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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꽃을 베다
작가 : 단산
작품등록일 : 2022.2.18

1604년.
임진년에 벌어진 왜란의 막바지에 퇴각하는 왜군 패잔병에게 온가족이 도륙당하고 사울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가족을 학살한 사무라이의 이름은 미우라 다이크케.
사울은 5년간 무술을 배워 복수하러 왜국으로 찾아간다.
천신만고 끝에 미우라를 찾았지만 그는 최고의 사무라이를 이끌고 조선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미우라의 배신으로 가문이 적몰된 미우라의 정혼녀를 만난 사울은 그녀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뒤쫓는다.
사무라이들의 임무는 조선에 남아있는 항왜군 6,000명을 이끌고 저선 국왕을 해치고 조선을 정복하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조정에서 사울의 말을 믿지 못하자 사울은 가나에와 함께 사무라이와 6,000명의 항왜군을 막는 싸움을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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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18 16:35     조회 : 160     추천 : 0     분량 : 7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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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순천에 갇혀있는 고니시 유기나가군을 구하려고 동원한 일본수군의 배는 모두 500여척.

  첩보에 의하면 조선과 명의 수군은 150여척이 전부였다.

  500척은 조선에 있는 병선은 물론 일본에서 올 수 있는 거의 모든 병선을 동원한 것이었다.

  500여척의 배는 먼 바다의 높은 파도를 피해 가급적 뭍에 가까이 붙어 진격했다.

  뭍에 붙어 진격한 가장 큰 이유는 바다에서 이순신을 만나면 살아남기 어렵기에 이순신 군을 만나면 육지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배에 탄 병력도 수군은 물론이고 육군과 칼싸움에 능한 사무라이까지 6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다.

 

  노량해협을 통과한 총대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안심했을 것이다.

  명량수로의 좁은 해협에서 12척밖에 없는 이순신에게 133척의 일본수군이 철저하게 패한 경험이 있기에 노량해협을 통과하며 극도로 조심했다.

  조선수군의 매복이 없다는 척후병의 보고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대비하며 노량해협을 통과했다.

 

  마침내 해협을 무사히 통과해 노량 앞바다에 나오자 안심했다.

  이순신이 불패의 명장이라고 하여도 150척으로 노량포를 가득 메운 500여척에 이르는 일본수군을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지척에 있는 고니시를 구해 부산포로 돌아가 일본으로 철수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은 물론 어선조차 만나지 못했기에 일본수군의 출동을 조선수군이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제 조선수군이 알게 되어 출동하여도 500여척이나 되는 일본수군과 싸우려면 조선의 수군 150척이 모두 필요한데 이순신이 출동하고 나면 고니시군을 태우고 사라지고 난 후일 것이다.

  노량의 넓은 바다에 나오자 시마즈는 작전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이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흐흐흐’

 

  시마즈는 한순간 이순신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500척이 노량의 넓은 바다에 나오자 시마즈는 전속력으로 순천으로 진격을 명령했다.

  바닷물도 얼음장 같은 11월 19일, 새벽 4시였다.

 

  하지만 시마즈의 계획은 완전히 빗나갔다.

  광양만 묘도의 위와 아래에 나누어 매복하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명의 수군은 일본수군이 노량해협을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수군이 한척도 빠짐없이 관음포를 지나 금호도 앞바다로 들어오자 공격의 북을 울렸다.

 

 쿵! 쿵! 쿵!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비록 조선과 명의 수군이 기습으로 공격했지만 병선은 겨우 130여척 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4배에 가까운 500여척을 이끌던 시마즈는 조선수군이 130여척인 것을 알자 전면전을 벌이기로 했다.

  해협이 아니 넓은 바다에서 500대 130은 싸워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수군의 수는 6만명대 13여명이었다.

  시마즈는 재빨리 전선을 움직여 130여척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그리고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새벽에 시작된 해전은 무려 8시간 동안 이어졌고 일본수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순신의 군사는 왜군에게 거대한 벽이었다.

  500척이 아니라 10배인 1300척이 포위해도 범접할 수 없는 신(神)이었다.

 

  비록 고니시는 전투가 벌어지는 혼란한 상황에서 남해의 먼 바다를 돌아 탈출했지만, 일본수군 500여척 중에 살아 돌아온 전선은 겨우 50여척이고 6만명 에 3만 명이 죽었다.

