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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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날이 개었다.
주룩주룩하고 여름비가 오던 며칠 전에 비해, 오늘은 마치 내가 학교에 가는 걸 알리는 듯이.
"예현아, 일어났어?"
"예현아~ 일어나라~"
방문 건너편에서부터 서연재의 청명스러운 말투와 백대빈의 화사한 말이 들렸다.
지금은 정확히 7시 30분.
"교복 입고 나갈게."
'아휴, 이 스타킹은 왜 이리 또 긴 거야. 빨리 입어야 하는데...'
최대한 치마를 끌어내리고 나는 거실로 향했다.
끼익,
"어??? 김예현??? 너 뭐야???"
"예현아?????"
뭐야, 왜 다들 말에 물음표가 가득해?
"... 응?"
"너... 오늘 아침부터 엄청 덥다는데...? 문자 못 받았어?"
"아?"
"그래, 예현아... 오늘 폭염주의보래..."
아, 망했다.
다시 교복 벗고 하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거잖아...
또 언제 갈아입어...
하복을 입고 머리를 정돈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8시가 되었다.
"예현아~? 언제 나와? 밥 다 식었어."
"지금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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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우와라니...? 문제 있어??"
"아니, 그런 건 없는데 그냥 감탄이 나와. 예현이는 어떻게 학교 하복을 입어도 이렇게 예쁘지?"
"서연재 미쳤냐, 내 앞에서 그런 능글맞은 말 하지 말라고."
"응~ 응~ 예현아, 대빈이는 무시하고 얼른 밥 먹어. 오늘 학교 8시 반 까지라며."
"지금 몇 시인데."
"8시 15분."
시계를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아오, 진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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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녀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학교에 들이대는 남자애들 있으면 무시하고, 학교에서 도움 필요하면 또 연락하고, 김예현 너답게 잘 하고 와!"
"저녁은 집 와서 먹을 거지? 예쁘게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응."
저 둘은 사람 이사 가는 것도 아니고, 학교 간다고 했는데 뭘 저렇게 길게 말해...?
지금 등교 시간 5분 남았다고!!!!!!
"간다, 진짜 갈게. 너 싫은 거 아니고 늦어서 그래. 제발 이것 좀 놔."
"응응, 잘 다녀와야 해."
하, 방심하고 말았다.
오늘따라 다정함에 끌려서... 좋아하다가... 시간을 지체했다.
그래. 오늘은 시작부터가 별로였어.
그렇게, 쨍쨍 내리쬐우는 햇살과는 다르게, 학교를 가는 동안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비가 내렸다.
개학 날인데... 그것도 교환학생으로 가는 첫날인데...
지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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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진짜 갔네..."
"진짜 갔어... 진짜 갔다고..."
"예현이가 학교에 갔다고!!!"
"우리 둘뿐인데 뭐 해야 하냐."
"게임방이라도 갈래?"
"뭐래, 내가 너랑 왜."
"흥, 서연재... 예현이 가버린다고 태도 돌변하는 거 봐? 나 좋다고 쫓아올 때는 언제고?"
"뭐라는 거야?!?!?! 내가 널 언제 좋아했고 언제 쫓아가???"
"너 인간세계에 온 것도, 나 잡으러 온 거 아니야?"
"아니... 그러니까 널 잡으러 온 거지... 너 좋아서 온 게 아니잖아."
"야, 싫은 관심도 관심인데 어? 그게 그거지~"
"..."
"연재야, 예현이 올 때까지 우리 그냥 게임방 가있자. 응?"
"게임방을 왜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는 건데?"
"예현이랑 갔을 때 뽑기만 하고 못 한 게 더 많단 말이야... 게임방에서 이긴 사람이 밥 사기! 콜?"
"......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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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네가 예현이니?"
우여곡절 끝에 학교 교무실까지 다다랐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도... 거칠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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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
"다들 조용! 너희 방학 끝났다고 이렇게 산만하면 어떡해? 너네 내년에 고등학교 삼학년이야. 곧 수능이라고!"
"아, 선생님~~~"
교실 문밖으로 같은 반이 될 아이들의 얼굴이 보인다.
'얘는 서연재 닮았다. 조금 천진난만해 보이기는 하는데......'
"예현아, 이제 들어와 볼래?"
'후우...'
나는 떨리는 심장을 가다듬고 교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사해 볼까 예현아?"
"나는 캐나다에서 온 김예현이라고 해.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오게 됐는데..."
아차, 이건 내가 들어간 뒤 담임 선생님이 얘기해 주셔도 충분한 내용인데.
떨려서 말을 늘려 버렸다.
"... 잘 부탁해."
"김예현, 이름 예쁘지? 이 친구는 캐나다에 아주 오래 있다가 온 학생이니까 예현이가 한국에 적응할 때까지 잘 챙겨주렴~. 이만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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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 오는 애는 흔치 않아서 누구인가 했는데 너 교환학생으로 온 거구나?"
"응."
근데 한국에서 쭉 다니려고. 그러고 싶거든.
"너 한국 사람인데 왜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와? 혹시 너희 부모님이 교포이신가?"
