 나는 세 시간을 연달았다.
네 시간을 하지 못했던 건 내 영어 능력을 탓하겠다.
...
모르는 건 악마한테 도움받기로 했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되지.
김예현 >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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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노크 소리에 덩달아 급해져 문을 열었다.
"예현아, 무슨 일이야...!?"
연재의 양 손바닥 위에는 구급상자가, 그 안에는 소화제와 소독약과 붕대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자다 깬 것 같이 부스스한 목소리도 미안한데 구급상자까지 들고 오기 있냐고...'
"... 어, 너를 깨우려고 한 건 아닌데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잘래?"
"아니야. 괜찮아. 나 불러줘서 고마워."
"뭐가 맨날 고맙대."
"그냥 좋아서 그랬어."
"... 그래도 네가 나한테 미안해하는 것보단 낫네."
"나아서 다행이다. 이 문제가 알고 싶은 게 맞지?"
갑자기 몸을 내 쪽으로 기울여서 놀랐다.
57번 빈칸에 성립하는 정답을.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대답을.
"알고 싶어."
"여덟 번째 문장을 보면 글 속의 등장인물은 주인공들의 성공에 기뻐하지 못 하고 있어. 등장인물이 주인공들에게 축하한다고서 했던 응원은 전부 거짓 발언이 되는 거야. 빈 칸에는 이 단어가 들어가야 해."
"어어, 고마워."
"... 예현아."
"응?"
"주말에 나랑 바다 가지 않을래?"
어???????
놀랍게도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미쳤다는 것도, 매운탕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이거다. 여기서 나도 너 좋다고 대답하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