  200여척이 침몰되고, 100여척이 조선군에게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150여척은 반파되어 도망쳤다. 살아남아 도망친 전선은 겨우 50여척이었다.

 

  완전히 패배한 시마즈는 50여척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왜군은 온전한 50여척의 배로 파손된 150여척을 끌고 서둘러 도망쳤다.

  만약 일본군의 배가 완전히 침몰된다면 아직 살아남은 3만명과 부산포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병사들도 몰살될 수도 있었다.

  남아있는 200척이라도 돌아가야 고국으로 후퇴하여 살릴 수가 있었다.

 

  그렇게 왜군이 철저하게 패배하는 동안 조선수군은... 1척만 침몰되었다.

 

  시마즈의 퇴각 명령에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은 일본수군은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미 퇴각하는 일본수군이 가장 빨리 도망칠 수 있는 곳에 명나라수군을 잠복시켜 놓았다.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단 한척의 배도, 단 한사람도 살아 돌아가게 할 생각이 없었다.

  다급하게 도망치는 일본수군을 뒤쫓은 이순신은 관음포 앞에서 결국 총탄에 맞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순신을 죽였다.”

 

  구주의 영주 시마즈는 3만 명의 수군을 잃었지만 이순신을 죽인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자랑스러워했다.

 

  기요하라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두 번이나 보았다.

  한산해전에서는 멀리서 지켜본 것이 전부였지만 이순신장군이 순사한 노량해전에서 본 그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요하라가 탄 배를 충돌하여 지휘하던 그 모습을 말이다.

  3만 명이 죽은 지옥 같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죽고, 기요하라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기요하라는 노량포에 이틀을 머물면서 이순신의 순국(殉國)에 대하여 조사했다.

  이순신의 전사(戰死)가 사실인지를 조사하는 것이 기요하라의 첫 번째 임무였다.

 

  “장군께서 죽으려고 하신게지 뭐겠소?”

  “일부러 죽으려고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왜놈 수군과 맞싸운 곳이 저기 저곳이오.”

 

  노인은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기요하라는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에 죽도가 보이고 그 넘어 바다가 펼쳐져있었다.

 

  “나리가 장군께서 싸우신 곳을 알고 싶다기에 내가 알려주는 것이오. 저기보이는 죽도 넘어가 장군께서 왜놈들이 만난 곳이오. 왜놈들이 순천에 갇힌 지들 장군과 병사들을 구하려고 노량포를 지나 죽도에 이르자 미리 죽도 근방에 있었던 장군의 수군이 일제히 공격해버렸지. 내가 여기 이 자리에서 지켜봤는데 왜놈 배 500척이 장군이 이끄는 배를 당해내지 못하고 침몰하는데... 내가 살면서 그만큼 통쾌하고 장관인 구경을 못 봤소. 날이 밝기도 전에 시작된 싸움이 점심참에는 바다를 새까맣게 덮었던 그 많던 왜놈배가 바다로 침몰해서 겨우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소. 바다는 죽은 왜놈들 쏟아낸 피로 새빨갛게 물들고, 둥둥 떠다니는 왜놈들로 바다를 걸어서 다닐 정도였지... 우리 배는 하나도 안 다졌고 말이오.”

 

  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구경했다는 말처럼 비교적 전투의 상황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조선수군 1척을 일본수군이 침몰시킨 것을 빼고 말이다.

 

  “장군의 시신은 노량포에 내렸지요?”

 

  계속 말하게 두면 노인이 목격한 것을 하루 밤낮을 말해도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한 기요하라는 애써 비장한 얼굴을 하고 슬픈 듯이 물었다.

  하지만 슬픈 얼굴을 한 기요하라의 얼굴은 슬픈 표정이기보다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노인은 그때를 생각하는지 기요하라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슬픔이 올라오는지 눈시울이 붉어져서 말했다.

 

  “시신이라니...”

  “아... 장군의 사체 말입니다.”

 

  노인은 자신의 말을 끊고 바다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기요하라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양반들의 말뽄새를 내가 잘 알지 못하지만... 장군의 주검을 뭐라고 부르신 게요?”

  “그게... 아이쿠... 잘못했습니다. 어르신... 제가 생각이 짧아서 실수를 했습니다. 장군의 영령은 이곳 노량포에 내렸지요?”