"아니. 우리 부모님은 지금 캐나다에 계셔. 내가 열 살 때 사정이 생겨 캐나다로 이민을 갔었고."
사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아빠가 좋아해서 간 거긴 한데...
"근데 왜 너만 쏙 다시 왔어? 혹시 왕따 같은 거.....?"
... 음. 얘는 되게 무례하네.
"야, 넌 새로 온 친구한테 왕따가 뭐냐, 왕따가?"
"괜찮아. 그거 안 당했어도 애초에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반 아이들은 말이 많았고, 나에게 관심을 많이 보였다.
"너희 부모님 캐나다에 계시면 너 지금 혼자 살아?"
"아니?"
"응? 그럼 누구?"
헉, 실언했다.
지난번처럼 꼬이면 안 되는데...
"아니, 아니야. 나 혼자 살아."
"근데... 옷에 붙은 이 노란 머리카락은 뭐야?"
백대빈 이 놈이...
"솔직히 말해봐, 누구랑 사냐는데 당황하면서 변명할 게 있어? 뭐 남자친구랑 이런 거는 아닐 거 아니야."
"얘가 로맨스 판타지 많이 봐서 그래, 미안하다. 신경 쓰지 마."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너도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이거, 머리카락은 아니고 털...이야. 집에 잠깐 맡은 개가 있거든."
"아아~!"
백대빈 미안.
걱정을 괜히 했나,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반 아이들은 더 이상 나에 대해 묻지 않고 곧바로 자기 할 일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2학년의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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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 뾰뵹, 뿅!!!
"아싸~"
"뭐냐, 서연재? 그 안 한다던 사람... 아니 천사 맞나요?"
"응, 말 돌리지 말고~ 결과를 인정해라 백대빈!"
"이런, 내가 지다니... 자꾸 지면 자존심 상하는데."
"뭐?"
"응? 아니야, 아무것도. 밥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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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대빈아."
"응? 밥 먹다가 징그럽게 목소리를 왜 깔아?"
"..."
"아니 뭐냐고, 할 말 있으면 말을 해."
"너 예현이 아직도 좋아하지?"
"응, 그게 왜."
"나도 좋아해."
"뭐야, 이제 와서 기선 제압이라도 하냐?"
"이 감정은... 쉽게 변하지가 않을 것 같아. 너한테 미운 정이 참 들었지만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너 천사 맞냐? 아예 대놓고 사람 면전에다 대고 포기한다고 말하네, 나도 너 포기할 수 있거든."
지금 연재와 대빈의 사이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애가 사랑을 한다면 이 관계도 조만간 끝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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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르, 뚜르르, 덜컥-
"여보세요?"
"엥 뭐야, 우리 딸이 웬일로 전화를 걸어? 용돈은 이미 줬는데?"
"아니요 엄마. 그냥 보고 싶기도 하고... 저 오늘 개학했잖아요."
"그건 알지~. 너 문자도 귀찮아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전화를 하지를 않나 보고 싶다고 하지를 않나, 이렇게 보면 우리 딸도 은근 다정하다니까? 오늘 어땠어? 좋았니?"
"... 네. 첫날부터 애들이 저한테 좀 잘해 줬고, 수업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근데 아침엔 서연재랑 백대빈이... 앗, 아니..."
"서연재랑 백대빈은 누구니? 혹시 벌써 친구 사귄 거야? 대견하다, 우리 딸! 아빠가 좋아하겠다."
엄마께는 대충 룸메이트라고만 했는데 더 이상 말하는 것을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다.
"아니요! 제 룸메이트들이에요! 서연재는 천사이고요, 백대빈은 악마에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니? 요즘 유행하는... 몰래카메라 같은 거 하는 거야? 엄마한테 하려고 했다면 대실패! 우리 같이 아빠한테 해 볼까?"
"그러면 재밌겠지만... 아니요, 진짜 저희 집에 천사랑 악마가 살아요."
"에이, 딸. 자꾸 이상한 소리 하면 차단한다?"
"차단이라니요... 엄마, 저번에 말씀드렸던 룸메이트 말이에요. 진짜 저희 집에 천사랑 악마가 살고 있어요..."
"우와~ 너무 신기하네, 엄마한테 사진이라도 보여주라."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었는데... 어쩌지.
"... 사진은 안 찍었더라고요."
"에구 그랬구나. 예현아 소설 내용은 이제 그만 말하고, 너 이제 곧 고등학교 3학년이야. 공부는 너 열심히 하는 거 아니까 말하지 않을게. 엄마랑 아빠가 수능 거기서 보고 캐나다로 다시 올 건지 결정하라고 했지? 맘은 정했고?"
"저 여기 있을게요."
"헐 아빠 우는 소리 벌써 들린다."
"어우... 그러게요."
뚝.
나라도 안 믿을테니 엄마를 이해한다.
나중에 꼭 보여드려야지.
다만 세상에는 그 전까지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게 많다.
그리고 나는...
천사님 > 예현아
천사님 > 보고 싶어
그 애 생각을 하자 마자 연락이 왔다.
아니. 나 진짜 진지하다고.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한 시간 동안 계속 그 연락만 생각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