 

  기요하라는 재빨리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노인에게, 아니 조선인에게 임금보다 더 높은 이순신장군에게 일본에서 죽은 사람에게 부르는 사체라고 부른 것이었다.

 

  “장군의 영령이 노량포에 안치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기요하라는 노인의 의심을 지우려고 단어를 골라 쓰며 담대한 얼굴로 물었다.

 

  “왜놈들이 겨우 몇 척의 배를 끌고 도망친 후에 수군의 배가 노량포에 도착했는데... 우린 그때까지도 장군께서 돌아가신 것을 알지 못했소이다. 그날 하루를 보내고 아침이 되어서야 장군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들리자 고을 사람들 모두 장군께서 안치되어있는 곳으로 몰려갔소이다. 이미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와서 통곡을 하고...”

 

  노인은 다시 눈물이 나는지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의식을 위해 고향으로 이동할 때는 모두 나와서 울면서 배웅했소이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노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노인과 헤어진 기요하라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며 이순신의 죽음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모두 한결같이 노인과 같은 심정으로 말하였다.

  이순신이 지휘한 배에 타서 노잡이를 했다는 사람은 이순신의 영령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영령을 배에서 내릴 때 모든 조선 수군은 물론 명나라 수군까지도 목 놓아 울었다고 말했다.

 

  “장군께서 갑옷도 입지 않으시고 도망치는 왜놈 배를 잡아 몰살 시키라고 외치셨지요. 노를 저으면서도 장군의 쟁쟁한 목소리가 배 밑바닥까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장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왜놈들 배를 모두 침몰시키고 났을 때는 이미 장군께서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갑옷도 입지 않으시고 갑판에 나가셨다고 자진하신 것이라고 소문이 무성했었지요.”

 

  이틀 동안 조사한 기요하라는 이순신 장군이 정말 순국했다고 판단했다.

  아니 죽었다고 믿고 싶었다.

  장군의 시체를 보기 전에는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죽었다고 믿고 싶었다.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 죽었다는 것은 일본에 가장 위협적인 장군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장군이 죽지 않고 사라졌다는 소문도 있지만 기요하라가 조사한 것으로는 이순신장군이 전투 중에 죽었다고 판단하였다.

  자신의 몸을 훼손하는 행위가 가장 큰 불효가 되는 조선에서 이순신은 적의 힘을 빌려 스스로 죽으려고 일부로 몸을 노출시켰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비록 적이지만 기요하라는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뜻으로 순사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왜 스스로 몸을 노출시켰는지 알 수 없었다.

  시요하라가 만난 조선이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명쾌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죽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지금 정권을 잡은 도쿠카와 이에야스도 조선이 만약 이순신 장군을 앞세워 보복하려고 일본으로 쳐들어온다면 일본은 멸망해 조선 땅이 될 것이라고 불안에 떨었으며 이순신의 죽음이 진짜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멍청하게도 조선은 이순신 장군도 자진하게 만들고, 의병장도 죽이거나 역모로 몰아 처단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왕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거 참 이상한 양반을 다 보겠네.”

  “왜요?”

  “아... 어느 댁의 자제인 줄은 모르겠지만 글쎄 장군님에 대하여 여기저기 쏘다니며 묻고 다니기에...”

  “아이구... 영감 또 산에 올라가서 본 이야기를 하셨구려?”

  “장군님이 왜놈들을 전부 죽이는 걸 할멈도 보지 않았는가... 그때 본걸 소상이 이야기해 달라기에 할멈하고 같이 본 걸 모두 말해줬지 그런데 장군님의 사체를 봤야고 묻는 거야.”

  “사체라는 거의 뭐래요?”

  “뭐기는... 우린 시신이라고 말하는데 왜놈들은 사체라고 말하잖아. 왜놈들한테 잡혀가서 무덤을 만들 때 왜놈들은 사체라고 하는 걸 들었거든. 그런데 한양의 양반 댁 자제라고 하는 사람이 조선말과 왜놈 말을 구분해서 쓸 줄도 모르니... 하 참...!”

 

  뒤채에서 짚신을 만들고 있던 강검은 무심결에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였다.

 

  “...내가 재차 확인하려고 하니까 그제야 영령이라고 했지만 꼭 왜놈이 말하는 것 같았어. 왜놈들이 한양에 있는 동안 주상을 따라가지 못한 양반들이 왜놈과 한통속이 되었다고 하더니 사실은 모양이야.”

 

  강검은 옆에 벗어놓았던 짚신을 탁! 탁! 떨어 맨발로 다녀 시커멓게 변한 발에 궤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구부리고 앉아있을 때는 몰랐지만 두 다리를 딛고 일어서니 6척이나 되는 키가 낮은 굴뚝 끝에 닿을 정도로 헌칠하게 컸다.

 

  “...우리도 비록 몰락한 양반이지만 왜놈한테 구걸한 양반하고 같아!”

 

  할머니가 속을 뒤집어 놓았는지 할아버지의 버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양반이란 사람이 어떻게 생겼어요.”

 

  강검은 마당으로 나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술훈련을 그만두고 놓아버려 이미 녹이 슬은 칼을 가지고 강검은 천천히 노량포에 나아갔다.

  할아버지가 말한 선비는 키가 크고 다부진 몸매를 하였으며 갓 아래에 보이는 눈이 늑대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났지만, 결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눈은 아니라고 하였다.

  도포를 입었는데 갓 지은 것처럼 깨끗하고, 겉으로 보기에 양반은 분명한데 하인도 없이 보따리를 직접 짊어지고 다닌다고하였다.

  가장 큰 특징은 웃을 때의 표정이 호방한 모습으로 지도자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노량포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길에서 봤다는 어부의 말을 들은 강검은 부지런히 선비의 뒤를 쫓았다.

 

  노량포에서 이순신의 순사(殉死)를 확인한 기요하라는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동 악양의 고소성 아래에 도착했다.

  기요하라는 왜군이 하동을 점령할 때 종군하였기에 하동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악양을 지나 산을 넘어 청암에 이르렀다.

  청암계곡을 따라 올라가 이윽고 묵계리에 도착했다.

  기요하라가 묵계리를 찾은 것은 길삼봉을 찾기 위해서였다.

 

  길삼봉은 기축옥사를 일으킨 정여립모반사건의 모사(謀士)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생년이 알려지지 않은 길삼봉은 본래 천안의 사노였다.

  사노로 신분제를 혁파하려고 했던 길삼봉은 사노를 규합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조정에 발각되어 실패하여 관군에 쫓기던 중에 정여립을 만난 교류하였고, 1589년 정여립모반사건으로 1,000여명의 사람이 체포되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이끌고 전주, 태인, 남원 계룡산 등에 반란군과 대항하다 사라졌다.

  조선에 파견된 밀정의 보고로 길삼봉이 지리산에서 최종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길삼봉이 살아 있다면... 그의 주변에 부하들이 있을 것이고, 억만분의 하나로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면 숨어 살기에는 산이 넓고 깊은 지리산에 들었을 것이고 길삼봉이 그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묵계리 일대는 과연 조선의 십승지(十勝地)답게 천하명당이었다.

  멀리 지리산의 노고단과 천왕봉을 조종산으로 하고 남부능선의 삼신봉을 주산으로, 좌청룡으로 외삼신봉을 삼고 우백호로 백운산이 있으며, 묵계계곡의 묵계천이 물줄기가 되었다.

  그 맞은편에 주산과 밀치재가 조산이 되었으며, 외삼신봉 아래의 봉우리와 관음봉과 거시봉, 시루봉이 내청룡, 내백호를 이루었다.

  천하명당이라 할 묵계계곡의 끝에 자리한 마을은 그리 크지 않지만 계곡 좌우의 분지에 족히 수천 명이 피란할 수 있는 곳으로 관군에게 쫓기어 후일을 도모할 길삼봉이 피란살이를 할 만 한 곳이었다.

 

  청암에서 산을 넘어 관음봉, 시루봉을 거쳐 묵계리를 살핀 기요하라는 마침내 묵계리에 들어갔다.

  산속의 집이기에 집들은 산속 곳곳에 산재하여 살고 있었다.

  길삼봉이 살던 집을 알려면 할 수 없이 집집마다 방문하여 물어봐야할 것이었다.

  기요하라는 천천히 언덕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강검이 기요하라를 본 것은 기요하라가 세 번째 집을 방문하고 나왔을 때였다.

  강검도 역시 첫 번째 집을 방문하여 선비에 대하여 묻고는 길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멀리 계곡 중간에 있는 기요하라를 발견하자 강검은 나는 듯이 빠르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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